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18)
을 위한 세계는 없다-618화(618/817)
EP.618 Coram Deo (2)
다음날.
눈 덮인 성검 산맥 위로 새하얀 태양이 떠오르기 무섭게, 시이나는 성녀님의 숙소로 달려갔다.
총대주교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 아니, 총대주교를 고발하기 위해서.
“성녀님! 총대주교, 그 미친 작자가 성물지기님을 고문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발을 들은 성녀님의 반응은 시이나의 기대와 달랐다.
“그래? 다 늙어서 고생이네.”
간단하다 못해 쿨한 평가. 그 한마디 말을 남긴 성녀님은 다시 아침 루틴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천리안으로 여명과 세티가 일어나는 모습을 훔쳐봤다.
“저… 성녀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시이나는 당황했다.
‘이렇게 가볍게 넘기실 일이 아닙니다!’ 라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정좌한 채 먼 곳을 바라보는 성녀님의 모습이 너무나 경건했으므로.
안대에 가려진 눈으로 무엇을 보고 계신 걸까.
대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보시기에, 저리도 진지하시단 말인가?
성녀의 분위기에 압도된 시이나는 조용히 그녀의 루틴이 끝나길 기다렸다.
물론, 성녀가 뭘 보는지 알고 있는 호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디론가 연락을 보냈다.
그리고 대략 3분 뒤.
성녀가 화들짝 침대에서 튀어 올랐다. 그녀는 무슨 기상나팔을 들은 이등병처럼 빠르게 잠자리를 정리하고 옷까지 갈아입었다.
대체 뭘 보신 거지? 시이나가 당황하는 찰나, 방문이 열리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투명 망토를 쓴 채 달려온 여명.
그는 딱 시이나가 원하던 반응을 보여줬다.
“성물지기께서 고문 받고 있다고??”
당황과 흥분, 그리고 분노.
시이나는 그와 같은 감정을 느끼며 총대주교의 악덕을 고발했다.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성녀가 말했다.
“우리 아빠 걱정은 할 필요 없어. 기껏해야 총대주교의 낚시일 테니까.”
낚시? 낚시라니. 시이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성물지기께선 피를 잔뜩 흘리고 계셨습니다!”
“아, 그래?”
“예! 바닥이 흥건할 정도로 피를 철철…!”
“그게 아빠… 아니, 성물지기께서 죽을 정도였어? 아니었지?”
“….”
시이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성녀를 바라봤다. 성녀님께서 이렇게나 냉혹하신 분이셨나?
성물지기가 멀쩡한 사람은 아니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생물학적 아버지 아닌가!
그렇게 당장이라도 언성을 높이려는 시이나와 달리, 여명은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가 물었다.
“성녀, 왜 이렇게 침착해?”
“아니 뭐, 총대주교가 고문이나 심문 전문가도 아니고… 기껏해야 다 늙은 노인네잖아? 그에 비해 우리 아빠는 꽤 강한 초인에다가, 신성까지 쓸 수 있고. 권총도 아니고 채찍으로는 못 죽이지.”
“…하지만 총대주교도 신성 쓸 줄 알잖아.”
“다섯 신께서 우리 아빠 죽이라고 축복을 내려주실 거 같아? 응? 이 믿음 없는 것들아?”
그렇게 한마디 쏘아준 성녀는 시이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총대주교는 바보가 아니야. 시이나가 자기편이 아니란 것 정도는 눈치챘을 거라고. 그런데 아빠가 갇혀 있는 장소까지 시이나를 끌어들여서, 직접 고문 장면을 보여줬다고? 이게 낚시가 아니면 뭐야?”
“….”
그럴싸한 말이었다. 여명은 ‘내가 알던 성녀가 아닌데.’ 라는 눈빛으로 팔짱을 꼈고, 시이나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성녀는 계속 말했다.
“아마 우리가 아빠를 구하기 위해 신전으로 오길 바라는 거겠지. 이유는… 음, 이유는 모르겠네.”
그때, 시이나가 끼어들었다.
“저, 성녀님, 총대주교가 제게 명령한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녀는 품에서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며 총대주교의 명령을 설명했다.
