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32)
을 위한 세계는 없다-632화(632/817)
EP.632 Coram Deo (16)
“어디, 이번 대 용사파티의 실력을 보여주겠나?”
변경백의 제안은 누가 봐도 대련 신청이었다.
지구와 아샤를 통틀어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자의 대련 신청에 일행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 여기서요?”
특히나 살로메가 크게 놀라는 가운데, 여명은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통째로 임대한 여관 최상층은 그럭저럭 넓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숙소로서 넓다는 뜻이었다.
탁자, 의자, 침대, 그리고 구더기 공주가 내던져 놓은 짐 덩어리들까지.
어떻게 봐도 칼부림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었다.
그렇다고 나가서 싸우자니, 대로변에 모인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는 상황.
이대로 장소를 옮기시려는 건가? 여명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변경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만 괜찮다면 여기서 하도록 하지. 바깥은 보는 눈이 많으니.”
“그렇지만 여기는 대련을 하기엔 좁은….”
그 순간, 변경백의 몸에서 화악-!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주가시빌리의 유형화된 살기와 비슷하지만, 순수한 마나로만 이루어진 기세.
그 기세는 그대로 일행을 지나쳐 주변의 가구들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렇게 밀려난 가구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 옮기는 것처럼 정갈하게 벽에 안착했다.
뭐지? 마법? 아니, 주변의 마나가 움직이지 않은 걸 보면 무술인데….
여명이 속으로 그의 무술을 파악하는 사이, 변경백은 가구들이 밀려난 널찍한 공간에 섰다.
여전히 정식 대련장이라고 하기엔 좁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나란히 검을 겨누기엔 충분한 공간이었다.
변경백 또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한 손으로 검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무슨 수를 써도 좋으니, 날 한 걸음이라도 물러나게 해보게.”
“….”
“누구부터 나서겠나?”
올림피아 16강, 혹은 8강에 있는 선수들이 들을 말은 아니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변경백을 보고 오만하다 하지 못했다.
그의 기세가 너무나 강대해서? 아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흡사 텅 빈 허공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감각.
이건 뭐지? 격의 차이인가? 아니면 변경백의 진의가 만들어낸 결과?
답을 찾지 못한 여명은 꿀꺽 침을 삼킨 뒤,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나서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일행들이 앞으로 나섰다. 세티, 성녀, 쇠미리… 눈치를 보던 살로메까지.
“제가 먼저 도전하겠습니다.”
“아뇨, 제가 먼저 할게요!”
“제가 먼저….”
그녀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게 의외였는지, 변경백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한 명씩 오게. 순서는… 며느리 순서의 반대로 하지.”
며느리란 단어를 입에 담는 변경백의 표정이 묘해졌지만, 일행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순서 반대로?
원래라면 네 번째인 네티가 처음으로 나서야겠지만, 네티는 여기에 없었다.
그 대신… 일행들의 시선이 살로메에게 꽂혔다.
“저, 저는 며느리 아닌데요?”
살로메가 뒤늦게 항변했으나, 성녀는 한 마디로 그녀의 저항을 박살 냈다.
“그래서 안 할 거야?”
“아, 아뇨. 물론 해야죠! 아니, 할게요!”
살로메는 쪼르르 변경백 앞으로 갔다.
“저기, 근데, 제가 마법을 쓰면 일대가 날아갈 텐데….”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네. 자유롭게 마법을 펼치게.”
변경백이 그녀의 가슴을 겨누며 말하자, 살로메는 의아해하면서도 지팡이를 들었다.
시작은 가볍게 얼음 창.
그녀의 주변 마나가 움찔거리고, 검은 용의 뼈로 만들어진 지팡이가 호응하던 바로 그때.
휙. 변경백이 검 끝을 튕겼다.
세티나 성녀는 그게 무슨 결과를 가져왔는지 몰랐지만, 마법을 쓸 줄 아는 여명과 검 바로 앞에 있던 살로메는 달랐다.
두 사람은 보았다. 보이지 않는 검이 완성직전의 얼음 창 주문을 잘라내는 것을.
“…?!”
이건 또 무슨- 기겁하는 살로메를 향해 변경백이 검 까닥거리며 말했다.
“이걸로 끝인가?”
“아, 아뇨. 아직입니다!”
살로메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한 번 더 마나를 엮었다.
실명 안개, 벼락, 열상, 얼음판….
마탑의 미래라는 칭호에 걸맞은 무수한 마법들이 펼쳐졌지만, 변경백은 그때마다 주문을 베어버렸다.
준비하는 자와 베는 자.
주문들이 허무하게 날아가면 날아갈수록, 살로메는 더 빠르게, 더 많은 마법을 시전했다.
급소를 노리는 얼음송곳부터, 건물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융해 광선까지.
