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29)
을 위한 세계는 없다-629화(629/817)
EP.629 Coram Deo (13)
활활 타긴 무슨.
여명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참았다. 장모님 앞에서 차마 딸을 때릴 수는 없었으니까.
물론 그건 그거고, 따질 건 따져야 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성녀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오늘 말하려고 했어.”
“….”
여명이 정색하자, 성녀가 당황하며 덧붙였다.
“어, 어차피 한 번 본 이상 미래는 바뀔 거고, 또….”
“또?”
“성도에 불 질러 보고 싶었… 농담이야. 농담.”
니가 그런 말 하면 농담처럼 안 들려… 여명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그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녀는 리볼버를 내려놓고 여명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성녀인데, 당연히 성도가 불타는 건 막을 생각이야. 한국이나 빨갱이들이 연관된 거라면 더더욱.”
“….”
“나 믿지?”
나름대로 분위기를 잡는 말이라고 꺼낸 것 같은데,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여명은 물론이고, 세티와 막내마저 묘한 눈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
뭐지? 이상함을 느낀 성녀가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녀의 어머니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것도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면서.
“성녀님… 아니, 우리 딸. 어느새 다 컸구나.”
“으, 응…?”
“이 엄마는 네가 평생 친구 하나 못 사귀면 어쩌나 걱정….”
“엄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성녀는 양팔을 휘두르며 모리네의 말을 끊었다.
이 상황이 어지간히도 부끄러운 건지, 안대 아래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여명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 번 더 놀릴까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은 나중으로 미뤄둘 때였다. 지금은 훨씬 진지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였다.
크흠, 여명이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하자, 성녀가 이때다 싶어 분위기를 돌렸다.
“이, 이런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 하자! 아, 그래! 예지 한 번 더 해볼까?”
“…어차피 같은 순간은 두 번 못 보잖아.”
“어… 그건 그렇지만, 가까운 미래를 보면 되잖아?”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오늘 경기도 있는데, 굳이 예지로 체력을 뺄 필요 없어.”
“체력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오늘 상대는 나보다 약하니까!”
이게 진짜. 여명은 손가락으로 성녀의 이마를 꾹꾹 눌렀다.
“…가벼운 마음으로 싸우지 마. 상대에게는 일생일대의 경기일지도 모르니까. 승패에 상관 없이, 최선을 다해줘. 알겠지?”
“….”
성녀는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은 미소와 함께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예지는 쓸 필요 없어.”
“어? 왜?”
“여기가 한국도 아니고… 눈치 보면서 녀석들이 먼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잖아?”
그러자 성녀와 막내가 동시에 머리 위로 느낌표를 띄웠다.
“먼저 움직이게?”
“드디어 장관 죽여요?”
여명은 둘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모리네를 똑바로 바라봤다.
“모리네, 푸른 쥐라면 한국 정부가 숨어있는 위치를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모리네는 즉시 대답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대략적인 위치라면 알고 있단다. 그거라도 알려주면 되겠니?”
“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값은 치르겠습니다.”
여명의 말에 모리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사이에 값을 치를 필요는 없단다.”
“그럼 성물지기의 위치라도….”
“괜찮아. 그이가 뭘 하고 있을 진 뻔하거든. 아마 독방에 갇혀서 속죄하고 있겠지.”
“….”
역시 세기의 로맨스를 찍은 부부답다고 할까. 이걸 단번에 맞추네.
그에 비해, 성녀와 여명은 아직 그 정도로 통하진 않았다.
“언제 갈 거야? 내일 경기 끝나기 전에? 아니면 끝난 뒤에?”
“오늘.”
“으, 응?”
“지금 당장.”
말을 끝낸 여명은 주먹을 쥐었다. 이제, 둥지 바깥으로 나온 짐승들을 사냥할 때였다.
성도 바깥, 성검 산맥 너머 바로 앞에는 도시가 있다.
성도로 향하는 물자를 독점하고, 순례자들이 뿌리는 돈을 빨아 번성한 도시.
이 도시에는 이름이 없었다.
도시공학적으로 성도의 위성 도시에 불과해서?
아니, 이 도시에 이름이 없는 건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였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약속한 초대 용사의 약속을 따라, 다섯 교단은 성검 산맥 바깥에 있는 모든 도시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했다.
자연스레 도시는 제국의 땅이 되었지만, 도시에는 황제가 임명한 귀족이나, 궁중백, 심지어 행정관조차 없었다.
제국의 어느 황제도, -스탈린에게 엘릭서를 바친 현 황제조차- 성도 코앞에 있는 도시를 건드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지나 지구와 연결되고, 철도가 이어지고, 공항이 들어왔음에도 이런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기조를 파괴하려던 자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특히 초대 용사와 다섯 교단에 별 관심이 없던 지구인들… 그들은 도시에 쌓인 어마어마한 이권을 노렸다.
