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21)
을 위한 세계는 없다-621화(621/817)
EP.621 Coram Deo (5)
총대주교가 초래한 고통이 하나가 아니듯, 여명의 주먹질 또한 한 대로 끝나지 않았다.
열, 스물, 서른….
이윽고 그 숫자가 무의미해질 때까지, 여명은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의 누구도 그 폭력을 막지 못했다. 성물지기와 세티, 그리고 이 땅을 지켜보는 모든 신들까지도.
멈추지 않을 것 같은 폭력을 멈춘 건 여명 본인이었다. 그는총대주교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멱살을 놓았다.
털썩, 기절한 늙은이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기 무섭게, 성물지기가 총대주교에게 뛰어갔다. 종교인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종교인이 아닌 여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주먹에 묻은 피를 닦아내지도 않았고, 분노에 소리치거나 통쾌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조용히, 아주 조용히 총대주교를 내려다봤다.
침묵.
세티는 여명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건 그것은 어머니를 잃은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보다는 훨씬 길고, 한참에는 조금 못 미치는 시간이 흐른 뒤.
여명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티는 어리숙한 위로 대신,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그럼 이제 전대 성녀님… 아니, 시어머니의 유산을 찾아볼까?”
시어머니. 그 단어를 들은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웃어버렸다.
“그래, 그거부터 찾자. 그러기 위해서 온 거니까.”
그렇게 미소를 교환한 두 사람은 동시에 성물지기를 바라봤다.
연구 기록은 어디 있냐는 뜻이 담긴 눈빛.
총대주교의 상태를 확인하던 성물지기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 그게, 이미 보안 신성이 발동한 상태라.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구나.”
“…보안을 끄실 수는 없나요?”
“원래는 내가 총대주교님의 권한보다 위에 있지만, 지금은 징계를 받는 중이라서… 총대주교님이 깨어나셔서 직접 풀지 않는 이상 계속 이 상태일 것 같구나.”
“….”
여명과 세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나, 성물지기는 무안한지 말을 돌렸다.
“어… 그래도 찾는 거 자체는 어렵지 않을 거다. 신의 성물이 아닌 성인들의 유품으로 분류되니까. 내 기억상 오른쪽 벽 어딘가에 있던 거 같은데….”
두 사람은 자연스레 오른쪽 벽을 확인했다. 아마 보관함이 있었을 자리.
여명의 눈에는 그곳이 청소부 도구함으로, 세티에게는 호텔 고급 옷장으로 보였다.
문제는, 도구함과 옷장이 적어도 수십 개가 넘는다는 점일까.
여명은 청소 도구함을 열면서 물었다.
“성물들도 전부 다른 물건으로 보이는데, 기록은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그건 직접 만져보면 된다. 그저 보이는 게 달라졌을 뿐이니까. 종이 묶음처럼 느껴지는 걸 찾으면 될 거다. 오른쪽 벽면에 종이로 된 물건은 그것뿐이니.”
보이는 것만 바꾸는 신성이라.
그다지 대단한 보안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한걸음 떨어져서 보자면 이런 보안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방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어려울뿐더러, 이곳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신들의 성물이었으니까.
무슨 스탈린도 아니고, 저 차원 너머에서 만물을 내려다보는 신들의 눈을 피해 성물을 도둑질할 인간이 존재할 리 없었다.
물론, 박 기자의 렌즈처럼 신이 직접 다른 곳으로 유출해버릴 가능성도 있었지만.
아무튼, 여명은 청소 도구함을 열어 연구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시작은 도끼가 분명한 빗자루였다. 잡자마자 맹렬한 신성이 느껴지는 게, 아마 레독스의 성물인듯했다.
‘진짜 빗자루 성물은 없나? 있으면 하나 가지고 싶은데.’
여명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세티 또한 옷과 이불로 변해있는 성물들을 확인했다.
개중에는 아주 고급스러운 여성용 속옷도 있었는데, 정작 손에서 느껴지는 촉감은 목걸이였다.
섬세한 꽃다발이 새겨진, 녹색 신의 목걸이.
