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47)
을 위한 세계는 없다-647화(647/817)
EP.647 당국의 정당한 요구에 대한 소비예트 계승자의 답변. (4)
쿠구궁…!
지하 통로 전체가 부르르 떨리고, 먼지와 돌가루가 눈물처럼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조웅찬 장관은 머리를 털지 못했다. 그는 악에 찬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뭣들 하는 거냐! 고작 한 놈이다! 당장 녀석을 제압해!”
총알처럼 쏟아진 그의 말은 통로를 채운 양치기와 괴수 군인들 너머, 지하 통로의 반대편, 빛나는 검을 든 남자에게 박혔다.
몰락한 소련의 스파이를 유혹할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 성검을 잃은 대역죄인이자, 현 성녀의 아버지.
성물지기.
온몸에 피 칠갑을 한 그는 홀로 통로를 막아서고 있었다.
“쏴! 쏘란 말이다! 이 병신들아!! 죽어도 손만 있으면 돼!!”
다시 한번 장관의 목소리가 울리고, 그의 곁에 서 있던 병력들은 근접 무기를 내던졌다.
그리고 그동안 침투를 위해 아껴놨던 ‘진짜 무기’를 꺼냈다.
철컥. 초인이라도 순식간에 벌집으로 만들 수 있는 대구경 기관총들이 성물지기를 겨눴다.
성물지기는 음울한 눈으로 성물을 들었다.
제대로 된 무장… 아니, 방패라도 가지고 왔더라면.
아쉬웠지만, 죄인인 그가 급하게 챙겨올 수 있는 건 검 모양 성물 하나가 전부였다.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중앙 신전으로 향하는 지하 통로 네 개가 전부 모이는 입구였으므로.
즉, 이곳에서 도망친다는 건 중앙 신전으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성기사로서, 그리고 성물지기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
그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로 했다. 두려움은 없었다. 그를 짓누르는 건 짙은 아쉬움뿐이었다.
아내와 딸에게 작별 인사를 남기지 못한다는 아쉬움.
그러나 사람은 모든 걸 얻을 수 없는 법이다. 성검보다 사랑을 택했던 남자는 아쉬움을 삼키고 총구를 마주했다.
이윽고, 침입자들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한발 앞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양치기가 아닌, 성물지기의 뒤통수에서.
“폭탄이다! 장관님을 보호해라!”
닭머리 양치기가 보호막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성물지기의 목덜미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콰앙 !
땅 위에서 터지는 포탄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지만, 좁은 통로에서 터진 폭탄은 그 자체로 훌륭한 살상 무기였다.
폭발 범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성물지기가 화상을 입을 정도.
쿨럭!
성물지기는 피를 토하면서도 고개를 들어, 자신을 끌어당긴 자를 확인했다. 한데, 그를 당긴 사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투명 망토. 성물지기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모리네?”
곧, 투명 망토가 벗겨지며 백발의 여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푸른 쥐, 모리네. 그녀는 너덜너덜해진 남편의 손을 꽉 붙잡았다.
“늦어서 미안해.”
“…사과할 필요 없어. 내 사랑.”
그렇게 두 사람의 눈빛이 뜨거워지고,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진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재회의 키스는 나중에 해주세요. 싸움은 아직 안 끝났으니까.”
두 부부의 등 뒤에서, 세티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연기가 자욱한 통로 너머로 연막탄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일단 두 분 모두 중앙 신전 쪽으로 후퇴하세요.”
“그럴, 수는….”
성물지기가 반대의 의사를 표하기 무섭게, 세티가 말을 끊었다.
“다른 통로에서 공산당이 오고 있어요. 녀석들의 목적이 뭔지 모르겠지만… 좋은 의도는 절대 아니겠죠.”
“….”
“전 두 분이 사셨으면 좋겠어요. 성녀도, 여명도 같은 마음이겠죠… 그러니, 자.”
세티는 연막탄 너머에서 들리는 웅성거림을 무시한 채 망치를 들었다.
