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53)
을 위한 세계는 없다-653화(653/817)
EP.653 이 조연을 보라. (3) (수정)
아야톨라의 표정 변화는 극적이었다.
뭐 그딴 거짓말을 하냐는 듯한 분노.
진지하지 못한 그녀를 향한 짜증
마지막으로 설마? 하는 의심까지.
눈동자도 없는 주제에, 표정 연기만 두고 보면 여명의 양아치 연기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아니, 여명은 연기가 아닌가?’
뭐, 어쨌거나. 실없는 생각을 흘려보낸 성녀는 총을 탁탁 흔들며 말했다.
“내 처녀성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됐어. 여기서 나가는 법이나 말해.”
“….”
아야톨라는 우물쭈물 입술을 비틀다가, 못 믿겠다는 듯 또 질문을 반복했다.
“정말로… 처녀가 아닌 거냐? 네가 누군가와 사랑을 나눴다고?”
“그 이야기 이제 그만하자니까.”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수음 좀 했다고 처녀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 크악!”
그 순간, 성녀는 총구로 녀석의 이마를 후려쳤다. 이 새끼가 못하는 말이 없어.
퍽, 퍽!
때때로 폭력은 백 마디 설교보다 확실한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었고, 지금이 딱 그런 순간이었다.
아야톨라의 이마에 혹을 만들어준 성녀는 녀석의 멱살을 잡으며 재차 질문했다.
“자, 자, 이제 지랄은 그만하고, 건설적인 대화를 합시다.”
“….”
“난 분명 성물의 방으로 가는 길을 열었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여긴 또 어디고?”
아야톨라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너는 똑바로 열었다. 바로 이곳이, 성물의 방이다.”
“거짓말하면 머리에 총구멍 난다고 어머니가 안 가르쳐주시던?”
성녀가 으르렁거리기 무섭게, 아야톨라가 대답했다.
“…내 어머니가 너희 어머니다.”
“아, 맞다. 그랬지.”
“….”
진짜 미친년인가? 아야톨라는 이마의 혹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난 지금 진실의 권능을 사용하는 중이다. 거짓말은 할 수 없다.”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쟁이는 원래 자기가 진실만 말한다고 지껄이는 법이지. 네 속임수를 내가 모를 거 같아? 저번에 우리 여명한테도 사기 쳤으면서.”
성녀는 녀석이 히라리아에서 여명을 속였던 사실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야톨라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내 권능은 원래 그런 용도지.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교를 쓸 능력은커녕, 육체도 없다.”
“….”
“내 텅 빈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실… 잠깐, 우리 여명?”
녀석은 대화를 시작한 이후 가장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천여명? 녀석이… 너의 처녀를, 아니, 연인이냐?”
“질문은 내가 해.”
의도적인 무시. 정답이었다. 아야톨라는 멍청한 여동생을 본 오빠처럼 물었다.
“…녀석은 홍세티의 연인일 텐데?”
“응, 그래서 뭐?”
“….”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대답.
아야톨라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일그러진 표정이 꼭 고장 난 로봇 같았다.
어쨌거나, 성녀는 계속 질문했다.
“네 말대로 여기가 성물의 방이라 치고, 세티와 여명은 어떻게 됐지? 두 사람에게 갈 방법은?”
“…부모님의 안부보다 그게 먼저인 거냐?”
“조금 전에 엄마의 죽음을 보여준 녀석이 할 말은 아닌데.”
“….”
성녀는 리볼버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 아빠는 무사하실 거야. 너희와 빨갱이가 원하는 건 두 분이 아닐 테니까. 그렇지?”
조금 전까지 미친 소리를 지껄이던 여자가 내뱉는 거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말이었다.
역시, 아무리 미쳐도(?) 성녀는 성녀란 건가.
아야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생각이 맞다.”
성녀는 그럴 줄 알았다- 같은 말을 꺼냈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똑같은 걸 요구했다.
“그래서, 여명과 세티를 찾을 방법은?”
“알려주겠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조건? 총알 한 발 더 쏴줘?”
리볼버 총구가 번뜩였지만, 아야톨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쏠 테면 쏴라. 하지만 몇 발을 쏴도 내 의지는 바뀌지 않았다. 애초에 이 몸은… 임시에 불과하니까.”
맞는 말이었다. 애초에 진짜 육체였다면 이렇게 입을 나불거릴 수 없었을 테니까.
진짜 몸이었다면 총에 맞은 시점에서 기절했거나, 상처 때문에 과다출혈로 쓰러졌으리라.
쯧, 성녀는 혀를 차며 대답했다.
“조건을 말해.”
아야톨라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너에게 나의 기억을 보여준 것처럼… 너도 내게 기억을 보여줬으면 한다.”
“…내가 진짜로 그걸 했는지 보고 싶다고?”
성녀는 과장되게 어깨를 움츠렸다. 아야톨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굳이 그게 아니어도 된다. 그저, 운명이 바뀌었단 증거를 보여다오.”
진중하고, 진지한 말. 그건 성녀가 미처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놀란 그녀는 조심스럽게 녀석의 몸 위에서 발을 뗐다. 아야톨라는 짧은 신음과 함께 상체를 일으켰다.
성녀는 어느새 재생한 녀석의 종아리를 보며 말했다.
“운명이 바뀐 증거라면 이미 충분하잖아. 만주, 시카고… 뭘 더 보여 달란 거야?”
“…그것들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사소? 자칫하면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을 일이 사소하다고?”
“그래, 사소하지. 지구와 아샤의 인구를 생각해봐라, 시카고와 만주의 모든 인간들이 죽었어도… 인류 전체와 비교하면 일부에 불과하다.”
“….”