황태자가 성도에 오기 전에, 제국 황가의 족보에 여명의 피를 묻혀오라.
“…황가의 족보에, 내 피를?”
여명이 종이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는 사이, 성녀가 화들짝 놀라 중얼거렸다.
“어? 설마 여명이 용사인 걸 눈치챈 건가?”
“…?”
용사? 시이나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오르건 말건, 성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총대주교에게 용사 혈통을 알아내는 능력이라도 있나? 그러면 지금 황가가 용사 혈통이 아니란 것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단 소리인데…?”
“…??”
황가가 뭐요? 시이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여명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변경백과 초대 용사를 닮은 그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가 내민 종이를 보고 있었다.
“시이나 선배, 혹시 이 종이가 정확히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아십니까? 피가 필요한 걸 보면 꽤 복잡한 마법이 걸린 것 같은….”
질문을 꺼내던 여명은 뒤늦게 시이나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녀의 얼굴은 탈색된 머리카락만큼이나 창백했다.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
“제가, 그, 어… 도,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사님.”
그제야 여명은 뭐가 잘못됐는지 깨달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원흉인 성녀를 바라보자마자, 성녀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아. 맞다. 함부로 말하면 안 됐지.”
“….”
“시이나? 여기서 들은 거 전부 비밀로 하겠다고 신께 맹세해 줘요.”
“무, 물론입니다. 성녀님, 레독스님을 비롯한 모든 신께 침묵을 맹세하겠습니다.”
시이나가 자신의 가슴을 두들기며 맹세한 직후, 성녀가 쭈욱 허리를 폈다.
문제 해결! 이란 뜻이 담긴 몸짓이었다. 여명은 뚱한 표정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요놈의 입이 문제라니까.”
“잠깐, 흐핫, 하! 갈비뼈 맞았… 악! 내, 내가 잘못했어! 그만! 항복!”
평소 시이나라면 화를 낼 광경이었으나, 그녀는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용사와 성녀의 관계 아닌가.
선배 성기사들이 왜 그렇게까지 여명과 성녀의 관계를 응원했는지, 짧은 깨달음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뭐, 아무튼.
성녀에게 벌(?)을 내린 여명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호아나에게 사람 한 명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그가 부를 수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마법에 능통한 사람.
“아침부터 웬일이래요? 앞으로 계획은 어제 회의에서 다 정한 거 아니었어요?”
용사 파티의 마법사, 살로메.
아침을 먹던 중이었는지, 손에 샌드위치를 든 그녀는 옆구리를 붙잡은 성녀와 여명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혹시, 나치 소리 하려고 부른 거면 저 화낼 거예요.”
“….”
“아무튼, 진짜 왜 불렀어요?”
여명은 시이나가 가지고 온 종이에 엮인 이야기를 짧게 설명했다.
황가의 족보? 살로메는 살짝 관심을 보이며 종이를 펼쳤다.
세월을 견뎌낸 모든 종이가 그러하듯, 살짝 누렇게 변한 종이.
펼쳐진 종이에는 먼지를 뺀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지만, 살로메는 그 속에 숨겨진 마법진을 찾아냈다.
“히라리아의- 빛이여.”
그녀가 짧은 주문을 읊자마자, 종이가 붉게 빛나며 복잡한 마법진을 드러냈다.
한데, 마법진이 하나가 아니었다. 종이 위로 떠 오른 마법진은 적어도 넷 이상.
“혈액 분석 마법, 정보를 뽑아내는 마법과 정보 기록 마법, 그리고….”
종이의 마법진들을 해석하던 살로메는 갑자기 눈살을 팍 찌푸렸다.
그녀가 해석할 수 없는 마법이 있는 걸까? 성녀와 여명이 시선을 모으길 잠시.
살로메가 종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마법진은… 정확히 뭔지 모르겠어요. 기밀 처리가 된 걸 보면 중요한 마법 같은데… 흠, 확실하진 않지만, 어디론가 정보를 보내는 마법과 비슷한 거 같기도 해요.”
“정보를 보내?”
