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20)
을 위한 세계는 없다-620화(620/817)
EP.620 Coram Deo (4)
용사의 후손.
그 단어를 마주한 일행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흠칫, 놀라는 성물지기와 의미심장하게 눈빛을 교환하는 부부 사기단.
‘또 이상한 오해를 샀네.’
‘사실대로 말할 거야?’
‘아니, 우리 편도 아니고 일단 떠보자.’
곧 성물지기가 ‘저 말이 진짜냐’는 눈으로 여명을 돌아봤을 땐, 여명은 머릿속으로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그는 놀라움을 숨기는 척,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제가 용사 혈통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한 번 더 크게 놀라는 성물지기와 달리, 총대주교는 코웃음을 쳤다.
“대놓고 황금색 눈을 드러내놓고 다니는데, 어찌 모르겠느냐?”
“….”
거짓말이다. 여명이 용사의 후손이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옛날부터 성녀가 아닌 그를 노렸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올림피아 선수단 환영 연설 때 뭔가 발견한 게 틀림없었다.
용사 혈통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는 능력… 대체 뭘까? 권능? 신성? 아니면 성물?
여명은 속으로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겉으로는 연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예.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전 용사의 혈통을 타고났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렵군요. 옥좌의 찬탈자라니.”
“하!”
총대주교는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과장되게 웃었다.
“젊은 친구가 낯짝이 용 가죽만큼이나 두껍군.”
“….”
“혹시 미국 출신인가? 내가 만난 최악의 거짓말쟁이들은 전부 미국인이었거든.”
노인 특유의 낡고 녹슨 조롱이었다.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 한국 출신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를 왜 황가와 엮는지 모르겠습니다. 용사의 후손이 얼마나 많은데… 저를 딱 집어 옥좌와 엮는 이유가 뭡니까?”
“…후우, 그 나이에 벌써 정치인처럼 지껄이는 법을 배웠군. 젊은이는 젊은이처럼 말해야 하는 법이거늘.”
“….”
젊은이를 등 처먹는 노인네처럼 중얼거린 총대주교는, 연설할 때처럼 묵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현 황가는 용사의 혈통과 아무 상관 없다. 단 한 방울도.”
성물지기는 경악했다.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쉬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놀란 연기를 준비하던 여명이 무안할 만큼 과격하게.
성녀의 리액션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거였나?
쓸모없는 깨달음을 적립한 여명은 연기를 때려치우고 한숨과 함께 말했다.
“대단한 비밀도 아니잖습니까.”
“그렇게 무덤덤하게 넘길 비밀도 아니지.”
“….”
“내 경험에 의하면, 비밀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네. 알려져봤자 별 볼 일 없는 비밀과, 세상을 뒤엎을 수 있는 비밀. 이건 명백히 후자에 속하는 비밀일세.”
그렇게 말한 총대주교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저 무능하고 멍청한 황제가 입헌군주제로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용사의 후손이라는 전통 때문이지. 만약… 그게 거짓이라는 게 밝혀지면, 제국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는 복도 너머, 그러니까 남쪽의 제국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가는 사라지고, 제국은 그 시체를 뜯어먹을 온갖 벌레들의 각축장이 되겠지. 공산주의자, 미국식 공화주의자, 유럽식 연방주의자, 심지어 복고주의자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바보들까지….”
“….”
“하지만, 그때 제대로 된 용사의 후손이 나타난다면? 그것도 지구 국가의 지원과 성녀의 지지, 그리고 용사가 떠오를 정도로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후손이라면…?”
총대주교의 말꼬리가 높아지던 순간, 세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변경백은 왜 빼죠? 그 사람도 제대로 된 용사의 혈통인데요.”
그러자 총대주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샤에서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을 두고 바보라고 부르지. 하지만 내가 쌓아온 교양이 있으니, 자네를 바보라 부르는 대신 점잖게 설명해주겠네.”
“….”
“혈통을 통한 지배 체제의 기본은 세습일세. 고자에게 옥좌를 줘도 후계자 다툼을 조금 뒤로 미루는 것에 불과할 뿐. 안정적인 세습 체제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지.”
