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23)
을 위한 세계는 없다-623화(623/817)
EP.623 Coram Deo (7)
점심 시간, 올림피아 선수촌 식당.
식사를 위해 모인 올림피아 선수단과 관계자들의 분위기는 활발했다.
요리사보다 호위하는 성기사가 더 많다거나, 식단이 생각보다 적다는 사소한 문제들은 누구도 언급하지 않을 정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올림피아 선수들은 청색 추기경이 피습당해 청색 감시망이 사라진 것도, 총대주교의 턱주가리가 박살 난 것도 몰랐으니까.
성도로 오던 황태자가 사라졌단 소식 또한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런 건 어디 정치인이나 기자들이 관심을 가질 일.
당장 경기가 코앞인 학생들은 망해가는 제국의 황태자보다는 자신의 대진표를 분석하기에 여념 없었다.
물론, 그런 자잘한 사건 사고들을 다 알고 있음에도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양념해서 말린 돼지 지방? 추운 북부니까 고지방식을 먹는 건 이해하겠는데, 왜 하필 말린 거야?”
사제들이 차린 음식을 분석하는 마법사와-
“백색 신의 사제들은 아무거나 다 말려 먹어, 태양신의 사제라면 그래야 한다나. 제정신이 아니지. 그 양반들은 선크림도 이단으로 지정하자고 한다니까?”
이때다 싶어 사제들을 디스하는 성녀.
“나도 형부 피 마셔보고 싶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헛소리를 내뱉는 막내까지.
누구 하나 진지함과 거리가 먼 광경이었다. 조금 전까지 새벽에 있던 일을 설명하던 세티는 놓고 이마를 붙잡았다.
그나마 엘프와 넷째 동생이 정상이라서 다행이었-
“여명의 피는 저도 먹어보고 싶네요. 무슨 맛일까요?”
아, 미리디스 너마저. 세티가 배신당한 카이사르의 눈빛으로 엘프를 바라보자, 엘프가 뒤늦게 변명을 붙였다.
“아니, 궁금하잖아요. 환골탈태한 데다가, 무장 혈청까지 들어간 피라니.”
“….”
“세티, 말해봐요. 무슨 맛이었어요?”
다음 순간, 식탁에 둘러앉은 소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세티에게 쏠렸다.
심지어 얌전한 넷째 동생조차 은근히 귀를 쫑긋거리는 게, 어지간히도 궁금한 모양.
하지만 세티는 그 기대를 단 한 마디로 박살 냈다.
“경황이 없어서 맛 같은 건 못 느꼈어.”
“우우-”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막내가 야유를 내뱉는 가운데, 시리가 손을 들었다.
“저기… 저번부터 궁금했던 건데, 무장 혈청이 정확히 뭔가요? 그냥 피로 무기를 만드는 마도구 같은 건가요?”
뜬금없는 질문에 대답한 건 의외로 세티나 성녀가 아닌 엘프였다.
“무장 혈청이요? 흡혈귀들이 몸속에 품고 있는 혈마법의 근본이자 원형이죠. 보통은 단단하게 굳혀서 무기로 써요.”
“….”
이번에는 엘프에게 시선이 쏠렸다. 시리는 말린 과일을 오물거리는 엘프에게 물었다.
“하지만 형부는 흡혈귀가 아니잖아요?”
“그래, 그게 좀 이상하긴 해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소련에서 사람이 쓸 수 있도록 개조한 물건이 아닐까요?”
“….”
개조…. 그 단어 속에 숨겨진 어두운 현실을 읽어낸 시리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녀는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흡혈귀들은 왜 지구로 간 건가요?”
이번에 대답한 성녀였다.
“교단의 손아귀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네?”
“모기 새끼들이랑 우리 교단은 원수 사이였거든. 멀쩡한 사람 피를 빨고, 그렇다고 정상적으로 번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거기다 종말 교단이나 네크로맨서랑 붙어먹는 경우도 많아서, 교단 성기사들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흡혈귀 척살이었어.”
성녀는 식당 창문 밖으로 보이는 붉은 병영을 보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민간인 사이에 숨어든 걸 찾을 수 없어서 잡는 게 워낙 힘들었다던데, 지르지스 경… 아니, 지금은 단장이지. 아무튼, 지르지스 단장이 새로운 추적 기술을 발견한 뒤로는 대대적인 토벌이 있었고, 아샤에서 발붙일 곳이 없어졌어.”
그때, 미리디스가 거들었다.
“아, 저도 기억나요. 몇몇 흡혈귀들이 숲까지 도망쳐 와서는, 숲 인간들을 해쳤거든요. 저희 아버지도 토벌 작전에 한 손 거드셨어요.”
“…?”
그러자 성녀는 그게 뭔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난다고? 이거 수십 년은 더 된 이야기인데…?”
“어, 그게… 그때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고요.”
성녀가 여전히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는 사이, 시리가 엘프를 구원했다.
