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56)
을 위한 세계는 없다-656화(656/817)
EP.656 이 조연을 보라. (6)
매 머리의 신이 말했다.
『보라, 그가 또다시 운명을 바꿨다.』
엄숙한 선언과 달리, 여명의 모습은 엄숙함과 거리가 멀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살짝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붉은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다가, 무어라 소리 지르고, 바닥에 내려치고, 또 한 번 소리 지르는 모습.
“….”
왜 저러는 거지? 라날의 주접 이후 여명이 저렇게 화내는 걸 본 적 없던 성녀는 귀를 기울여봤다.
-나와.
-멸공… 성검? 이게 진짜 미쳤나.
-나오라고.
-멸공의 눈물??? 어쭙잖게 합친다고 될 거 같냐!
애원하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모를 말들. 그 말을 들은 성녀는 물론이고, 신들의 표정마저 묘해졌다.
멸공?
성녀의 고개가 기울어질 때쯤, 여명은 아예 검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대로 발을 들어… 밟지 못했다.
그는 차마 검을 밟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다시 검을 주워 허리에 차는 모습이 참으로 쓸쓸했다.
성녀는 그제야 저 검이 드워프에게 받은 연 노란 색 검이란 걸 깨달았다.
‘왜 빨개졌지? 혁명이라도 당했나?’
여명이 들었다면 버럭 화를 내고도 남을 생각을 떠올릴 때쯤.
같은 걸 바라보던 아야톨라가 중얼거렸다.
“붉은 별이 천여명이었다고?”
“….”
앗. 이거 비밀이었지. 성녀는 곧바로 아야톨라의 얼굴을 확인했다.
혹시라도 녀석이 도망치려고 하면 쏴버릴 생각으로 리볼버를 꼭 쥔 채로.
그러나 아야톨라는 도망치긴커녕, 폭소를 터트렸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뭐가 그리 웃긴지, 녀석의 웃음소리가 귀를 울렸다. 아야톨라는 숨이 막혀 끅끅거릴 때까지 계속 웃었다.
어딘가 섬뜩한 웃음이 끝나기 무섭게, 정색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운명이 바뀔 리가 없지.”
“뭐?”
“그는 운명을 바꾼 게 아니다. 동생아. 운명에게 조종당한 거지.”
“….”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구나, 모를 만도 하지. 주인공이야말로 운명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천여명이 바꿨다고 생각한 운명은… 또 다른 운명에 불과하다.”
아야톨라는 텅 빈 눈으로 매의 신을 올려다봤다.
“지구의 신이여, 당신도 보기 좋게 속았군요. 오랜 시간 공들인 이 우연도, 결국 운명과 주인공 앞에-”
녀석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여명이 그의 말을 끊었으므로.
“플레이어, 공산주의자, 이번에는 주인공인가? 나도 모르는 정체성이 계속 늘어나네.”
“….”
“뭐, 내가 직접 검기를 꽂아 넣은 놈이 살아있는 것만큼 신기하진 않지만.”
아야톨라에게 쏘아준 여명은 곧장 시선을 돌려 매 머리 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로구나.』
서로 인사하는 두 사람을 보며 성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어? 어떻게?’
당황하는 성녀와 달리, 아야톨라는 사납게 말했다.
“그래, 이 시간대의 난 이미 한 번 죽었지. 네가 꿈과 피를 죽인 것처럼.”
“….”
여명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도 그럴 게, 살기의 신성과 말싸움을 벌인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다. 그에겐 아야톨라의 헛소리와 어울릴 이유도, 여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재밌는 가설이지만, 난 주인공이 아니다. 진실을 흘리는 자.”
“…오직 진정한 주인공만이 스스로의 운명을 부정하는 법이지.”
“….”
여명이 이대로 목을 날릴까 고민하는 사이, 성녀가 끼어들었다.
“야, 이교도 주제에 사제처럼 말하지 말고, 쉽게 말해.”
어처구니없는 요구였기에, 아야톨라는 어처구니없게 화답했다.
그러니까, 녀석은 더욱더 사제 같은 말투로 말했다.
“주인공은 운명이 그를 필요로 하는 순간까지 자신이 주인공이란 사실을 모르노라. 우리 속 돼지처럼 주어진 기연을 처먹으며 살을 불릴 뿐….”
