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40)
을 위한 세계는 없다-640화(640/817)
EP.640 꺼지지 않는 해의 이야기 (4)
날아드는 포탄, 살이 타는 역겨운 악취, 무너진 건물이 내뿜는 분진, 그리고… 파도.
파도.
무너진 건물 사이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괴수들은 출렁거리는 파도처럼 보였다.
울부짖고, 뛰고, 달리는 와중에도 발을 맞추고 있는 까닭이었다.
처음 나치를 마주했던 소련군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성녀는 생물이란 질서를 벗어난 괴수가 질서를 유지하며 움직이는 모습이 참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파도가 다른 괴수들과 충돌하는 순간.
파도가 깨졌다. 바닷물이 아닌 피와 살을 흩뿌리면서.
그제야 현실감을 되찾은 성녀의 귓가로, 살로메의 목소리가 울렸다.
“봤죠?! 한 놈도 놓치지 않을 테니까, 이제 가세요!!”
그녀의 말에 호응하듯 하늘에서 피의 포탄이 떨어졌다.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하나의 빛이 밝게 빛났다.
성녀의 눈이 빛을 쫓아 움직였다. 그곳에는 용사가, 그의 연인이, 그리고 잡신의 화신이 있었다.
지옥 같은 전장에서 홀로 빛나는 그는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녀는 충동적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까치발을 들었다.
짧은 입맞춤, 강렬한 축복.
눈을 크게 뜬 여명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성녀가 그의 가슴을 밀었다.
“잡신은 해줄 수 없는 성녀의 축복이야. 가서, 이기고 와.”
장난스러운 말투였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여명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성녀님께서 그걸 바라신다면야.”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성녀는 몸에서 차오르는 신성을 느꼈다.
그리고 맞잡은 손이 떨어진 바로 다음 순간.
여명이 떠올랐다.
언제나 정갈하고 조용했던 성도의 밤은 때아닌 혼란을 겪고 있었다.
특히나 관광객들이 몰린 여관 지역이 그러했는데, 지구와 아샤 곳곳에서 모인 사람들은 여관 창문과 도로, 그리고 야외 광장에 모여 웅성거리는 까닭이었다.
-전쟁이라도 난 건가? 아니면 그냥 화재?
-마나로 붙인 불… 설마 프레시외즈?
-신들께서 노하셨다!!! 더러운 지구인들을 이 도시에 들이면 안 된다고 그리 말했거늘!!
-시, 시발, 저거 나만 보이는 거야? 너희는 저거 안 보여?
-성녀님, 우리 성녀님, 시카고와 만주에서 그러하셨듯 저희를 구해주소서….
모든 혼란이 향하는 곳은 저 멀리, 중앙 신전 지역에서 피어오르는 불이었다.
비정상적으로 높게 치솟은 화염.
그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연기를 내뿜고 있는 탓에, 불길 너머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드문드문 들려오는 폭발음과 진동이 말하고 있었다.
저곳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 모든 혼란이 공포로 번지지 않은 건 성기사들의 노력과,
-현재 성기사단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모두 당황하지 마시고,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불이 나기 훨씬 전부터 불이 난다며 사람들을 깨우고 다닌 거짓말쟁이 덕분이었다.
-아이고, 성기사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요! 저는 그냥 장난 좀 친 겁니다요!!
-변명은 검은 사제님들 앞에서나 해라!
-그, 그리고 진짜로 불이 났잖습니까! 저는 거짓말한 적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아이고, 성기사님!!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공교로운 일이었으나, 거짓말쟁이의 정체를 안 사람들은 관심을 끊었다.
관광객 등쳐먹던 악덕 상인.
그는 화재를 예측할 능력도, 알아도 사람들을 구할 인성도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러니까 파롤이나 호아나처럼 여명의 정체를 알고 있는 성기사들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 지구인이 제게 돈을 주고 시킨 일입니다요! 저는 시킨 일을 한 죄 밖에 없습니다!
