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38)
을 위한 세계는 없다-638화(638/817)
EP.638 꺼지지 않는 해의 이야기 (2)
[일어나라.]낯선 목소리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던 킴 필비의 정신을 끄집어냈다. 차갑게 식은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일어나라, 킴 필비. 당장!]아직 혈관에 남은 피가 강제로 움직이며 심장과 뇌를 자극했다. 킴 필비는 고통 속에서 눈을 떴다.
쿨럭.
그는 깨어나자마자 피를 한가득 토했다. 여명이 단검을 꽂아 넣은 폐에서 피가 역류한 까닭이었다.
[움직여라.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베리야의 목소리를 따라, 가슴에 박힌 레닌 훈장이 떨렸다. 죽음이 그의 몸을 떠났다.
끄윽, 끅.
정신을 차린 킴 필비는 여명이 박아 넣은 단검을 뽑았다. 푸확! 그의 가슴에서 또다시 피가 쏟아졌다.
조금 전까지 뇌로 향하는 산소가 끊긴 탓인가,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흐릿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안 가 정신을 차렸다.
코를 찌르는 불과 피의 악취 때문에? 아니, 저 멀리서 보이는 성녀 때문에.
쨍그랑!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신전에 화염병을 던지는 성녀라니.
‘아직 뇌가 회복되지 않았나?’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킴 필비는 눈을 비볐다. 그리고 뒤늦게 불길 속에서 타오르는 괴수들을 확인했다.
아, 그렇다. 성녀는 역시 성녀였다.
그녀는 괴수를 막기 위해 직접 신전에 불을 지른 것이다. 저만한 결단력이라니! 역시 소련의 혈통을 이은 여인다웠다.
그렇게 킴 필비의 감탄 섞인 오해(?)가 길어지는 사이, 한 번 더 목소리가 울렸다.
[피! 용사의 피에 문제가 생겼다!]피에 문제가 생겼다고? 불가능했다.
그가 직접 붙잡힌 황태자의 모습을 확인했고, 무엇보다 피의 신 앞에서 어떻게 피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분명 ‘황실’의 피였다.
‘설마, 피가 모자랐던 건가?’
하긴, 한 병은 너무 적었다. 처음 계획대로 황태자의 피를 모조리 뽑아야 했….
[가설은 필요 없다! 지금 당장 용사의 피를 찾아!!]다음 순간, 그의 가슴에서 치이익! 연기가 올라왔다. 막대한 마나를 받은 성물이 뜨겁게 달궈진 까닭이었다.
강제로 쏟아지는 신성의 열기.
“크읍!”
킴 필비는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멀리 성녀의 총소리와 타오르는 괴수의 비명이 뒤섞인 소음이 그의 귀를 찔렀다.
그리고 잠시 후, 불길이 그의 바로 앞까지 퍼질 때쯤.
킴 필비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혈관 가득 피의 권능을 받아들인 그는 당황했다.
‘이게 뭐… 지?’
‘황실’의 피는 이 도시에 없었다. 황태자는 성검 산맥 너머, 이름 없는 도시의 공산당 아지트에서 느껴졌다.
한데, ‘용사’의 피는 이 도시에 있었다. 그것도 두 개나.
하나는 성도 구석에, 또 하나는 여관들이 모인 숙박 지역에.
권능이 잘못된 건가?
당황한 킴 필비는 한 번 더 피를 추적했다.
그리고 자신과 권능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당황했다.
중앙 신전에서 멀지 않은 도서관 지붕.
붉은 빛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친 그곳에서, 휘리릭! 강렬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누가 봐도 인공적인 바람은 빛기둥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촉수로 뒤덮인 KGB 요원을 노리고 있었다.
“크윽!”
바람은 촉수 수십 개를 동시에 베고 지나갔다. 청색 신을 상징하는 푸른 지붕 위로 불경한 피와 촉수가 흩뿌려졌다.
“이 빌어먹을 귀쟁이년!”