“네. 이거 황가의 족보에서 뜯은 종이라고 했죠? 그만한 족보가 하나만 있을 리는 없고… 아마 여기에 기록되면 다른 족보에도 기록되는 게 아닐까요? 물론, 가설이지만요.”
“….”
멋도 모르고 피를 흘렸으면 그의 혈통이 기록되고, 그게 그대로 제국에 있는 족보에도 적혔을 거란 말인가.
[44대 용사 후손, 천여명…]큰일 날 뻔했네. 여명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잠깐, 총대주교는 왜 내 혈통을 확인하려는 거지…?”
“용사랑 닮았으니까? 검은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라면 누구나 용사를 떠올릴 걸요.”
살로메의 말은 타당했으나,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라면 훨씬 전에 움직였어야지. 내가 성녀랑 엮인 게 얼마나 오래됐는데.”
“그건 그렇네요?”
그때, 성녀가 끼어들었다.
“혹시, 실물을 봐서 그런 거 아닐까? 실물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
실물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고? 여명은 문뜩, 총대주교가 그를 보고 경악했던 걸 떠올렸다.
그사이 성녀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역시, 총대주교는 용사를 알아볼 수 있는 건가? 그거라면 이런 낚시를 하는 것도, 여명의 피를 확인하려는 것도 전부 설명이 되는데.”
“…그런 능력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는데.”
여명이 지적하자, 성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응, 하지만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긴 하잖아?”
“…그러니 일단 총대주교가 내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전제로 움직이자?”
“바로 그거야.”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두 사람은 곧 살로메까지 껴서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내일모레 열리는 올림피아 16강과 한국, 그리고 이제 곧 도착할 황태자까지.
성녀는 투덜거렸다.
“황태자가 도착하기 전에 여명의 피를 확인하라… 뭔가 노림수가 있는 건 확실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네. 설마 여명을 이용해서 황가를 흔들어 보려는 건가?”
“…끔찍한 소리네요.”
일행은 새삼 용사 혈통의 무거움을 실감했다. 물론, 그 무게를 가장 크게 느끼는 건 여명 본인이었다.
“일단, 성물지기를 구출할 준비부터 하자. 황태자는… 도착한 뒤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거야.”
“쓰읍, 그 양반은 왜 이럴 때 성도로 오는 거람? 가만히 수도에 처박혀 있지.”
성녀의 투덜거림으로 짧은 회의가 끝나고 정확히 4시간 뒤.
성도로 향하던 황태자가 실종됐다는 뉴스가 떴다.
성도를 향해 달리는 열차 안.
[사랑의 도피? 젊은 황태자는 어디로?]추잡스러운 제목의 신문 기사를 본 황태자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목격자가 몇인데, 이런 식으로 진실을 가리려 하다니.
지구 국가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정보기관도, 국민을 통제할 대규모 행정력도 없는 제국에서 이만한 진실을 숨기기란 불가능했다.
“아버님….”
황태자가 한탄 섞인 목소리로 신문을 고이 접는 순간, 누군가 그의 뒤로 다가왔다.
“아버지라. 황제의 도움을 기다리는가?”
고개를 돌려보니, 열차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구인 남자가 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킴 필비였던가?
황태자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기대도 안 합니다. 아버지에겐… 아들이 둘이나 더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건 너지.”
“그건 장점이 아닙니다. 자신보다 인기가 좋은 아들을 좋아할 아버지는 없으니.”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지 않는다’는 뜻이 담긴, 꽤나 신랄한 말.
그 말이 퍽 인상적이었는지, 킴 필비는 웃으며 그의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황태자가 먼저 물었다.
“절 어쩌시려는 겁니까?”
“열차를 보면 모르나? 우린 성도로 가고 있다.”
성도에 가서 뭘 하려는지는 알려주지 않겠군. 그렇게 확신한 황태자는 좌석 등받이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의외로군요. 당연히 절 방패 삼아 수도로 갈 줄 알았습니다.”
“제국 수도로? 왜 그렇게 생각하지?”
“스탈린은 가장 먼저 제국 수도부터 점령했으니까.”
제국이 소련의 꼭두각시가 된 이유. 황태자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나 굴욕적인 역사였다.