『Do It!』
목걸이 속 녹색 신의 신성은 직접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노골적인(?) 신성을 뿜어냈다.
이 양반이 진짜.
세티는 천천히 속옷을 내려놓은 뒤, 후끈거리는 볼을 쓸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호텔 VIP룸 풍경은, 여명과 첫 경험을 했던 바로 그곳이었으니까.
아마 녹색 신께서도 그걸 알고 이런 장난을 치시는 거겠지.
세티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계속 성물을 확인했다.
잘못 잡으면 손가락이 베일 정도로 날카로운 검, 두꺼운 흉갑, 장갑, 그리고-
무슨 짐승의 털로 만든 것 같은 망토까지.
[오류, 세대 알 수 없음.]뭐지 이건? 성물이 아닌 거 같은데? 망토를 만지작거리던 세티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바로 그때.
성물지기가 뜬금없이 질문을 꺼냈다.
“저기… 중요한 건 아니지만, 최근에 우리 따님이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알려줄 수 있니?”
“예?”
“그, 시카고에서 만날 때는 경황이 없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얼굴 보기 전에 선물이라도 하나 사주고 싶어서.”
“….”
질투가 날 정도로 따스한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말. 그러나 그 사랑이 보답받는 일은 없었다.
조금 전 총대주교가 발동한 청색의 권능은 여전히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질문을 받은 세티와 여명은 동시에 진실을 말해버렸으니까.
“성녀가 가장 원하는 거요? 여명이랑 저랑 동시에 호텔로 끌고 가는 거요.”
“저와 세티를 한 침대로 끌어들이는 걸 가장 바라고 있을 겁니다.”
아, 진실의 냉혹함이란! 진실을 흘린 여명과 세티는 동시에 얼어붙었다.
물론, 둘이 느끼는 당혹감을 다 합쳐도 성물지기가 느낀 충격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
곧, 창백하게 질린 침묵이 세 사람 사이를 휘감았다.
성물지기는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입술만 벙긋거릴 뿐,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가 오늘 마주한 진실들이 어디 한두 개인가.
용사 혈통, 황가의 비밀, 총대주교의 비밀… 그리고 딸의 무시무시한 꿈까지.
진실에 압도된 성물지기는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모든 이들과 같은 반응을 보여줬다.
그러니까, 진실을 외면해버렸다.
“그, 사실 내가 검은 비단으로 직접 짠 안대를 선물할까 하는데… 우리 따님께서 좋아할까?”
“…예, 좋아할 겁니다.”
“그거 다행이네. 사실, 바이크랑 안대 중 뭘 선물로 줘야 할지 고민했거든.”
“어… 그게, 바이크랑 비교하면 당연히 바이크를 좋아할 것 같은데요?”
“….”
다시 한번 진실에 상처받은 성물지기는 구슬픈 얼굴로 총대주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청색 신께서 일부러 괴롭히는 거 아닌가?
신에게 모든 잘못을 밀어낸 여명은 문뜩, 자신에게 질문할 기회가 생겼다는 걸 떠올렸다.
그래서 그는 질문했다.
“그, 성물지기님. 성녀의 이름은 누가 지은 겁니까?”
“이름?”
“예, 워낙 이상… 음, 인상적인 이름이라서요. 누가 지어준 건지 궁금했습니다.”
혹시 전대 성녀님이 지으신 겁니까? 라는 뒷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성물지기가 대답했다.
“나와 모리네가 함께 지은 이름이야.”
“두 분께서 같이요? 러시아식도, 그렇다고 아샤식도 아닌 기묘한 이름을요?”
“…기묘한 이름이라니. 우리가 얼마나 고민해서 지은 이름인데.”
그게 고심한 이름이라니.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세티를 바라봤다.
그녀가 ‘쇠똥구리도 만만치 않거든’ 이란 뜻이 담긴 눈빛으로 대답하는 가운데, 성물지기가 말을 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참, 감개무량해. 따님께서 성녀로 뽑히기 전까진, 이름을 붙일 정신도 없었거든. 나는 죄인이었고, 모리네는 도망자였으니.”
