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41)
을 위한 세계는 없다-641화(641/817)
EP.641 꺼지지 않는 해의 이야기 (5)
“…이사기녹.”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녹색 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추기경의 몸을 빌린 신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그래, 그것이 내 이름이다. 아이야.』
갑작스러운 만큼 당황스러운 만남이었다. 녹색 신은 무릎을 꿇으려는 여명을 제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박, 사박- 신발을 신고, 나무 바닥 위를 걷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발에선 흙을 밟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흙 소리와 함께 다가온 그녀는 여명의 볼에 손을 올렸다. 추기경의 몸을 빌린 신의 손은 따스했다. 푸른 여름의 그것처럼.
『직접 보니 더욱 놀랍구나. 아이야, 너는 진정으로 그녀의 아들이로구나.』
“….”
『얼굴에 반항심이 그득그득한 게, 아주 제 어미와 판박이야.』
다른 사람들은 해주지 못 하는 어머니의 이야기.
다른 때라면 귀를 기울였을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여명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여신님, 제가 이곳에 떨어진 지 얼마나 지났습니까?”
『대략 5분 정도 지났단다.』
몸을 전부 재생하는 시간치곤 짧았지만, 전투 중 이탈 시간치곤 너무 길었다.
여명이 아직 전장에 남아 있을 살로메와 성녀를 떠올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마자, 여신께서 덧붙였다.
『신 앞에서도 다른 사람 걱정을 하다니. 갸륵하구나. 허나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바깥 시간은 3초도 흐르지 않았으니. 네가 추락하는 시간까지 합쳐도, 아직 1분도 지나지 않았다.』
“바깥… 시간이라뇨?”
녹색 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명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나무로 만들어진 천장에는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가 추락하며 만들어진 구멍.
한데, 그 구멍은 반투명한 녹색 장막으로 막혀 있었다. 아마 어떤 결계 같은 게 펼쳐져 있는 듯했다.
‘재생할 시간을 벌어주신 건가…?’
상상도 못 한 선물이었다. 여명은 진심 어린 감사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녹색 신은 미소 지었다.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말은 미소와 전혀 달랐다.
『안달 내지 말거라. 아이야, 이대로 나가서 다시 싸운들, 너는 피의 신에게 살해당할 뿐이니.』
“그건 싸워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진다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긴다고 해도 죽을 것이다. 주사위를 굴려 가며 강림한 신을 무찌르기 위한 대가란 그런 것이고… 너는, 주인공이 아니니.』
“….”
녹색 신의 말은 부드럽게 여명의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어떠한 진실도 그의 투지를 꺾기엔 모자랐다.
투쟁심으로 들끓는 금빛 눈동자.
그 눈에서 옛 기억을 떠올린 녹색 신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베리야가 앞으로 백 명, 아니, 수십 명 분량의 피를 더 먹으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될 것이다. 용사의 피를 먹지 않는 이상 평생 이 땅이 그의 감옥이 되겠지만… 마침 이 도시에 용사가 둘이나 있구나.』
“….”
『아, 물론, 아이야, 너의 피에는….』
그 순간, 녹색 신의 머리 뒤에서 청색 빛이 번쩍였다.
화가 난 것처럼 빠르게 점멸하는 빛을 본 녹색 신은 말을 끊고 어깨를 으쓱였다.
『스포일러는 금지라는구나.』
이건 또 뭐지. 여명이 놀란 눈으로 청색 빛을 바라보는 가운데, 여신께서 말을 돌리셨다.
『어쨌거나, 아이야. 너와 변경백이 지금 당장 성도를 떠난다면 베리야는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을 때까지 이 도시에 갇혀 수음이나 할 것이다.』
“….”
지금처럼 직접 움직이지 못한 채로 계속 성도에 처박혀 있을 거란 소리인가? 그건…
『…공산주의가 세상을 바꿀 마지막 기회가 사라진다는 뜻이지.』
녹색 신은 자연스레 여명의 뒷말을 가로챘다. 여명은 설마 싶은 마음으로 덧붙였다.
“…그것이 시나리오입니까?”
그러자 녹색 신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치챘느냐? 놀랍구나. 작가의 노트에는 없던 이야기일 텐데.』
“녀석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당장 신의 힘을 세 개나 가지고 있던 플레이어도 제 손에 죽었습니다.”