보이지 않는 공방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이윽고, 잘려나간 주문의 마나가 눈에 보일 정도로 흩날리고, 살로메의 등이 흠뻑 땀으로 젖을 때쯤.
살로메는 마지막 한 줌의 마나까지 쥐어짰다. 이대로 패배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도록.
하지만 밑바닥을 긁어내면 찌꺼기가 올라오는 법.
의식하지 못한 사이, 그녀의 주문 사이로 예상하지 못한 힘이 엮였다.
“Rache!!”
짧은 독일어와 함께 터져 나온 그것은, 눈에 보일 정도로 검게 물든 뒤틀린 마나였다.
?!
여명은 물론이고 직접 사용한 살로메조차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자신이 시전한 마법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나 변경백은 덤덤했다. 마치,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처럼.
이윽고, 뒤틀린 마나가 섞인 살로메의 주문이 강렬한 빛을 내며 폭발하려는 순간.
변경백이 검을 횡으로 그었다. 용사의 무술, 1초식.
!!!
소리는 없었다. 하다못해 검을 휘두를 때 으레 들리곤 하는 바람 소리조차 없었다. 남은 건 검에 베여 사라진 주문의 잔해뿐.
한 손으로, 그것도 저렇게 빨리 쓸 수 있는 무술이었나?
여명의 감탄과 마나 가루가 흩날리는 가운데, 살로메는 무릎에 힘을 잃고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아?”
여명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는 사이, 변경백이 살로메에게 다가왔다.
“정말이었군. 정말로… 몸에 마왕을 봉인하고 있었군.”
“….”
살로메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붙잡은 채, 조금 전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뭐야, 내가 방금 뭘 쓴 거야?
다행히 그녀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새 검을 늘어트린 변경백의 입에서 정답이 나왔으니까.
“그것도 꽤나 많이 소화했군. 사실상 소화가 끝난 것 같은데… 그대는 어쩌고 싶은가?”
“예? 어쩌다뇨? 뭐, 뭘요?”
이어진 변경백의 말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마왕의 힘을 흡수할 텐가. 아니면 그대로 흩어버릴 건가?”
“…??”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살로메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변경백이 덧붙였다.
“설마, 그대가 마왕을 봉인한 첫 번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마왕을 완전히 죽이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네. 어떤 시대에는 도저히 죽일 수가 없을 정도로. 그리고… 사람은 치울 수 없는 건 그냥 뚜껑을 덮어버리는 법이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뚜껑이 되었을지, 상상해본 적 있는가?”
없었다. 살로메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되물었다.
“흐, 흩어버리는 것과 흡수하는 것, 둘의 차이가 뭐죠?”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네. 흩어버린다면, 마왕을 영원히 없애는 거지. 자연 상태의 뒤틀린 마나가 조금 늘어나긴 하겠지만.”
“그러면 흡수하는 건….”
“죽을 때까지 흡수한 뒤틀린 마나를 품고 살게 되겠지. 대신, 그대의 죽음과 함께 마왕의 마나도 세상에서 사라질 걸세.”
“….”
살로메는 마탑에도 없는 정보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냐고 묻지 않았다.
꿀의 혈통이야말로 역사 이래 가장 많이 마왕과 싸워온 혈통이었으므로.
곧, 옆에서 듣고 있던 여명이 물었다.
“흩어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경우마다 다르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폭식, 운동, 춤, 농사, 노래….”
그때, 여명이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노래요?”
“이상하지만, 사실이라네. 우리 가문의 기록에 의하면 37대 변경백은 마왕을 퇴치 후 무려 13년 동안 노래를 불렀다네. 심지어는 밥 먹을 때도.”
“….”
여명은 고개를 돌려 살로메를 바라봤다. 아니, 방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살로메에게 쏠렸다.
“알고 있었어?”
“…아뇨. 하지만 저번에 말해드렸던 것처럼, 소화 같은 개념일 거라고 예상하긴 했어요.”
“과연… 그래서 청색 신이 노래 부르지 말라고 하신 건가. 결정하기 전에 소화하지 말라고?”
“…?”
여명이 그걸 어떻게 알아?? 설마 들었어?? 살로메가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떠올리는 찰나.
여태껏 조용히 있던 세티가 물었다.
“흡수했을 때는 부작용은 없나요?”
변경백은 자연스레 대답했다.
“부작용이라… 수명이 대폭 늘어나고, 평생 뒤틀린 마나의 유혹에 시달리며, 때때로… 마왕의 특징이 신체에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네.”
“특징이요?”
설마 몸이 점액질이 되거나, 팔다리가 더 돋아난다든가 하는 건 아니겠지?
모두가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렸으나, 이어진 말은 그보다 더 최악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냥 털이나 좀 나는 정도이니.”
“….”
털…? 일행은 거의 동시에 살로메의 인중을 바라봤다. 살로메는 자신의 입을 가리며 버럭 화냈다.