“근데 흡혈귀들은 왜 하필 소련 땅으로 간 건가요? 미국처럼 자유로운 나라로 가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흡혈귀가 나오는 드라마나 소설 같은 것도 많았잖아요.”
어떤 면에서는 순수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조금 슬픈 질문.
미리디스 애써 서글픈 표정을 숨겼다.
그녀는 엘프를 다루는 작품도 많았지만, 학살을 막아주진 못했다- 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달그락. 포크를 내려놓은 그녀는 조금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건 말이죠…”
“…차우셰스쿠 때문이었지.”
예카테리나. 옛 지배자들에 소속된 여인은 어딘가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하고, 과감한 동시에 잔혹한 남자였어. 마치 흡혈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지….”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눈은 호텔 창문 너머 성검 산맥을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훨씬 더 머나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마니아의 수도, 너무나 아름다웠던 부쿠레슈티.
“그는 우리에게 권력을 약속했고, 나의 친족들은 그를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의 서기장으로 만들어줬지. 아샤와 지구 역사를 통틀어 최초로 우리를 위한 나라가 생긴 거야.”
“….”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조웅찬 장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장관의 비서를 비롯한 한국 요원들은 달랐다.
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차우셰스쿠가 전 국민을 도청하고, 흡혈귀에게 먹일 인간을 늘리기 위해 피임과 낙태를 금지한 미치광이 독재자라서?
아니, 그가 김정일을 후원하던 빨갱이 새끼라서.
어릴 적부터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아 온 요원들은 크흠, 큼- 헛기침으로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예카테리나는 그 시절의 루마니아와 차우셰스쿠가 얼마나 위대했는지 한참 동안 떠들어댔다.
그리고 보다 못한 장관이 그녀의 입을 막으려는 순간.
한발 앞서 예카테리나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스탈린이 우리를 배신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지.”
“배신? 단순히 스탈린이 너희를 학살한 게 아니란 말인가?”
“당연하지. 당시의 모든 공산 국가는 스탈린의 허락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어. 차우셰스쿠 또한 그의 허락 아래 루마니아 공산당의 서기장이 된 거라고.”
장관은 흥미로운 듯 눈썹을 씰룩였다. 예카테리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욕심 많은 콧수염 서기장이 맨입으로 허락해줬겠어? 쯧, 혈족은 대가로 공산 진영에 무수한 지식을 넘겨줬어. 마법, 마나, 그리고 인간의 품종 개량법까지!”
“….”
“우리의 정보가 없었다면, 미국과의 초인 경쟁에서 소련이 앞서 나갈 수 있었을까?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었지! 하지만 배은망덕한 스탈린은 우리를 배신했어! 내 혈족들을 베리야, 그 짐승만도 못한 대머리 새끼에게 밥으로 던져줬다고!”
감정이 격해진 듯, 그녀의 농염한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한 번 더 분노를 토해내려는 그때.
장관이 입을 열었다.
“예카테리나. 진정하게.”
“….”
“분노는 소비재일세. 이런 곳에서 낭비하지 말고, 더 적절한 순간에 써야 하지 않겠나.”
“그게 언제인데? 우리가 성도에 도착한 게 벌써 며칠이야. 그런데 이 호텔에 처박혀 있는 것 말고 뭘 했지?”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지.”
“…순간? 어느 순간?”
“자네의 오래된 적에게 한 방 먹이고, 새로운 적의 꼬리를 붙잡을 가장 적절한 순간.”
오래된 적은 교단을, 새로운 적은 붉은 별을 뜻했다. 예카테리나가 미간을 구기자, 장관이 그녀가 앉은 창가로 다가가며 말했다.
“정확한 시간은 확신할 수 없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불씨가 날아오고 있으니.”
“…불씨.”
“그래, 불씨지. 황태자를 납치한, 빨갱이들이란 이름의 불씨. 그리고… 10강 중 최강, 변경백이란 이름의 불씨.”
말끝을 흐린 조웅찬 장관은 창턱을 짚고 바깥을 바라봤다. 성검 산맥 너머, 성도를 향해서.
“어느 쪽이건, 이 마른 장작 같은 도시를 불태우기엔 충분하겠지. 우리는 불타는 도시에서 원하는 걸 얻어가면 되는 걸세.”
그의 말에 호응하는 걸까? 성도에서 불어온 바람이 장관과 예카테리나 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불씨를 퍼트리는 마른 바람이었다.
여명은 바람으로 흐트러지는 투명 망토를 다잡았다.
고작 바람 때문에 망토가 벗겨지는 일은 없겠으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특히 주변에 사람이 많을 때는 더더욱.
-성녀님의 경기가 언제라고?
-이번 올림피아는 10강의 대리전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군. 맥팔레인에, 오귀스트에, 브라우닝에….
-백색의 울쓰바티시여, 저기 새치기하는 자에게 벌을 내려주소서….
성검 산맥에서 성도까지 이어지는 순례길에는 선수단이 도착한 날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인파가 들어차 있었다.
