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27)
을 위한 세계는 없다-627화(627/817)
EP.627 Coram Deo (11)
살로메가 콧김을 씩씩대고 여명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일 무렵.
도망간 김에 캐서린에게 먹일 약을 챙겨온 라쉬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너희 둘은 또 왜 싸워?”
“별 건 아니고, 살로메 속에 있는… 영약 비슷한 게 소화되면서 정신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아서요.”
여명이 에둘러 표현하자, 구더기 공주가 눈을 빛냈다.
“아, 영약 이야기였어? 흔하진 않지만, 아예 없는 경우는 아니야. 살아있는 영약을 먹으면 종종 저런 경우가 있거든.”
“…살아있는 영약?”
“문자 그대로 아직 살아있는 생명체나, 세계수 결정과 용의 심장처럼 의지가 남아 있는 것들을 통칭하는… 아, 그러고 보니 넌 두 개 다 처먹었네?”
“….”
“아무튼, 그런 영약들을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어. 그 정도로 많이 먹는 경우가 흔하진 않지만… 암시장에서는 종종 볼 수 있어서 알고 있지.”
암시장 연금술사다운 말이었다. 살로메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치료법도 아시나요?”
“치료법… 까진 모르겠고, 보통은 먹은 걸 다시 배출해버리지. 아깝게 시리.”
“…배출 못 하는 상황이라면요?”
그러자 구더기 공주가 미간을 모았다.
“그러면 소화제를 만들어서 억지로라도 소화해야지… 대체 뭘 먹었는데 그래?”
대답은 살로메가 아닌 여명의 입에서 나왔다.
“히틀러요.”
“…?”
“살로메는 마왕이 된 히틀러를 뱃속에 봉인했어요.”
라쉬크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침착한 얼굴로 되물었다.
“시발, 뭘 봉인했다고?”
“히틀러요.”
“내가 아는 그 히틀러?”
“마왕이 됐으니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일단 동일인은 맞아요.”
“….”
구더기 공주는 현실을 이해하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멍한 눈으로 물었다.
“이것도 니 여자들은 다 알고 있던 거지? 나만 빼고.”
“라쉬크만 뺀 건 아니에요.”
“누가 또 모르는데?”
“어… 딜라?”
“설마, 용용이도 알아?”
“알긴 알죠. 이걸 설명한 장소가 녀석의 둥지였으니.”
“이런 시발, 내가 그 식충이만도 못해? 왜 안 알려줬어?!”
“그야… 모르는 게 약인 것도 있잖아요.”
“아, 그건 그렇지.”
언성을 높이려던 라쉬크는 여명의 말에 납득해버렸다.
세상에는, 특히 용사 주변에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일들도 많았다….
…이미 다 알아버렸지만.
라쉬크는 푸우-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린 뒤, 캐서린에게 줄 물약 뚜껑을 따며 말했다.
“음… 일단, 이런 경우에 쓰는 소화제는 상극의 기운을 때려 박아서 녹이는 게 정석이야. 물론 이것도 소화한 영약을 온전히 몸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할 수 있어요.”
살로메는 즉시 대답했다. 그녀가 히틀러를 위해 만들어진 ‘그릇’인 만큼, 역으로 집어삼킬 자신이 있었다.
“그래? 그러면 바로 만들어줄게. 어디 보자… 마왕의 기운과 상극인 건 역시 신성이니까… 성녀의 피 좀 얻어올래? 지금 구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신성한 건 그거라서.”
“…성물을 갈아 먹는 건?”
“신들이 잘도 그걸 허락해주겠다… 그리고 그런 거 갈아먹으면 중금속 중독 걸려.”
묘하게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납득한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빈 병을 꺼낸 뒤,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 그 피를 병에 담았다.
라쉬크가 그 꼴을 보며 물었다.
“…뭐하냐?”
“신성한 피가 필요하다면서요. 제 피로 한 번 써보세요.”
“…용사 혈통이라?”
“그런 건 아니고, 제가 신의 화신이거든요.”
“…?”
“아, 이것도 라쉬크한테는 말 안 했죠?”
“….”
구더기 공주는 이마를 짚었다. 용사, 전대 성녀의 아들, 이제는 신의 화신이냐?
신을 직접 본 여파일까? 그녀는 두려움보다 욕심을 느꼈다.
“그, 내가 소화제 만들어 줄 테니까. 네 피 한 방울… 아니, 일 리터만 뽑아서 나 주면 안 되냐?”
귀한 재료만 보면 욕심부터 내는 연금술사 특유의 병이 도진 모습.