“수염 안 났거든?!”
“…누가 뭐래?”
“방금 전부 히틀러 수염 생각한 거 다 알거든!?”
여명은 씩씩거리는 살로메를 보며 살짝 안타까움을 느꼈다.
독일 군가 부르기 vs 히틀러 수염 기르기라니… 이 무슨 끔찍한 이지선다란 말인가.
‘…불쌍해라.’
그의 속마음을 읽은 걸까, 살로메는 지팡이 끝으로 여명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뭐, 아무튼.
여명은 살로메의 지팡이를 피해 일어나며 물었다.
“아버… 아니, 변경백께선 둘 중 어느 걸 골라야 한다고 보십니까?”
“숭고한 희생에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법. 그건 마왕을 봉인한 자가 선택할 일일세.”
“….”
반박의 여지 없는 정론. 다행인지 불행인지, 살로메는 아직 선택지를 고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언과 가르침… 모두 감사합니다.”
살로메가 물러난 뒤, 쇠미리와 성녀, 그리고 세티가 차례대로 변경백과 대련했다.
대련 방식은 조금 전과 똑같았다. 한걸음이라도 변경백을 물러나게 하면 승리.
-갑니다!
미리디스는 아예 시작 전에 바람 마법을 온몸에 두른 채 변경백에게 달려들었다.
가속하는 몸으로 온갖 마법과 검이 변경백을 노렸지만, 걸음을 움직이긴커녕 역으로 바람 마법이 갈가리 잘려나갔다.
결국, 처음부터 모든 걸 쏟아부은 그녀는 살로메보다 훨씬 빠르게 항복을 선언했다.
“가진 것을 억누르지 말게. 부모의 유산은 버리고 싶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니.”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다음은 성녀. 그녀는 시작부터 주접을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시아버지를 쏠 수는 없어요….”
친아빠를 오토바이로 박아 버린 인간이 무슨 소리를? 변경백을 뺀 모두가 그녀의 가증스러움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진실을 모르는 변경백은 성녀의 태도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자잘한 조언을 건넸다.
예를 들어, 전대 성녀님의 스위스 금고 계좌번호와 비밀번호 같은 것들.
“아버님, 제, 제가 이걸 받아도 될까요?”
“그녀도 그걸 바랄 걸세.”
“아….”
다행히 성녀의 주접은 거기까지였다. 여명이 성녀를 붙잡아 질질 끌고 간 덕분이었다.
겸사겸사, 몰래 계좌를 받아 적고 있던 구더기 공주도 여명에게 붙잡혔다.
“아니, 나는 너희가 못 외울 때를 대비해서… 악! 야, 잠깐, 잠깐만! 뼈 맞았어!”
아무튼, 그렇게 정의가 구현되는 사이.
마지막으로 세티가 앞으로 나섰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세티가 힘껏 마나를 끌어 올렸으나, 변경백은 조금 전과 다른 방식을 제안했다.
“혹시, 성기사 대련을 알고 있나?”
“…마나를 쓰지 않고 싸우는 대련이요?”
“그래, 잘 알고 있군. 이번에는 그걸로 해보지.”
감히 누구의 제안이라고 거절하겠는가. 세티는 순순히 마나를 거두고, 기다란 워해머를 양손으로 짧게 잡았다.
“자, 실력을 보여주게나.”
그렇게 시작된 대련은 짧았다. 미리디스는 물론이고, 성녀의 주접보다도 빨리 끝났다.
딱 네 번의 공방.
마나를 쓰지 않았음에도, 변경백의 검은 정확하게 세티의 몸을 건드렸다.
손목, 팔꿈치, 망치를 잡은 손, 그리고 망치.
무기를 휘두르기도 전에 약점을 허락한 세티가 멍하니 입을 다문 가운데, 변경백이 말했다.
“배웠는가?”
“…예.”
변경백이 검을 회수하자, 세티는 고개를 꾸벅 숙여 예를 표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준 건 이정표일 뿐. 앞으로 남은 길은 그대 혼자 헤쳐나가야 하네. 부디, 올바른 길로 나아가길.”
그건 무술을 익힌 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성녀는 여명을 향해 물었다.
“저게 뭔소리야?”
여명은 일견즉해로 파악한 내용을 가감 없이 말했다.
“세티의 약점과 습관을 짚어준 거야. 초인이라도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는 건 쉽지 않은데….”
“그걸 지적했다? 꼭 선생님이 학생을 지도하는 것 같네.”
“그래, 그 정도 차이야.”
“역시, 실물이 계단의 환상보다 더 강한가 보네… 그러면 여명, 너도 저 정도로 차이 날까?”
“글쎄, 그건 해봐야 알겠지.”
그렇게 대답한 여명은 세티를 지나쳐 변경백 앞에 섰다. 변경백은 이번에도 성기사 대련을 신청했다.
