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24)
을 위한 세계는 없다-624화(624/817)
EP.624 Coram Deo (8)
당신이 어떻게 성도에- 라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동궁정백이 자신의 얼굴 절반에 환상을 씌운 까닭이었다.
“피눈물의 환상…? 여, 열쇠도 없이, 어떻게?”
환상을 본 월라드는 경악과 신음이 반반씩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비코프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깟 비전 유물 하나 없다고, 수십 년 전에 만든 무술 하나 익히지 못할 줄 알았나? 동무?”
“….”
짙어지는 비코프의 미소를 따라, 침묵이 몰려왔다.
위압적인 침묵.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여명은 비코프의 피눈물이 완전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정말로 피눈물의 환상을 완벽하게 익혔다면, 지금 자신의 얼굴을 덮고 있는 환상을 눈치챘을 테니까.
여명은 침을 삼키며 비코프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이대로 검을 뽑아 일격에 그의 목을 날릴 수 있느냐, 없느냐.
비코프가 그를 눈치채지 못한 지금이야말로 최고의 기회였지만, 긍정적으로 따져도 확률은 반반이었다.
용사의 무술을 사용할 시간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아무 준비도 없이 단순히 검을 뽑아 휘두르는 것만으로 저만한 강자의 목을 자르는 건 쉽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실패의 리스크가 너무 컸다.
성도 한가운데에서 완성형 주가시빌리 둘이 싸우는 건… 여러모로 미친 짓이었다.
결국, 여명은 살기를 억눌렀다. 그는 비코프가 갑자기 튀어나온 이유부터 유추했다.
‘성도를 대놓고 돌아다니고, 환상까지 보여준 보여준다는 건….’
그의 생각이 길어지려는 찰나, 비코프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푸른 쥐 동무. 보다시피, 나는 피눈물과 주가시빌리의 계승자가 되었네. 상상력이 부족한 자네라도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지?”
한 번 더 침묵.
꿀꺽- 월라드는 힘겹게 침을 삼킨 뒤에야 입을 열었다.
“지금, 그분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거요?”
“자처하다니?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분을 계승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
월라드의 표정이 공포로 물든 바로 그때.
푸른 쥐 요원의 얼굴을 뒤집어쓴 여명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 당신만 있는 건 아니지.”
“흐음?”
“붉은 별.”
비코프의 눈썹이 휘어졌다. 여명은 자신의 얼굴에 금칠하는 오글거림을 참으며 덧붙였다.
“그 또한 피눈물의 환상과 주가시빌리를 계승했다. 거기다 미국, 일본 등, 지구 자본주의자들과 싸웠지. 아샤 북부에서 꾸물거리는 당신과 다르게.”
여명의 말이 아픈 곳을 찌른 걸까? 비코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혁명과 거리가 멀다는 건 그쪽도 알고 있을 텐데?”
“맞아. 우리는 알지, 하지만 모스크바를 비롯한 지구인들도 알까? 혁명과의 거리는 당신이나 우리가 아니라 대중이 판단하는 거야.”
여명이 이죽거리자, 비코프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살기를 억누르는 미소.
직후, 그의 몸속에서 마나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드레이테리얼에서 싸웠을 때보다 섬세하고, 은밀하게.
그 사이에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을 걸까? 여명은 비코프의 마나 응용력이 저번보다 늘었다는 걸 깨달았다.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주가시빌리를 대성한 천재였고, 그동안 제국 북부에서 혁명이란 이름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니까.
재능과 실전.
죽지 않는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할 뿐이라는 니체의 말처럼, 그가 강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명 또한 그렇게 강해지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살기를 삼킨 여명은 비코프를 따라 마나를 끌어 올렸다.
고요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이는 마나, 월라드의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 팽팽하게 당겨지는 긴장감.
이윽고, 비코프가 손을 들어 올린 순간.
턱!
투박한 그릇이 두 사람 사이로 떨어졌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축 늘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고기가 담긴 그릇이었다.
여명은 고개를 들어 그릇을 가져온 늙은이를 올려다봤다.
“…주인장, 저는 1인분 시켰는데요.”
“넉넉히 드릴 테니, 저짝 친구분이랑 같이 먹고 가슈.”
주인장은 비코프를 슬쩍 바라봤다.
“보아 허니 우연히 고향 친구라도 만난 거 같은디, 낮부터 술을 팔 수도 없고, 이거라도 넉넉히 드리는 거여.”
“….”
넉넉한 인심은 눈도 녹인다고 했던가, 인상을 굳히고 있던 비코프는 갑자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주인장, 성도에 오자마자 분에 넘치는 호의를 받는군요.”
“감사는 신께 허고, 냄구는 일없이 먹고 가시유.”
그렇게 주인이 주방으로 돌아갔음에도, 비코프는 다시 살기를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게 고기 한 점을 집어 먹었다.