여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주신 게 얼만데, 원하시면 당연히 드려야죠. 그리고 뭐, 처음 만났을 때 요구한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고.”
라쉬크가 움찔, 몸을 떠는 순간 살로메가 궁금한 듯 끼어들었다.
“처음에 뭘 요구했는데?”
“정액.”
“….”
자신을 보는 살로메의 시선이 차가워지는 걸 느낀 구더기 공주는 빽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씨… 그런 의도로 말한 거 아니잖아!”
“저도 그런 의도로 말한 거 아닌데요.”
“….”
이 나쁜 새끼. 더 말해봤자 자신만 추해질 뿐이라는 걸 깨달은 라쉬크는 대답 대신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소로 가볍게 반격한 여명은 자신의 피를 채운 병을 건넸다.
구더기 공주는 병에 담긴 피를 확인하다가, 대뜸 분홍색 가루를 꺼내 병에 부었다.
애써 뽑은 피에 무슨 짓을?
여명이 묻기도 전에, 가루를 흔들어 섞은 구더기 공주는 살로메에게 병을 내밀었다.
“어? 벌써 끝난 건가요?”
병을 받아든 살로메의 질문. 라쉬크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만들었겠어? 일단 효과가 있나 먹어보라고 주는 거야.”
“그럼 방금 넣은 가루는 뭔데요?”
“딸기향. 그냥 먹으면 비리잖아.”
“….”
살로메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병을 받았다.
그리고 구더기 공주가 캐서린에게 약을 먹이는 사이, 그녀 또한 여명의 피를 한 모금 마셨다.
흡혈귀는 아니지만, 의외로 먹을 만했다. 딸기향 때문인지 생각보다 비리지도 않고, 살짝 단맛이 나는 게, 마치 잘 만든 딸기 음료 같았…
그 순간,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것이 아닌, 히틀러의 비명이.
“크아악!! 역겨운 빨갱이의 피가!!”
살로메는 당황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여명이 픽 웃으며 말했다.
“효과가 있네.”
살로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화되는 양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내면의 히틀러가 이렇게까지 비명을 지를 정도 아닌가.
소화제로 만들면 필시 대단한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살로메가 병뚜껑을 닫는 사이, 라쉬크의 약을 먹은 캐서린이 깨어났다.
그리고 막 눈을 뜬 그녀가 들은 첫 말은….
“Tod dem Marxismus!!!”
살로메의 입으로 마지막 발악을 토해내는 히틀러의 저주였다.
성도 구석의 한 음식점.
관광객들도 잘 찾지 않는 구석진 골목에 자리한 가게는 소박했다.
메뉴는 고기 스튜와 감자찜 같은 소박한 메뉴가 전부였고, 술조차 팔지 않았다.
주변을 순찰하는 성기사들이 말하기를, 단골들이 없었다면 이미 예전에 망하고도 남았을 가게.
다르게 말하자면, 가게를 운영할 정도로 단골들이 찾아준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가게는 평소와 달리 텅 비어 있었다.
아마 단골들이 전부 올림피아 경기를 보러 간 탓이리라.
올림피아 특수에도 파리만 날리는 상황이었지만, 주인장은 실망하지 않았다.
오늘 그를 찾아올 특별한 손님이 있었으니까.
곰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끼익-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가게를 채웠다.
행주로 그릇을 닦고 있던 주인장이 고개를 돌리자, 묘령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염병할 가시내. 오랜만이여.”
“예, 오랜만이네요. 어르신.”
여인은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았다. 따로 식사 주문을 하지 않았음에도, 주인장은 그릇에 고기 스튜를 듬뿍 퍼서 여인에게 다가갔다.
“다 늙어서 이게 뭔 고생이여. 이게 다 입구녕에 밥 넣자고 하는 일인디, 일단 한 거럭 먹고혀.”
툭. 그릇을 받아든 여인은 조심스레 스튜를 떠먹었다.
“맛있네요.”
“짜굽진 않고?”
“싱겁게 먹는 것보단 낫죠.”
그렇게 말한 여인은 식사를 이어나갔다. 한 수저, 한 수저… 빠르게 그릇을 비우는 여인을 보던 주인장이 물었다.
“언태 굶으면서 온 거여?”
“예, 밥도 안 먹고 달려왔어요.”
“일행은?”
“그분은 제가 없어도 잘 오시는 분이라서요. 먼저 왔죠.”
또다시 이어지는 식사. 주인장은 그녀와 상관없이 천장을 보며 말했다.