플레이어를 언급한 여명의 눈동자는 한층 더 뜨거워졌다.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던 녹색 신은, 대뜸 이런 제안을 꺼냈다.
『너만 원한다면, 지금 당장 너와 인연이 있는 모두를 도시 바깥으로 보내주마. 어쩌겠느냐? 살겠느냐, 아니면 목숨을 잃을 걸 각오한 채 싸우겠느냐?』
“…싸우겠습니다.”
즉답. 일말의 고민도 없이 시나리오를 망가트리겠다는 그를 보며, 녹색 신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녀는 확인하듯 물었다.
『왜 그래야 하느냐? 너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하였잖느냐. 빨갱이는 빨갱이고, 너는 너다. 그런데도 이 도시를 위해 목숨을 걸 이유가 있느냐?』
녹색 신은 용사라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혹은 빨갱이를 쓸어 버리기 위해서- 같은 대답을 기대했다.
하지만 여명의 대답은 신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성녀를 위해서 싸우겠습니다.”
『성녀? 어느 쪽 성녀 말이냐?』
전대 성녀와 현대 성녀. 여명은 둘 중 하나를 고르지 않았다.
“둘 모두입니다. 전 부모님 무덤 앞에서 날뛰는 빨갱이를 용서할 생각도, 애인의 고향이 불타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생각도 없습니다.”
『오… 근데, 현대의 성녀는 불타는 쪽을 더 좋아한다만?』
여명은 불현듯 화염병을 던지는 성녀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떨쳐냈다.
“그녀가 직접 태우는 것과, 빨갱이가 태우는 건 다른 이야깁니다.”
『사랑의 궤변이라.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구나.』
“….”
여명이 대답하지 않자, 녹색 신은 킥킥 웃었다. 어딘가 성녀와 닮은 미소였다.
『아이야, 네 각오를 내가 잘 알았다. 허나 너는 무식하게 적을 향해 달려드는 인간이 아니니, 분명 베리야에게 이길 방법이 있는 것이렷다?』
핵폭탄과 주사위, 그리고… 변경백.
여명이 자기도 모르게 두 개의 힘을 떠올린 순간, 녹색 신이 그의 생각을 읽은 듯 이렇게 말했다.
『허나, 그 방법이 무엇이건, 베리야에게 쓰지 말거라.』
“…예?”
『내가 확신하건대, 너의 앞길에는 오늘 같은 시련이 몇 번이고 더 펼쳐질 것이다. 비장의 수는 그때를 위해 아껴두거라. 오늘은….』
말끝을 흐린 녹색 신은 손을 들어 여명의 손바닥과 자신의 손바닥을 포갰다.
그리고, 사르륵-
그녀의 손바닥이 여명의 손을 떠난 직후, 여명의 손바닥 위로 꽃잎이 휘몰아쳤다.
아름다운 꽃의 소용돌이.
소용돌이는 천천히 사라졌다. 그리고 꽃잎이 여명의 발치로 떨어진 순간.
그의 손바닥 위로 나무로 이루어진 작은 주사위 하나가 나타났다.
“주사위… 이걸 왜 성녀도 아닌 제게…?”
『내가 처음에 말하지 않았느냐. 너에게 줄 선물이 있노라고.』
녹색 신은 그대로 주사위를 여명의 손아귀에 올렸다.
뭔가 극적인 건 느껴지지 않았지만, 주사위의 위력을 아는 여명은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녹색 신이 말했다.
『나는 믿었다. 네가 그녀를 닮은 아이일 거라 믿었다. 그래서 우리를 비롯한 모든 별들이 주사위를 던지는 와중에도, 나 홀로 참고 또 참았노라.』
“….”
『그리고 보아라. 내가 옳지 않았느냐?』
여명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단순히 신의 칭찬 때문인지, 아니면 어머니와 닮았단 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녹색 신이 조심스레 그의 손을 기울였다는 사실뿐이었다.
또르르- 탁.
땅으로 떨어진 주사위의 눈은 5.
꽤 높은 숫자였으나, 녹색 신은 덤덤하게 말했다.
『이것으로, 피의 신의 주사위는 무효화 되었다.』
또 다른 주사위를 무효화로 만드는 주사위…? 여명은 그의 얼굴에 손을 올리는 녹색 신을 똑바로 바라봤다.
