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54)
을 위한 세계는 없다-654화(654/817)
EP.654 이 조연을 보라. (4)
같은 시각.
여명은 살기의 거인을 향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스릉- 거인은 산의 눈물을 알아봤다.
[털짐승들의 검. 아직도 가지고 있었나.]“…털짐승이 아니라, 드워프다.”
[내게는 털짐승이다. 모든 공산주의자에게 드워프가 털짐승인 것처럼.]“….”
드레이테리얼에서 그를 막아섰던 붉은 팔과 똑같은 말.
그 말을 들은 여명은 확신했다. 역시, 이놈은 그때 봤던 팔과 동일한 존재다.
그사이, 그것이 고개를 들었다.
[위선 떨 것 없다. 플레이어, 어차피 너에겐 드워프나 털짐승이나 모두 경험치로 보일 테니.]“…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플레이어가 아니다.”
공산주의자 아니면 플레이어냐? 여명은 지긋지긋한 오해에 넌더리를 냈다.
[부정해봤자 소용없다. 네게서 느껴지는 아공간… 비코프의 핵을 빼앗은 그건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권능 아닌가.]거인은 으르렁거리듯 말을 이었다.
[재미있었겠지. 시나리오를 뒤틀고, 세상을 기만하고, 이 세상의 모든 걸 그저 놀잇감 삼아서, 죽이고 또 죽이고… 하지만 여기서까지 연기할 필요 없다. 내 눈은 결코 속일 수 없-.]여명은 참지 못하고 녀석의 말을 끊었다.
“내가 플레이어를 죽였다.”
[…?]“내 손으로 직접 녀석의 목을 베고, 허리를 토막 냈다. 이 아공간은 내 복수의 전리품일 뿐. 너의 무지와 확신으로 나를 재단하지 마라.”
그의 말에서 무언가 느낀 걸까? 거인의 고개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거짓이… 아니다? 정말로 넌 플레이어가 아닌 건가?]“아, 진짜 아니라니까.”
[하지만 그게 더 이상하군. 네가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왜 시나리오를 망가트리고 있는 거냐?]“내가 역으로 물어보자. 왜 내가 시나리오를 지켜야 하지?”
여명은 ‘시나리오는 절대 거부할 수 없다’ 같은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거인이 꺼낸 건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그것이 선이기 때문이다.]“…선?”
여명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제국 수도에 핵폭탄을 날리는 게 선이라고?”
[그래, 선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 너도 인간이라면 알고 있을 텐데.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선, 때때로 작은 희생이 필요한 법이다.]검을 든 여명은 버럭 소리쳤다.
“작은 희생? 대체 얼마나 큰 선을 추구하길래, 수폭 피해자들을 작다고 말할 수 있는 거냐?”
여명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미 무수한 운명을 마주하고 바꿔온 그에게 있어, 더 나은 미래란 말은 모욕으로 들렸다.
당장 그가 드레이테리얼의 운명을 바꾸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가장 먼저 수십, 수백 만의 무고한 목숨이 핵의 불길 아래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핵으로 힘을 증명한 비코프는 곧바로 아샤에 공산 혁명을 일으키리라. 그건 냉전이 다시 시작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또다시 냉전을 일으키는 게 선이라고?’
그런 선이라면 존재해선 안 됐다.
여명은 차가운 눈으로 거인을 노려봤다.
“대답해. 당장.”
허나, 거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살기가 휘몰아치는 눈구멍으로 빤히 여명을 바라봤다.
그리고 여명이 전투 자세를 잡은 순간, 거인이 대답했다.
[공산주의의 종말.]“…뭐라고?”
[학살과 독재로 물든 사악한 사상이 주인공에게 패배해 사라지고, 진정한 의미로 냉전이 끝나는 것… 그것이 시나리오가 추구하는 선이다.]“잡신이라니! 잡신이라니!”
한참 동안 주접을 떨고 나서야, 성녀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두 거인을 보며 크게 심호흡한 뒤, 매의 거인에게 물었다.
