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33)
을 위한 세계는 없다-633화(633/817)
EP.633 Coram Deo (17)
두메아 가문의 가전 무술이 그러하듯, 가전 무술들은 으레 가문명 그 자체가 이름이 되곤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변경백 가문의 가전 무술은 따로 이름이 있었다.
“이 무술의 이름은 ‘황금 사냥’일세.”
변경백의 입에서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여명이 처음 느낀 감정은 섬뜩함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금은 초대 용사… 즉, 제국 황가를 상징하는 단어였으니까.
“…역적으로 몰려도 이상하지 않을 이름이군요.”
변경백은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 가문의 기나긴 역사 동안, 이 무술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채 백 명이 되지 않았네.”
“….”
“가문의 선조님들은 이 이름을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하셨지. 황금을 위한 사냥… 그러니까 황제를 향한 충성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분이 있었는가 하면, 문자 그대로 황족을 사냥하기 위한 야심이 담긴 무술로 해석하는 분도 있었네.”
“…변경백께서는 둘 중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대답 대신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하시는구나.’
변경백의 표정을 읽은 여명이 속으로 질문을 삼키는 사이, 변경백이 말을 이었다.
“백 명도 익히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이미 예상했겠지만, 이 무술은 가주… 정확히는 용사의 업을 계승한 자에게만 허락되는 무술일세.”
용사의 업?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에 힘을 줬다. 당혹을 참기 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전 용사의 업을 계승한 적 없….”
“마왕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패퇴시키고, 아야톨라를 셋이나 참살한 자가 용사가 아니라면 누가 용사라 칭할 수 있겠는가?”
“….”
“그리고 무엇보다 가주의 자격은… 이제는 필요 없네. 영토를 잃은 귀족은, 자연스레 계급 또한 잃는 게 아샤의 전통이니 말일세.”
그렇게 말한 변경백은 담담하게 웃었다. 씁쓸함이 담긴 미소였다.
그걸 본 여명은 자기도 모르게 궁금해졌다. 자신의 대에서 가문의 종말을 선언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참담함? 슬픔? 죄책감?
정확히는 몰라도, 끔찍한 감정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에 공감한 여명은… 자신이 가문을 계승하겠노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변경백의 말이 한 발 더 빨랐다.
“혹시라도, 우리 가문을 이을 생각일랑 하지 말게.”
“…예?”
“새장을 벗어난 새에게 새장은 필요하지 않은 법일세. 하물며 새장에서 자라지 않은 새라면야… 우리 가문이 자네의 정체를 밝히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면서까지 되찾을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다분히 현실적인 이유들. 설마 변경백 정도 되는 사람이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한 걸까?
아니었다. 변경백은 뒤편에 모인 며느리‘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봤을 땐, 자네는 새로운 가문을 만드는 편이 나을 걸세.”
“….”
“아샤에 새로운 귀족 가문을 만들 수도, 아니면 평범한 지구의 시민이 될 수도 있겠지. 저 며느리… 들의 집안을 계승할 수도 있겠고. 또 어쩌면 그 이상도 가능할 걸세.”
그 이상?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쇠미리의 꿈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아무튼, 기나긴 설명을 끝낸 변경백은 슬그머니 검을 들었다.
“사담이 길었군. 이제부터 진지하게 무술을 전수해 주겠네.”
변경백의 선언에 여명은 마찬가지로 마나를 끌어 올리며 생각했다.
과연, 물질을 투과시키는 무시무시한 무술을 어떻게 익히게 될까?
이미 계단의 시련에서 훔치려다가 실패한 무술인 만큼, 기대감과 긴장이 동시에 척추를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방법은… 여명의 생각보다 훨씬 단순했다.
달깍.
변경백은 들어 올린 검을 휘두르는 대신, 손잡이에 박힌 보석 꿀을 뽑았다.
시카고 경매장에서 봤던 반쪽짜리가 아닌, 온전한 형태의 보석.