녹색 신은 손자를 처음 만나는 할머니처럼 조심스럽게 그의 볼을 쓸며 말했다.
『내 조언하노니, 주사위를 아끼지 말거라. 너의 주사위는 언제나 네가 아는 것보다 한 개 더 많다.』
“…예?”
『이만큼 알려준 것만으로도 청색이 지랄을 하는구나. 자! 이제 가거라. 가서 조지아의 도살자와 피 냄새나는 빡빡이, 그리고 운명에게 당당하게 맞서거라.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신께서는 자기만 아는 소리를 늘어놨다. 여명은 떠나기 전에 신께 여쭸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라니, 넌 내게 무언가 갚을 필요가 없다. 내가 무엇의 신인지 잊었느냐?』
“….”
기억하고 있었다. 사랑과 생명, 그리고 다산.
괜히 부끄러워진 여명은 한 번 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그대로 마나를 끌어 올렸다.
!
번쩍이는 빛과 동시에, 여명이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녹색 신은 천장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빈 허공을 쳐다보았다.
『이것으로, 우리는 모든 주사위를 잃고 게임판에서 떠나노라. 하지만 우리는 어른의 의무를 다했음이니…… 애써 젊은이에게 줄을 묶어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이곳을 지켜보던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부끄러움 때문인지, 혹은 뻔뻔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시이벌.
라쉬크는 촉수를 피하며 욕을 삼켰다.
마나를 가득 머금은 촉수는 그 자체로 흉기였다. 살짝 스치기만 했는데 특수 처리된 실험 가운이 찢어지는 게 그 증거였다.
이게 얼마짜린데!! 시발!!
바닥을 굴러 촉수를 피한 라쉬크가 발작적으로 단검을 던지건 말건, 침입자는 더욱 강하게 그녀를 몰아쳤다.
“죽어라. 이츨리!”
거기다 잊고 싶은 예전 코드네임을 지껄이기까지.
“시발, 그 이름 버린 지 십 년도 넘었거든!”
그녀가 남미 혁명가와 정치인들을 죽였기로서니, 멕시코 신화 속 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건 오글거리는 일이었다.
특히 자신이 원해서 죽인 게 아닌 경우에는 더더욱.
라쉬크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즉발성 독약을 던졌다.
쨍그랑!
촉수가 가볍게 그녀의 독약 병을 쳐냈다. 맞는 순간 피와 살을 녹이고, 피를 오염시키는 맹독이었음에도,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촉수를 상대론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법적인 효과가 든 물약을 쓰자니, 성물이 뿜어내는 반마력장이 문제였다.
시발 소련놈들. 뭐 저딴 걸 만들었어? 한 번 더 욕을 삼킨 라쉬크는 촉수를 피해 바닥을 굴렀다.
촉수의 주인, 킴 필비는 그런 그녀를 조롱했다.
“실력이 많이 죽었군. 이츨리.”
라쉬크는 암살자를 상대로 기습해놓고 뭐라느냐고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를 가르친 미국에 의하면, 목숨이 걸린 싸움에 정의나 룰 따윈 없었다.
오직 누가 죽느냐, 사느냐 뿐.
그래서 그녀는 대답 대신, 책상 아래로 몸을 날렸다.
기껏해야 나무로 만든 책상이 그녀를 보호해줄 거라고 믿어서? 아니, 책상 서랍에 숨겨진 물건을 꺼내기 위해서.
그녀가 현역시절부터 써온 단검.
남미 정치인들과 터스키기 연구소의 과학자들의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게 빛나는 단검을 꺼내 휘두르자, 후두둑! 그녀를 노리던 촉수들이 떨어져 나갔다.
“용의 뼈?”
강철도 으스러트리는 촉수가 허무하게 잘려나간 걸 본 킴 필비는 곧장 단검의 정체를 눈치챘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라쉬크의 돌진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넓다고 해봐야 여관방.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라쉬크의 단검이 킴 필비의 목을 노리고 가속했다. 단검이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섬뜩했다.
킴 필비는 허리를 굽혀 단검을 피했다. 원래 이런 큰 회피 동작은 다음 공격에 노출되는 바보짓이었으나, 그의 몸에서 돋아난 촉수는 능숙하게 단검을 막아냈다.