한 호흡. 늙은 폐로 숨을 삼킨 총대주교는 설명을 계속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적인 문제가 있지. 변경백이 황제가 되면, 프랑스를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은가? 설사 변경백이 전쟁을 참는다고 해도, 변경백령 전쟁의 상처는 두고두고 새로운 황조의 발목을 붙잡을 걸세.”
흥미로운 동시에, 그럴싸한 관점이었다. 지구인인 여명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아샤인의 관점.
아무튼, 세티를 향해 조롱과 설명을 끝마친 총대주교는 다시 여명을 바라봤다.
“자, 이제 왜 변경백이 대안이 될 수 없는지, 그리고 왜 내가 자네를 옥좌의 찬탈자로 불렀는지 알겠나?”
“예, 무슨 걱정을 하시는 건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 정말로 제국 황가와 엮일 생각이 없습니다.”
“오, 그러신가. 지구에 간 성녀와 만난 것도, 실력을 숨긴 채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시선을 모은 것도- 전부 우연이란 말이렷다?”
“예.”
즉답이었다. 총대주교는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렇다면 성녀와 자네의 관계도 우연… 아니, 운명이겠군? 성기사들이 자네에게 비비적거리는 것도 운명. 성검과의 인연도 운명, 저것도 운명, 이것도 운명… 자네는 황제가 될 운명을 타고났군. 대단하군. 아주 대단해!”
“본인이 믿기 어렵다고 해서, 비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다고 진실이 변하진 않으니.”
“진실…? 감히 다섯 신 교단의 총대주교 앞에서 진실을 가르치려 하느냐?”
“아뇨, 제가 어떻게 감히 총대주교님을 가르치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한 건 그쪽이 먼저였습니다.”
“하! 벌써 황제가 된 것처럼 말하는군. 하지만 네놈은 절대 황제가 될 수 없다. 되어서도 안 되고! 이게 어떻게 얻은 평화인데…! 너도, 저 바보 같은 지구 계집도 결단코-”
그때, 여명이 말을 끊었다.
“…한 번만 더 세티를 모욕하면 후회하실 겁니다. 늙은이 종아리를 걷어차는 건 굳이 황제가 아니라도 할 수 있으니 말이죠.”
여명의 무례한 대답에 놀란 건 총대주교가 아닌 성물지기였다.
그는 밀려드는 진실과 거짓을 견디지 못하고 물에 빠진 사람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성물지기라는 직위와 아샤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샤인인만큼 총대주교의 편을 들어야 했지만… 잠시 고민하던 그는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총대주교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이 친구는 총대주교님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결심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성물지기, 네가 낄 대화가 아니다!”
“….”
“대체 얼마나 더 교단을 어지럽혀야 만족할 것이냐? 성검을 지구에 넘긴 것만으로는 부족 했단 말이냐!”
총대주교의 일갈에 성물지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긴, 성검을 잃은 건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만했다.
하지만 덕분에 성녀가 태어날 수 있었고, 여명은 성녀의 연인이었다. 그는 고개 숙인 성물지기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총대주교님, 괜한 말싸움은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뭐라? 괜한 말싸움?”
“저는 지금 검은 신께 직접 허락을 받고 성물의 방으로 가는 겁니다. 불만이 있으면 그분께….”
총대주교의 표정을 본 여명은 입을 다물었다. ‘직접 허락을 받고’ 라는 부분을 듣자마자, 주름 가득한 얼굴에 혐오가 서렸으므로.
“…신을 만났다? 다른 자도 아니고, 용사 혈통이?”
“….”
“용사 혈통은 신과 소통할 수 없다. 초대 용사 이후 그 누구도! 심지어 총대주교인 나조차 그러할진대, 네깟 놈이 신을 만났다고 주장하느냐?”
나조차 그러하다고? 여명은 문뜩 총대주교의 맥주 빛 눈동자가 물에 탄 황금처럼 보인단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작은 깨달음이 머리를 스친 순간. 총대주교가 성물의 방 문고리를 콱, 붙잡았다.
