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2)
을 위한 세계는 없다-62화(62/817)
〈 62화 〉 복수는 복수를 원하는 자에게… (6)
* * *
***
“요즘 사는 건 어떻더냐?”
작업반장님이 술을 따르며 물으셨다. 이제는 구하기도 어려운 낡은 브랜드의 소주가 쪼르르 잔을 채웠다.
“힘들어 죽을 거 같아요.”
나는 한숨 반 푸념 반 대답했다.
미그니움이 나를 죽음에서 건져낸 뒤,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싸우고, 죽이고… 이젠 하다 하다 용과 싸우지 않았나.
“청소부 일 처음 배울 때처럼?”
“…에이, 그래도 그때만큼은 아니죠.”
나는 뒤통수를 긁었다. 어리숙하고, 모든 것이 낯설던 시절.
그때 부숴 먹은 장비값이 제임스 형의 3개월 치 월급보다 많았던가?
청소부 길드 모두가 나를 걸어 다니는 재앙이라고 불렀던 시절이었다.
반장님 또한 그 시절을 떠올리신 건지, 피식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셨다. 알싸한 희석식 소주의 향기가 풍겼다.
“쇠똥구리야.”
잔을 전부 비운 반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언제나 듣기 좋은, 소나무 같은 목소리.
“예, 반장님.”
“힘들면 여기서 그만둬도 된다.”
그만두다니? 죽일 놈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 그만둔단 말인가.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대답했다.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요.”
“그러니 더 그만두기 좋은 타이밍이지. 아직 유명한 사람을 죽인 건 아니니, 여기서 멈추고 새 신분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면 되지 않느냐.”
“….”
“대통령은 고사하고, 장관이라도 죽여봐라, 세상이 널 어떻게 보겠느냐?”
“…장관 죽인 테러범으로 보겠죠, 뭐.”
“너는 그래도 괜찮더냐?”
괜찮냐고?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반장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주름진 눈가 위, 걱정이 가득한 눈동자가 나를 마주했다.
“실패하면 목숨을 잃을 테고, 성공해도 미래 따윈 없을 게다. 평생 쫓기는 삶을 살겠지. 넌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게냐?”
나는 대답 대신, 술병을 들고 반장님에게 다가갔다.
조용히 술잔을 채워드리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이 흘러나왔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용서라도 해요?”
얼마 따르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술잔이 넘쳐흘렀다.
갈 곳을 잃은 술들이 아래로 떨어진다. 마치 눈물처럼.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이라고 자위하면서, 남은 고통과 억울함은 전부 내팽개치고… 그다음은요?”
“우리가 못 산 삶을 살아야지.”
“….”
“춘식이가 꼭 한번 타고 싶다던 슈퍼카를 사는 건 어떠냐? 제임스가 꿈꾸던 치킨집을 차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반장님.”
“덕배와 달리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마누라 얼굴을 보며 깨어나고, 자식을 보며 잠들고, 그렇게 오순도순 살다가… 사춘기가 온 아들딸 때문에 속앓이도 해보고.”
청소부들이 꿈꾸던 삶. 나는 가득 찬 술잔을 보며 대답했다.
“반장님이 살고, 제가 죽었다면… 반장님은 그렇게 사실 수 있으세요?”
당돌한 질문.
내가 이런 질문을 할 줄 모르셨던 걸까? 반장님은 잠시 말을 잃으셨다가, 씨익 웃으며 대답하셨다.
“아니, 나는 그렇겐 못 살았을 게다. 아마… 국회의사당과 경무대에 폭탄을 설치하려고 했겠지.”
“….”
“이거, 이거. 어른을 그런 눈으로 보면 쓰나.”
반장님이 쯧쯧 혀를 찼다. 나는 푸우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뵌 건데, 응원은 못 해주실망정 자꾸 이상한 소리나 하시니 그렇죠.”
“이상한 소리라니. 요놈아, 조금 전에 한 말은 전부 내 진심이다.”