“….”
“성녀로 뽑힌 뒤, 교단의 사제들은 멋대로 따님의 이름을 지으려 했단다. 전대 성녀님께서 나서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아마 다섯 신의 처녀 같은 이름을 부여받았겠지.”
지금 이름이나 다섯 신의 처녀나 도찐개찐인 거 같은데… 아무튼, 전대 성녀님이 개입했다는 말을 들은 여명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세티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성녀의 이름 또한 뭔가가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혹시,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뭔가 영감을 받으신 게 있습니까?”
“아쉽지만, 영감 같은 건 없었단다. 그때 우리 부부가 가진 방향성이라곤, 우리와 연관 지을 수 없는 이름으로 짓자는 것뿐이었단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니까.”
“….”
“아직도 생각나는군. 달이 아주 밝은 밤이었지… 모리네와 나는 나란히 앉아, 달을 보며 이름을 지었어.”
성물지기는 그때가 생각나는지 후우- 기다란 숨을 내뱉었다.
“부끄럽지만, 이름을 짓는 내내 눈물을 뚝뚝 흘렸지. 우리는 그게 딸에게 줄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했거든.”
“마지막 선물이라뇨?”
“상식적으로, 교단이 다음 성녀의 오점이 될 우리를 살려둘 이유가 없었으니까. 지금도 따님께선 혼혈이라고 손가락 받는 판인데, 그때는 어땠겠니?”
“….”
“우리는 기꺼이 죽음을 기다렸지만… 사형이 내려지기 전에 백색 신께서는 내게 단죄의 빛을 내려주셨단다. 무신론자인 소련의 스파이와, 성검을 잃어버린 멍청이를 살려주신 거지.”
단죄의 빛이 그런 성물이었나.
여명은 그제야 성물지기가 자신에게 단죄의 빛을 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사랑을 인정해준 신이 내린 성물을 사위에게 준다… 세기의 로맨티스트다운 행동이었다.
물론, 총대주교로선 두들겨 패도 모자랄 행동이긴 했지만.
아무튼, 여명은 성물지기의 이야기 속에서 다른 힌트를 잡아냈다.
‘달을 보고 이름을 지었다… 혹시 성녀는 달의 신인가?’
자신이 태양신인 케프리의 화신이란 걸 생각하면, 그쪽이 타당할지도 몰랐-
그때, 세티가 그의 상념을 끊었다.
“찾았다.”
달빛 비추는 성도.
양손을 모아 여명과 세티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던 성녀는 문뜩, 무언가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뭔가 달라졌다.
정확히 뭐가 달라졌는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감은 확실했다.
뭐지? 묘한 불길함이 등허리를 쓸고 내려갔다.
설마 여명과 세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녀는 천리안을 쓰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성물의 방은 어차피 볼 수 없었다. 지금은 두 사람을 믿는 것 외에 방법이 없…
…진 않았다.
그녀에게는 예지가 있었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힘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곧바로 예지를 사용했다.
적어도 애인을 관음하는 용도로 쓰는 것보다는 건설적인 사용법이어서? 아니, 그녀의 등허리를 쓸고 지나가는 묘한 불길함 때문에.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다섯 신의 신성이 따스하게 몸을 감싸는 것과 동시에, 성녀는 내면으로 침전했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정체 모를 붉은 탑이 하늘까지 치솟은 성도를 보았다.
허물어지는 중앙 신전을 보았고.
분노에 가득 찬 세티를 보았으며.
불타는 성도를 보았다.
그래, 성도는 불타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불씨 속, 무수한 신도들의 비명과 성기사들의 고함이 귀를 찔렀다.
이건 이미 여명과 세티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녀는 예지 속을 두리번거렸다.
누구냐, 누가 감히 성도에 불을 질렀느냐?
한참을 예지 속에서 집중하던 그녀는 이윽고, 그녀는 범인을 찾아냈다.
불길을 뿜어내며 성도 골목을 불태우는 자들. 그건…
자신과 여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