“….”
“천여명. 네가 아무리 부정할지언정, 너는 분명 주인공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니, 여명이 딱 그랬다. 그는 아야톨라의 지랄을 가볍게 흘려버렸다.
“…주인공이 아니라고 하면 주인공이라고? 참 대단한 모순 납셨네.”
“말로 부족한가? 그럼 행동이라면 어떤가?”
“…행동?”
아야톨라는 텅 빈 눈구멍으로 여명을 마주했다. 공허한 눈구멍 속에서는 광기 어린 확신이 느껴지고 있었다.
“천여명과 붉은 별, 두 명의 궤적이 가리키는 답은 하나다. 왜 여태껏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네가 노리는 게… 각하란 사실을.”
“….”
‘각하’란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여명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래, 난 각하를 노리고 있다. 그래서? 그 구역질 나는 쓰레기와 적대하는 게 왜 주인공으로 이어지지?”
아야톨라는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역시, 거기까진 깨닫지 못했구나. 각하의 적이 왜 주인공이냐고?”
“….”
“그야… 각하가 운명의 적이기 때문이다.”
“뭐어?!”
화들짝 놀라는 성녀와 달리, 여명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그는 검 손잡이 위로 손을 올리고 물었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뭐 어쩌란 거냐.”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던 걸까? 아야톨라의 눈매가 무겁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여명은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운명과 각하가 서로 적이라고?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교단이 운명을 운운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교단과 손을 잡은 각하도 당연히 운명과 드잡이질하고 있겠지.
거기다 운명과 각하는 그놈이 그놈 아닌가.
숨어서 세상을 속이고, 멋대로 타인을 이용하고, 무고한 자를 학살하는 쓰레기들.
각하의 제물이 될 한국인이나, 운명에 의해 죽어간 이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없다.
그러니 같다. 둘은 똑같은 쓰레기다.
녀석들의 목적이 어떻게 다르고, 왜 싸우는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알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 여명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아야톨라에게 되물을 수 있었다.
“유언은 그게 전부냐?”
“….”
여명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공산주의의 그것처럼 빨갛게 물든 검날이 번들거렸다. 칼날에 얼굴이 비친 아야톨라가 하! 크게 웃었다.
녀석은 여명이 아닌, 신들을 향해서 말했다.
“지구의 신들이여, 당신들은 이걸 보고도 우리보다 이자가 더 낫다고 할 수 있나? 불쌍한 나의 동생이여, 운명이 너에게 진정으로 사랑을 허락할 줄 알았- ”
그때, 입을 다물고 있던 매의 신이 부리를 열었다.
『잠깐, 멈추어라.』
그가 멈춘 건 아야톨라의 말이 아닌, 여명의 검이었다.
여명은 허리춤에서 반쯤 빠져나온 검을 쥔 채로 신을 올려다봤다.
신이 말했다.
『조금 전까지, 나는 운명에 맞서는 우리가 종말 교단과 어떻게 다른지, 또 얼마나 더 나은지 설명하고 있었다..』
“….”
『쇠똥구리, 너야말로 그 증거이니, 내 왕관을 걸고 부탁하겠다. 저 불쌍한 영혼에게 증명해다오. 전대 성녀가 옳았음을, 그녀를 믿은 우리가 옳았음을… 그 검에 깃든 신성에게 그러했듯, 폭력이 아닌 마음으로서.』
여명은 ‘그냥 모가지를 치는 쪽이 더 빠르지 않을까요?’ 라고 말하는 대신, 순순히 검을 다시 꽂아 넣었다.
신의 부탁이나, ‘아무리 그래도 처음은 빨갱이를 죽여야 하는 게 아니냐’는 자칭 성검의 속삭임 때문은 아니었다.
성녀.
오랜만에 안대를 벗은 그녀의 두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여명은 성녀에게 살짝 웃어준 뒤 신에게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게 먼저겠지. 보여다오. 너의 기억을.』
여명은 기억을 어떻게 보여주냐고 묻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성녀가 쓰는 방법을 두다다 설명해준 덕분이었다.
아야톨라가 어디 해보라는 듯 팔짱을 끼는 사이, 여명은 손을 들었다.
곧, 그들이 서 있던 새하얀 공간 위로 여러 색조가 물들기 시작했다.