두꺼운 달러 뭉치를 본 성기사들은 저 화재가 어떤 식이건 여명과 성녀님이 개입한 문제라고 확신했다.
두 사람이 아니면 누가 저만한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이만한 달러를 내놓겠는가?
그래서였을까? 세티와 미리디스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성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성도에 있는 모든 성기사들에게 전해라. 붉은 신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빛기둥을 뿜어내는 자들을 추적해라!
그렇게 시민들을 지킬 최소한의 인력만 남긴 성기사들이 우르르 성도 전체로 퍼지길 잠시.
여명을 아는 또 한 사람이 성기사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용사의 피를 찾아 여관 지역으로 달려온 킴 필비.
‘일이 꼬여도 너무 꼬였다. 누군가 우리 작전을 유출한 건가?’
타당한 의견이었다. 한두 개면 모를까, 이미 계획에 너무 많은 오차가 생겼다.
갑자기 기도회를 연 총대주교, 잘못된 용사의 피, 시민과 성기사들의 반응…
모든 것들이 일이 꼬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른 때였다면 작전을 중지하고 후퇴해도 모자랄 상황.
하지만 이미 시작된 작전을 멈출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승리 공식이 남아 있었으므로.
용사의 피.
다른 곳이 아닌 이 땅에서 직접 신의 축복을 받아낸 자의 혈통이라면, 베리야를 이 땅에 완전히 강림시킬 수 있다.
다른 에너지 생명체들처럼 신성이니 사제니 하는 단말기 없이, 직접 힘을 휘두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핵무기조차 앞서는 힘.
이것만 성공하면 사회주의는 부활할 수 있다. 금이 아니라 인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국가가 재건될 것이다.
비록 잔혹한 지배자가 군림하는 국가일지라도, 킴 필비는 인민의 국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망설임 없이 용사의 피가 느껴지는 여관으로 침투했다.
달칵, 조심스레 창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선 순간.
킴 필비의 몸이 정지했다.
소리를 죽이던 발도, 총을 쥔 손도, 언제든 튀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촉수마저도.
모든 게 우뚝 멈춘 채, 방의 주인을 바라봤다.
“…이츨리?”
아즈텍 신화 속 희생 의식을 관장하는 여신의 이름.
하지만 현대, 특히 남미 공산권에서 그 이름은 남미의 정치인들을 끔찍하게 살해한 미국 암살자의 코드네임으로 통했다.
목표물의 폐에 벌레를 집어넣어 암살하는 무시무시한 분홍 마녀.
기어코 자신의 주인들마저 벌레 먹이로 준 마녀가 지금, 용사의 피를 든 채로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네년이 어떻게 그 피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녀의 손이 흐릿해졌다.
챙! 날아온 단검이 그의 손, 정확히는 권총을 관통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킴 필비는 다급하게 인공 성물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다음 순간, 폭발하듯 뻗어 나가는 촉수와 분홍색 액체가 든 온갖 약병이 교차했다.
문답무용.
쨍그랑! 깨진 병에서 유독한 분홍 가스가 터져 나오고, 콰앙! 촉수가 가구를 박살 냈다.
조국을 배신한 빨갱이와 조국에서 도망친 암살자.
예정에 없던 두 사람의 격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하하!! 아이러니하지 않나? 너와 나, 공산주의자 두 명 모두 신성을 사용하다니!]날아오는 여명을 향해, 베리야가 소리쳤다.
“공산주의자 아니라니까.”
이미 수십 번도 넘게 했던 말을 다시 되뇌며, 여명은 더욱 빠르게 하늘을 박찼다.
삽시간에 좁혀지는 거리. 베리야는 광기에 찬 웃음소리와 함께 재차 소리쳤다.