성녀는 정색했다. 그건 백만 단위로 사람이 죽는 것보다, 그녀의 처녀성이 더 중요하단 말이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잘한 운명이 바뀌는 경우는 흔하다. 꿈을 흘리는 자가 시카고를 찾은 것도 그 작은 변화를 증폭하기 위해서였지.”
“….”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군. 그러면 이런 비유는 어떻지?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레벨이 딱 맞는 사냥터에서만 사냥하지 않는다. 만주와 시카고는 딱 그 정도 변화였다.”
“…사람은 게임 속 사냥감이 아니야. 만주도, 시카고도 사냥터가 아니고.”
“그건 네 생각이다. 운명의 생각은….”
“그쪽 생각이겠지. 운명 좀 그만 팔아먹어.”
아야톨라는 반박하지 않았다. 성녀는 그런 녀석을 빤히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 조건을 받아들일 테니까. 방법이나 알려줘. 단, 기억을 보여주는 건 두 사람을 찾은 뒤야.”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두 사람을 찾으러 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아야톨라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성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와 닮은 창백한 손.
동족 혐오라고 해야 할까? 성녀는 꺼림칙함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녀석의 손을 잡았다. 직후, 맞잡은 손을 따라 어떤 기억들이 몰려왔다.
이 새하얀 공간을 조작하는 방법과… 이 공간의 진실을.
“성물의 방이… 천상과 이어진 곳이었어?”
성녀가 경악하는 사이, 아야톨라가 덧붙였다.
“그래, 성검이 떨어진 충격으로 현실과 천상 사이의 장막이 찢어진 장소이자… 별들의 세상과 가장 가까운 곳.”
“….”
성물을 이곳에서 보관하는 이유가 그런 거였나? 성녀가 머릿속으로 흘러든 기억을 정리하는 사이, 아야톨라가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자, 동생이여, 이제 보여다오. 뒤바뀐 운명의 진실을.”
성물의 방을 조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단한 마법도, 축복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원하는 그림을 떠올리며 마음속의 붓을 들고, 자신의 기억을 물감 삼아 그리기만 하면 됐다.
‘여명과 세티를 찾아줘.’
조용히 눈을 감은 성녀는 마음속으로 붓을 휘둘렀다.
아야톨라의 방식과는 조금 달랐다. 손을 튕긴 녀석과 달리, 그녀는 리볼버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알이 허공을 관통하는 것과 동시에, 새하얀 공간이 뒤틀리며 그녀의 기억이 떠올랐다.
시작은 전대 성녀님과의 기억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떨어진 그녀를 사랑해주시던 기억들.
[총대주교는 덜떨어진 개새끼라서 그렇게 지껄이는 거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사람 말은 진지하게 들을 필요 없어.]시작이 이상했던 걸까? 지켜보던 아야톨라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딱히 중요하진 않았다. 성녀는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서로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싸우자!]중등부 올림피아에서 세티를 박살 냈던 기억.
[바이크 사줘!! 사달라고!!!]푸른 쥐 어르신들에게 아카데미 입학 기념 바이크를 사달라고 징징거리던 기억.
[개새끼만 보면 쏘고 싶은 병에 걸려서 그만… 뭐, 그래도 살인은 아니니까.]월라드를 쫓던 여명과 처음 만난 기억.
[네놈도 나의 복수를 부정하느냐?]만주에서 용을 막아냈던 기억.
함께 아카데미로 돌아간 기억, 플레이어와 싸운 기억, 함께 아샤를 돌아다니고, 한숨 쉬고, 웃고, 살리고, 구한, 그 모든 기억들.
여명과 함께한 기억은 그녀가 살아온 날 중 일부에 불과했지만, 마치 깊은 문신처럼, 혹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그녀의 기억 깊은 곳에 박혀있었다.
특히…
[변태를 사랑한 대가를 치르는 날이군요.]그와 함께 한 첫날 밤. 꼭꼭 숨겨 놨던 눈을 공개하고, 영원을 약속한 그 날은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운명이, 움직이지 않아?”
곁에서 기억을 지켜보던 아야톨라가 소리 없이 경악하는 가운데, 성녀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세티가 느껴지는 곳.
기억이 흐려지며 물감이 사라지고, 주변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성녀는 천천히 총을 내리고,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드디어, 약속의 때가 왔노라.』
세티가 아닌, 검은 개의 머리를 가진 거인이었다. 수인처럼 사람의 몸통을 하고 있으나, 수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존재.
그보다 세티는 어디 있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성녀는 문뜩, 자신의 등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보았다.
거대한 맹금류의 머리를 가진 거인을.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으나, 그것이 원래 세상의 방식인 법.』
이집트풍 황금 옥좌에 앉아있던 매 머리의 거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검은 개 거인에게 맞서는 것처럼.
하지만 매 머리의 거인은 검은 개 거인과 싸우지 않았다. 그저 새하얀 공간을 등진 채, 성녀를 내려다봤다.
오드 아이. 커다란 이집트식 왕관 아래에서 반짝이는 거인의 눈동자는 성녀와 똑같은 오드 아이였다.
매의 그것과 같은 노란 빛 눈동자와, 밤하늘을 닮은 검은 눈동자.
차이가 있다면, 거인의 오드 아이 위치는 성녀와 정반대였다. 마치, 서로의 눈을 나눠 낀 것처럼.
성녀가 뭔가를 느끼는 순간, 거인의 부리가 움직였다.
『메켄티, 내가 약속을 지키러 왔노라.』
“….”
『이것이, 그녀가 너를 위해 남긴….』
거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녀가 비명을 질렀다.
“내, 내 몸속에 잡신이! 잡신이 깃들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