“소박하면서도 정성이 가득한 농민의 요리라. 훌륭하군.”
“….”
정작 음식을 주문한 여명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비코프는 조금 전보다 한층 여유로운 분위기로 입을 열었다.
“이런 음식 앞에서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자,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지.”
“본론?”
“정보 길드와 할 이야기가 뭐가 있겠나? 정보를 사는 거지.”
여명보다 먼저, 월라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너한테 팔 정보는 없어.”
월라드로서는 꽤나 용기를 낸 말이겠지만, 비코프는 개의치 않았다. 스튜를 한 숟가락 더 떠먹은 그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동무, 충성도 좋지만, 목숨은 소중히 해야 하는 법일세. 일단 무슨 정보를 사고 싶은지 들어보는 게 먼저 아닌가.”
“….”
죽여버리겠다는 소리를 참 부드럽게도 하는군. 여명이 손을 반쯤 ‘쥐는’ 사이, 비코프가 덧붙였다.
“우선, 모리네와 변경백의 위치를 넘기게.”
“….”
큰 누님의 이야기가 나온 순간, 월라드의 손이 옷 사이로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총을 꺼내 쏠 기세였고, 그는 실제로 품속의 권총을 집었다.
그러나 월라드의 총이 옷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여명이 그의 팔꿈치를 눌러 움직임을 막은 뒤, 비코프의 질문에 대답했으니까.
“두 사람은 성도에서 3일 거리에 있다.”
“나는 거리가 아니라 위치를 물었네만?”
“그건 우리도 모르지. 그리고 어차피 답을 듣고 싶어서 한 질문도 아니지 않나?”
“….”
월라드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당황했다. 그에 비해 비코프는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변경백과 사장님의 위치는 그쪽도 대충은 알고 있을 테니까. 변경백에게 걸릴까 무서워 가까이 접근은 못 했겠지만.”
“…흐음.”
“즉, 당신은 우리가 가짜 정보를 넘길지, 아니면 침묵할지 떠본 거야.”
“떠본다… 내가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당장이라도 동무들을 납치하면 그만인데.”
“납치? 성도 한가운데에서?”
여명은 보란 듯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창문 밖으로 순찰 중인 성기사들이 보였다.
“고작 쥐새끼 하나 잡겠다고 많은 걸 준비하셨군. 하지만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렇고… 그쪽이 우릴 발견한 건 우연인 것 같단 말이지.”
“….”
“내 감이 맞는지, 아니면 당신의 협박이 맞는지. 어디 시험해볼까? 잘나신 계승자 동무?”
비코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그는 여명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다행히, 비코프는 여명의 피눈물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만남이 우연이라는 증거였다.
이 자리에 피눈물의 환상을 꿰뚫어 볼 KGB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여명을 그냥 넘길 리 없었으므로.
어쨌거나, 잠시 후.
여명을 노려보던 비코프는 픽 웃으며 물었다.
“동무, 자네 이름이 뭔가?”
“카자 감자토프.”
그건 푸른 쥐 시드니 지부 정보원의 이름이었다.
“카자 감자토프… 기억해두지.”
영문도 모르고 비코프에게 찍힌 카자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여명이 얼굴에 덮고 있는 환상부터가 그의 얼굴이었으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월라드 이마를 짚었다. 비코프는 월라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카자 동무, 자네 말대로 이 만남은 우연일세. 하지만 모든 우연은 필연을 품고 있지.”
“…자본주의의 몰락이 필연인 것처럼?”
여명이 그렇게 맞장구를 치자, 월라드는 이 미친 빨갱이 새끼가 뭐라는 거지- 라는 뜻이 담긴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정작 비코프는 웃었지만.
“우리의 만남이 더 이어질 거라는 확신이 드는군… 카자 동무. 우리 쪽에 붙을 생각 없나? 내가 중히 써주겠네.”
“거절하겠다.”
“그런가? 하긴, 소련의 남아라면 쉽게 충성을 바꾸지 않는 법이지….”
“….”
“그러면, 이렇게 하지. 동무들이 내 질문 하나에 대답해주면, 이대로 떠나주겠네. 자네의 솔직함과 우리의 필연을 걸고.”
“싫다면?”
여명은 한쪽 눈썹을 들며 대답했다.
그러자 비코프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니까, 손가락 끝으로 가게 주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가게 주인장을 죽일 걸세.”
“….”
“그다음은 저기, 밥을 먹고 있는 순례자 둘을 죽이지.”
“미친 새끼가… 그러고도 무사히 성도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월라드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코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담은 못 하겠지. 하지만 그사이 바깥에서 돌아다니는 행인 셋을 죽일 수 있다고 장담하네.”
“….”