“저한테 맞고 기절해서 가실래요. 아니면 그냥 가실래요?”
성물지기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통로에서 튀어나온 사람이 질문을 가로챘으므로.
“안타깝지만, 너희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
어둠 속에서 드러난 건 전 동궁정백, 비코프였다.
병력을 두고 혼자 올 줄이야. 세티는 예상보다 빨리 온 그를 보며 무기를 들었다.
“…예상보다 빨리 오셨네. 빨갱이 새끼.”
“나도 반갑군. 홍세티.”
“….”
쿠구궁…! 다시 한번 통로가 흔들리는 사이, 비코프가 주먹을 쥐며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성물지기를 넘기게.”
“…공산당이 왜 성물지기를 노리는 거지?”
“애석하게도, 대화로 낭비할 시간이 없군. 홍세티. 선택지는 하나뿐일세. 성물지기를 넘기고 살거나, 지키다가 죽거나.”
다음 순간, 비코프의 어깨 위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완성형 주가시빌리.
누구보다 그 위력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세티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는 듯 씨익 미소까지 지었다.
웃어? 주먹을 든 비코프의 눈썹이 휘어졌다.
“허세를 부리면서 시간을 끌 생각이냐? 하지만 천여명은 올 수 없-.”
그 순간, 세티가 복도 저편으로 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조웅찬! 네가 죽인 공산당원들의 원한을 잊었다고 생각하느냐!”
마나로 어색하게 바꾼 목소리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지만, 총알은 달랐다.
탕!
불길함을 느낀 비코프가 세티에게 달려들기 무섭게, 연막에 가려진 복도 저편에서 대응 사격이 날아왔다.
-장관님을 지켜라!
비코프는 통로를 가득 채우는 총알을 보며 일이 꼬였음을 확신했다.
극적인 등장에도 불구하고, 변경백은 덤덤했다.
마치, 이깟 아수라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신전의 기둥보다도 더 두꺼운 거인의 다리를 잘라낸 그는 천천히 검을 늘어트리고, 여명과 눈을 마주했다.
내가 너무 늦었나?
그가 입술을 움직여 물었다. 여명은 조금 전 스탈린을 마주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감탄을 느끼며 대답했다.
아뇨, 딱 맞춰 오셨습니다.
이심전심이라, 여명과 변경백이 짧게 생각을 교환한 순간.
바닥에 처박힌 베리야가 상체를 들어 올리며 포효했다.
[하하하! 용사가 제 발로 올 줄이야! 천운은 나를 향하고 있다!]처절함과 기쁨이 뒤섞인 목소리를 따라 바닥에 쌓인 잔해가 흔들렸다. 여명은 그제야 두 사람 모두 베리야에게 피를 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거기다 무장 혈청이 흐르는 그의 피와 달리, 변경백은 순수한 용사의 피를 가지고 있었다.
여명은 뒤늦게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고 입술을 씹었다. 하지만 그가 변경백에게 조심하란 말을 하기도 전에, 베리야가 변경백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콰아아아 – !!
타오르는 신성을 연료 삼아, 거대한 팔이 변경백이 서 있던 잔해 주변을 쓸어버렸다.
대지가 비명을 지르고, 으깨진 잔해들이 흩뿌려지는 광경.
귓불을 스치는 바람과 돌조각들이 시야를 가로막는 와중에도, 여명은 보았다.
베리야의 팔을 피해 하늘로 뛰어오른 변경백의 손이 흐릿해지는 것을.
검을 휘두른 걸까? 이어진 결과를 보면 그런 것 같았다.
!!!
변경백의 손 앞에 놓인 거인의 어깨가 갈라졌다. 거대한 어깨가 쩌억 벌어지며 피와 무장 혈청이 쏟아졌다.
그러나 베리야는 굴하지 않고 더욱더 크게 신성을 불태웠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신성 때문에 공기가 전율할 정도였다.
