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55)
을 위한 세계는 없다-655화(655/817)
EP.655 이 조연을 보라. (5)
“모든 사건이 운명대로 흐르고, 비코프가 이곳에 도착했어도… 그 방법으론 공산주의는 없앨 수 없다.”
[…?]거인을 이루고 있던 살기가 출렁거렸다. 여명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귀족들이 농노를 수탈하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공격하고, 혁명가들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 공산주의는 사라지지 않아.”
이건 선악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해보라, 소련은 선했던가?
독재와 차별, 그리고 권력에 의한 대량 학살.
그건 거의 모든 공산국가의 공통점이었다. 공산주의는 악했다.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당장 그가 익히고 있는 주가시빌리부터가 그 증거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는 살아남았다.
미국과 대등하게 싸웠던 국력 때문에?
물론 그것도 한 가지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공산주의가 그저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달라,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는- 혁명가들의 오만.
어린아이마저 공장에 처넣는- 자본의 타락.
그리고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인민들의 위장.
그래, 공산주의는 사회 모순에 따른 결과에 불과했다.
그리고 원인이 바뀌지 않는 이상, 결과 또한 바뀌지 않으리라.
“악명을 쌓은 공산주의를 주인공이 무찌르고, 냉전을 끝내? 꿈 같은 소리는 집어치워. 기껏해야 수십 년을 억누르는 게 전부일 거다.”
[….]“그리고 그 수십 년 뒤, 그럴싸하게 이름만 바꾼 채 다시 돌아오겠지. 복고 사회주의, 아샤식 스탈린주의 등등.”
거기까지 말한 여명은 입을 다물었다. 거인 또한 입을 열지 못했다.
침묵.
딱딱하게 굳은 채 여명을 바라보는 녀석은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혹은 어이없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진실이 어느 쪽이건 간에, 녀석은 한참 뒤에나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다. 너는 새빨간 거짓말쟁이다.]“….”
[2차 대전으로 나치는 사라졌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로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냉전을 끝낼 것이다. 우리는-]“아니. 틀린 건 너다.”
여명은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무겁게 말했다.
“인간과 사상은 한곳에 몰아넣고 치울 수 있는 쓰레기가 아니다. 나치가 사라졌다고? 내가 바로 얼마 전에 히틀러를 봤는데, 잘도 그런 소리를.”
[….]“나치는 여전히 남아있다. 우월주의에 빠진 아샤 귀족들 사이에, 제국주의를 잊지 못한 유럽에, 그리고 남아있는 파시스트들의 마음속에.”
반론이 돌아오기 전에, 여명은 인벤토리를 열어 훈장을 꺼냈다.
황금빛 월계관 안에 소련의 상징인 낫과 망치를 품은 붉은 별이 새겨져 있고, 그 위로는 횃불과 휘날리는 적색 깃발이 새겨진 훈장.
적기 훈장.
“히틀러의 부활을 막은 자로서 증언한다. 나치는 죽지 않았다. 2차 대전으로 수천만 명이 희생되었음에도, 나치는 사라지지 않았다. 공산주의라고 다를 것 같지 않군.”
[….]거인의 고개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얼굴과 적기 훈장을 번갈아 보는 것처럼.
여명은 적기 훈장을 꽉 쥐며 녀석의 떨림에 쐐기를 박았다.
“운명의 목적이 무엇이건 상관 없어. 넌 운명에게 속았다.”
[내가… 속았다고?]살기의 거인, 신이 되지 못한 찌꺼기는 혼란스러운 듯 뒤로 물러났다. 녀석은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 운명은 절대적이다.]여명은 자신이 그 절대적인 운명을 바꿨노라고 지적하지 않았다. 거인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녀석은 분노했다. 자신을 속일 수 없기에 분노했다.
[거짓말이야! 너는 틀렸다! 틀렸다고! 내가 속았을 리 없다! 나는 냉전을 끝내기 위해 신의 자리조차 포기했단 말이다!]쾅, 쾅! 녀석의 주먹이 바닥을 때렸다. 살기가 넘쳐났지만,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네깟놈이 감히, 운명을 바꾼 죄를 저지른 네놈이! 나를 우롱해? 네놈은 아무것도 모른다! 너는 혁명가도 아니고, 당원도 아니야! 그저 운 좋게 주가시빌리를 배운 인간에 불과해!]여명도, 거인도 그 말이 헛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법.
살기의 신성은 드레이테리얼에서 여명을 습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거칠게 소리쳤다.
[넌 공산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담담하게 대답한 여명은 쥐고 있던 적기 훈장을 바닥에 내던지고,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는 방 청소용으로 산 빗자루와 걸레를 꺼내, 적기 훈장 옆에 던졌다.
