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6)
을 위한 세계는 없다-66화(66/817)
〈 66화 〉 예정에 없던 편입 시험 (4)
* * *
***
자신에게 겨눠진 총구를 본 순간, 여명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
‘거래 좀 안 풀렸다고 뒤통수에 총질이라니.’
이 거래가 일방적인 강도질에 가깝다는 걸 떠올려보면,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여명은 한숨과 함께 손을 들어 올렸다. 권총탄 정도야, 팔로 막아낸 뒤 재생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팔에 총알은 꽂히지 않았다.
아니, 총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여명이 팔을 내리자, 그의 시야로 기묘한 풍경이 보였다.
모든 게 정지된 세상.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가는 다룰마와 이제 막 고개를 돌리는 성녀, 이곳을 바라보던 군인들의 발걸음까지.
광기 어린 정 대령의 얼굴은 물론이고, 불을 뿜는 총구조차 그대로 멈춰있었다.
“…이건 또 뭐야.”
최근에 황당한 일을 너무 자주 겪어서 그런가, 여명은 놀라움보다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잠시 미간을 주무른 뒤, 그는 마나를 끌어 올려 감각을 늘렸다. 아니, 늘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마나를 끌어 올린 순간, 멈춰있던 다룰마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예 놀라지도 않는군. 이렇게나 반응이 없어서야. 애써 연기한 사람이 뭐가 되나?]다룰마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드워프의 목소리.
“다룰마?”
여명이 고개를 돌리자, 다룰마… 아니, 다룰마의 몸을 빼앗은 무언가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둔 가문의 장자로 보이나?]다룰마의 몸 위로, 반투명한 드워프가 겹쳐져 있었다. 고급스러운 예복을 입고, 커다란 왕관을 쓴 드워프.
“…드워프의 왕인가.”
[그 칭호는 너무 짧군. 진짜 칭호는 이런 거라네.]말이 끝나기 무섭게, 드워프 왕의 유령… 아니, 유령 비슷한 무언가가 과장된 자세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나는 용 비늘 산맥의 정당한 왕이자, 용사의 후손, 갈 우라간의 정당한 주인이자, 용의 친구, 유니콘과 대왕 두더지의 지배자, 위대한 산맥의 주인, 대로의 관리자이자, 모든 드워프의 어버이, 다섯 신의 축복을 받은 자, 바위의 주인, 레독스의 망치, 제국 황제의 친우이자, 다섯 회의의 중재자, 오크의 공포이자, 으뜸가는 황금의 제작자, 금화의 주관자이며 그 외에 무수한 칭호를 가진…]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여명이 그런 생각으로 눈썹을 들어 올리기 무섭게, 드워프가 덧붙였다.
[…다발 힐린이라고 하네. 내 특별히, 다발이라고 부르는 걸 허락하지.]“…천여명. 그냥 인간.”
여명이 팔짱을 끼며 대답하자, 드워프 왕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용살자란 칭호는 어디에 뒀나?]“…용살자라니, 용을 죽인 적 없다만.”
여명은 보란 듯 뒤편에 누워있는 붉은 용을 바라봤다. 양다리와 날개에 흉터가 남아있었지만, 용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럼 용을 쓰러트린 자라고 하게. 칭호는 많을수록 좋으니.]이놈은 또 뭐야? 여명은 저 드워프 귀신을 죽여야 하나 고민했다.
잘못하면 애꿎은 다룰마가 죽을 거 같아서 참고 있긴 한데…
[그럼 서로 통성명도 끝냈으니, 용을 쓰러트린 용사, 천여명. 이제 나하고 대화 좀 하겠나?]거부해봤자 들어주지도 않을 것 같았기에, 여명은 감시탑 계단에 털석 주저앉았다.
“최대한 짧게.”
[그건 힘들겠는데.]“….”
[자네도 내 입장이 돼보게. 수십 년 만에 입을 열었는데 어떻게 짧게 끝내겠나?]여명은 슬쩍 파양결을 끌어올려 주먹에 모았다. 일렁이는 마나를 본 다발 힐린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남들이 아는 정도는 알지. 마지막 드워프 왕.”
[무모하게 모스크바로 날아가다가 격추당한 멍청한 왕?]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
[굳이 덧붙이자면, 내 무모함에는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고 배웠겠지. 안 그런가? 국제사회의 관심을 얻기 위해, 그리고 소련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오기 위해선 그게 최선이었다…]거기까지 말한 드워프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는 건, 역사가들을 위한 핑계지. 역사가 언제나 그렇듯, 진실은 조금 더 잔인하고 슬프다네.]역사의 뒤편에 숨겨진 진실이라, 청소부 시절이었다면 관심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그런가? 그럼 역사가 아니라 운명과 관계된 거라면 어떤가?]“소련에게 멸망하는 게 운명이라고 말할 생각이라면…”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네. 내가 말하는 운명이란, 세계수의 결정이 자네에게 말한 운명과 똑같은 말이지.]“…뭐?”
세계수의 결정? 여명이 관심을 보이자마자, 다발이 덧붙였다.
[자네는 운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길게 설명하면 한 대 때릴 표정이군. 좋아. 내 최대한 짧게 설명해보겠네.]큼큼, 드워프는 헛기침한 뒤 말했다.
