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37)
을 위한 세계는 없다-637화(637/817)
EP.637 꺼지지 않는 해의 이야기
혁명가의 가장 큰 적은 또 다른 혁명가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
성도와 용사 계곡 사이의 순례길.
물류 트럭만이 오가는 싸늘한 도로 위로, 일단의 병력이 성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코프를 위시한 아샤 공산당원들.
망원경으로 저 멀리 성도를 훔쳐보는 그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평생 믿어온 종교의 성지를 불태운다는 계획에 찬성할 정도로 정신무장이 투철한 당원들은 ‘아직’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이곳에 모인 한 명 한 명이 성도를 불태우는데 망설임 없는 일당백의 혁명가란 뜻이기도 했다.
등을 맡길 수 있는 동지들.
그런 동지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비코프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비코프 동지! 보십시오!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사바칸, 형제를 위해 총을 잡은 젊은 군인은 멀리 성도의 하늘을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비코프는 망원경을 드는 대신 눈에 마나를 모았다. 강화된 그의 시야는 성도의 중앙으로 모여드는 밤 구름을 정확히 포착했다.
시작되는군.
“동무들, 모두 준비하시게. 하늘로 올라간 자가 다시 내려올 테니.”
하필 그자가 베리야일 줄은 몰랐지만… 비코프는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는 혐오를 삼켰다.
누가 어떻게 승천했건, 중요한 건 조국의 자원을 남용했다는 사실이었다.
조국의 것은 곧 인민의 것. 이제 그 대가를 내놓을 때가 됐….
그 순간, 망원경을 들고 있던 사바칸이 또 한 번 호들갑을 떨었다.
“비, 비코프 동지! 보십시오!”
이번에는 호들갑 떨만 했다. 갈라진 하늘에서 붉은 액체가 쏟아지기 시작했으니까.
“저거 다 피입니까?”
“오, 스탈린이시여….”
사바칸은 물론이고, 다른 혁명 전사들의 숨소리가 작아졌다.
포탄과 불벼락을 넘어온 전사였음에도, 그들의 내면에는 여전히 초자연적인 현상을 두려워하는 시골 농민 특유의 감상이 남아 있었다.
그 연약한 감상은 쏟아지던 피가 거인의 형상으로 변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두려움과 경악, 그리고 혼란.
멍하니 붉은 거인의 강림을 바라보던 사바칸의 시선으로 문뜩, 다른 것들이 보였다.
“비, 비코프 동지. 저 사람들은 왜 저걸 보면서도 성도로 가는 겁니까?”
사바칸은 그들을 지나쳐가는 물류 트럭을 가리키며 물었다. 비코프는 덤덤히 대답했다.
“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서 그렇네. 사바칸 동무.”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베리야… 아니, 저 거인을 인식하기 위해선 처음부터 보고 있었거나, 우리처럼 같은 이데올로기를 알고 있어야만 하네.”
“이데… 얼럭?”
“이데올로기. 개인이나 사회 집단을 규정하는 이념이나 사상을 뜻하는… 음.”
사바칸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뜨는 걸 본 비코프는 조금 더 쉬운 표현을 꺼냈다.
“이렇게 생각해 보게. 다섯 신의 신도라고 해서, 신의 본체를 직접 볼 수는 없지. 신의 본체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니까. 하지만 사제들은 종종 신의 본체를 볼 수 있다고들 하지. 저 거인도 마찬가지일세.”
“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저게 성도를 파괴하는 동안 우리 눈에만 보이는 겁니까?”
비코프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게 완전히 강림하면 모두가 볼 수 있게 될 걸세. 누구나 성검을 볼 수 있는 것처럼.”
“….”
사바칸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비코프 동지, 그러면 저건 우리 당의 신입니까?”
“…저번에도 말했지만, 사바칸 동무. 신이란 건 존재하지 않네. 다른 차원의 에너지 생명체일 뿐일세.”
“하지만 피를 제물로 당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당에서 말한 나쁜 신들이 딱 저렇-”
질문은 거기까지였다.
발을 들어 뭔가를 내려찍으려던 거인이 갑자기 우뚝, 멈춰버렸으므로.
“어어?”
“갑자기 왜 저래?”
당황하는 동지들과 달리, 그 모습을 본 비코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일이 꼬였군.
그는 의자 대신으로 쓰고 있던 커다란 철제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미국에서 들여온 최신 무기들과 탄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철컥! 비코프가 기관총과 대전차 로켓을 꺼내기 무섭게, 다른 동지들 또한 각자 무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개중에서 가장 먼저 무장을 끝낸 건 사바칸이었다. 그는 수류탄과 탄창을 허리에 차며 물었다.