잘려나간 촉수 사이, 소련의 인공 성물이 번쩍였다. 두터운 반마력장이 형성되며 재차 몰아치는 바람을 밀어냈다.
남자는 잘린 촉수를 재생하며 소리쳤다.
“우리의 일을 돕지는 못할 망정! 같은 공산주의자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같은 공산주의자? 반대편 건물 지붕에서 완드를 들고 있던 소녀는 코웃음 쳤다.
“뭐래, 트로츠키주의자 놈이.”
“트, 트로츠키주의자? 이 개같은 년이!”
트로츠키주의자란 스탈린에게 숙청된 레프 트로츠키의 이름에서 비롯된 단어였다.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사이비’, ‘배신자’ 정도의 의미를 지닌 말이기도 했는데, 스탈린이 지배하던 소련에서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리는 건 곧 숙청을 의미했다.
즉, 같은 공산주의자고 뭐고 널 죽이겠다는 말.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한 남자는 촉수로 총을 꺼냈다. 그의 촉수 아래 숨겨져 있던 세 개의 기관단총이 건너편 소녀를 향해 불을 뿜었다.
!!!!
소녀는 가볍게 몸을 날리며 바람을 일으켰다.
탄환을 밀어내거나, 막기 위해서? 아니,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가속 시키기 위해서.
휘이잉-! 혼자서 화망을 형성하고 있던 KGB 요원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가 바람에 실린 천둥소리를 들은 건, 건물 아래에서 튀어나온 망치가 그의 척추를 내려찍기 직전이었다.
“양동…?!”
우지직- 척추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동시에 남자의 몸이 지붕에 처박혔다. 뒤늦게 촉수가 발악했지만, 망치는 자비 없이 그의 인공 성물을 강타했다.
쩌엉 – !
충격을 견디지 못한 인공 성물이 정지했다. KGB 요원의 몸에서 솟구치던 빛이 사라지고, 촉수 또한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세 명째.”
망치의 주인, 세티는 요원의 몸에서 성물을 뽑아내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회수한 성물을 챙기는 사이, 반대편 옥상에 있던 쇠미리가 다가왔다.
“세티, 저쪽도 눈치챘나 봐요.”
그녀의 시선은 성도 곳곳에서 솟구친 빛줄기로 향했다.
인공 성물로 베리야를 지원 중인 KGB 요원들.
녀석들은 빛줄기가 사라진 걸 눈치챈 듯, 빛줄기가 사라진 장소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있었다.
“이러면 더 힘들어지는데… 막내랑 시리는요?”
세티는 휴대폰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그쪽은 이제 두 명 처리했어. 살로메도 두 명.”
“…합쳐서 일곱이네요. 이 속도라면 해 뜰 때까지 정리하는 건 무리네요.”
“이러면 호아나 경과 성기사들이 잘해주길 바랄 수밖에….”
미리디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도 저편에서 피어나는 불길을 보며 중얼거렸다.
“결국, 성녀랑 여명은 성도를 불태우게 됐네요. ‘저런걸’ 막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저런 거?”
“…?”
미리디스는 기절한 KGB 요원을 포박하는 세티를 바라봤다. 설마…
“…저 거인이 안 보여요?”
“거인? 거인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일단 몸부터 움직인 건가? 미리디스는 새삼 그녀의 행동력에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저게 눈에 안 보인다는 건… 역시, 세티는 이쪽에는 별 관심이 없네요.”
이쪽이 뭘 뜻하는 건지는 물을 것도 없었다. 빨갱이.
“…빨갱이만 볼 수 있는 신이라니. 농담도 안 되는 거 알지?”
“모든 농담은 현실에 기초하는 법이죠. 저건… 아직 완벽하게 현실에 안착하지 못해서 그래요. 착지는 했는데 고정을 못 한 상태라고 할까… 고정할 무언가를 찾으면 모두가 볼 수 있겠죠.”
“….”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불사의 왕이 천 년 넘게 실패한 일을 소련의 잔재들이 해내다니.”
세티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 않았다.
