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52)
을 위한 세계는 없다-652화(652/817)
EP.652 이 조연을 보라. (2)
성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가운데, 그녀를 닮은 꼬맹이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메켄티.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에서 그저 바라만 보는 건 어떤 기분이지? 외로웠나? 아니면 고통스러웠나?”
“….”
“어디 말해봐라. 피할 수 없는 결말로 향하는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노골적인 조롱. 성녀는 아무 말 없이 총을 들었다.
조금 전 아야톨라의 천벌에 맞아 찢어진 그녀의 안대가 덜렁거리는 가운데, 꼬맹이가 한 번 더 이죽거렸다.
“또 총을 쏘려고? 폭력이라니. 얼마나 대답할 말이 없으- 아악!”
성녀는 총을 쏘지 않았다. 리볼버를 거꾸로 쥐고 꼬맹이의 머리를 후려쳤을 뿐.
“이게 어디서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불러.”
퍽, 퍽!
철심이 박힌 리볼버 손잡이는 단단했다. 한껏 분위기를 잡던 꼬맹이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이, 미친, 악! 야 이 씹, 그만, 악! 그만하란 말이다!”
“존댓말.”
“존댓말은, 씁, 개새끼 성서 뜯어먹는 소리- 아악!”
결국, 참지 못한 꼬맹이가 먼저 항복했다.
“그만! 끅! 젠장, 항복! 항복할 테니까! 그만 하세요!”
성녀는 그제야 손을 멈췄다. 휘릭, 피묻은 리볼버를 돌려 다시 홀스터에 꽂아 넣는 자세가 참으로 경쾌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존댓말 하면 얼마나 좋아.”
그러자 녀석이 소리쳤다. 텅 빈 눈구멍에서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이…! 이 정신 나간 년아! 내가 너보다 연상이다!”
연상? 성녀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다. 여명과 비교하면 절반도 안 될 녀석이 뭔 소리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이구, 그랬어요? 그래서, 몇 살 연상인데?”
“4,000살.”
“…?”
성녀는 다시 리볼버 위에 손을 올렸다. 꼬맹이는 후다닥 물러나며 소리쳤다.
“시발, 적당히 해!”
그렇게 녀석이 열 걸음 넘게 도망간 뒤, 성녀는 팔짱을 꼈다. 4,000살. 그건 여명의 ‘진짜’ 나이와 비슷했으니까.
“그래, 뭐, 4,000살이라고 치고. 그래서 어쩌라고?”
“4,000살이라고 치는 게 아니라, 진짜 4,000살이다! 존댓말 운운하더니, 내 나이를 알자마자 얼굴에 철판을 까는구나. 이 뻔뻔한 것! ”
“그래, 그래, 믿어 줄게. 너 말고 4,000살 넘는 사람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니까.”
“….”
성녀는 여명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꼬맹이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마 그녀가 그저 이죽거리기 위해 4,000살을 꺼냈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아무튼, 꼬맹이는 차분하게 말했다.
“후, 성녀. 진지하게 생각해라. 나는 너한테 제안을 하러 온 거니까.”
“제안? 눈동자가 없는 자칭 4,000살 어린이께서 나한테 진지한 제안을 하시겠다고? 그것도 이런 이상한 곳에서? 와! 너무 기대된다.”
“….”
꼬맹이는 꽉 주먹을 쥐었다가,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었다.
“그래, 이 상황을 바로 받아들이기 어렵겠지. 하지만 내 제안을 들으면 너도 생각을 바꿀… 야! 집중 좀 해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녀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년이 진짜. 꼬맹이는 분위기 잡는 걸 포기하고 바로 주제를 꺼냈다.
“최대한 짧게 말하지. 우리를 위해 성물을 찾아줬으면 한다. 그러면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주마.”
“운명?”
“그래, 운명. 평생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쓸쓸히 고독사하는 너의 운명.”
성녀는 그제야 관심이 생긴 듯 빤히 꼬맹이를 바라봤다.
“흐으음… 넌 누구야? 누구길래 나를 위해 운명을 바꿔주겠다는 거지?”
“아까 말했듯, 나는 성자다.”
“성자라… 어느 교단의 성자야?”
“너와 같지. 다섯 신 교단.”
“….”
성녀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섯 신 교단에서, 성자란 신들께 예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을 뜻했으니까.
남자라면 성자, 여자라면 성녀…
거기까지 생각한 성녀가 물었다.
“내가 알기로, 교단의 역사에 당신 같은 성자는 없는데…?”
“말했잖아. 난 버려진 성자이자, 운명에게 살해당한 사생아라고.”
“…역사에서 은폐됐다, 뭐 그런 헛소리를 하려고?”
“아니, 난 그 이상이다.”
그 순간, 덜렁거리던 안대가 흘러내렸다. 새하얀 머리카락 아래, 성녀의 오드 아이가 드러났다.