“….”
“하지만 나부터가 이런 놈이니, 차마 너한테 복수를 그만두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느냐.”
반장님은 손을 뻗어 내 어깨에 손을 올리셨다. 익숙한 술 냄새 사이로, 거친 손바닥이 느껴졌다.
“쇠똥구리… 아니, 여명아.”
“예.”
“네가 무슨 선택을 하건, 나는 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손바닥이 내 얼굴을 쓸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더 이상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우리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반장님은 마지막 술잔을 털어 넣으셨다.
벌써 한 병을 다 비우시다니. 나는 다른 술병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와 반장님 주변을 휘감고 있는 건먹먹한 어둠뿐.
“반장님…?”
다시 반장님을 바라봤으나, 반장님이 있던 자리에는 빈 술잔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제야, 나는…
청소부 길드의 쇠똥구리이자, 반장님의 성을 물려받은 천여명은.
꿈에서 깨어났다.
***
눈을 뜨자 땟국물이 가득한 김만수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여명의 눈을 보자마자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여명! 정신이 드냐?”
아, 여명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숨을 들이쉬었다. 바싹 익었던 폐가 산소를 빨아들이고, 멈춰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용은? 용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직 안 죽었다. 기절하긴 했지만.”
김만수는 그렇게 말하며 여명의 상체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계곡 저편에 뻗어있는 용이 보였다.
날개와 다리, 심지어 눈까지 잃었음에도 용은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질긴 생명력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제 곧 군이 오면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김만수가 그런 말을 하며 여명을 안심시키는 사이, 다른 용병들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모두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특히 권 단장은 용의 마법을 정면에서 막은 게 문제였는지, 온몸에 화상과 수포가 가득했다.
“여명의 몸 상태는? 긴급 후송이 필요한 수준인가?”
물론, 정면에서 마법을 뒤집어썼던 여명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그럭저럭?”
대답을 들은 권 단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명의 상태는 의사가 기겁할 정도로 심각했으니까.
“10분 정도면…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 상처를 재생하는데 10분?
용병들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여명을 살폈다. 그러나 여명의 육체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빠르게 재생하고 있었다.
재생이 어려운 화상이 실시간으로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는 모습을 확인한 권 단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만주를 구한 영웅을 이 자리에서 잃을 일은 없을 테니.”
만주를 구한 영웅. 낯간지러운 표현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명이 아니었다면… 만주는 분명 멸망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위업을 표정을 달성한 사람치곤, 여명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지금 당장…”
그가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순간, 하늘에서 누군가가 떨어져 내렸다.
쿵!
파순.누더기가 된 방한복 위로 검붉은 마나를 망토처럼 두른 그가 여명과 용병들 한 가운데에 착지했다.
“안녕?”
중성적인 얼굴 위로, 미소가 걸렸다. 용병들은 몸을 긴장시키면서도, 쉽사리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함께 용과 맞서 싸운 탓도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힘의 차이 때문이었다.
모두 몸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모를까, 지금 당장 녀석과 싸운다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물론 용병들이 무슨 생각을 하건, 파순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녀석은 오직 여명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여명, 우리 약속은 기억하겠지?”
“…그래, 기억하지.”
“약속대로 용의 내단… 아니, 심장은 내가 가져가마.”
용의 심장을 빼가겠다고? 권 단장이 슬쩍 눈썹을 씰룩거렸으나, 그 이상의 행동은 옮기지 못했다.
여명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탓이었다.
“좋아, 심장은 네 것이다. 가져가라.”
하지만 파순은 바로 용에게 날아가지 않았다. 녀석은 용과 여명을 번갈아 바라본 뒤, 피식 웃었다.
“의외로 순순히 내주네? 생각보다 용과 싸움이 격렬했나 보지?”
“…약속을 지킬 뿐이다.”