여명은 신중하게 보여줄 기억을 골랐다.
그의 소중한 기억을 함부로 보여주기 싫어서? 아니, 그의 기억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거대한 악 때문에.
미그니움.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타났던 그녀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다 보니, 기억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았다.
실수로 세티에게 깨물리던 순간을 떠올렸다가, 개 머리의 신에게 한 소리 들었을 정도.
『이노옴!!! 그녀의 소중한 순간을 함부로 보여주지 마라!』
어째서일까? 여명은 개 머리의 신에게서 사위를 혼내는 장인어른의 분노를 느꼈다.
묘한 느낌이었다. 그의 ‘진짜’ 장인어른들은 다 비정상이었으니까.
뭐, 아무튼.
여명은 계속 기억을 이어나갔다.
인천, 만주, 아카데미, 드레이테리얼, 제미니 시티, LA, 시카고, 호주, 히라리아, 개성, 성도….
스스로가 생각해도 정말 열심히 돌아다녔구나 싶은 감정을 떠올릴 때쯤.
아야톨라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
우웨엑-!
여명은 기억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아야톨라를 바라보자, 녀석의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뭐, 뭐야. 왜 그래?”
놀란 성녀가 치유의 기적을 들고 그에게 달려들건 말건, 아야톨라는 여명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명이 물었다.
“이걸로 대답이 됐나?”
아야톨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신들과 성녀, 그리고 다시 여명을 차례대로 바라본 뒤 아주 조심스레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군. 심지어 신들마저도….”
“…?”
“그분.”
미그니움. 아야톨라는 그녀의 이름을 직접 꺼내지 못했다. 그저 발음을 따라 입술을 달싹이는 게 전부였다.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손잡이를 꽉 쥐었다. 어떻게? 미그니움에 대한 기억은 보여주지 않았을 텐데?
“…그분이라니. 그녀에 대해 뭘 알지?”
“말해줄 수 없다. 아직 내 영혼은 교단에게 묶여 있으니까.”
“뭐?”
“하지만, 한 가지. 네가 주인공이 아니란 건 알겠다.”
여명이 무어라 더 묻기도 전에, 아야톨라가 피에 젖은 얼굴을 슥슥 문지르며 말했다.
“내 모든 태도를 바꾸고 묻겠다. 천여명, 너는 왜… 우리처럼 되지 않았지?”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넌 바깥에서 온 자에게 가족을 잃었다. 운명에게 부모를 잃었고, 너와 같은 피해자들을 무수히 만나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나눴다. 그런데 왜… 우리처럼 종말을 추구하지 않는 거지?”
“….”
“용사이기 때문인가? 그래서 종말이 아니라, 구원을 추구하는 것인가? 그것이 운명에 대한 너의 답인가?”
아야톨라는 조금 전 태도가 어디 갔냐는 듯, 애원하듯 말했다.
“진지한 질문이다. 부디, 너의 진심을 알려줬으면 한다.”
“….”
진실의 권능이 피부를 타고 느껴졌다. 악의가 아닌, 순수한 궁금증이 깃든 권능.
그냥 무시해버릴 수도 있었지만, 여명은 그러지 못했다. 성녀와 신들조차 궁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결국, 그는 푹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전에도 너와 비슷한 질문을 한 사람이 있었지. 구원은 무슨… 난 내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바빠. 그러니 내 대답은 이거다. 난 구원자가 아니야. 될 생각도 없고, 될 수도 없다.”
의외의 대답이었던 걸까? 아야톨라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
“…그래, 그렇지. 복수도 사랑도… 따지고 보면 개인적인 일이지.”
그는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편견을 수정하겠다. 종말 외에도 답이 있었으니… 매부, 내가 널 성녀의 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
“성녀의 눈?”
성녀가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묻자, 아야톨라가 대답했다.
“각하와 교단이 노리는 성물의 이름이다. 동생아, 네 눈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여명은 다른 단어에 꽂혀 있었다.
“매부…??”
그러자 아야톨라는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난 다른 회차에서 태어난 성녀의 오빠다.”
소련 스파이 장모, 교단의 죄인 장인, 그 다음에는 아야톨라야?
성녀가 어깨를 으쓱이는 가운데, 여명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