그녀의 노랗고 검은 두 눈동자 위로, 꼬맹이는 텅 빈 눈구멍이 비춘 순간.
“내가, 너의 오빠다.”
탕!
성녀는 망설임 없이 리볼버를 쐈다. 아까 전에 쐈던 종아리에 또 한발.
“아악!! 이 미친년!”
꼬맹이는 종아리를 붙잡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성녀는 나머지 종아리도 쏴버리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으나, 달깍- 총알이 바닥났다.
다행히 아까 여명에게 받은 리볼버 탄이 좀 남아있었다. 그녀는 한발 한발 총알을 재장전하며 말했다.
“오빠는 닝기미. 우리 엄마는 아빠랑 처음 할 때 처녀였어.”
“뭐…? 그딴 건 대체 왜 알고 있는 거냐?”
“청색 신께서 알려주셨어. 아니었으면 엄마랑 아빠 둘 다 죽었을 거래.”
“….”
꼬맹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노려봤다.
그리고 드르륵- 착! 성녀가 리볼버 장전을 끝내자마자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세상은 회귀하고 있다.”
“…흐음?”
성녀의 미간이 좁혀지기 무섭게, 꼬맹이가 손가락을 튕겼다. 탁!
직후, 새하얀 공간으로 색이 피어났다. 검은색, 회색, 붉은색… 빠르게 번지는 펼쳐진 색 너머로, 새로운 풍경이 시야를 채웠다.
-거의 다 됐어요! 조금만 더!
-모리네, 심호흡하세요. 후, 하, 후, 하, 힘빼시면 안 됩니다!
피에 젖은 이불을 덮은 어머니와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녹색 사제들.
그리고 낡은 전구가 간신히 새 생명의 빛을 비추고 있는 그곳은… 성도의 감옥이었다.
성녀는 멍하니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녀가 아는 것보다 훨씬 젊은 어머니는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숨소리를 내뱉으며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옆에 붙어있던 사제들이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나왔어요! 다 나왔어요! 모리네, 고생했어요!
-아주, 건강한 아들입니다!
아들? 성녀는 무언가 끔찍한 걸 본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꼬맹이가 절뚝거리며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태어났다.”
“….”
“그리고, 살해당했지.”
성녀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벽에 걸린 전구가 부르르 떨렸다.
아니, 흔들리는 건 전구뿐만이 아니었다.
쿠구궁…! 그건 감옥 전체가 떨리는 소리였다.
아이를 품에 안은 모리네와 녹색 사제, 그리고 성녀가 차례대로 고개를 든 순간.
감옥 천장이 무너졌다.
성녀는 화들짝 놀라 어머니에게 손을 뻗었지만, 무너진 천장은 그녀를 그대로 관통해버렸다.
성녀는 뻗은 손을 꽈악 쥐며 말했다.
“…환상.”
“아니, 기억이다.”
꼬맹이는 모리네가 깔린 자리를 보며 말했다.
“이것이 운명이 내게 저지른 죄다.”
“…왜?”
“아까 말했을 텐데. 자궁이 고환보다 관리하기 쉽다.”
“….”
꼬맹이는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무너진 감옥이 물에 젖은 그림처럼 흐려지고, 또 다른 그림이 그려졌다.
스으윽- 붓질하는 소리를 따라 시야를 채운 건 어떤 실험실이었다.
백색 가운을 입은 과학자들과 그들 앞에 놓인 무수한 핏덩이들, 그리고 베리야가 서 있는 실험실.
피의 거인이 아닌, 살아생전의 모습을 한 베리야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뭔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체?”
성녀는 베리야 앞에 놓인 남성의 시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꼬맹이가 설명했다.
“그냥 시체가 아니야. 옛 아샤 제국 황제의 미라다.”
“….”
“형제 전쟁으로 황실의 피가 사라지기 전… 운 좋게 미라화된 물건이지.”
성녀는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저기서 용사의 유전자를 뽑아낸 거야?”
“그래, 아주 복잡하고 더러운 방법을 통해서.”
“….”
그 복잡하고 더러운 방법이 뭔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성녀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녀석의 음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순수한 용사의 혈통은 뽑아낼 수 없었다. 불완전한 유전자 몇 개가 전부였고,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이런저런 추가 유전자들이 삽입되었다.”
“…쥬라기 공원?”
“보통은 키메라부터 떠올릴 텐데… 아무튼, 지구인들이 만든 인공 혈통은 전부 여기서 기인했다.”
성녀의 표정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그녀가 물었다.
“어… 그러면, 러시아 혈통은 용사 혈통이 아닌 거지?”
“그래, 용사 혈통에서 비롯된 무언가다. 네가 좋아하는 한국의 희생양들도 마찬가지고.”
“아.”
성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한숨 속에는 은근한 기쁨이 묻어있었다.