[고작 검술 따위로! 신을 쓰러트릴 순 없다!!]입을 쩍 벌리고 포효한 베리야의 몸 곳곳에서 무기가 솟아났다.
신성을 대가로 만들어낸 무기들은 조금 전 여명에게 쏘아냈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거대했다.
하나하나가 전차 주포 이상.
저건 피하거나 막는 레벨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대로 발사되면 범위에 들어가는 모든 것이 쓸려나갈 게 분명했다. 건물은 물론이고, 오밀조밀 모인 민간인들 또한 끔찍한 꼴을 당하리라.
‘젠장.’
여명이 그대로 베리야를 향해 강하했으나, 이미 장전된 포탄보다 빠를 순 없었다.
! ! ! ! !
포탄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이어질 파괴에 겁을 먹은 공기가 떨렸다. 여명은 변경백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금 사냥으로 포탄을 피할 거라는 여명의 예상과 달리, 변경백은 포탄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검을 휘둘렀다.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게.
다음 순간, 여명은 보았다. 쏟아지는 포탄이 모조리 반으로 잘리는 것을.
콰과과광!!!
잘린 포탄의 불꽃이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하! 방사능에 절여져도 용사는 용사란 거냐? 영토조차 지키지 못한 패배자가!]베리야의 분노를 따라, 여명은 마하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변경백의 세 가지 무술.’
계단의 시련에서 보여준 용사의 무술과 황금 사냥 외에, 마하간이 저장하지 못한 또 한 가지의 무술.
저게 그 무술일까? 알 수 없었다.
지금 확실한 건, 베리야가 더욱 많은 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피!! 용사의 피를 내놔라!!]대공포, 대포, 기관총, 그리고 여명을 날려버렸던 폭탄까지.
피의 신이 신성을 태워가며 만든 무장 혈청들은 그 자체로 현대전의 구현이었다.
대단한 군사 지식이 없는 여명조차 성도를 쓸어버리기에 충분하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한 양.
놀란 여명이 녀석을 막기 위해 아래로 강하한 순간, 변경백이 그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무기는 내가 막겠다. 그사이-
그의 말이 다 전해지기도 전에, 콰아아 – !! 무수한 포탄이 불을 뿜었다.
변경백은 말을 그만두고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여명은 그가 남긴 뒷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놈을 쓰러트려라.
어떻게? 라는 질문은 필요 없었다. 이건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스탈린이 내민 신성을 거부한 자신이, 교단에게 성녀를 빼앗은 자신이 해야 할 일.
여명은 폭발하는 포탄 사이에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시작은 천도무친. 그를 중심으로 바람이 몰아치고, 마나가 증폭했다.
다음은 혈류가속. 그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맥박치고,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빠르게 피가 돌았다.
수십, 수백 배를 증폭하는 만박불통의 원조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차곡차곡 쌓이는 몸의 부담을 따라 그의 마나가 증폭됐다.
2배, 3배, 4배…
[…무슨?]뒤늦게 여명의 증폭을 확인한 베리야가 포구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가 쏘아낸 포들은 보이지 않는 검기에 잘려 작은 폭발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잠시 후, 여명의 몸이 버틸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한 순간.
그는 히틀러의 심상 속에서 그의 몸을 빌렸던 스탈린과 똑같이 마나를 움직였다.
화아악 – !
신성과 함께 터져 나오는 주가시빌리. 베리야는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주가시빌리에 신성을…? 바실리와 비코프도 하지 못한 일을 네깟놈이!!]알게 뭐냐. 여명은 무장 혈청을 양 손에 나눠 쥐었다.
타오르는 신성, 넘쳐나는 살기… 그리고 낫과 망치로 변한 무장 혈청.
그렇게 소비에트의 유산들이 스스로 아편이 된 망령을 향해 겨눠진 순간.
여명이 선언했다.
“넌 오늘, 여기서 죽는다.”
직후, 아침의 빛을 머금은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의 거인을 향해 내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