다국적 폭력 조직과 도망쳐 온 아세안과 남미의 권력자들, 심지어 미국의 햄버거 기업까지.
당연하게도, 성공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기세 좋게 도시의 이권을 차지하려던 자들은 신앙의 앞에서 무릎 꿇었다.
권력자들의 수작질? 조직 폭력배의 협박과 폭력?
이곳은 지구가 아닌 아샤였다.
백색과 흑색의 신도들에게 그들은 순교의 기회요, 적색 신의 신도들에겐 투쟁을 증명할 기회에 불과했다.
하루가 멀다고 결투를 신청하는 적색 신도들에게 시달린 조폭들은 와해 되었고.
희대의 학살자 폴 포트는 이름 모를 흑색 신도에게 머리가 깨져 죽었으며.
전범 재판을 피해 도망친 호르헤 비델라는 아르헨티나 출신 신도에게 목이 잘렸다.
그나마 햄버거 기업이 선전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신앙은 자본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뭐, 그래도 햄버거는 잘 파는 듯했다.
지구식 햄버거 가게에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몰려 있었으니까.
올림피아를 보러 온 관광객, 햄버거란 걸 먹어보기 위해 온 아샤인 등등.
가게 구석에 앉아있던 여명은, 콜라를 홀짝이며 그들을 바라봤다.
한 사람 한 사람, 세심하게.
그리고 사람을 얼마나 관찰했을까? 어느 순간, 그의 감각에 ‘사람이 아닌’ 것이 걸렸다.
“양치기다.”
여명이 입을 열자마자, 햄버거를 우걱거리던 세티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 아, 저기 있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건 햄버거 가게 바로 앞 신호등이었다.
그곳에는 환상으로 머리를 가린 양치기들이 탄 차가 정지 신호를 받고 멈춰 있었다.
대놓고 돌아다닐 줄이야. 잠시 차량을 바라보던 세티는 남은 햄버거를 단번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진짜 햄버거 가게에서 기다리니까 나왔네. 어떻게 알았어?”
“이 프렌차이즈는 도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가게를 열거든. 이 주변에 묵고 있다면 당연히 여기를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어.”
“…그것도 다큐멘터리에서 본 거지?”
“응.”
대체 그에게 다큐멘터리란 뭘까. 세티가 고민하는 사이, 여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그의 얼굴은 조금 전 테이블에 앉아 있던 때와 전혀 다른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가자.”
“응.”
그렇게 두 사람이 가게를 벗어날 때쯤, 양치기들의 차량이 출발했다. 세티는 급하게 따라가지 않고 느긋하게 무전기를 들었다.
“목표 포착, 햄버거 가게 앞 사거리에서 오오시디니 3번가로 이동 중.”
곧, 무전기 너머에서 익숙한 엘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인. 추적할게.]여명이 고개를 들자, 가까운 상가 건물 지붕에서 무언가 흐릿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투명 망토를 쓴 미리디스가 바람을 일으켜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는 모습.
그녀는 엘프 특유의 날렵함을 자랑하듯이, 차량을 따라 위해 껑충껑충 옥상 사이를 뛰어넘었다.
여명과 세티는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미리디스에게서 무전이 왔다.
[목적지 확인, 메켄티 빌딩… 이란 곳으로 진입했어. 따라 진입할까?]“혹시 모르니까 너무 가까이 접근하진 말고, 적절한 위치에서 대기해 줘.”
[응, 그러면 어느 방인지 확인한 뒤에 연락해. 저격 포인트 잡을 테니까.]무전이 오가는 사이, 두 사람은 메켄티 빌딩에 도착했다.
성녀가 태어난 해에 건축된 빌딩은, 완공된 지 십 년이 넘었음에도 지구 건축의 위엄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아샤의 반발을 우려한 건가? 빌딩 벽면에 다섯 신의 상징이 그려져 있었는데, 자본과 신성이 어우러진 그 모습이 참으로 묘했다.
뭐, 저 모습도 오늘까지겠지만.
“…이 빌딩, 보험은 들었겠지?”
“아마도? 엘프 테러 약관 정도는 기본이니까.”
실없는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투명 망토를 뒤집어쓴 뒤,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멍하니 앉아있는 1층 안내 직원을 지나, 비상계단으로 향하길 잠시.
1층, 10층, 20층… 39층.
거의 꼭대기 층에 올라가고 나서야, 두 사람은 익숙한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나름대로 마나를 숨긴 모습이었으나, 환골탈태로 마나 감응력이 극도로 높아진 여명의 감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여명은 녀석들의 숫자를 헤아리며 무전기를 켰다.
“느껴지는 건 일곱 명… 예상대로 층을 통째로 차지한 거 같아.”
