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45)
을 위한 세계는 없다-645화(645/817)
EP.645 당국의 정당한 요구에 대한 소비예트 계승자의 답변. (2)
쇠미리는 다급한 걸음으로 여관 계단을 올랐다. 바람을 휘감은 그녀의 발은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보다도 빨랐다.
그리고 몇 초도 흐르기 전에, 쾅! 그녀는 방문을 박살 내며 안으로 돌입했다.
“라쉬크!”
비산하는 나무 조각 사이로, 그녀의 완드가 번쩍였다. 세계수의 결정을 따라 복잡한 바람 마법이 칼날처럼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녀의 마법이 발사되는 일은 없었다.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뜨겁게 달아오른 전투의 열기나, 전투 후의 냉혹함도 아니었으니까.
조용하다 못해 허무한 침묵.
그나마 피에 젖은 구더기 공주만이 전투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도 응급치료를 끝낸 듯 가느다란 숨을 내쉬고 있었다.
뭐지?
미리디스는 딱딱하게 굳은 킴 필비를 힐끗거리며 구더기 공주에게 다가갔다.
“라쉬크? 괜찮아요?”
“아니, 뒤지게 아파. 성녀… 성녀를 불러줘. 강탈해간 최음제 값을 갚을 때가 됐어.”
다행히 목숨이 위험한 상처는 아닌지, 구더기 공주는 당당하게 헛소리를 내뱉었다.
쇠미리는 그녀 옆에 가득 쌓인 빈 약병들과 멍하니 서 있는 킴 필비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약으로 제압한 건가요?”
대답은 구더기 공주가 아닌 킴 필비에게서 나왔다.
“아니. 이츨리는 내게 패했다.”
화들짝 놀란 쇠미리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완드를 겨눴다. 그러거나 말거나, 킴 필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와 라쉬크를 바라봤다.
“그 귀… 데메론드의 딸이로군.”
“….”
“너는 무슨 입장으로 이곳에 온 거냐. 엘프? 공산주의자? 아니면 단순히 천여명의 동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쇠미리는 그 질문을 무시하지 않았다.
“…용사의 동료.”
그건 킴 필비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 위로 놀람과 당황이 떠올랐다.
“그가 용사라는 사실이 대단한 비밀도 아니었나 보군. 데메론드, 그 귀쟁이조차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가 말끝을 흐리는 사이, 쇠미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모르세요.”
“뭐?”
“제가 용사 파티의 일원이라서 아는 거죠.”
“….”
담담한 진실,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살의.
미리디스가 이렇게 쉽게 진실을 말해주는 건, 그를 죽일 생각이란 증거였다.
킴 필비는 그 당돌한 자신감에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역시 데메론드의 딸년이라고 수긍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그가 답을 찾기 전에, 쇠미리가 먼저 물었다.
“KGB는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죠? 하던 대로 노멘클라투라들과 함께 연방의 유산이나 까먹지 않고.”
“모든 건… 소비에트의 부활을 위해서다.”
쇠미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킴 필비가 바라보던 창밖을 봤다.
“…저 괴물이 공산주의와 무슨 상관인데요?”
“괴물인지,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외형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정말로 중요한 건, 저 거인이 소비에트를 부활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무슨 개소리….”
“개소리? 역사도 모르는 애송이 년이 잘도 지껄이는군.”
“주둥이 조심해. 킴 필비.”
쇠미리가 정색하기 무섭게, 킴 필비가 버럭 말을 이었다.
“작금의 모스크바를 봐라. 한때 지구와 아샤의 절반을 지배하던 나라는 어디 갔지?”
“….”
“고작 시베리아에서 튀어나오는 괴수 때문에 소비에트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나? 아니, 인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자원도, 땅도! 전부 그대로 있다. 소비에트는 여전히 그곳에 있단 말이다! 하지만 모스크바는 연방을 부활시키긴커녕, 남은 유산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지! 어째서 그러한가? 답은 너무나 간단하다.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다!”
쇠미리는 마법을 발사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정보는 많을수록 좋았고, 킴 필비는 아직 살기를 풍기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성도를 파괴할 학살자를 새로운 소련의 지도자로 만들겠다고?”
“그래, 그 길이 유일한 길이라면, 기꺼이 그 길을 걸어야 하는 법이다.”
즉답이었다. 쇠미리는 참지 못하고 이죽거렸다.
“독재와 학살을 옹호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맑스가 무덤에서 통곡하겠네요.”
“학살을 옹호하는 게 아니다. 현실을 보는 거지.”
“….”
“러시아 제국을 무너트린 건 평화로운 율리 마르토프의 멘셰비키가 아닌 극단적인 레닌의 볼셰비키였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죽이고 대숙청으로 권력을 잡았다. 권력이란 피에서 나오는 법이다.”