“저, 저기… 어느 땅의 신이세요? 혹시 사라진 겔차 왕국의 수호신이나, 화이트 파이어의…?”
『나는 지구의 신이다.』
“진짜 개 잡신이잖아!”
이건 말도 안 돼-! 성녀는 온몸으로 거부감을 표현했다. 그러니까, 거의 브레이크 댄스에 가까운 몸짓으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제발, 좀 진정해 미친년아.”
결국, 참다못한 아야톨라가 끼어들었다.
그는 아직 총에 맞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성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콱!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그녀의 모가지를 붙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성녀는 또다시 한탄했다.
“이젠 하다 하다 종말 교단까지 날 훈계하다니…! 오, 다섯 신이시여… 부디 저를 용서하소서….”
“….”
천여명은 무슨 생각으로 얘랑 사귀는 거지? 근묵자흑이라고, 걔도 똑같이 미친놈인가?
그렇게 아야톨라가 마음속으로 천여명에 대한 평가를 수정할 때쯤.
검은 개 거인이 폭소를 터트렸다.
『크하핫! 다섯 신이 교육 한번 잘했군! 그래, 저놈은 잡신이지!』
『닥쳐라!』
매가 검은 개를 노려봤으나, 검은 개는 계속 낄낄거렸다. 매는 딱! 부리를 다무는 것으로 성질을 내뱉은 다음, 다시 성녀를 바라봤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이야, 슬퍼할 필요 없다. 다섯 신 또한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이니, 너는 그들의 믿음을 배신한 게 아니다.』
그제야, 성녀가 기도를 가장한 주접을 멈췄다.
“다섯 신께서… 제가 잡신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다고요?”
매는 애써 잡신이란 단어를 외면하며 대답했다.
『그래, 내가 너의 안에서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것 또한 그들이 요구한 바였다.』
“….”
전부 신들께서 계획한 일이라고? 성녀는 충격받은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매가 말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그래, 아이야. 우리는 이집트라 불리는 땅의 신이었다.』
“이집트? 나일강이 있는… 지구 국가요? 하지만 그곳은 북아프리카잖아요. 저는 소련의 혈통인데….”
『한때, 이집트는 약했다. 중동이라 불리는 땅을 뒤덮은 냉전에서 벗어나지 못했지. 스탈린에게 무릎 꿇지 않을 정도의 강단은 있었지만… 그들은 옛 신앙을 파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단다.』
“….”
이집트가 신들을 소련에 팔았다고? 대체 신을 어떻게 팔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미 신들은 이렇게 그녀의 앞에 있었으니까.
성녀가 물었다.
“그들을… 미워하시나요?”
『미움도, 후회도 없다. 운명이 우리에게 벌을 주고자 했는데, 나세르가 어찌 막을 수 있었겠느냐? 그저, 우리를 판 돈으로 수십만 명의 아이가 굶어 죽는 걸 막을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
잡신이라도 역시 신은 신이란 걸까. 성녀는 그 따스한 말 속에서 조금 용기를 얻었다.
“잡… 아니, 동물의 머리를 한 신이시여, 저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시나이까?”
그 대답은 매가 아닌 검은 개에게서 나왔다.
『힘을 주겠다. 신의 힘! 그 대가로 우리가 원하는 건 단 하나뿐이다! 운명의 죽음!』
“….”
『그녀를 추방하고, 우리를 속박한 운명을 죽여! 이 역겨운 게임판을 뒤엎고! 스스로의 존엄을 되찾으란 말이다! 너희가 마음껏 서로 사랑하고, 죽일 수 있도록!』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저쪽은 아무래도 악신인 것 같았다.
저런 게 천사 같은 세티 속에 있었다니. 이래서 잡신들이란.
애써 검은 개를 무시한 성녀는 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신께서도 같은 목적을 가지고 계신가요?”