“나는 밑바닥 청소부로 살았지만, 한 번도 당에 가입해본 적 없었다.”
그다음으로 꺼내 던진 건 KGB의 기관단총과 킴 필비의 컴비네이션 건이었다.
“오히려 소련의 망령들을 처리했고.”
다음은 작은 금속 조각 두 개를 꺼냈다. 드레이테리얼에서 손에 넣은 핵미사일의 파편과 힘을 잃고 찌그러진 인공 성물.
“소련의 부활을 저지했으며.”
다음으로 피눈물의 열쇠. 그는 작은 열쇠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소련의 유산을 차지했다.”
주가시빌리는 꺼낼 것도 없었다. 여명은 산의 눈물을 들지 않은 반대편 손에 무장 혈청으로 인민의 낫과 망치를 만들었다.
[한 사람이 이만한 유산을…?]거인의 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거칠게 흔들렸다.
여명은 마지막 물건을 꺼냈다. 반짝이는 금색의 별.
그것을 본 거인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사회주의 노력 영웅…? 그건 스탈린의…!]비코프도 그렇고, 이 거인도 그렇고 금성 메달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여명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난 공산주의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 없을 거다. 내가 본 거라곤 책 몇 권과 다큐멘터리 몇… 아니, 수십 편이 전부니까.”
[….]“하지만 이 물건들의 주인이자, 소련의 부활을 저지한 사람으로서 한가지는 맹세할 수 있다. 너의 방식으로는 공산주의를 없앨 수 없어. 다시 말하지만, 운명이 널 속였다.”
[그럴… 그럴 리 없다.]거인은 주먹을 쥐었다. 살기의 아지랑이 그 자체로 이루어진 육체가 꿈틀거리며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내뿜었다.
[운명이 왜 날 속인단 말이냐! 난 그가 추구한 선을 위해 기꺼이 신의 자리를 포기했다. 그런 나를 왜!]“미안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살기의 거인이 또다시 쾅! 바닥을 내려쳤다.
[그러면 넌… 넌 왜 나에게 이런 걸 알려준 거냐! 비코프에게 신성을 주기 싫었다면, 그냥 싸우거나, 하다못해 날 속였어야지!]그러게. 왜 그랬을까. 여명은 자신의 앞에 놓인 팔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왜 이 멍청한 신성을 설득하고 있는 걸까.
왜?
의문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살기의 신성이 그의 몸을 콱 붙잡았다.
[왜! 왜 이렇게까지 운명을 비트는 거냐! 알량한 정의감이냐? 아니면 복수? 대체 이유가 뭐냔 말이다!!]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정신은 다른 걸 떠올리고 있었으므로.
운명을 위해 죽음으로 날아간 왕이 있었다. 운명에서 벗어난 그는 마지막까지 친우를 걱정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영원한 우정을 바라노라.
모든 걸 포기했던 용이 있었다. 운명에서 벗어난 그녀는 삶의 즐거움을 찾았다.
-밥 줘.
종족을 위해 그냥 나무가 되길 선택한 세계수가 있었다. 그녀는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딸의 자유를 바랐다.
-은혜라, 딸 도둑놈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이로군.
그 외에도 운명에 휩쓸린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고통받았고, 누군가는 저항했고, 누군가는 맞섰다.
여명은 그들을 돕고, 구했다.
왜?
떠오르는 이유는 난잡했다.
복수를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기분이 나빠서, 누군가가 부탁해서.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그동안 다른 어르신들의 가르침과 무인들의 진의를 가슴에 품어온 여명은, 그 난잡함 속에서 뚜렷한 한 가지 이유를 골라낼 수 있었다.
너무나 솔직하고, 당연한 이유.
그는… 그러고 싶었다.
복수에 미친 용을 살려주고 싶었고, 무고한 인간들이 죽는 걸 막고 싶었으며, 살기의 신성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 그는, 천여명이란 인간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여명을 붙잡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살기의 신성은 그게 사실이냐고 묻지 않았다. 여명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으니까.
신성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강렬한 진심이.
녀석은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려는 듯, 거대한 몸을 기울여 여명에게 머리를 내밀었다.
[고작 그딴 이유로 운명을 비틀었단 말이냐? 개새끼가 자기 불알을 핥는 것과 같은 이유로? 다른 자도 아니고, 주가시빌리가?]거인의 얼굴 속 살기가 출렁거리며 격한 감정을 표현했다. 여명은 녀석의 살기에 호응하는 살기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 그게 전부다.”