“약속, 약속이라…”
파순은 말끝을 흐리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용병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내 기억에 우리 약속은 싸움을 잠시 미뤄두자는 거였는데. 기억하냐?”
그 순간 파순의 손에서 뭔가가 번쩍였다. 그 빛의 번쩍임과 동시에 가장 앞에 있던 권 단장의 손에도 불길이 터져 나왔다.
퍼엉!!
화염과 장풍이 부딪히며 흡사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충격파가 일어났다.
“막아!”
파순과 가장 가까웠던 용병은 충격파를 맞으면서도 단검을 집어던졌다. 다음 순간, 파순은 검지와 중지를 뻗어 가볍게 단검을 붙잡았다.
녀석은 손목을 가볍게 흔드는 것으로 단검을 주인에게 돌려보냈다. 빛살처럼 날아간 단검이 용병의 어깨를 갈라버렸다.
우선 한 놈.
파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소총을 들어 올리는 용병에게 손가락을 뻗어 지풍을 쏘아냈다.
소총과 용병의 어깨가 동시에 박살나고, 용병은 그대로 저편으로 날아갔다.
이제 남은 건 둘.
그가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순간, 권몽주가 달려들었다. 온몸에서 불을 내뿜는 단장의 화공은 인상적이었지만, 그뿐이었다.
파순은 곧장 허리를 틀어 그 공격을 피했다. 그는 회피와 동시에 균형을 잃은 권 단장의 얼굴에 주먹을 내질렀다.
이빨이 부러지고, 피가 튀었지만, 권 단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몸마저 불태우려는 듯, 더욱더 큰 화염을 일으키며 파순에게 달라붙었다.
“자폭이라도 하려고?”
파순은 그의 발악을 비웃으며 몸을 뒤로 뺐다. 불길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손바닥을 펼쳐, 장풍을 내뿜었다.
가장 먼저 달려드는 양 무릎을 박살 내고, 그다음으로 어깨를 부수고, 마지막으로 갈비뼈를 으스러트렸다.
그렇게 권 몽주 단장이 바닥에 쓰러지기까지, 불과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니, 선죽 용병단의 최정예 4인이 모두 쓰러지기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다는 게 정확하리라.
파순은 여명의 앞을 막은 김만수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너는 어떻게 죽여줄까?”
김만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손도끼를 꽉 쥐고, 파순을 노려봤다.
“새끼, 눈빛이 마음에 드는데? 좋아. 넌 두 눈을 파주마.”
파순은 손가락을 펼쳐 지풍을 준비했다. 마나를 끌어모으고, 최후의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
무언가가 그의 가슴을관통했다. 구멍난 가슴에서 뒤늦게 푸확, 피가 튀었다.
그제야, 파순은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허공에서, 리볼버를 쥐고 있는 새하얀 손이 보였다.
“성녀, 이 씨발년이…”
“미안해요. 제가 개새끼만 보면 쏘고 싶은 병에 걸려서 그만.”
성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박한 도발.
파순이 발작적으로 장풍을 쏘아냈으나, 성녀는 다시 투명 망토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성녀! 그깟 망토 뒤에 숨는다고 내가 널 못 죽일 거 같으냐?”
파순은 피가 흐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비켜 나갔지만, 나약한 육체는 이 정도 상처조차 버티지 못했다.
용과 맞서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위기.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여유가 사라지고, 냉철한 생각이 떠올랐다.
‘성녀를 바로 찾는 건 무리야. 우선 여명부터 죽여야 해. 녀석이 재생하면 승산이…’
그가 여명을 떠올리고 고개를 돌린 순간, 여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그의 손에는 혜성검을 쏘아냈던 푸른 단검이 들려있었다.
“뭐?”
재생에 10분은 걸린다고 했…
파순의 머리로 의문이 떠오른 그때. 여명이 손에서 푸른 빛이 번쩍였다.
목을 꿰뚫는 싸늘한 푸른 단검.
그것이 파순이 느낀 마지막 감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