기쁨? 꼬맹이가 물었다.
“…그 반응은 뭐지?”
“반응? 무슨 반응? 아무것도 아닌데?”
뭔가 부끄러운 생각이라도 한 걸까, 성녀가 시선을 돌렸다. 꼬맹이는 사납게 되물었다.
“말해.”
“싫….”
“말. 해.”
직후, 보이지 않는 힘이 성녀의 혓바닥을 채웠다. 일반적인 마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힘. 권능이었다.
‘진실의 권능?!’
성녀가 화들짝 놀라 입을 막았으나, 이미 늦었다. 그녀의 혓바닥은 진실을 토해냈다.
“이번 대 용사랑 같은 혈통인 줄 알고 쫄았어. 아니라서 다행이다.”
“…또?”
“어떤 면에선 세티랑 유전자가 이어졌단 거잖아? 우리는 자매였구나! 최고야!”
“….”
이거 진짜 미친년인가. 꼬맹이가 이 광경을 보면서 그딴 생각을 했냐고 따지려는 순간.
탕!
성녀가 기어코 다른 쪽 종아리를 쏴버렸다.
“끄아악!! 이, 미친, 개, 씨발!”
꼬맹이가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쓰러지자, 주변 풍경이 다시 새하얀 공간으로 돌아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녀는 꼬맹이의 몸을 짓밟으며 말했다.
“이번 대 진실을 흘리는 자… 맞지? 눈깔이 없어서 못 알아봤어.”
“크흑, 그래, 맞다. 내가… 아야톨라다.”
그러자 성녀는 꼬맹이의 이마에 총구를 가져다댔다.
“너한테도 진실의 권능을 사용해.”
“….”
“빨리.”
아야톨라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 권능의 힘이 녀석의 몸을 감싸는 걸 느낀 성녀가 재차 물었다.
“엄마와 내가 소련의 인공 혈통인 거랑, 고환이 무슨 상관이지?”
“…운명은 용사의 혈통이 끊어지길 바라고 있다. 엘프, 수인, 드워프… 이미 다른 종족의 혈통은 끝났다. 인간 중 유일한 계승자는 고자가 되었고, 마지막 용은 이상 성욕자다.”
녀석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성녀는 지그시 리볼버에 힘을 실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아까는 다른 유전자라며.”
“하지만 우리의 핏속에 용사의 혈통 일부가 남아있는 건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자식을 낳는다면? 그 자식이 자식을 낳고, 끝없이 세대를 불려간다면… 세대를 뛰어넘어 새로운 용사가 태어날지도 모르지.”
“…고작 가능성이야.”
아야톨라는 이마로 총구를 밀어내며 소리쳤다.
“그래, 고작 가능성이지! 하지만 운명은 그 가능성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를 죽이고, 여자만 내버려 둔 거다! 남자는 언제든 여자를 임신 시킬 수 있지만, 여자는 일 년에 한 명을 낳는 게 고작이니까! 그쪽이 더 관리하기 쉬우니까!”
성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분노를 쏟아낸 녀석은 비릿한 미소로 그녀를 노려봤다.
“메켄티, 어째서 네가 고독사하는 운명인지, 이제 알겠지? 운명은 너를 마지막으로 소련의 인공 혈통을 끊을 생각이었다. 다른 철혈의 아이들도 마찬가지고!”
“….”
“너는 처녀로 죽을 거다. 어떠한 사랑도 하지 못한 채, 홀로, 쓸쓸하게.”
거기까지 말한 아야톨라는 성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성녀… 아니, 동생이여. 내 손을 잡아라. 우리가 함께라면 바꿀 수 있다. 이 잘못된 게임판을 뒤엎고, 모두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어!”
성녀는 잠시 아야톨라의 손을 내려다봤다. 뭔가 고민하는 걸까?
아야톨라가 다시 한 번 그녀를 유혹하려는 순간.
성녀가 말했다.
“나 처녀 아닌데?”
“…?”
여명은 눈을 떴다.
황금빛 눈동자 위로 새하얀 공간이 보이기 무섭게, 그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세티는? 성녀는?
이미 피부나 다름없는 마나가 주변을 쓸었지만, 세티도, 성녀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평선을 구분할 수 없는 백색의 공간, 끝없이 펼쳐진 공간에서 느껴지는 건 여명 본인과….
[깨어났군.]수십 명의 남자가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웅장한 목소리를 따라 여명은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커다란 붉은 거인이 쪼그려 앉아있었다.
묘하게 베리야와 닮았으나, 몸을 이루고 있는 재료가 달랐다. 피가 아닌, 주가시빌리의 아지랑이로 이루어진 거인.
여명은 묘한 익숙함을 느끼며 녀석을 올려다봤다. 녀석 또한 고개를 숙여 여명을 내려다봤다.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군.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