“동지, 계획대로 도로를 봉쇄하면 되겠습니까?”
비코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계획을 변경하겠다. 사바칸 동무와 카디 동무는 나를 따라 성도로 진입.”
그는 저 멀리 붉은 거인과 순례길을 번갈아 보며 덧붙였다.
“나머지 인원은 이곳에 남아 도로를 통제하되, 외부 진입만 막고 나가려는 차량은 전부 풀어준다. 알겠나?”
동지들은 왜 갑자기 계획을 바꿨냐고 묻는 대신 그에게 경례했다. 비코프를 향한 그들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3시간 내로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후퇴하도록.”
그 말을 끝으로, 비코프는 미리 준비한 차량에 몸을 실었다.
부아앙-! 물류 트럭으로 위장한 차량의 엔진이 요란한 엔진음을 내뱉었다. 운전대를 잡은 사바칸이 물었다.
“동지,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중앙 신전.”
“거인을 지원하러 갑니까?”
“아니, 우리는 성물의 방으로 간다.”
사바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량이 출발하며 창문으로 바람이 몰아쳤다. 피 냄새가 섞인 바람이었다.
[어디서… 잘못… 브레즈네프가… 속였… 아니… 정수… 완벽… 황태자… 피… 비코프… … 설마… 피가… 모자랐…?]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베리야가 중얼거리는 사이.
여명은 검에 마나를 모았다.
녀석에게 왜 용사의 피가 필요하고, 뻐꾸기 황실의 피를 먹어서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알 필요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빨갱이 새끼의 사정이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건 저 빨갱이가 자신과 자신의 사람들을 노렸다는 사실 뿐이었다.
일본 공산당이나 몇몇 한국인들처럼 대화가 통할 상대도 아니었다.
그런고로, 이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후우- 짧은 각오를 삼킨 여명의 검이 베리야를 겨눴다.
용사의 무술 2초식. 혈관 속 파양결과 주가시빌리를 따라 마나와 이치가 뒤엉키고, 그의 주가시빌리와 닮은 검붉은 검기가 검에 깃들었다.
[이, 반쪽짜리 잡종 새끼가-]뒤늦게 패닉에서 벗어난 베리야가 반응했지만, 그의 거구는 여전히 정지해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명은 검을 찔렀다.
!!!!
충분한 시간을 들여 쏘아낸 검기는 그대로 붉은 거인의 가슴을 꿰뚫었다.
위력이 어찌나 무시무시한지, 거인의 가슴에 구멍이 뚫릴 정도.
하지만 여명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나도, 살기도, 적의도 차고 넘쳤다.
그는 또다시, 아니, 계속해서 2초식을 쏘아냈다.
[сука блять!]베리야가 뭐라고 지껄이건, 녀석의 몸은 기껏해야 커다란 과녁판에 불과했다. 여명은 펜싱 선수라도 된 것처럼 베리야의 온몸에 검기를 쑤셔 박았다.
!
!!
!!!
붉은 거인의 몸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역겨운 피가 장맛비처럼 바닥으로 쏟아졌다. 녀석의 몸은 피의 신을 자칭할 만큼 튼튼했지만, 이쪽이 펼치는 용사의 무술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여명이 녀석을 누더기로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여명이 한 발로 서 있는 거인의 다리에 구멍을 뚫으려는 순간.
[그만!!!!!!]베리야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파장이 터져 나왔다. 보이지 않는 파장과 충돌한 검기가 꺾여 나가고, 여명의 몸이 건물 옥상 밖으로 날아갈 정도.
[이 목소리를 듣는 모든 KGB에게 명한다 – ! 성물을- 발동해라- !!!]성물? 바닥에 착지한 여명이 고개를 들자, 도시 곳곳에서 붉은 빛줄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하나, 둘, 다섯, 열, 스물… 오십.
이 자리에서 보이는 것만 해도 오십에 달하는 빛줄기들은 어떤 마법진처럼 동그란 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원의 중심에 있는 건 피의 거인이었다.
[천- 여명-!!!]다음 순간, 빛을 머금은 붉은 거인의 몸이 재생하기 시작했다.
‘KGB의 인공 성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운 건가?’
애써 쑤셔 박은 상처들이 재생하는 걸 본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거인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인공 성물의 빛은 임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성물을 가진 KGB 요원들을 죽이면 될 일이었다. 거기다 스스로 빛을 뿜어내며 위치를 드러내고 있다면야.