“그래, 그 자신만만한 주둥이에서 나오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어디 한 번 보도록 하지!”
“잠깐-!”
놀란 성물지기가 그를 말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총대주교는 문을 활짝 열었다.
번쩍!
문 너머에서 터져 나온 빛은 그대로 여명을 집어삼켰다.
여명은 검을 뽑지 않았다.
살기를 느끼지 않아서?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그를 덮친 빛이 무척이나 익숙한 까닭이었다.
성녀를 가호하던 다섯 신의 빛.
따스하게 눈을 가렸던 빛이 사라진 걸 느낀 여명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청소 도구실과 마주했다.
그가 인천에서 사용하던 청소 도구실과는 달랐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청소기와 쓰레기통, 그리고 길게 늘어선 청소도구함은 분명 청소 도구실의 그것이었다.
잠시 풍경을 바라보던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청소도구함을 열었다. 내부에는 그조차 감탄할 정도로 깔끔한 청소 도구들이 가득했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청소 도구들에서 신성이 느껴졌다.
저 걸레에서는 적색 신의 신성이, 저기 거꾸로 걸린 빗자루에서는 검은 신의 신성이….
“….”
여기가 성물의 방인가? 근데 왜 이따위로 보이는 거지?
여명이 의아한 듯 고개를 돌리자, 세티가 갑자기 허공에서 뿅 하고 나타났다.
본인도 어리둥절한 건지, 그녀는 청소 도구실을 둘러보며 눈을 깜빡였다.
“호텔 VIP룸?? 여명, 왜 이런 곳에 있어?”
“…호텔? 어디 호텔? 난 청소 도구실로 보이는데.”
“여기가 청소 도구실이라고? 하지만 내 눈에는 우리가 처음….”
거기까지 말한 세티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뭔가를 고민하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사람마다 다른 풍경을 보는 마법이 걸린 곳인 거 같네.”
다음 순간, 성물지기가 허공에서 튀어나와 그녀의 말을 증명했다.
“둘 다 괜찮니?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너희 심상 속 풍경을 변형해서 보여주는 거니까, 당황할 필요 없단다.”
“여기가 성물의 방인 겁니까?”
“그래, 이 풍경은….”
그때, 총대주교의 목소리가 성물지기의 뒷말을 가로챘다.
[…이 방에 모인 성물을 지키기 위한 보안이지.]여명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푸른 보석이 보였다.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건 선택받은 자뿐. 자네는 이곳에 갇힌 걸세.]청소 도구실에 갇혔다고? 나쁘지 않은데- 여명은 그런 생각을 삼키며 물었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넌 피와 눈물로 세운 이 평화를 망가트릴 존재니까.]“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아니,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다.]“…?”
여명이 고개를 갸웃한 찰나, 보석 너머의 총대주교가 세티를 향해 물었다.
[넌 진짜 용사의 혈통인가?]아까 했던 질문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결과는 달랐다.
“아까 대답했… 그렇습니다.”
여명의 의지와 상관없이, 입에서 제멋대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낯설지 않은 권능이었다.
“…강제로 진실을 말하게 하는 권능. 진실 흘리는 자와 똑같은 권능이군요.”
[감히 청색 신의 성물과 저주받을 아야톨라의 힘을 비교하느냐? 진실과 지혜의 신께선 거짓 없는 대화를 위해 이 성물을 내리셨다!]그건 아마 목소리를 따라 반짝이는 저 청색 보석의 힘인 듯했다. 여명은 ‘문뜩 거짓 없는 대화’ 말에서 뭔가를 깨달았다.
“…그러면 당신께서도 제 질문에 대답하셔야겠군요?”
[그렇다.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질문을 대화라 부르진 않으니.]“….”
아야톨라 쪽이 더 강한 거 아닌가? 여명이 불경한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총대주교가 말했다.
[조금 전 질문에 대답했으니, 내가 질문하겠다. 거기, 지구의 소녀여. 천여명에게 가진 불만을 말하라.]“…?”