젊은이의 객기인가, 아니면 지배자로 태어난 자 특유의 오만인가?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 킴 필비는 삐딱하게 창가에 기대며 대답했다.
“우리는 서기장 각하가 아니다.”
“…그래서 성도로 가시는 겁니까? 스탈린보다 더 위대한 일을 벌이기 위해서?”
상대를 떠보기 위한 말. 객기였군. 킴 필비는 피식 웃었다.
“누구도 그분보다 위대할 수 없다.”
“….”
“하지만, 그분의 행동에서 배울 수는 있지. 그분께서 수도를 점령해 제국을 구원했듯, 우리도 성도를 통해 인민을 구원할 것이다.”
신은 안중에도 없는 소리였다. 공산주의자들이란… 황태자는 표정을 숨기며 말했다.
“그 구원에… 제가 필요한 겁니까?”
“정확히는, 너의 피가 필요하지.”
“….”
피? 황태자는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거짓 혈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삼켰다.
그 웃음을 오해한 걸까. 킴 필비는 삐딱한 얼굴로 말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저항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조언 감사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피는 얼마든지 뽑아가셔도 됩니다.”
이 쓰레기 같은 피, 전부 버려도 상관없으니.
뒷말을 삼킨 황태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덜컹, 덜컹- 흔들리는 기차의 진동이 그의 몸을 타고 흘렸다. 마치, 흔들리는 그의 마음처럼.
몇 시간 뒤, 성도의 백색이 석양으로 물드는 시간.
“정말로 갈 거야?”
창가에 앉아 있던 세티는 허공을 향해 물었다.
곧, 허공에서 투명 망토를 뒤집어쓴 여명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오늘 바로 가는 게 총대주교의 의표를 찌를 수 있을 테니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세티는 입술을 씹었다.
“낚시꾼의 뒤통수를 때리겠다는 거지? 잘 알겠어. 하지만 실패할 수도 있어. 만에 하나 성물지기 탈옥의 범인으로 몰리면….”
“그럴 일 없을 거야.”
“진짜 자신감 하나는… 그냥 며칠만 더 기다렸다 가면 안 돼?”
“황태자가 실종됐다잖아. 거기다 한국에, 빨갱이에, 변경백에… 올림피아까지. 여기서 더 기다리면 다른 혼란 때문에 타이밍을 못 잡을 거야.”
“…그러면 억류의 방이란 곳은 어떻게 가게? 시이나 선배가 준 지도는 믿을 만한 거야?”
상식적인 지적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상식적이지 않았다.
“지도는 그냥 덤이야. 직접 가본 적 있어.”
“뭐? 언제?”
“아야톨라의 악몽 속에서.”
“….”
세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딴 게 말이 되냐고 묻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녀는 여명과 함께 아야톨라의 악몽을 경험했으니까.
짧은 침묵.
그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여명이 투명 망토 바깥으로 쏙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네 신명 때문에 내가 위험을 무릅쓰는 게 싫은 거지?”
“…알면서도 가려는 거야?”
세티의 샐쭉한 표정을 본 여명은 작게 미소 지었다.
“응. 이건 내 어머니의 유품과 관련된 일이기도 하니까.”
“….”
“문제없이 돌아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여명이 창문으로 향하는 순간.
세티가 그의 투명 망토 자락을 붙잡았다.
“나도 같이 가. 역시, 혼자 못 보내겠어.”
“난 괜찮다니까.”
“내가 안 괜찮아. 그리고….”
잠시 말꼬리를 흐린 세티는 꽈악- 손아귀에 힘을 주며 덧붙였다.
“이건 내 시어머니의 유품과 관련된 문제잖아?”
자신의 말로 반박당한 여명은 창밖과 세티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직 하늘에 걸린 석양이 세티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얼굴에 걸린 홍조를 가려주려는 것처럼.
잠시 그녀를 보던 여명은 손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네.”
세티는 미소 어린 표정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잠시 후, 투명 망토를 쓴 두 사람이 중앙 신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성녀와 성기사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은밀하게.
하지만 두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한 숙소 지붕 위.
석양 아래 긴 그림자를 드리운 파순이 두 사람이 멀어지는 방향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장작 하나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