여명은 그대로 베리야에게 등을 돌려 KGB 요원들을 향해 내달렸다.
…내달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등을 돌리기 무섭게, 붉은 거인의 몸에서 작은 구슬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여명도 익히 아는 구슬이었다.
“…베리야의 구슬?”
문제는 구슬의 양이었다. 눈대중으로 봐도 수천 개가 넘는 어마어마한 양.
설마 저기서 괴수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설마’가 ‘역시나’가 될 때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캬아아악!!!
바닥으로 쏟아진 구슬이 쩌억- 벌어지며 그 안에서 무수한 괴수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시카고에서 봤던, 피부가 벗겨진 늑대를 닮은 괴수들.
붉은 거인이 흘린 피 웅덩이 위에서 천천히 허리를 펴는 괴수들의 모습은 마치 지옥의 한 장면 같았다.
그리고 녀석들이 불러올 광경 또한, 지옥과 다르지 않았다.
[죽여-!! 모조리 죽여라-!!! 피를 흘려라! 피로 이 아편굴을 익사시켜라!!!]자칭 피의 신의 명령이 내려지자, 괴수들이 일제히 호응했다. 그것들은 비명 같은 괴성과 함께 가까운 생명체를 향해 내달렸다.
그러니까, 여명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명은 파도처럼 몰려드는 괴수를 보며 고민했다. 이대로 KGB 요원들을 처리하러 가야 하나, 아니면 괴수들을 처리해야 하나?
이기기 위해선 KGB 요원들을 노리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사이에 괴수들에게 살해 당할 일반인들은?
밤에는 한적한 중앙 신전 주변을 벗어나면 끔찍한 살육이 벌어질 게 뻔했다.
인구 밀도를 생각하면 성기사들이 출동하기까지 적어도 만 단위는 우습게 죽어 나가겠지.
‘제기랄.’
욕지거리를 삼킨 여명은 선택했다. 그는 KGB 요원이 아닌 괴수를 향해 검을 들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을 불렀다.
케프리.
어둠을 가르는 여명의 신이 그의 부름에 호응했다. 피와 어둠으로 절여진 성도의 밤 한가운데, 찬란한 태양의 빛이 그의 몸에 깃들었다.
번쩍!
[신성! 어서 저 신성을 가져와!!!]악에 받친 베리야의 외침이 머리를 울리고, 달려오는 괴수들이 여명에게 이빨을 세운 순간.
탕!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괴수의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여명이 총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투명 망토가 벗겨지며 안대로 눈을 가린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녀. 그녀는 쌍권총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세티랑 귀쟁이는 저기, 빛을 내뿜고 있는 녀석들 잡으러 갔어.”
벌써? 설마 숙소로 안 돌아가고 날 미행한 거야?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여명은 그보다 훨씬 합리적인 말을 꺼냈다.
“지원은 됐으니까, 당장 중앙 신전으로 가! 사제들을 대피시켜야-”
“이미 다녀왔어.”
다녀왔다고? 여명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성녀가 덧붙였다.
“총대주교가 기도회를 연다고 해서 당직 사제 몇 명 빼고 다 신전을 비운 상태야. 남은 당직 사제들도 내가 전부 내보냈….”
탕!
한 번 더 괴수의 머리를 날려버린 성녀는 계속 방아쇠를 당기며 말했다.
“뭐, 그래봤자 괴수들이 빠져나가면 다 말짱 도루묵이지만. 이 구역을 봉쇄하는 동시에 사람들을 대피 시켜야 해.”
여명은 코앞으로 다가온 괴수의 목을 베며 대답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있을 테니까, 넌 가서 경보기를-”
성녀는 여명의 말꼬리를 채갔다.
“성도에는 경보기 같은 거 없어. 그러니까 전통적인 방법을 써야지.”
“전통적인 방법?”
여명이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리기 무섭게, 성녀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눈이 안 좋아도, 불을 보면 도망가지 않겠어?”
직후, 성녀는 허리춤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주둥이에 천이 꽂힌 병… 수제 화염병이었다.
“오랜만에 예지가 맞았네? 아이고 아쉬워라.”
“….”
아쉽기는 개뿔이나. 성녀가 즐거운 얼굴로 화염병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여명은 내면에서 한 애국자가 남긴 불길을 끌어올렸다.
주와이외즈.
달려들던 괴수들의 비명과 함께, 성도가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