쩡- !
마나와 칼날이 충돌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추가 수당도! 없는! 데! 내가! 왜! 이 지랄을!!!”
라쉬크는 비명인지 분노의 외침인지 모를 말을 소리치며 계속 단검을 휘둘렀다. 기껏해야 어른 손바닥보다 조금 긴 칼날이었지만, 어마어마한 속도가 짧은 칼날을 만회했다.
킴 필비의 촉수 또한 그녀에게 굴하지 않고 끝없이 재생하며 단검을 막아냈다. 난타전으로 가면 성물이 있는 그가 압도할 게 뻔했기에.
그리고, 여관 방 전체가 잘린 촉수와 충격파로 엉망이 될 때쯤.
촉수의 속도가 라쉬크를 압도했다. 라쉬크 또한 비범한 초인이었으나,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인공 성물을 쓴 괴물과 싸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라쉬크 또한 그 사실을 인지했다. 여명을 옆에서 본 그녀는 재생 괴물을 상대하는 게 얼마나 무식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고, 이대로 죽일 수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다음 수로 넘어갔다.
그러니까, 기습적으로 단검을 집어 던졌다.
설마 이만한 무기를 투척할 줄 몰랐던 킴 필비는 조금 늦게 반응했다.
아슬아슬하게 촉수 하나가 단검을 막았지만, 막힌 단검마저도 킴 필비의 복부를 꿰뚫기엔 충분했다.
푸욱! 킴 필비는 대장을 파고드는 고통에 입술을 씹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승부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독약도 안 통하고, 무기도 잃은 암살자는 그를 이길 수 없었으므로.
“이츨리. 몸에 붙은 살덩어리를 볼 때부터 수준이 떨어진 건 알았지만, 설마 판단력까지 쓰레기가 되었을 줄이야.”
“미친 노인네 말본새보소. 이거 살 아니고 몸매야!!!”
그렇게 빽 소리치는 라쉬크의 손가락 사이로 작은 유리 조각이 번뜩였다.
킴 필비는 그깟 유리 조각으로 뭘 할 수 있겠냐는 마음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녀가 유리 조각을 던진 건 그가 아니었다.
용사의 피가 든 비커.
그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끼며 몸을 날렸다. 다음 순간, 푹! 어깨에 유리 조각이 박히는 게 느껴졌다.
“이 미친년이!”
킴 필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이, 라쉬크는 피가 든 비커를 챙겨서 훌쩍 뒤로 물러났다.
꽈악- 비커를 쥔 그녀가 말했다.
“미친놈은 이 시간에 여자 혼자 있는 방에 들어온 그쪽이지! 손녀까지 있는 사람이 뭐 하는 짓이야!?”
“….”
가족을 운운하며 도발했음에도, 킴 필비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라쉬크 손에 든 용사의 피를 바라봤다.
“그 피를 넘겨라. 그러면 목숨은 살려주지.”
“좆까.”
“….”
킴 필비는 우뚝 솟은 라쉬크의 중지를 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저년을 죽여버리고, 바닥에 흘린 피 몇 방울만 챙겨가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황태자의 피가 부족해서 베리야가 완전히 강림하지 못했다는 가설이 마음에 걸렸다.
더는 실패해선 안 된다. 어떻게든 저 한 병을 온전히 가져가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킴 필비는 천천히 촉수를 거둬들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래를 하지.”
“거래는 씨발, 개소리는 개집에서나 해.”
라쉬크는 비커를 쥔 손에 힘을 줬다. 킴 필비는 침착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그 피를 온전히 넘겨주면, 아무 일도 없이 끝날 거다. 나와 우리의 서기장, 그리고 원한다면 내 개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
“이 싸움은 우리가 이겼다. 네가 누구와 손을 잡고 그 피를 연구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함부로 가지고 있을 피가 아니다. 이 이상 큰일 치르지 말고, 자. 넘겨라.”
“넘기긴 시발, 조금 전까진 날 죽이려고 그 지랄을 해놓고, 잘도 살려주겠네.”
“그 지랄을 하던 인간이 이렇게 정중하게 부탁하는 이유가 뭐겠나? 진심이란 원래 급박한 상황에 나오는 거다.”
“….”