[네가 오르세 타불을 구했다지? 용의 해방자! 대공포가 뭔지도 모르는 그 멍청한 용은 당당하게 모스크바로 날아왔었지. 지금의 너처럼!]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연에 가려진 베리야의 몸 곳곳에서 기다란 기관포 주둥이가 튀어나왔다.
아무르 기관포라 불리는 대공포와 유사한, 아니, 똑같은 총구 수십 개가 동시에 여명을 향하더니…
그대로 불을 뿜었다.
!!!!
하늘을 가득 메우는 포탄의 향연.
한발로 사람을 분쇄육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대공포 수백 개가 여명을 노리는 광경은 비현실적이다 못해 장엄했다.
그러나 포탄을 피하는 당사자인 여명은 황당함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쏟아지던 포탄도 그렇고, 지금 쏟아지는 대공포도 그렇고 무장 혈청으로 뭐 이딴 걸 만드나 싶었다.
피로 모양을 만들고, 마나로 화약을 대신하는 건가? 여명도 이런 생각을 못 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실제 포탄보다는 위력에서 떨어지는 편이라 시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위력이 떨어져도 포탄은 포탄.
다음 순간, 여명의 종아리에 포탄 한 발이 직격했다. 펑! 종아리가 그대로 너덜너덜해졌다.
환골탈태한 육체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기절하고도 남을 위력.
과거의 용이 그러했던 것처럼 속도와 몸만 믿고 접근하다간, 그대로 분쇄육이 되리라.
‘이쯤 되면 피의 신이 아니라 현대 무기의 신 아닌가?’
짧게 숨을 삼킨 여명은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 그는 용이 아니었고 상대도 용을 상대하던 모스크바 방공망이 아니었다.
대처할 수 있다. 수를 떠올린 그는 빠르게 하늘을 박찼다.
넘쳐나는 마나가 호응하고, 날아가는 가속도가 더해졌다.
이어지는 용사의 무술.
다음 순간, 콰르르릉!! 천둥소리가 밤하늘 가득 울려 퍼졌다. 검기와 포탄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천둥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결과는 무승부에 가까웠다. 포탄이 검기의 위력을 감소시킨 까닭이었다. 베리야는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놈의 검기! 지구의 신이라면 조금 더 현대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지!]직후, 녀석은 더 많은 피와 육체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대공포, 더 많은 포탄.
[고작 그만한 힘으로 ‘나’의 혁명을 막으려 했느냐?]피의 신의 분노를 따라 피로 이루어진 수천, 수만 발의 사격이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조금 전 일격으로 거리를 좁힌 여명은 어쭙잖게 회피 기동을 하는 대신, 재차 검을 휘둘렀다.
다시 천둥이 울리고, 여명은 생각했다. 이대로 접근해 드잡이질을 벌이는 건 하책이었다. 만에 하나 녀석이 자신의 피를 먹고 각성할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하책인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대대급 화력을 내뿜는 녀석과 장거리 전을 벌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으니까.
방법은 하나. 피를 주지 않으면서, 저 거체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강한 한 방.
순간의 생각을 끝낸 그는 그대로 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도망가느냐? 그래, 어디 멀리멀리 도망가 봐라! 내가 성녀의 피로 목을 축이는 동안 최대한 멀리 가보란 말이다!]직접 움직이지 못하는 와중에도, 베리야의 태도는 승자의 그것에 가까웠다.
여명은 그에게 뻐꾸기 혈통도 못 알아본 병신이라고 말하는 대신, 더욱더 고도를 높였다.
이윽고 포탄과 연기가 닿지 못하고, 성도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하늘에 오른 그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그대로 방향을 돌려- 아래로 강하했다.
중력과 함께 가속하는 여명의 몸 뒤로 빛나는 신성이 길게 늘어졌다.
[떨어진다고? 용보다도 멍청하구나!]녀석의 말대로,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건 대공포의 먹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베리야는 승리하지 못했다.
하늘에서 추락하는 여명의 몸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터져 나왔으므로.