[하, 하하하하!!!]거인은 폭소를 터트렸다. 어딘가 허무하고, 또 어딘가 후련한 웃음 소리로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색하며 말했다.
“….”
[하지만 마음에 든다. 미친놈이 아니라면, 감히 운명을 비틀진 않았을 테니.]거인은 조심스레 여명을 바닥에 내려놨다. 여명은 바닥에 떨어트린 물건들을 슥슥 발로 밀며 물었다.
“이제 뭘 할거지? 이대로 신이 될 건가?”
[아니, 더 이상 기다리는 건 질색이다. 나는 다섯 신처럼 개같… 인내심이 좋지 않으니.]“…그러면?”
[보고 싶다.]“뭘?”
[운명이 왜 날 속였는지… 네가 바꾼 운명이 무엇인지 지켜 보고 싶다.]“미안하지만, 신성을 받아들일 생각 없다.”
거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의 힘을 거절하다니… 어이가 없지만,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 네 몸에 깃든 다른 신성 또한, 겉돌고 있는 게 느껴진다….]말끝을 흐리던 거인은, 갑자기 휙! 주먹을 들었다.
[하지만! 꼭 방법이 그것만 있는 건 아니다. 난 아직 진짜 신이 아니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여명이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 거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음 순간, 녀석은 대뜸 여명을 향해 발을 휘둘렀다.
!!!
살기로 가득한 신성이 검과 부딪히며 폭발을 일으켰다. 아지랑이가 아니라, 마치 탱크와 충돌한 느낌이었다.
이 미친.
왜 갑자기 지랄이야? 당황이 머리를 스쳤지만, 여명의 몸은 정직했다.
혈관 사이로 마나가 차오르고, 근섬유가 빳빳하게 차오른다. 육체가 일순간에 전투태세를 갖췄다.
말은 필요 없었다. 살기의 신성은 여태껏 나눈 대화가 무색할 정도로 무작정 몸을 던지고 있었다.
지능이 사라지기라도 한 걸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신성과 무모함의 조합은 여명을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평범한 초인이었다면 반격도 못 하고 으깨졌을 테지만… 여명은 몸을 날리는 와중에도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탐색전은 없었다.
주가시빌리, 화산쇄설, 혜성검, 용사의 무술- 모든 걸 일제히 끌어올렸다.
베리야와 싸우며 소모한 체력을 생각한다면, 시간을 끌어선 안 됐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야 했다.
빛나는 검기, 출렁이는 아지랑이, 터져 나오는 살기.
살기의 신성은 멈추지 않았다. 다리를 자르면 팔로 달려들었고, 머리를 터트리면 몸을 굴러서라도 달려들었다.
심지어 짐승처럼 높이 뛰어올라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한데… 뭔가 이상했다.
‘왜 이렇게 약하지?’
여명은 점점 더 검의 속도를 높이며 생각했다. 잘려나간 아지랑이가 끝도 없이 퍼지며 재생을 반복했지만, 그뿐이었다.
녀석은 너무 약했다. 힘, 속도, 어느 것 하나 주가시빌리의 신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마치 봐주는 것처럼.
설마 자신이 신성을 흡수할 때까지 계속 싸우려는 건가?
땀방울과 함께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리던 여명은 문뜩, 세티가 보낸 문자를 떠올렸다.
[드레이테리얼, 붉은 손. 왼팔을 노릴 것.]여명은 무의식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그 문자가 가리킨 곳을 확인했다.
과거, 드레이테리얼에서 녀석이 내밀었던 팔과 똑같은 부분.
밑져봐야 본전이었다. 여명은 곧바로 그곳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거인은 피하지 않았다.
푸확! 잘려나간 팔 위로 아지랑이가 터져 나왔다. 빨갱이를 토막 낸 산의 눈물이 즐거운 듯 부르르 떨렸-
아니 잠깐, 이거 왜 떨려?
놀란 여명이 산의 눈물을 녀석의 몸에서 뽑아내려 했지만, 검은 살기 덩이 속에 단단히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살기가 말했다.
[털짐승들과 나 사이엔 공통점이 있었군. 우리는 공산주의의 파멸을 바란다.]“뭐라는 거야, 미친 새끼가-”
[그래, 미친 짓이다. 그냥 운명을 바꾸려는 미친놈에게 어울리는 짓 아닌가?]녀석이 능글맞게 대답한 직후,
콰아아 – !!
살기의 신성이 그대로 산의 눈물 속으로 빨려 들기 시작했다.
여명이 억지로 검을 빼 막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연노란색으로 빛나던 검신은 이미 새빨갛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