여명의 말에 의하면 별을 떨어트리는 재료 중 하나는 세계수의 눈물이었고, 미리디스는 그런 세계수의 마지막 싹이었으니까.
아무튼, 요원을 정리한 세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인이 보이건 말건, 일단 이 녀석들을 처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리고 그녀가 비각술을 펼치려는 순간, 미리디스가 손뼉을 쳤다.
“아, 그래. 세티, 세티도 거인을 볼 방법이 떠올랐어요.”
“응?”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서기장이 된 여명을.”
“…뭐? 뭐가 된 여명?”
“제2의 스탈린이요. 엘프와 지구, 아샤를 모두 아우르는 공산 진영의 지도자… 스탈린 같은 학살자보다 훨씬 나을 거 같지 않아요?”
세티는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대신, 그런 여명을 상상해봤다.
…의외로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여명은 이미 반쯤 서기장의 길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의미 있는 상상은 아니었다.
그가 아는 여명은 절대 서기장 자리를 받아들일 리 없으므로.
그는 서기장보다는 청소부를, 하다못해 다큐멘터리 감독을 꿈꿀 남자였….
그 순간, 세티의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명과 성녀가 피워낸 불길 가운데에서 타오르는 거대한 존재.
“세티? 보여요?”
미리디스가 그녀를 불렀으나, 세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저 붉은 거인의 낯이 익은 까닭이었다.
비코프가 핵미사일을 발사하던 때, 여명을 막아섰던 바로 그 거인.
“세티?”
잠시 말없이 거인을, 정확히는 거인의 왼팔을 노려보던 세티는 고개를 돌려 미리디스를 바라봤다.
“미리, 지금 여명하고 가장 가까운 건 누구야? 우리? 살로메? 아니면 내 동생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으나, 미리디스는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잠시 후, 그녀가 대답했다.
“살로메요. 중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세티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살로메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쩌면 최악의 상황을 뒤바꿀 수 있는 문자를.
[당장 여명에게 가서 전해줘. 드레이테리얼, 붉은 손. 왼팔을 노릴 것.]화르륵!
여명의 몸의 중심에서 피어난 불길은 삽시간에 붉은 거인과 중앙 신전, 그리고 괴수들을 둘러쌌다.
엘랑의 불. 도시를 통째로 불태울 수 있는 화염은 주가시빌리의 아지랑이를 장작 삼아 거대한 장벽을 만들었다.
사람이라면 겁에 질려 도망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불길이었지만, 괴수는 사람이 아니었다.
-캬아악!
녀석들은 살이 타건 말건 달려들었다. 불타는 동료를 방패 삼아, 꾸역꾸역 불길을 넘었다.
불길 속에서 타죽는 괴수가 어찌나 많은지, 잿가루에 숨이 막히고 시야가 전부 가릴 정도.
개중 몇 마리가 불길을 넘어오기도 했지만, 탕! 성녀의 쌍권총은 정확하게 녀석들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만 넘어와! 화염병 던져야 한다고!”
성녀의 투덜거림이 울리는 와중에도, 여명은 섬세하게 불길을 키웠다.
도시의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로 높고, 괴수가 넘어올 수 없을 정도로 두껍게.
[프랑스 잡놈의 재주… 그 재주가 얼마나 버티나 보자!]베리야 또한 지지 않고 구슬을 쏟아냈다.
피의 신을 운운하던 자신감이 어디 간 건 아닌지, 쏟아지는 구슬의 양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만큼 살기와 장작을 집어삼킨 주와이외즈 또한 착실히 불어났지만… 여명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상황을 인식했다.
‘시간을 끌고 있어.’
상대는 소련의 모든 스파이를 담당하던 괴물. 고작 빽빽거리며 괴수를 쏟아내는 게 전부일 리 없다.
마음 같아서는 녀석의 본체를 통째로 불태우고 싶었으나, 본체는 불길보다 빠르게 재생하고 있었다.
‘엿 같은 재생 괴물 같으니.’
그동안 그를 상대해왔던 적들이 들으면 기가 찰 생각을 떠올린 순간.