거기까지 말한 킴 필비는 쇠미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세계수의 결정이 박힌 완드가 부르르 떠는 가운데, 엘프가 말했다.
“참 대단한 신념이시네. 그래서… 그 대단한 신념을 가지신 분이 여기서 왜 좌절하고 있죠?”
“….”
짧은 침묵.
창문 너머 소란스러움이 침묵 사이로 파고들 때쯤, 킴 필비가 대뜸 이렇게 물었다.
“천여명… 공산주의자가 아닌 그가 어떻게 계승자가 된 거지?”
“계승… 뭐요?”
“주가시빌리, 피눈물, 무장 혈청, 그리고 적기 훈장… 그는 누가 봐도 소비에트의 계승자다. 우리가 억지로 만든 계승자가 아니라, 진짜 서기장의 계승자.”
“…??”
“황가의 사생아이자, 용사 혈통이라는 것까지 계산하면 저 거인… 아니, 베리야보다도 더 완벽한 계승자라고 볼 수 있지. 아샤인들 중 많은 이들이 그를 지지할 테니.”
하지만 여명 본인은 소비에트 부활은커녕, 공산주의자로 불리는 것조차 거부했다.
이게 단순히 우연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피눈물을 익힌 과정부터 이상했다.
모리네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던 비전 유물이 덜컥 그 녀석을 선택하다니?
마치 누군가 그에게 모든 유산이 모이도록 유도한 것처럼-
그 순간, 쇠미리가 그의 생각을 끊었다.
“사생아라니, 여명은 적장자예요.”
“…그가 황제의 친아들이란 말이냐?”
킴 필비가 당혹했고, 뒤이어 쇠미리도 당황했다.
“황가는 뻐꾸기 당해서 용사 혈통을 잃었어요. 아마 차원문이 열리기 전에 벌어졌던 형제 전쟁 때 끊어진 걸 텐데… 몰랐어요?”
“…???”
차원문이 열리기 이전 역사라니. 그제서야 황태자의 피가 왜 먹히지 않은 건지 깨달은 킴 필비가 떠듬떠듬 물었다.
“그러면 53대 변경백이라고?”
“…53대?”
“변경백이 52대 가주니, 그는 53대겠지.”
그때, 천으로 상처를 싸매고 있던 라쉬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뭔 놈의 정보 조직이 아는 게 하나도 없어?”
“….”
킴 필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사이, 쇠미리가 덧붙였다.
“변경백은 43대 가주세요.”
“아니, 그럴 리가…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이런 정보를 틀릴 것 같나? 누군가 우리 정보를 조작할 리도 없-”
쇠미리는 다급히 변명하는 킴 필비의 말을 끊었다.
“딱 한 명 있죠. 당신들의 정보를 조작할 수 있는 사람.”
소비에트의 정보 조직의 머리 위, 아니… 모든 소비에트 연방의 가장 위에 있던 자.
그분이라면 KGB의 모든 정보를 조작할 수 있었다. 킴 필비는 조금 전까지 느꼈던 두려움이 사실이 된 것을 느끼며 한탄했다.
“…정말로 그분께서, 모든 걸 의도하셨단 말인가?”
대체 왜? 천여명에게 대체 뭐가 있길래 이런 일을 계획하셨단 말인가?
그냥 명령만 내렸어도, KGB는 기꺼이 따랐을 터인데… 그의 감정이 복잡해지는 사이, 쇠미리가 물었다.
“당신이 피를 흘리는 쪽이 되어 보니 어떤가요?”
“….”
킴 필비는 음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렇지 않다. 이 길이 유일한 길이라면, 기꺼이 그 길을 걸어야 하는 법이니까.”
조금 전에 했던 말의 반복.
쇠미리는 그의 신념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그를 향해 공격을 준비했다.
“미친놈.”
완드에 마나가 모였다. 협상이나, 항복은 없었다. 서로가 그냥 헤어지기엔 너무 많은 진실을 꺼낸 뒤였다. 킴 필비는 성물의 마나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데메론드의 딸이여, 너 혼자 날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누가 혼자라고 했어요?”
다음 순간, 기다렸다는 듯 두 소녀가 깨진 여관 창문 사이로 등장했다.
탁! 기다란 불의 검을 든 붉은 머리 소녀와 양손에 소총을 든 연두색 머리 소녀.
“…희생양.”
희생양 자매, 오시리와 이시스는 킴 필비의 도주 경로를 틀어막으며 말했다.
“드디어 우리도 거물을 잡네.”
“예아.”
킴 필비는 자신을 둘러싼 소녀들을 쓰윽 훑어보며 말했다.
“너희가 인질로 잡히면, 천여명이 어떻게 나올지 보지.”
그가 자세를 잡고, 구더기 공주가 후다닥 테이블 뒤로 도망가는 찰나.