“만에 하나… 그 피를 쏟기라도 하면, 나는 너를 아주 끔찍하게 죽일 거다. 네가 남미의 동지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거짓말이었다. 그에겐 시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긴 말이긴 했다.
내장에 벌레를 채워 죽이는 그녀의 잔혹한 암살 방식은 스탈린 실종 시기와 맞물려 남미의 혼란에 큰 영향을 미쳤으니까.
어쨌거나, 그는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라쉬크는 잠시 그 손을 바라보다가, 창문 밖을 바라봤다.
이렇게나 험악하게 싸웠는데도, 아직까지 한 명 도우러 오지 않는 상태.
분명 바깥의 사고 때문에 지원 올 병력이 없는 것이리라.
결국, 이 상황을 그녀 혼자서 헤쳐나가야 한다는 말인데… 암살을 위한 준비를 끝낸 상태라면 모를까, 이렇게 기습당한 상태에서는 답이 없었다.
‘어쩌지.’
이대로 피를 넘기는 게 상책이었으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왜일까? 여명이 자신을 위해 직접 뽑아준 피라서?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이건 그냥… 그래, 추가 수당 대신 받은 물건이라서 그렇다.
그래 씨발, 어떻게 얻은 피인데, 이걸 그냥 줘?
버티자. 버티면서 시간을 끌면, 분명 그 자식이 도우러 와줄 거야.
그렇게 생각을 끝낸 라쉬크는, 시간을 끌 요량으로 물었다.
“노친네. 피를 넘기는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조건? 감히 이 상황에서 협상을 운운하는 거냐?”
“협상이고 뭐고, 이건 연금술사의 자존심이야. 적어도… 이 피로 뭘 하려는 건지 알아야겠어.”
“….”
“응? 말해봐. 이제와서 여명의 피로 뭘 하려는 거야? 당신들이랑 싸우면서 적어도 십 리터는 넘게 쏟았을 텐데.”
“…뭐?”
누구의 피? 킴 필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놀란 라쉬크가 당장이라도 반격할 자세를 잡았으나, 한 방 먹은 건 그녀가 아닌 킴 필비 쪽이었다.
“그 피가… 누구의 피라고?”
“어… 천여명?”
“이 천박한 실험실 계집이…! 아직도 장난질할 여유가 남아 있는 거냐? 그건 천여명의 피가 아닌, 용사의 피다!”
그제야, 라쉬크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천여명은 용사다. 킴 필비는 용사의 피를 빼앗으러 왔다. 근데 천여명이 용사란 사실은 모른다…?
‘…병신인가?’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천여명의 피를 감지하지 못한 거라면?
그 순간, 라쉬크의 눈으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무장 혈청이 들어왔다.
여명의 피에서 분리해낸 무장 혈청.
설마, 저 무장 혈청이 피를 감지하는 걸 막아주고 있었던 건가?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증명할 수 없지만, 인간이 쓸 수 있는 무장 혈청 아닌가. 무슨 비범한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 가설과 상관없이, 지금은 눈앞에 있는 킴 필비가 먼저였다.
녀석은 그녀에게 촉수를 겨누며 말했다.
“기회는 이미 줬다. 이츨리. 당장 그 피를 내놓거나, 죽어라.”
목소리에 담긴 살기가 어마어마했다. 이게 진짜 마지막 경고가 틀림없었다.
라쉬크는 비커를 꽉 쥐었다. 이대로 줘야 하나? 상식적으로는 그게 맞았다.
맞았는데…
손에서 힘이 풀리질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킴 필비의 태도를 보아하니, 이 피가 여명의 싸움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게 확실했으니까.
물론 아닐 확률도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행동 때문에 여명이 잘못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이 피 때문에 여명이 죽기라도 한다면…?’
시발. 그녀는 가슴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을 삼켰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의리? 정? 호감?
아니, 전부 아니다. 이건…
“…하, 그놈의 근로 계약이 뭐라고.”
그래, 근로자는 근로 계약 규정이 없어도 민법상 신의성실원칙에 따른 성실의무를 지는 법.
그리고 이 순간, 성실의무는 딱 하나였다.
“안 돼!!!”
킴 필비의 비명과 동시에, 그녀는 비커를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용사의 피가 허무하게 여관 바닥을 적시는 순간, 킴 필비의 촉수가 일제히 그녀를 노리고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