예상외의 인물들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돼지, 소, 말의 머리를 지닌…
‘양치기?!’
여명은 저 멀리서 불길을 향해 뛰어드는 녀석들을 보며 기겁했다.
설마, 한국이 베리야와 동맹을 맺은 건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무식하게 불길로 뛰어드는 괴수들과 달리, 녀석들은 보호막을 두른 채 가장 불길이 얇은 곳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이었다.
괴수들은 자연스럽게 녀석들을 공격하려다가, 양치기들이 들고 있는 뭔가를 보곤 갑자기 길을 터줬다.
양치기들 또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망설임 없이 베리야의 몸을 향해 내달렸다.
뭐지? 여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양치기들의 손에 들린 물건을 확인했다. 붉은 액체가 담긴 네모난 비닐… 혈액 팩이었다.
피의 신과 혈액 팩. 불길을 유지하던 여명은 성녀에게 외쳤다.
“성녀! 저 녀석들이 베리야에게 닿게 내버려 두지 마! 쏴!”
그의 고함이 끝나기도 전에, 성녀는 이미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쌍권총의 불을 뿜고, 가장 앞서가던 돼지머리가 픽 쓰러졌다.
그러자 곧 괴수들이 양치기들을 보호하듯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탕!
성녀는 괴수들의 작은 틈을 뚫고 한 마리 더 처치했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아무리 성녀라고 해도, 수백 마리의 괴수를 뚫고 녀석들을 저격할 수 없었다.
이윽고, 녀석들이 베리야의 몸에 닿은 순간.
철퍽! 양치기들의 몸이 그대로 폭발했다. 쏟아지는 피, 피, 피-
[하하하!! 운명은 나의 편이었다!!!]기껏해야 발끝을 덮을 양의 피였지만, 이어진 결과는 끔찍했다.
베리야의 몸에 깃든 신성이 폭발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무게추가 기울어지는 순간이었다.
‘제기랄.’
여명은 양치기들이 죽은 자리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베리야의 거대한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몸속 신성이 말하고 있었다. 녀석의 신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온다.’
그의 근육이 바짝 긴장한 순간.
베리야의 몸 곳곳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붉은 핏덩이… 아니, 하나하나가 여명의 몸통만큼이나 굵은 포탄들.
“혈마법으로 포탄을 만들었다고???”
포탄을 알아본 성녀가 기겁한 직후, 여명은 그녀를 안고 몸을 날렸다.
콰앙! 포탄이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재료는 피였지만, 위력은 일반 포탄과 다르지 않았다. 갈라지는 바닥과 튀어 오르는 돌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순간, 하늘을 메울 정도로 무수한 포탄이 여명을 쫓았다.
“붉은 레독스시여, 당신의 총이- 꺄악! 도전하나이다! 용사에게 당신의 힘을!”
성녀가 다급하게 시전한 축복이 여명의 몸에 깃든 직후. 여명은 한 손으로 성녀를 옆구리에 끼우고 남은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 – !!!
폭발하는 혜성의 빛.
길게 꼬리를 무는 검기가 밤하늘을 밝히고, 검기와 충돌한 포탄들이 우수수 한 줌 핏물로 녹아내렸다.
하지만 여명은 안심하지 않았다. 베리야의 몸에서 시작된 포탄들도, 쏟아지는 괴수도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줄어들지 않았으니까.
‘피를 흡수할수록 신성을 더 많이 사용할 수 있는 건가?’
고작 양치기와 혈액 팩의 피로 이 정도라니, 녀석이 이대로 사람들의 피를 빤다면… 걷잡을 수 없으리라.
사람들을 대피시킬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여명은 이를 악물었다.
‘신성에는 신성.’
판단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케프리!’
다짐한 여명이 마음속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 직후.
번쩍!
그의 몸에 깃들어있던 빛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어둠을 밝히는 아침의 빛.
그 찬란한 빛 속에 안긴 성녀는 기겁했다.
“으악! 잡신의 신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