“서기장께서는.”
구수한 사투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로 묵직한 정치인의 목소리가 들어찼다.
“히틀러가 차원문 너머로 도망친 그 날. 그날을 기점으로, 어딘가 변하셨다. 그전에도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그 후로는 반신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지.”
“….”
“변한 그분이 이끄는 조국은 무적이었어. 황금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였지. 인민의 삶은 나아졌고, 서방은 조국의 위엄에 벌벌 떨었다네. 권력 싸움에서 패배했단 이유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고문당하는 일도 없었고.”
여인은 손을 멈췄다. 주인장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성공에 취한 우리는 그분의 모든 걸 정당화했다. 대숙청의 잔혹함, 전쟁 초기의 실책, 골로도모르의 실패… 모든 게 서기장 각하의 사소한 실수로 여겨지거나, 아예 잘못이 아니란 식으로 넘어갔지. 물론, 자네들의 존재 또한 그랬어.”
“….”
“사과하지는 않겠네. 사과로 무언가 바꾸기엔 너무나 멀리 왔으니.”
뻔뻔하다면 뻔뻔하고, 담담하면 담담한 태도였다. 하지만 여인은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는지, 덤덤히 말했다.
“당신께서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저희가 자라날 때는 이미 조국에 없으셨잖아요.”
“…내가 있었다고 해도, 너희를 똑같이 대했을 거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
“그러니 말해주세요. 브리즈네프 전 상무회 주석님. 왜 조국을 떠나신 분이 여기 계시는 건지.”
주인장, 브리즈네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듯 식탁 위의 냅킨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시절, 그러니까 나를 비롯해 엘릭서를 하사받은 자들조차 젊음을 잃어가던 시절에… 그분께서 나를 불렀다.”
“….”
“그분은 나에게 두 가지 명령을 내려셨지. 하나는 작은 유리병을 퀴니 코완에게 전달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이 사라졌을 때 소비에트 궁전의 꼭대기 층에서 뭔가를 챙겨서 성도로 갈 것.”
“…서기장께서 스스로 사라질 걸 알고 계셨다고요?”
“그분처럼 특별한 사람은, 특별한 통찰력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존경심이 묻어나왔다. 여인은 손을 멈추고 브리즈네프를 똑바로 바라봤다.
“소비에트 궁전에서 챙긴 게 뭐죠?”
“미안하지만, 말해줄 수 없다.”
“….”
“그분께서 내게 이렇게 명령하셨거든. 자격이 있는 자가 오면, 내어주라고.”
“전 자격이 없다… 그럼, 킴 필비나 비코프는 어떻죠?”
“아마, 둘 다 아닐 거다. 두 사람에게 자격이 있었다면, 그분께서 직접 주셨겠지.”
원하던 대답이었을까? 여인의 몸에서 느껴지던 긴장이 한껏 누그러들었다.
고기 냄새로 가득한 침묵.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어느새 스튜를 다 비운 여인은 금화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잘 먹었습니다.”
“벌써 가보려고?”
“예, 오늘 딸의 경기가 있어서요.”
“딸? 아아, 그려. 어여 가봐. 나도 딸이 있어서 잘 알지. 그 나이가 딱 부모 골치를 썩이는 나이여.”
작게 미소 지은 여인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그대로 가게를 나섰다. 들어올 때만큼이나, 떠나는 것도 무덤덤한 여인이었다.
잠시 그녀가 사라진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인장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식탁 정리를 끝낼 무렵에.
끼익-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리네?”
한데, 문을 연 건 조금 전에 나간 여인이 아니었다.
이마가 훤한 탈모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쓴 남자.
세월을 뛰어넘은 외모를 가진 그는 주인장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모리네가 왔다 갔나?”
“….”
“아쉽군.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그년도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역시, 6을 못 뽑은 탓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남자는 천천히 주인장을 향해 다가왔다. 주인장은 굳은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돌아가라. 여기에 널 위한 건 없다.”
“이런 아편 냄새 나는 도시에 처박혀 있다 보니 뇌도 같이 퇴화한 건가? 아직도 그자에게 충성하다니. 자네는 버려진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네놈에게 줄건 아무것도 없어.”
주인장의 목소리를 따라, 남자의 얼굴에 고인 미소가 더 진해졌다.
“뭐, 그렇다면야. 내가 알아서 받아 가지.”
남자는 손가락을 들어 주인장을 겨눴다. 옛 소련 시절, 반역자란 자들을 처형하던 그때처럼.
그리고 다음 순간, 가게 창문이 시뻘겋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