매 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오롯이 복수 때문은 아니다.』
“그러면…?”
『이건 너 자신과 네 주변의 모든 인연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매의 거인은 매서운 눈동자를 빛내며 덧붙였다.
『특히,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이 얼마나 따스한 말인가? 다른 누구보다도 신의 감각에 민감한 성녀는 살짝 감동했다.
물론, 그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순간, 개 머리가 그 감동을 박살 냈으므로.
『선심 쓰는 척 지껄이는 건 그만둬라! 어차피 천여명이 운명을 뒤튼 시점부터, 이 잡종에게 남은 선택지는 싸움뿐이다!』
『….』
매를 침묵시킨 개 머리는 성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날 봐라, 지구와 아샤의 잡종아!』
“잡종이 절 말하는 거였어요?!”
혼혈도 아니고 잡종? 성녀가 화를 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검은 개가 소리쳤다.
『우리는 존엄, 명분, 정의 같은 것들 때문에 그 기나긴 시간을 기다린 게 아니다! 우리는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 운명이 아닌 우리의 의지로!』
“….”
『싸워라! 피를 봐야 할 때는 피를 보고, 죽여야 할 때는 죽여! 네가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니! 운명과 싸워라!』
낯선 신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귀를 울렸다. 하지만 성녀를 놀라게 한 건 목소리 크기가 아닌, 그 속에 담긴 분노였다.
성녀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몇 걸음이나 물러났을까? 툭, 그녀의 등이 매 거인의 발목에 닿았다.
그녀는 매에게 물었다.
“저 말이 사실인가요?”
『표현이 격하긴 하지만… 그래, 그렇다. 우린 너에게 싸울 힘을 주기 위해 이곳에 강림했다.』
매 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 거라면 베리야와 싸우기 전에 주시지 그러셨어요. 진짜 죽을 뻔했는데.”
『미안하구나. 우리도 널 돕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우리가 나설 수 있는 건 운명이 허락한 순간과… 이곳, 성물의 방뿐이니.』
성녀는 운명이 허락한 순간이 언제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보다 한 걸음 앞에 있는 질문을 꺼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야톨라를 보면서.
“단순히 운명을 비트는 게 아니라, 운명을 죽여야 한다면… 그게 종말 교단과 뭐가 다르죠?”
비슷한 의문을 떠올린 걸까, 진실을 흘리는 자는 묵묵히 신과 성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매 머리의 신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신께선 마치 어떻게 대답해야 아야톨라가 상처받지 않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대답을 아꼈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를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
『어떤 때는, 말보단 보는 게 나을 때도 있지. 지금이 딱 그런 때로구나.』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매는 그대로 손을 허공에 찔러 넣었다.
사아앗-
새하얀 허공이 일렁거렸다. 그리고 마치 새하얀 커튼처럼 신의 손을 따라 반으로 갈라지더니…
성녀가 애타게 찾던 것을 보여줬다.
“…여명?”
새하얀 공간 저 너머, 홀로 선 여명이 보였다.
한데, 그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여명은 노발대발하며 무언가와 대화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의 주변에 있는 건 막대한 살기와…
손에 들린 붉은 검뿐이었다.
시간을 조금 뒤로 돌려, 거인의 입에서 공산주의 멸망이란 말이 나온 직후.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언제나 그렇듯, 여명은 잠시 말을 잃었다.
공산주의의 종말? 그게 운명의 목표 중 하나라고?
여명은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다.
“…공산주의를 멸망시키기 위해 공산주의자를 도왔다고?”
[그렇다.]“참신한 개소리네.”
[개소리가 아니다. 네가 없었다면, 수소 폭탄으로 제국을 무너트린 비코프는 단번에 아샤 전역에 공산 혁명을 퍼트렸을 터. 황실을 농락한 스탈린조차 농노들에게 지지를 받았는데, 직접 황실을 쓸어버렸다면? 그 파장이 얼마나 클지 상상해봐라.]“….”