“자네라면 한걸음은 별문제 없겠지. 그러니 한걸음이 아니라, 진지하게 검을 나눴으면 하네. 어떤가?”
“과분한 제안이십니다.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여명은 고개를 숙인 뒤, 자세를 잡았다. 시작은 제국기사단의 검술.
기수식을 알아본 변경백의 표정이 미미하게 떨리는 가운데, 여명이 먼저 검을 휘둘렀다.
챙- !
금속과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
서로 비슷하게 움직이는 검에는 마나와 파괴력 대신, 복잡한 기교와 이치가 담겨 있었다.
무술을 모르는 자의 눈에는 그저 챙, 챙 칼을 맞대는 행위로 보였지만, 여명은 이를 악 물어야 했다.
검이 충돌할 때마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마치 돌덩어리가 떨어진 연못처럼 둥근 충격파가 터져나왔으므로.
그리고 잠시 후, 보이지 않는 충격파는 나뭇잎을 물어뜯는 바람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고, 변경백이 입을 연 것도 그쯤이었다.
!
그가 검을 내려치며 물었다.
“에케모를 쓰러트렸다면, 세상이 회귀하는 걸 알고 있겠지.”
곧게 뻗은 검과 함께 날아온 말. 검의 기교에 집중하고 있던 여명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그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고 믿나?”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존재가 그 증거니까요.”
“그래…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떤가?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겠나?”
“…아뇨.”
즉답이었다. 변경백의 검에 실린 힘이 조금 줄어들었다. 충격파에 달궈진 공기가 잠시 침묵했다.
변경백은 검술을 바꾸며 물었다.
“어째서? 사랑하는 청소부들을 다시 만날 기회일 텐데.”
“그 사람들이 과연, 제가 사랑하던 청소부들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대답한 여명은 한층 더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그의 손이 흐릿해졌다.
!!!
변경백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속도를 따라오는 건 물론이고, 아예 시선을 돌려 긴장한 연인들을 바라봤다.
“연인들 때문은 아니고?”
“예, 물론 그녀들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다시 만날 그녀들도 지금의 그녀들이 아닐 테니까요. 다시 만날 청소부들이 제가 기억하던 형들이 아닌 것처럼.”
“…그러면 어머니는? 전대 성녀, 그녀를 살릴 수 있어도 회귀하지 않을 텐가?”
“….”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변경백 또한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두 자루의 검, 두 쌍의 금빛 눈동자, 두 명의 용사.
두 사람 사이로 휘몰아치는 바람만이 이 순간을 증명하길 잠시.
변경백이 다른 질문을 꺼냈다.
“복수자는 현재를 긍정할 수 없지. 자네에게 현재란 뭔가? 극복인가? 인내인가? 그것도 아니면 ….”
그때, 여명이 그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바랍니다.”
“바란다고?”
“예, 저는 긍정하고 싶습니다. 극복하고 싶습니다. 참아내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
여명은 그저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말을 꾸미기엔 변경백의 질문이 너무나도 무거웠으므로.
“해야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어깨가 무겁고, 가끔 다리도 후들거립니다. 그냥 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변경백은 여명의 대답을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검을 멈추지 않은 채, 그저 이렇게 말했다.
“자네 진의를 듣지 않아서 다행이군.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 못 할 진의를 품고 있을 테니.”
“….”
다음 순간, 챙! 변경백은 여명의 검을 크게 쳐내며 말을 이었다.
“너무 내 질문만 한 것 같군. 혹시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나?”
“….”
여명은 머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막으며 대답했다.
“절… 아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음에 담아뒀던 질문이었다. 유니콘의 친구이자 고자인 그는, 과연 여명을 아들로 생각하는 걸까?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란 놈이 튀어나오고, 며느리가 우르르 몰려온 이 상황을, 정말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명은 아야톨라를 상대할 때보다도 더 긴장하며 변경백의 입술을 바라봤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검이 절정에 이른 순간.
여명의 검이 변경백의 검을 관통했다. 물체와 육체를 비물질화 하는 변경백 가문의 비전무술.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계단의 환상 속 변경백에게 몇 번이고 당한 무술을 마주한 여명은 재빨리 검을 회수했다.
당연히 다음 검격이 급소를 노리고 찔러 들어올 줄 알고 한 행동이었는데….
변경백은 검을 회수했다.
갑자기? 아들이란 질문이 그렇게 싫으셨나? 살짝 주눅든 여명과 달리, 변경백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몰락하는 자신을 축복하라. 그리하면 모든 몰락이 끝날지니.”
“…예?”
“꿀의 혈통이… 우리 변경백 가문이 지켜온 가전 무술의 진의.”
“….”
“44대 용사. 천여명. 자네에겐 황금 혈통의 무술이 아닌, 꿀의 혈통의 무술을 전수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