전투 직전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바로 그 순간에.
?
공기가 변했다.
쇠미리와 킴 필비는 물론이고, 빨갱이와 거리가 먼 양 자매조차 곧바로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무언가.
“설마…?”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떠올린 쇠미리가 숨을 삼키는 가운데, 킴 필비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커헉…!”
그의 가슴에 인공 성물, 피에 젖은 레닌 훈장이 부르르 떨렸다. 짙은 신성이 터져 나오고, 고통을 참지 못한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 이건… 크흑, 설마…! 정말로 그분께서…?”
질문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순간.
성도의 시간이 정지했다.
[찬양하라! 우리의 자유로운 조국을! 인민들의 영광이 확고한 보루를! 소비에트의 깃발! 인민의 깃발이 승리에서 승리로 이끌어 주리라!]귀를 울리는 음악, 하늘로 치솟는 불꽃과 매연, 죽은 괴수의 시체, 뒤틀린 피의 거인, 그리고 모든 걸 집어삼킨 성도의 검은 밤하늘까지.
멈춰버린 세상 속에서 움직이는 건 단 한 명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계단을 내려오듯 하늘에서 내려오는 남자.
그가 누군지 물어볼 것도 없었다.
풍성한 수염과 새하얀 소비에트 대원수 복장, 그리고 가슴에 달린 노란 별… 그러니까 소비에트 금성 영웅 훈장이 그가 누군지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이오시프 스탈린.
거대한 밤하늘을 등진 그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느긋하게 내려왔다.
이윽고, 거인의 얼굴 높이까지 내려온 순간.
베리야가 소리쳤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스탈린은! 죽었다!! 내가 직접 확인했다!!! 시베리아 제1 연구실과 함께 차원 구덩이 너머로 사라지는 걸 봤단 말이다!!!!] [당신이 살아있을 리 없어!!! 그래! 가짜!! 넌 가짜야!!!]마지막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하늘에서 내려온 남자, 스탈린은 뒷짐을 진 채로 말했다.
『라브렌티. 넌 언제나 믿고 싶은 것만 믿었지. 일머리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명령에 따르는 개새끼 이상은 될 수 없었어.』
[감히…!]분노? 두려움? 알 수 없는 감정을 따라 거인의 숨소리가 격해졌다.
[나는 신이다!! 신이란 말이다!!!]직후, 조금 전까지 그렇게나 아끼던 신성을 장작 삼아 베리야의 손이 움직였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붉은 거인의 주먹이 휘몰아쳤다.
스탈린은 한심하다는 듯 손을 들었다.
『더는 신성을 낭비하지 마라. 너를 위한 신성이 아니다.』
다음 순간, 우뚝- 베리야의 몸이 다시 정지했다. 타오르던 신성 또한 주인을 거부한 채 다시 힘을 잃었다.
[어, 어떻게?]스탈린은 한심하다는 듯 베리야를 바라봤다.
『네가 정말로 신화 속 존재라도 된 것 같나? 넌 그저 육신을 버린 에너지 생명체에 불과하다.』
[….]『내가 직접 불태운 교회가 몇 개고, 죽인 사제가 몇 명인데… 고작 너 하나 정도야.』
베리야는 비명을 지르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고, 스탈린은 다시 뒷짐을 진채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는 자세 그대로 멈춘 여명의 곁에 도착한 순간.
그는 여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곧 여명을 억누르던 뭔가가 사라지며 그의 몸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푸하-! 크게 숨을 내뱉은 여명은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마주한 스탈린은 콧수염이 위로 올라갈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탈… 아니, 서기장 각하?”
『그래, 나일세. 천여명.』
어떻게 오신 겁니까- 라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베리야가 ‘적기 훈장’ 이란 단어를 내뱉기 무섭게, 인벤토리에 있던 적기 훈장이 멋대로 튀어나왔으니까.
억지로 적기 훈장을 붙여줄 때부터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 이 훈장은 그가 원하는 순간 튀어나올 수 있도록 준비한 물건이 분명했다.
아무튼, 여명의 침묵을 마주한 스탈린은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무슨 의심을 하고 있는지 예상이 가지만, 그 훈장은 진심에서 나온 선물이었네. 설마 자네가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또 이렇게 빨리 베리야의 곁으로 올 줄 몰랐을 뿐.』
“….”
베리야를 만났을 때 자신을 소환하는 물건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는 건가. 여명은 스탈린이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물건을 건넸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를 떠보기 위해 신중하게 말을 고르던 순간.
스탈린이 대뜸 그에게 직구를 던졌다.
『자, 시간이 많지 않으니 빨리빨리 움직이지. 천여명, 당장 저 멍청이의 신성을 먹어 치우게.』
사람 좋은 미소와 상반되는,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신의 화신이 아니라, 진짜 신이 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