직후, 변경백은 망설임이 담긴 눈으로 보석을 내려다봤다. 잠시 후, 어떤 감정을 털어낸 그는 가볍게 손을 튕겨 보석을 여명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보석을 받은 여명은 조심스레 보석을 쥐었다.
“설마… 이게 비전 유물인 겁니까?”
“그렇지 않기도 하고, 그렇기도 하네.”
“…?”
아니면 아니고, 맞으면 맞는 거지.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의아해하는 그를 향해, 변경백이 말했다.
“설명보다는 직접 해보는 편이 낫겠지. 자네의 마나를 불어넣어 보게.”
여명은 그렇게 했다. 여느 비전 유물들과 마찬가지로 힘껏 마나를 불어 넣은 순간.
!!!
묘한 충격과 함께 시간이 멈췄다.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모든 호흡과 신경, 심지어 먼지 한 톨까지 움직임을 잃었다.
무아지경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에 흔들림은 없었다.
‘이건 또 뭐지?’
의문이 길어지기 직전, 정지한 변경백의 등 뒤로 갑자기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무언가‘들’이었다.
장작 위의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무수한 아지랑이들.
하늘을 가득 채운 아지랑이들은 묘하게 사람과 비슷한 크기였는데, 하나 같이 살벌한 황금빛 눈동자 한 쌍을 반짝이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여명보다는 변경백의 눈과 닮은 눈이었다.
이거, 설마…?
누가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여명은 무의식적으로 아지랑이의 숫자를 헤아렸다.
41명.
초대 용사와 변경백, 그리고 자신을 뺀 꿀의 혈통 역대 가주들과 똑같은 숫자.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전부 전대 가주들이란 말인가?
그 의문에 대답하듯, 41명의 아지랑이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44대.]]] [[[존재할 수 없는 후손이여.]]]굵고, 깊고, 강하고, 무거운 목소리.
41개의 목소리는 합창이라도 하는 것처럼 화음을 이루며 여명의 귀를 찔렀다.
[[[몰락하는 자신을 축복하라. 그리하면 모든 몰락이 끝날지니….]]] [[황금이 되길 거부한 우리는.]] [너를 축복한다.]그 말을 끝으로, 아지랑이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떤 것들은 연기처럼 느릿하게, 또 어떤 것들은 불길처럼 빠르게.
이윽고, 모든 불길이 사라진 자리로 다시 시간이 돌아왔다.
“뭐라고 말씀하시던가?”
“….”
그와 똑같은 경험을 한 걸까? 변경백은 자연스럽게 물었다. 여명은 보석 꿀을 꽉 쥐며 대답했다.
“저를 축복한다고 하셨습니다.”
변경백은 두 눈동자 사이로 안도감이 스쳤다. 정상적인 후손이 아니면 뭔가 페널티가 있었던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아무튼, 놀란 마음을 삼킨 여명은 변경백에게 보석 꿀을 돌려주려 했다.
하지만 변경백은 손을 들어 그것을 사양했다.
“이 순간부터, 그 보석 꿀은 자네 걸세.”
“예? 하지만 이건….”
“언젠가 우리 가문의 허명이 필요할 때가 있다면, 그 보석을 증표로 삼게.”
여명은 거절하지 않았다. 가문의 상징을 넘겨주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고마워할 필요 없네. 자네가 보석의 반쪽을 찾아줬을 때부터 이렇게 될 일이었으니.”
“….”
“자, 첫 번째 관문을 넘었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지.”
변경백은 그대로 여명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선은 황금 사냥의 마나 사용법을 알려주겠네. 내 마나를 받아들이고, 내가 흘려보내는 길을 따라 자네의 마나를 움직이게.”
여명은 거절하지 않았다.
마나를 운용하는 법이야, 이미 계단에 시련에서 훔쳐 배운 덕분에 굳이 또 배울 필요가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절대, 아버지의 손길을 느껴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익히는 게 빠르군. 혹시 미리 배운 적 있는가?”