“다음에는 도로에 있는 관광객 넷, 사제 다섯, 부녀자 여섯… 여기 푸른 쥐 동무는 당연히 죽을 거고… 흠, 날 막을 수 있을 만한 성기사들이 모이기 전에 적어도 오백 명은 죽일 수 있겠군.”
농담이 아니었다.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 미친놈은 제국 수도에 핵을 날리려 했던… 아니, 진짜로 날렸던 놈이니까.
“나는 진심일세. 그러니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내 요구를 받아들이게.”
여명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해 봐.”
“흐음?”
“죽여보라고.”
“….”
“약속하지. 주인장을 죽이는 순간, 당신은 반드시 오늘 죽을 거야.”
비코프는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시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카자 동무, 자네가 더더욱 마음에 드는걸.”
“….”
“함께 보드카 잔을 나누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술이 없는 게 아쉽군. 뭐,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나눠야겠지. 카자 동무? 술 대신 질문을 나누는 게 어떤가.”
“질문?”
“내 질문에 대답해주면, 나도 동무 질문에 하나 대답해주겠네. 합리적이고, 평등한 정보와 정보의 교환. 어떤가?”
그는 마치 큰 호의라도 베푸는 것처럼 굴었다. 여명은 차갑게 대답했다.
“…질문이 뭔지 들은 뒤에 생각해보겠다.”
“듣고 난 뒤에는 늦을 텐데.”
“그건 들어봐야 아는 거고.”
여명의 말을 허세로 받아들인 걸까? 비코프는 한 번 더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다 사라지기 전에, 그는 아주 사소한 걸 묻는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성도에 있는 엘프와… 독화란 이름을 가진 남자의 위치 정보. 내가 요구하는 건 이 두 개일세.”
뭐? 여명은 어깨가 움찔거리는 걸 참았다.
“…엘프?”
“데메론드의 딸이 지구 아카데미에 입학한 건 대단한 비밀도 아니지. 당연히 올림피아에 참가했을 것 같지 않나?”
“…?”
대화의 의도 자체를 이해하지 못 하는 월라드와 달리, 여명은 ‘미리디스’가 아닌 ‘데메론드의 딸’이란 단어에서 확신했다.
‘…다섯 꼭짓점을 찾고 있어.’
소련의 기술을 극한까지 익힌 빨갱이 다섯이 모이면 스탈린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는 예언의 주인들.
미리디스는 아마 데메론드를 끌어낼 생각으로 찾는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한 가지 궁금증을 품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질문은 하나만 하기로 했던 거 같은데.”
“둘 중 하나만 대답하게. 어차피 둘 다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
“동무, 대답하겠나?”
잠시 뜸을 들인 여명은 조금 더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 월라드를 바라봤다.
그는 이미 이 상황이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걸 알고 있는 듯, 여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은 비코프를 향해 말했다.
“대답하지. 단, 그쪽이 우리 질문에 먼저 대답하겠다는 전제하에.”
“현명하군. 동무. 모든 소련인과 마찬가지로.”
소련인은 염병. 여명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질문을 꺼냈다.
이 엿 같은 대화를 이어온 진짜 이유를.
“납치한 황태자로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
이 질문을 예상했던 걸까? 비코프는 곧바로 대답했다.
“혁명.”
“…그건 지금도 하고 있지 않나?”
“혁명은 언제나 현재 그 이상을 노려야 하는 법이지.”
“그런 장난 같은 대답이 내 질문의 답인가?”
“장난이라니, 10월 혁명에서 이어진 혁명 정신이 장난으로 보이나?”
“….”
“혁명을 원하는 자는 많지만, 이해하는 자는 적다… 서기장께서 남긴 말이 또 이렇게 증명되는군.”
뻔뻔하게 지껄인 비코프는 그릇 속 국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말했다.
“자, 이제 내 질문의 답을 들을 시간이군.”
“이 정신 나간 새ㄲ…!”
“월라드, 잠깐.”
여명은 항의하는 월라드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
“엘프는 모르지만, 독화의 위치라면 알고 있다.”
“오, 그게 어딘가?”
“아샤.”
“그런 장난 같은 대답이 내 질문의 답인가?”
조금 전 여명이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 한 비코프의 미소가 진해졌다.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이었다.
“동무, 아주 재미있는 장난이었네.”
“그쪽 장난은 재미없었고.”
여명이 한 번 더 쏘아주고 나서야, 비코프가 대답했다.
“용사의 피는 쓸모가 많지. 이게 내 대답일세.”
“….”
뭐? 놀란 여명은 비코프를 살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 스튜를 떠먹는 손, 그리고 안정된 심장 소리.
모든 것들이 그의 말이 진실이라 말하고 있었다.
협박도, 과장도, 은유도 없는 담백한 진실.
잠시 뜸을 들인 여명은 똑같이 진실을 꺼냈다.