[주가시빌리!]그가 서기장의 옛 성씨를 부르짖는 가운데, 대공포는 애꿎은 아지랑이만 꿰뚫었다.
[뭐?]설마 조금 전 낙하 쇼는 이걸 위해서?
뒤늦게 베리야가 상황을 파악한 순간, 주가시빌리의 아지랑이가 베리야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섬광.
번쩍!
먹구름 속에서 폭발하는 번개처럼, 검붉은 아지랑이 속에서 검기가 터져 나왔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렬한 빛.
빛이 지나간 자리로, 침묵이 차올랐다.
신의 당황이 섞인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이 사라지기 전에, 쩌어억-! 아지랑이 속 베리야의 다리가 갈라졌다. 거대한 몸뚱이가 기우뚱- 중앙 신전 쪽으로 기울어졌다.
쿠우웅…!
쓰러진 거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중앙 신전의 지붕이 폭삭 무너졌다. 또다시 성녀의 예지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크아악!!]그리고 베리야는 처음으로 고통을 표했다. 하지만 그게 곧 승리나 패배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지긋지긋한 소련산 재생 괴물은 다리가 토막 난 와중에도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을 뿐,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심지어 잘려나간 다리가 꿈틀거리며 몸으로 되돌아가기까지 했다.
물론, 여명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어디 수백 조각으로 쪼개진 뒤에도 살아있을 수 있나 보자.”
그렇게 여명이 다시 검기를 끌어올린 순간.
베리야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서기장의 이 무술을 이렇게나 자유자재로 쓰는 사람은 네가 유일하다. 네가 그러고도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느냐? 너는 지금 마르크스부터 이어진 원대한 꿈을 망가트리고 있다!]“아가리 닥쳐.”
마르크스는 무슨… 어디서 주둥이로 시간을 끌려고.
여명은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커다란 검기를 쏘아내 거인의 오른팔을 잘라냈다.
쿵! 잘린 팔이 땅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베리야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말 들어본 적 있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넌 우리 당원이다. 날 쓰러트린다고 그 사실이 변하진 않아! 미국은 반드시 널 노릴 거다!]이번에는 목.
[냉전은 끝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 계급이 존재하는 한, 자본가가 노동자를 학대하는 한 우리는 남아 있다! 생각해봐라! 나는 이 땅의 구원자다!]“잘난 서기장도 구원자를 자청했지. 너희 공산당의 헛소리는 너무 많이 들었어. 이제 그만 죽어라.”
[하, 서기장! 그는 겁쟁이였다! 신으로 향하는 길이 눈앞에 있었는데도, 그 길을 걷는 대신 다른 곳에 힘을 낭비했어! 하지만 나는 다르다!]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지 중 왼팔만 남은 베리야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나는 당당히 천상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나의 조국과, 나의 인민을 위해서!]녀석은 사이비 교주처럼 지껄였다. 공산주의자란 놈이 신이 된 것도 어이가 없는데, 종교인처럼 지껄이다니.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여명이 녀석의 사지를 전부 토막 낼 생각으로 한 번 더 검을 든 순간.
녀석의 몸에서 갑자기 아지랑이가 터져 나왔다.
독화나 비코프의 그것과 똑같은, 붉은색 아지랑이.
[너만 서기장의 무술을 익히고 있는 줄 알았느냐?]조금 전 여명처럼 주가시빌리의 아지랑이로 시야를 가린 베리야는 곧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여명이 검을 휘둘러 아지랑이를 밀어냈을 땐, 이미 준비를 끝낸 그의 상체가 쩌억- 갈라지며 커다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장이 있어야할 자리를 차지한 무장 혈청 덩어리.
그 덩치에 걸맞게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무장 혈청은… 동그란 무언가로 변했다.
폭탄.