“아, 아뇨. 당연히 처음입니다.”
“이만한 재능이라… 하긴, 그러니 그 짧은 기간에 이렇게나 강해질 수 있었겠지.”
역시,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인가. 여명은 어색한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난 후.
여명이 완벽하게 마나를 운용하는 걸 확인한 변경백이 그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다 기억했으면, 내가 알려준 방법대로 손가락 끝에 마나를 모으고 무술을 펼쳐보게.”
직후, 여명은 그의 말을 따라 마나를 이끌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매우 조심스러웠는데, 계단의 시련에서 본 무술을 무작정 따라 했을 때, 살이 터지는 끔찍한 경험을 한 까닭이었다.
변경백이 직접 알려준 만큼, 이번에는 다르-
-지 않았다. 마나를 불어넣은 손가락 끝이 폭발하듯 찢어지며 푸확! 피가 흘렀다.
‘실패.’
실망하는 여명과 달리, 정작 변경백의 얼굴에는 이채가 서렸다.
“벌써 입문 단계를 넘어섰군.”
“…이게 입문이라고요?”
“황금 사냥의 본질은 의지가 없는 물체와 육체를 차원 뒤편으로 옮기는 걸세. 익숙하지 않을 때는 이렇게 살이 으깨지지.”
“….”
자신의 몸에만 적용되는 차원문같은 건가? 역시 무시무시한 무술이었다. 여명은 피가 난 상처를 재생하며 물었다.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머리에 사용했다가 실패하면… 뇌가 터질 수도 있는 겁니까?”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네. 뇌는 아니지만, 장기를 잃어서 돌아가신 선조님도 계시지.”
“….”
까딱하면 자폭기가 된다는 소리였으나, 여명은 두렵지 않았다. 당장 눈앞의 변경백은 이걸로 핵폭발도 피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곧 이어진 변경백의 말은 그를 두렵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군.”
“다음 단계라면…?”
“반복 숙달일세. 무술을 사용하는 감각에 익숙해지는 걸세. 개인적으로 조언하자면, 다른 사람의 공격을 피하면서 수련하면 혼자 익히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익힐 수 있네. 나도 그렇게 익혔고.”
“…설마, 적과 싸울 때 쓰신 겁니까?”
변경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치 잔당들은 수단 방법을 가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네. 특히 히틀러 본인은….”
“….”
“물론, 모험 중간 중간마다 동료들이 도와주었네. 자네도 그 방법을 써보는 건 어떤가?”
아뇨 저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여명이 뒷말을 내뱉기도 전에, 성녀와 라쉬크가 동시에 손을 들었다.
“저요! 저!! 제가 잘 도와줄 수 있습니다!”
“나! 나도!”
이 상황이 즐거우신 걸까, 변경백은 작게 미소 지으셨다.
“인망이 좋군.”
“….”
“아, 그리고 혹시… 저 분홍색 아가씨도 며느리인가?”
여명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구더기 공주는 동료였지, 연인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리고 라쉬크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아예 대놓고 단검을 뽑았다.
“딱 한 번만 찌를게!”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때의 나에겐 침착함도 인내심도 부족했다. 성도에 사는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혹은 그렇기에… 나는 단장이 되었다.
-지르지스 라크티. 적색 신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성기사단의 지휘권을 부여하노라.
당연하게도, 그곳에 영광은 없었다.
내가 피에 젖은 어두운 역사의 산증인이라서? 아니, 대대로 성기사단의 단장은 성검의 주인이었으니까.
성검 없는 성기사단의 단장, 성검을 잃은 성도가 임시로 채워 넣은 땜빵.
그게 내게 주어진 단장 자리의 본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날 위로하고, 심지어 동정하기도 했지만,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성검보다도 중요한 걸 지키고 있었으니까.