[그렇게 이름을 날린 비코프는 스탈린의 계승자가 되어 소련 몰락 이후 뿔뿔이 흩어진 공산주의자들의 구심점이 될 운명이었다. 그쯤 되면 소련의 유산을 파먹기에 바쁜 모스크바의 구더기들도 그를 막을 수 없었겠지.]“KGB는? 베리야를 이기고 비코프가 새로운 소련을 세울 수 있을 리가 없-”
[그걸 방지하기 위해 내가 있다.]“…?”
여명은 살기의 거인을 올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이놈은 정체가 뭐지?
“네 이름은 뭐지?”
[내겐 이름이 없다. 나는 그저, 살기의 신성이다.]“….”
[신이 되지 못한 찌꺼기이자, 비코프… 혹은 그 예비자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 운명이 준비한 부품이다. 올바른 시나리오가 진행됐다면, 비코프는 피와 시체 더미 위에서 나와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여명은 감정을 감추기 위해 검을 꽉 잡고, 억지로 반론을 꺼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운명이 바보도 아니고, 이미 신이 된 베리야를 쓰지 않고 어째서 비코프를….”
뻔한 반론이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론이 튀어나올 만큼 뻔한 반론.
[베리야는 스탈린의 손을 너무 많이 탔다.]“….”
[그는 자신이 스탈린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란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평생을 남의 도구로 살아온 자의 한계지.]그때, 여명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왜 이렇게 질문에 척척 대답해주는 거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순간, 살기의 거인이 숨겨둔 진실을 요구했으므로.
[플레이어… 아니, 주가시빌리여. 나를 흡수해라.]이놈이고 저놈이고, 빨갱이들은 전부 남한테 신성을 퍼먹일 생각밖에 없나?
여명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건 말건, 살기의 거인은 계속 지껄였다.
[늦지 않았다. 신이 되어라. 그리고 그 힘으로 네가 비튼 시나리오를 되돌려라.]“….”
오르세 라날도 그렇고, 왜 운명과 연관된 것들은 이렇게나 상식과 거리가 먼 걸까.
죽음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이라서?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고.
여명은 살기의 거인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왜 나지? 비코프도 이곳에 왔을 텐데.”
[비코프는 탈락했다.]여명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지는 가운데, 거인이 말했다.
[현실과 비현실의 장막 사이에서 날 만날 수 있는 건, 이 땅에서 가장 강대한 주가시빌리뿐.]“….”
[비코프는 너에게 밀렸다. 주가시빌리도, 강함도. 그는 최후의 서기장 자리에서 탈락했다.]최후의 서기장은 염병. 여명이 소리치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쇠미리의 음습한 욕망을 겪어본 탓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거인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주가시빌리는 살인을 위한 무술. 살기의 신성이 보장한다. 너는 스탈린 이후 최고의 살인마다. 세상에 너보다 강한 자는 있어도, 너보다 살인을 잘할 사람은 없다. 그러니…]거인은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딱딱하게 굳은 여명의 얼굴이 일렁이는 살기를 마주했다.
[네가 서기장이 되어라.]“….”
[빨갱이들을 죽여라. 공산주의가 없는 깨끗한 세상을 위해서.]여명은 그 말을 검토하지 않았다. 아니, 기억에 남기지도 않았다.
“…어이가 없네.”
[비코프처럼 공산주의자들을 끌어안고 죽으란 말이 아니다. 너는-]여명은 손을 저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만, 멍청한 소리는 거기까지만 해.”
[멍청한 소리? 이건 신의 힘이다. 플레이어처럼 게걸스레 힘을 좇은 너라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고 있을 텐데!]바로 조금 전 스탈린이 제시한 피의 신성을 거부한 그였다. 이제와서 살기의 신성을 얻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여명은 거칠게 대답했다.
“그놈의 신성은 무슨… 이건 그 이전의 문제다.”
[이전의 문제?]“공산주의는 그런 식으로 없앨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