“나도 독화의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흐음?”
“하지만 독화의 위치를 아는 사람을 알고 있다. 현재 올림피아 선수촌에 묵고 있는… 파순. 그녀는 독화와 자주 연락하는 사이다.”
거기까지 말한 여명은 비코프의 반응을 살폈다. 그다지 만족스러운 얼굴은 아니었으나, 화를 내지도 않았다.
“KGB와의 내전이 동무들에게 꽤 많은 타격을 줬나 보군?”
“아니라고 하진 않겠다.”
마지막까지 날이 선 말투였으나, 비코프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남은 고기 스튜를 싸그리 먹어치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장이 나눠 먹으라 했으니, 한 조각은 남겨뒀네.”
“….”
정말로 고기 한 조각만 남은 스튜 그릇을 뒤로한 채, 비코프는 자리를 떠났다.
“쓰으읍-”
긴장이 풀린 월라드가 심호흡하건 말건, 여명은 심각한 얼굴로 비코프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조금 전 비코프가 남긴 말에서 무시무시한 진실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용사의 피…? 이 새끼들, 현재 황족들이 뻐꾸기 새끼라는 걸 모르고 있나?’
스탈린이 직접 황제를 갈아 치웠… 아니, 생각해보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건 아샤를 뒤엎을 수 있는 극비 중 극비 정보.
제국 침공은 스탈린이 직접 진두지휘한 일이니, 비코프나 KGB들이 모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무엇보다, 스탈린이 갈아치우기 전이나, 갈아치운 후나 뻐꾸기 혈통인 건 똑같았고.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빨갱이들이 황가가 용사의 후손이 아니라는 걸 알아낸다면?
총대주교가 필사적으로 숨기려던 진실이, 다른 사람도 아닌 공산주의자들의 손에서 밝혀지게 된다면?
[혼란은 혁명의 씨앗이라네.]드레이테리얼에서 비코프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는 건 단순히 우연일까?
제국이 흔들리는 혼란 속에서 새로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는 미래는 망상에 불과할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식당을 나선 비코프는 홀로 성도를 걸었다.
역사를 품은 건물들 아래로 가득한 경건한 성기사들과 사제들, 즐거움과 기대로 가득한 관광객과 순례자들….
그의 걸음을 둘러싼 도시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드레이테리얼에서 유행하던 아편의 포장지처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니…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없애야 하는 건 쇠사슬만이 아니다.
환상 속 양귀비꽃 또한 인민의 적.
비록 서기장 각하조차 모든 꽃을 쓸어버리진 못 했지만, 언젠가 공산주의가 완성되면 모든 인민은 사슬과 꽃 양쪽 모두에서 자유롭게…
그때, 골목에서 낯선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끊었다.
“페르비 세크레타리(Первый секретарь).”
공산당 제1서기란 뜻의 러시아어. 비코프가 고개를 돌리자, 변장한 KGB가 보였다.
KGB는 골목 너머에서 보이는 성기사를 힐끗거리며 물었다.
“어떠십니까? 효과를 보셨습니까?”
“그래, 재밌는 일을 겪게 되더군.”
“재밌는 일이시라면…?”
“4대 상무회 주석님을 뵈었네.”
“….”
“브레즈네프 말입니까?”
비코프는 뒷짐을 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엘릭서 덕분인가, 아직도 정정하시더군. 직접 음식까지 하고 계시고.”
“그, 그렇다면 저희가 모시는 게….”
“아니. 이런 땅에서 홀로 은둔하고 계신 분을 끌어내는 건 예의가 아니지. 이미 백 세가 넘으신 분 아닌가.”
“….”
“그냥, 사람 한 명 붙여놓게. 새로운 연방이 세워질 때 자리를 빛내주실 수 있도록.”
KGB 요원은 긍정의 의미로 허리를 숙였다. 비코프는 그런 요원의 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푸른 쥐가 그분의 식당에 있더군. 아주 기가 막힌 우연이었어. 이것도 주사위의 힘인가?”
“…모르겠습니다. 그분께서는 필요한 걸 얻을 수 있다고만 하셨습니다.”
“필요한 거라… 한 번 더 사용할 수 있겠나?”
“주사위는 단 한 번만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런가? 아쉬운 일이군.”
비코프는 시선을 돌려 골목 저편, 올림피아 숙소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선수단 숙소에 사람을 보내 파순이란 자와 접촉해 독화의 위치를 알아내게. 숙소 주변에는 성기사단 단장이 있으니, 마나가 없는 자로 보내고.”
“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혹시, 기존 계획에서 변경할 부분은….”
“없네. 강림 계획은 그대로 진행하게.”
명령을 받은 요원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비코프는 하늘을 바라봤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 위로, 북부의 바람이 불어왔다.
불씨를 품은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