만인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자, 몇 번이고 전쟁을 막아내고, 무수한 사람을 구해낸 영웅.
성녀.
하지만 그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이래, 나는 처음으로 단장이 된 걸 후회했다.
단장이 아니었다면, 직접 변경백령으로 달려가 그를 붙잡아 올 수 있었을 텐데.
하다못해, 그녀를 데리고 도시 밖으로 도망치기라도 했을 텐데.
그러나 나의 어깨에 놓인 의무의 무게가 모든 걸 틀어막았다. 나는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나와 같은 신을 섬기는 이가 수억에 달했음에도, 나는 그 누구와도 이 고통을 나눌 수 없었다.
그녀가 조용히 죽음을 준비한 까닭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편지를 보냈고, 다음 대 성녀를 가르쳤으며, 종종 산책까지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심지가 얼마 남지 않은 촛불이 밝게 타오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 그건 유산 정리였다.
누구를 위한 유산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녀의 남은 삶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나는 용사가 만든 계곡을 바라봤다.
그곳으로 찾아올 그를 기다렸다. 지금쯤 출발했을까? 아니면 몰래 오느라 늦어지는 것일까.
뭐가 됐든, 늦기 전에 와야 할 텐데.
나는 혹시라도 성기사들이 둘의 만남을 방해할까, 일부러 보안을 줄여가며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사실을 깨달은 어느 날, 햇빛이 쨍쨍했던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내게 술 심부름을 시켰다.
대외적으로는 본인이 마시기 위한 술이었지만, 그건 나를 위한 술이었다.
겨울처럼 차갑고, 슬픔처럼 무색무취한 술.
술을 따라준 그녀는 힘차게 웃으며 말했다.
-슬퍼하지 마세요.
나는 술잔을 거꾸로 들었다. 술과 눈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울음이 되었다. 그래, 나는 울었다.
그게 그녀가 내게 남기는 마지막 말임을 알기에 울었다. 흡혈귀에게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울었다.
그녀는 나를 위로하며 말했다.
-그이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그때 고개를 끄덕였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오직 하나, 눈물을 닦아주던 그녀의 손뿐.
그 손은 그의 얼굴에 가득 흐르던 피를 닦아주던 때와 똑같았다.
-저는 슬프지 않으니, 단장도 슬퍼하지 마세요.
그렇게 그녀가 세상을 떠난 날, 나는 처음으로 명령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울었다.
만인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그녀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단 사실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단 사실에 울었다.
하지만 이제야, 그녀의 명령이 옳았음을 안다.
그래, 그녀는 단순히 날 위로한 게 아니었다. 내가 그녀의 말 속에 숨어있는 뜻을 찾지 못한 것뿐이었다.
이제는 안다. 그녀의 사랑이 실패하지 않았음을, 그러니 그녀는 이 세상에 그 증거를 남기고 떠났음을.
나는 늦지 않았음에 감사한다. 신이시여, 나의 충심, 나의 신앙, 나의 믿음엔 아직 기회가 남았음이니.
이번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나는 굳은 다짐과 함께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나의 시야를 채운 건…
“라쉬크, 칼 내려놓고 거기 수건 좀 줄래요? 여관 주인이 보고 기겁하기 전에 미리 좀 닦아두게.”
피범벅이 된 전대 성녀님의 아들과.
“이번에는 어디 때려줄까? 응? 목? 손? 아, 엉덩이! 나 엉덩이 때려봐도 돼??”
그에게 매달려 이상한 소리를 내뱉는 현 성녀님이었다.
“아직도 꿈인가….”
결국, 현실을 버티지 못한 나는 한 번 더 기절했다.
조악한 방에는 가죽이 찢어진 낡은 소파와 그보다 더 낡은 탁자, 그리고 가지런히 놓인 스팸이 준비되어 있었다.
유통기한이 훌쩍 지난 스팸 통조림.