[그래요? 그걸 감안해도 일곱은 너무 적은데… 혹시 기척 차단 마법진을 깔아놓은 걸지도 모르니까. 첫발은 큰 걸로 가죠?]“…큰 거?”
설마 또 이승만 동상인가? 여명이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무전을 기다렸으나, 돌아온 대답은 그보단 훨씬 온건했다.
[복도랑 문 사이에 폭탄을 쫘악 깔고, 도폭선으로 연결한 다음에… 쾅!]“….”
아니, 딱히 온건한 건 아닌가. 여명이 인벤토리 속 남은 폭약을 계산하느라 입을 다문 사이, 그 침묵을 오해한 미리디스가 덧붙였다.
[…저 테러리스트 아니에요. 아시죠?]“어, 응….”
[대답이 시원찮네요?]“공주님은 절대 테러리스트가 아니십니다…. 근데 난 도폭선 다룰 줄 모르는데.”
“…군필도 도폭선 쓰는 법은 모를 거 같은데?”
[엘프는 배워요.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다 쓸 수 있는 거라구요.]“….”
맑은 영혼이 아니라 맑스 영혼이겠지. 여명이 뒷말을 속으로 삼키는 사이, 미리디스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냥 화산쇄설로 터트리죠. 그리고 폭탄 설치할 장소는 제가 알려드릴게요. 혹시라도 기둥 건드리면 민간인 피해가 생길지 모르니까. 아시겠죠?]여명은 그러겠노라고 대답한 후, 인벤토리에서 폭탄을 꺼내 세티와 나눴다.
혹시라도 두 사람이 흘린 폭탄을 감지할까, 염동력으로 CCTV를 하나하나 제거하고, 미리디스의 조언에 따라 폭탄을 설치하길 한참.
녀석들이 있는 빌딩 오른쪽 벽면을 폭탄으로 채운 여명은 검을 뽑았다. 화르륵-! 그의 검을 따라 화산쇄설의 불씨와 주와이외즈의 불씨가 떠올랐다.
“준비 완료.”
세티 또한 빙글, 드워프에게 받은 대형 망치를 꺼내 들었다.
“여명은 정면으로 진입해. 나는 혹시라도 도망가는 놈이 없게 측면으로 진입할 테니까.”
“알겠어. 그러면 일단 폭발에 휘말리지 않게 조금 떨어져 있어.”
그렇게 세 사람의 포지션이 정해지고, 준비가 끝난 직후.
여명은 검을 내려쳤다.
콰아아앙 – !!!
빌딩은 용처럼 불길을 뱉어냈다.
깨진 유리창과 파편들이 비명 같은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쏟아지고, 대기가 흔들렸다.
폭발의 충격이 투명 망토를 흔드는 가운데, 미리디스는 빌딩 아래를 확인했다.
성녀가 올림피아 경기를 치르는 날이라서 그런지, 다행히 파편을 맞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운이 계속 좋을 수는 없었다. 싸움이 길어지면 필연적으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리라.
그리고 무차별적인 피해는 테러의 대의를 오염시키는 법.
그녀가 여명을 따라온 이유에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미리디스는 길게 심호흡한 뒤, 완드를 꽉 붙잡았다.
자, 이제 시작-
“축제 기간에 테러라니. 꼭 이래야 했나?”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놀란 쇠미리는 바람 마법을 일으키며 휙!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그대로 거리를 벌려 옥상 난간에 착지한 그녀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말을 건 사람이 너무나 익숙했으므로.
세월을 이겨낸 주름진 얼굴과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남루한 행색과 어울리지 않는 깊고 진한 황금색 눈동자.
전대 용사, 10강 중 으뜸이며, 자신이 섬기던 황제와 제국에게 배신당한 자.
변경백.
그는 뒷짐을 진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으… 음….”
“데메론드가 시킨 일인가? 나이가 들어서 유해진 줄 알았는데, 역시 엘프는 세월을 피해 가나 보군.”
“어… 그게….”
“변명은 됐네. 내 얼굴을 봐서라도 여기서 멈춰주게.”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양, 반대편 빌딩에서 콰아아앙-!!! 다시 한번 폭발음이 들렸다.
유독 민감한 엘프의 청각을 후려친 폭발음 덕분에 미리디스… 아니, 쇠미리는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저기, 그게… 이건 아버지가 일으킨 테러가 아닙니다.”
“…아버지?”
“예, 그… 데메론드 입 맑스가 제 아버지 되십니다.”
덜덜 떨면서 꺼낸 말 속에는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엘프 공주. 변경백의 눈썹이 살짝 휘어졌다.
하지만 진짜 충격적인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적절한 순간은 아니지만,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제 이름은 미리디스 입 맑스. 저는….”
“….”
“…아드님의 연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