여명이 비록 무기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다큐멘터리로 익힌 경험이 말하고 있었다. 저건 폭탄이다. 원자 폭탄인지, 아니면 단순히 폭탄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저만한 크기라면 이 주변 일대를 싹 쓸어버리고도 남을 거라는 것.
‘개자식이-‘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여명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주가시빌리 속 베리야를 향해 낙하한 찰나.
[감히, 신에게 대항하다니.]녀석의 웃음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명의 정신이 가속했다. 1초를 수십 조각으로 나눈 찰나의 순간 속에서, 그는 깨닫는다.
폭발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위력을 줄이는 것뿐. 시간은 없고, 더 나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여명은 검을 놓고, 양손을 펼쳐 다음 수를 준비했다.
왼손은 인벤토리를, 오른손은 진의를.
우선 왼손. 인벤토리 속에서, 용의 뼈가 튀어나왔다.
뒤틀린 마나를 머금은 카할 마그두의 뼈는 여명을 보호하듯 몸과 날개를 웅크렸다.
다음으로, 오른손.
그의 진의, 욕망의 검은 인력이 폭발을 끌어당겼다.
이윽고, 여명의 가속된 정신이 제 시간을 되찾은 순간.
!!!!!
폭발이 시작됐다. 소리보다도 먼저, 베리야의 상체가 산산 조각났다. 피의 거인은 미친 듯이 웃으며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다.
그리고 그 웃음 뒤로, 불길과 충격파가 뒤따랐다.
성녀도, 살로메도, 괴수도, 어쩌면 성도 중앙을 통째로 날려버릴 충격파.
여명의 진의는 그 충격파를, 불길을, 그리고 소리를 전부 끌어당겼다.
그렇게 물리법칙을 무시한 채 이끌린 폭발은, 여명의 코앞에서 물리법칙을 되찾았다.
!!!!
이윽고, 폭발이 용의 뼈를 뒤덮은 순간.
여명은 황금 사냥을 사용했다. 그의 전신이 흐릿해지며 첫 1초간 현실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1초. 너무나 긴 동시에, 너무나 짧은 1초.
직후, 현실로 돌아온 여명의 몸이 폭발에 휩쓸렸다.
!!!!!!!!!
고막이 먼저 찢어진 덕분에,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다. 각막이 녹아내린 탓에, 자신이 얼마나 폭발을 흡수했는지 볼 수 없었다.
그나마 1초를 번 덕분에 마나는 남아 있었다. 여명은 자신을 둘러싼 용의 뼈가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걸 느꼈다.
그 이상은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신경이 타버린 탓이리라.
떠 있는 걸까? 추락하는 중일까? 그것도 아니면 벌써 땅에 처박힌 걸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 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은 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베리야보다도 더한 재생 괴물이었다.
일어나.
아득한 정신 속에서, 여명은 자신의 몸에게 명령했다.
가장 먼저 호응한 건 진의였다. 환골탈태할 때 심장에 박아 넣은 그의 깊고 깊은 어둠은 말없이 심장을 움직였다.
일어나.
그다음은 주가시빌리였다. 그의 내장 곳곳에 스며든 붉은 살기는 강제로 다른 기운들을 붙잡아 일으켰다.
세계수의 마나, 뼈와 골수. 용의 뒤틀린 마나, 위장. 마지막으로 혈관 속 파양결까지.
환골탈태 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그의 몸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끊어진 뼈와 혈관이 자라나고, 망가진 내장이 재생되고…
시간 감각조차 없던 순간 속에서,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나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짝짝짝 – !
누군가 그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놀란 여명이 고개를 돌려보니, 낡은 나무 의자에 앉은 녹색 여인이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녹색 추기경님?”
여명이 해가 지기 전에 본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되묻자, 그녀의 얼굴에 기다란 미소가 걸렸다.
『그녀의 간택자,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의 아이야.』
“….”
『내 분명 선물을 받으러 오라고 했거늘. 생각보다 훨씬 늦게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