거짓 없는 대화를 위한 성물로 내부분열을 일으키다니. 여명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세티가 좀 곤란한 얼굴로 입을 들썩이는 게 보였다.
“어… 그게….”
잠깐 권능에 저항하던 세티는, 이내 속마음을 털어냈다.
“만박불통이 알려준 분신 말인데… 좀, 마음에 안 들어.”
“…??”
“마나를 불어 넣었다지만, 물풍선이랑 다를 바 없잖아. 그게 뭐야? 직접 애정을 쏟아야지. 성녀랑 네티 때문에 아무 말 안 하고 있었는데, 나는… 여명답지 않아서 싫어.”
“나답지 않다고?”
“넌 뭐든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잖아.”
“….”
그건 그렇지. 여명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변명을 내놨다.
“아니, 분신은 애초에 그런 용도가 아니긴 한데… 그, 다른 사람들은 종종 도구도 쓰잖아? 그런 관점에서 보면….”
“도구?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난 직접 살을 맞대는 게 좋은걸.”
아무리 성물이 있다지만, 너무 솔직한 대답 아닌가? 여명의 생각을 증명하듯, 세티는 새빨개진 얼굴을 숨겼다.
“여명 너는, 나한테 불만 없어?”
“없어. 넌 내게 완벽한 사람이니까.”
“….”
세티는 총알에 맞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 비해 옆에서 듣고 있던 두 종교인은 정색했다.
특히, 성물지기가 크게 정색했다.
“내 따님과 분신으로 뭘 한다고?”
“아직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아직?”
원래라면 주둥이를 다물어야 했지만, 청색 신의 성물은 기어코 여명의 입을 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분신 아랫도리가 안 만들어지더라구요. 헤어질 때 알려준 문구도 그렇고… 아마 만박불통이 절 골탕 먹인 것 같습니다.”
말을 끝낸 여명은 눈을 질끈 감으며 변명을 덧붙였다.
“성녀와 저는 굉장히 정상적으로 교제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그렇겠지.”
“….”
성물지기는 혈압이 올라오는 듯 목덜미를 잡았다. 여명과 세티마저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총대주교가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무슨…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게야?]“녹색 신께서 좋아하실 소리요.”
[….]총대주교가 침묵하길 잠시. 여명은 크흠,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이걸로 세티와 여명의 관계를 망가트리려던 총대주교의 계획은 무산됐다… 그보다 큰 부끄러움을 남기긴 했지만.
아무튼, 두 사람이 각각 질문 하나씩 총 두 개의 질문을 총대주교에게 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장인어른 앞에서 분신을 운운한 충격이 너무 컸으므로, 여명과 세티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감정을 다스렸다.
잠시 후, 세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명이 용사 혈통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죠?”
[나는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용사 혈통을 감지할 수 있다. 묽은 피는 거의 느낄 수 없지만, 저 녀석처럼 진한 피는 먼 거리에서 눈만 마주쳐도 알 수 있지.]자동으로 혈통을 알아볼 수 있다고? 상상도 못 한 대답에 세티가 눈매를 좁히는 가운데, 여명이 다음 질문을 꺼냈다.
“당신도 용사 혈통을 이었군요.”
[그래. 100년 전 사생아가 옥좌를 차지했을 때 성도로 도망친 방계 중 방계의 혈통이다.]예상대로였다. 여명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옥좌의 찬탈자에 가까운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군요. 제국의 혈통이 가짜라는 걸 알면서, 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아샤의 평화를 위해서.]“….”
[평화는 그 어떤 가치보다 앞선다. 이제 내가 질문하겠다.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차원문 너머로 도망친 방계 중 누가 제국을 노리는 것이냐?]여명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밝히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전 전대 성녀님과 변경백님의 아들입니다.”