귀족들 사이에서는 오크들이나 먹는 쓰레기 여물 취급받는 음식이었지만, 북부에서는 저것조차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내어주는 물건이었다.
‘…귀한 손님이라.’
황태자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통조림을 집었다. 물론, 먹지는 못했다.
납치범들이 챙겨준 음식을 먹느니 죽는 게 나아서? 아니, 따는 법을 몰라서.
통조림을 처음 본 건 아니지만… 보통 캔 따개로 되어 있지 않나? 이 열쇠 비스무리한 이걸 어디다 쓰란 거지?
황태자가 한참 동안 캔을 들었다 놨다 하며 머리를 굴리길 잠시.
끼익-
방문이 열리며 옛 소련 군복을 입은 중년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동궁정백, 비코프 주가시빌리.
그는 하나도 줄어들지 않은 스팸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적이 준 음식은 먹지 않겠다는 건가? 뭐, 그래도 자존심은 있군.”
“….”
오랜 기간 정치판에서 굴러온 황태자는 ‘어떻게 따는지 몰라서 못 먹었다’고 대답하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그가 경험하기에, 잘못된 말보단 침묵이 더 나았으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그 경험이 옳았다. 피식 웃은 비코프는 콰직! 맨손으로 스팸 뚜껑을 찢어 그에게 내밀었으니까.
“먹어라. 굶어 죽는 건 허락하지 않겠다.”
“….”
결국 어떻게 뚜껑을 따는지 알 수 없게 된 황태자는 포크를 들어 주섬주섬 스팸을 떠먹었다.
짜고, 차갑고, 비렸다.
지구 아카데미로 유학 간 동생은 나름 별미라고 했었는데. 차원문을 넘어가면서 입맛이 망가진 건가?
아무튼, 그가 꾸역꾸역 스팸 한 캔을 다 먹자마자, 비코프가 작은 컵과 단검을 꺼냈다.
설마 스팸이 최후의 만찬이었던 걸까? 황태자가 빈 스팸통을 내려놓자, 비코프가 단검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제 시체가 필요한 겁니까?”
“아니.”
비코프는 그대로 황태자의 손을 붙잡더니, 아주 살짝- 손바닥을 그었다. 그리고 주륵, 다른 인간들과 똑같은 붉은 피가 컵으로 흘러내렸다.
“피? 제 피를 뭐에 쓰려는 겁니까?”
“넌 알 필요 없다.”
“….”
그래 알 필요 없겠지. 하지만 자신의 혈통이 어떤지 알고 있는 황태자는 한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고작 한 컵만 가져가지 말고, 많이 가져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왜, 우리가 헌혈이라도 하는 것 같나?”
“당연히 그런 좋은 일에 쓰시는 일은 없겠지요. 그러니까 많이 가져가시란 말입니다.”
“….”
황태자의 말을 들은 비코프의 눈썹을 씰룩였다.
“우리는 야만인이 아니다.”
“당연히 아니겠죠. 야만인은 그렇게 많이 못 죽입니다.”
“….”
뚝, 뚝. 흘러내리는 핏방울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스팸의 돼지기름 냄새와 선명한 피 냄새가 얽히며 침묵 속을 유영했다.
잠시 후, 반 컵 정도 피를 채운 비코프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한테 이렇게 당돌하게 군 애새끼는 이걸로 두 번째군.”
“…그러면 제가 당신에게 살해 당하는 두 번째 젊은이가 되는 겁니까?”
“아니.”
아니라고? 황태자가 고개를 들자, 비코프가 다른 소리를 했다.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그의 피보다 네 피가 더 가치 있다니… 너희 둘만 봐도, 혁명은 필연이다. 이 땅에서 더 이상 계급은 존재해선 안 돼.”
“….”
“그러니 기뻐해라. 네 피로 이 땅에 평등이 찾아올 테니.”
끼익- 문을 열고 나가는 비코프의 등을 보며, 황태자는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