-제에발, 아샤인이면 성녀님과 살로메를 응원합시다!
-우승은 천여명이다!! 한국 만세!!
올림피아를 보기 위해 온 아샤인들, 그리고 겸사겸사 성도를 관광하려는 지구인들까지.
여명은 무수한 사람들 사이를 훌쩍훌쩍 뛰어넘으며 성도의 구석으로 향했다.
곧, 그의 시야로 작은 식당이 들어왔다. 여행객들은 거의 오지 않는, 현지인만 찾아오는 그런 낡은 식당.
일행들과 함께 식사할 시간까지 아끼면서 이곳으로 온 이유는-
“찾았다. 월라드.”
장만 어르신을 협박하다가 여명에게 뒤질 뻔한 푸른 쥐 요원.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여명은 창가에 앉은 그를 확인하자마자 가까운 골목으로 가 투명 망토를 벗었다. 그리고 곧바로 얼굴에 피눈물의 환상을 덮었다.
월라드가 보면 단번에 알아챌 수 있도록, 다른 푸른 쥐 요원의 얼굴을 빌렸다.
그렇게 준비를 끝낸 여명이 끼익- 식당으로 들어가자마자, 고기 스튜 비슷한 음식을 먹고 있던 월라드가 반응했다.
“카자? 어떻… 아. 뭐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문자를 보자마자 왔습니다.”
그랬다. 세티가 검은 개의 신과 만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여명은 푸른 쥐에서 보낸 암호 문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점심이 오기도 전에, 이렇듯 접선 장소로 왔다.
설마 월라드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여명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왜 부른 겁니까?”
“…누님의 전언을 전하러 왔다.”
“전언? 장모님이요?”
장모님이란 말이 어색한 걸까, 월라드는 닭살이 돋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선… 전언을 전하기에 앞서, 누님께서 변경백과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부터 말해야겠구나.”
“….”
여명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깜짝 놀라는 반응을 기대하던 월라드는 아쉬운 듯 쩝, 입맛을 다셨다.
“알고 있었냐?”
“예, 저도 이제 나름대로 듣는 귀가 있어서.”
“거, 무슨 귀인지 몰라도 한 짝만 더 있으면 CIA랑 한판 해도 되겠네… 아무튼, 누님의 계산에 의하면, 변경백은 3일 거리에 있다.”
“…3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여명이 올림피아 경기 날을 헤아리는 사이, 월라드가 쩝, 스튜를 퍼먹으며 말했다.
“그것도 최대한 길게 잡은 거고, 초인 특성상 빠르면 당장 내일 도착해도 이상하지 않지.”
“….”
“뭐 어쨌거나… 누님의 전언은 이거다. 변경백이 도착할 때까지 사고 치지 말고 대기하고 있어라.”
여명은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미 사고 친 경우에는?”
“…그런 것까진 안 알려주셨는데. 그 짧은 사이에 또 무슨 사고를 친 거냐?”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총대주교 턱주가리를 날려버렸죠- 라고 말할 수 없었으니까.
월라드는 훌륭한 정보원답게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저 ‘밥은 먹었냐’ 라고 물었을뿐.
“아직 안 먹었습니다.”
“그래? 그럼 먹고 가라. 여긴 성도에서 활동하는 푸른 쥐가 인정한 맛집이니까.”
그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여명은 식당에서 가장 비싼 메뉴를 주문했다. 월라드가 먹고 있는 고기 스튜였다.
아무튼, 여명은 스튜를 기다리는 와중에 물었다.
“변경백님은 그렇다 치고, 빨갱이들은 동향이 어때요?”
“녀석들이 황태자를 납치했다는 것 외에는 모른다. KGB가 움직이면 우리도 움직이기 쉽지 않아서.”
“….”
“아니, 모를 수도 있지. 왜 그런 눈으로 보냐? 공짜로 정보 받아먹으면서 너무한 거 아니야?”
“돈 드려요?”
“…너, 돈 많냐?”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그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천만 달러만… 쓰읍, 아니, 됐다. 조카 사위한테 뭘 더 뜯어내냐.”
그렇게 투덜거린 월라드는 스튜를 퍼먹던 손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그놈들이 왜 황태자를 납치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어림짐작은 가능하다. 황태자를 미끼로 제국과 협상하거나… 성도에서 황태자를 죽여 혁명의 당위성을 부르짖거나. 뭐, 둘 중 하나겠지.”
그럴싸한 말이었지만, 둘 다 진실과는 거리가 먼 말들이기도 했다.
왜냐면, 당사자가 부정했으므로.
“비루한 상상력이로군. 우리가 고작 그딴 이유로 황태자를 납치했을 것 같나?”
“….”
여명과 월라드는 갑자기 끼어든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각자의 방법으로 경악했다.
두 사람 앞에 의자를 끌고 와 앉은 건, 아샤 북부를 유린하고 있는 남자였으니까.
“…동궁정백, 비코프 주가시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