[…?]적막이 성물의 방을 감싸 안았다. 총대주교는 물론이고, 성물지기조차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럴… 리가? 변경백은 성불구다. 불구가 되기 전 두 사람은 입맞춤 이상을 하지 않았고. 이건 내가 직접 성녀를 심문해서 얻은 진실이란 말이다. 두 사람의 아들은 절대 태어날 수 없….]총대주교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청색 신의 성물은 그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여명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맹세컨대, 난 두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정당한 권리로서 묻겠습니다. 왜 어머니를 전쟁에서 강제로 끌어내고, 평생 성도에 가둬 놓은 겁니까? 대체 왜요?”
총대주교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화를….]…위해서. 뒷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가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까닭이었다.
여명은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성물을 향해 다가갔다. 이윽고, 그가 성물 앞에 도달한 순간.
쿨록! 더는 성물의 권능을 버티지 못한 총대주교가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말했다.
[미국이 그것을 원했다. 예지를 가진 그녀를 억류하고, 그녀가 처녀로 죽는 것을 대가로 참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운명이라서, 시나리오라서가 아니라! 변경백과 프랑스의 전쟁이 제국과 미국의 전쟁으로 번지는 걸 막기 위해서! 무수한 죽음을 막기 위해서! 기꺼이 그렇게 했다!!]총대주교의 고백은 감정적인 동시에 진솔했다.
[나를 비난하겠느냐? 미국과 손을 잡고, 신들께서 가장 사랑하는 이를 억류했다 비난하겠느냐? 운명에 고개를 조아렸다 비난하겠느냐? 좋다! 비난할 테면 해라!!]“….”
[하지만 알아두어라. 아샤가 지구와 전쟁을 벌여 맞이할 결과는 단 두 개뿐이었단 것을! 핵의 불길에 타죽거나, 옐로스톤 같은 지구의 화산을 폭발시켜 수억 명을 죽이거나! 나는 그 비극을 막고, 모두를 살렸다! 다섯 신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의 이름으로, 평화를-!]“-비난하지 않겠습니다.”
[…뭐?]“대신 묻겠습니다. 이 평화에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습니까?”
[….]“섬기는 신을 실망시키고, 당신을 믿는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그보다 많은 사람의 삶을 망가트릴 만큼?”
총대주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고뇌가 엉킨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고요가 길어지기 전에- 총대주교가 대답했다.
[…그럴 가치가 있었다. 내게 다시 똑같은 선택지가 생긴다 해도, 나는 그것을 택할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명은 총대주교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했다.
그는 어떤 면에서 에케모와 비슷했다. 운명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고, 세상에 자신의 구원을 강요했다.
하지만 용서해줄 스승이 있던 에케모와 달리, 대주교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사과할 사람도, 용서할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건 스스로 쌓은 아집과 업보 뿐이었다.
여명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성물 뒤에 숨은 총대주교를 향해서.
꽈악-! 보이지 않는 방 너머에서 노인의 멱살이 잡혔다.
끌어당긴다. 투명한 장벽 너머에 숨어있던 노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멱살을 잡힌 그는 적어도 다섯 개가 넘는 성물을 차고 있었다.
반지, 목걸이, 방패…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작동하지 않았다. 여명이 인벤토리에서 백색 신의 성물을 꺼낼 때까지, 계속.
“단죄의 빛…! 성물지기가 넘긴 자가 너였단 말인가? 하, 백색 신께서는 참으로 자비로우시구나. 그녀의 아들로서 나를 단죄하시다니.”
여명은 말없이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목을 내려치려다가, 총대주교의 눈을 마주했다.
그의 맥주 빛 눈동자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그곳에 있는 건 올 게 왔다는 침착함뿐이었다.
이런 날을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누군가 자신의 선택을 심판하러 오는 날을?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명은 심판자가 아니었다. 죄를 벌하는 신의 대행자는 더더욱 아니었고.
그래서 여명은 단죄의 빛을 회수했다. 물론, 그게 용서를 뜻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검이 사라진 손을 꽉 쥐어 주먹을 만들었다.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 표현.
“사위, 잠깐…!”
성물지기가 막는 것보다 먼저, 빠악! 여명의 주먹이 총대주교의 얼굴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