[이 세상에는… 결코 변하지 않는 흐름이란 게 존재한다네. 예를 들어, 자네가 먹은 세계수의 결정은 본래 마인의 손에 들어갔어야 했어.]“마인?”
[자네는 이미 만나지 않았나.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고, 막 하늘을 날아다니는…]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파순.”
기묘한 무술을 쓰며 하늘을 날아다니던 녀석.
정부에게 고용됐다는 사실 외엔 아는 게 없었지만, 마인이란 칭호가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없는 녀석이었다.
녀석의 성격과 탐욕… 모든 게 인간보다는 마귀에 가까웠으니까.
[파순이라, 내가 알던 이름과는 조금 다른데… 뭐 아무튼, 자네가 녀석의 운명을 바꿨다네.]“…세계수의 결정을 먹은 게 운명을 운운할 정도의 일인가?”
[그것뿐이라면 굳이 이런 말도 안 했겠지. 원래 운명대로였다면… 파순은 오르세 타불의 심장을 먹고, 황금 옥새를 손에 넣었어야 했다네.]용의 심장과 황금 옥새. 파순이 노리던 물건들을 떠올린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오, 이런. 용은 멀쩡히 살아있고, 옥새는 저 위에 처박혀 있군.]여명은 잠시 입을 다물고 드워프 왕의 말을 헤아려봤다. 만약 그가 만주에 있지 않았다면?
파순은 용병단을 습격해 다룰마 둔에게서 세계수의 결정을 빼앗을 테고, 용과 맞서 싸워 심장과 옥새를 얻었으리라.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한 이야기였다. 드워프 왕이 말하는 거창한 운명 단어와 어울리냐면… 그건 아니었다.
[믿기지 않는 눈치로군. 하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자네가 운명을 바꾼 게 틀림없다네.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묻지 말게. 나도 잘 모르겠으니.]드워프 왕은 웃었다. 어딘가 허탈하고, 공허한 웃음.
[난… 오랫동안 운명이 불변한다고 믿었네. 그래서 기꺼이 나 자신을 희생했지. 그런데… 하필 죽은 뒤에 운명을 바꾸는 자와 만날 줄이야.]“…그래서 뭐 어쩌란 거냐. 할 말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빨리해.”
[내가 부탁할 걸 기다리고 있었군? 부탁받거나 시험받는 것에 익숙해. 주변 인간들이 자네를 가만히 두지 않았나 본데.]여명은 입술을 씰룩였다.
[나도 그 기분 잘 알지. 세상은 뛰어난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거든.]“…제발, 요점만 말해.”
[그걸 원한다면야, 뭐… 대단한 부탁은 아니라네. 그저, 자네가 내 친우를 살려주면 좋겠어.]친우? 여명은 드워프 왕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구속구에 붙잡힌 붉은 용이 있었다.
[오르세 타불. 내 친우. 나는 그에게 아무 진실도 말해주지 않았지. 내 운명을 위해, 그를 이용했다네.]“….”
[저 친구는… 그것도 모르고 죄책감을 느끼더군. 내가 죽은 게 자기 탓인 줄 알고 미쳐버렸지.]여명은 자기도 모르게 용의 외침을 떠올렸다. 공산주의자를 향한 길 잃은 복수심.
그것을 마주한 성녀와 용병들은 두려움을 느꼈지만, 여명은 달랐다. 그는…
동질감을 느꼈다.
“…내가 저 용을 살려줘야 할 합당한 이유를 말해봐.”
하지만 그게 용을 자유롭게 풀어줘야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용의 복수를 동감하는 것과 그의 복수를 위한 자원을 포기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까.
[조금 전에 내 친우를 풀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큼, 농담이라네. 자네의 행동이 뻔한 블러핑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네. 상대가 갑자기 총을 쏠 줄은 몰랐지만.]드워프 왕은 정지한 정 대령을 슬쩍 바라본 뒤, 반투명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정의와 이익. 어느 쪽 이유를 말하면 되겠나?]“이익.”
여명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정의라니, 그와는 연이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드워프 왕의 생각이 조금 다른 듯했다.
[의외로군. 만주를 구하기 위해 몸 바친 자네가 정의가 아닌 이익을 말할 줄이야?]여명은 정의가 아니라 성녀의 예지와 다룰마가 약속한 거래, 그리고 용의 시체를 위해 싸운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드워프 왕의 은근한 미소를 보자마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가 성녀를 도와 만주를 구한 것도, 아직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마음대로 생각해.”
여명이 뚱하게 대답하자, 드워프 왕은 껄껄 웃으며 수염을 두들겼다.
[자네의 진심이 어떻든 간에, 자네가 정의가 아닌 이익을 말했으니, 나 또한 그에 맞춰야겠지.]그는 그렇게 말하며 감시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뭘 하려는 거지?
여명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저편에서 무언가가 그의 손을 향해 날아왔다.
탁. 마치 자석처럼 왕의 손으로 이끌려온 그것은, 금빛 마력을 내뿜고 있는 거대한 도장이었다.
황금 옥새.
만주를 파괴할 뻔한 마도구이자, 다룰마 둔이 애타게 찾는 드워프의 유물.
[용의 시체보다 더 귀한 것을 주면 이익에 부합하겠는가?]왕은 여명에게 옥새를 내밀었다. 여명은 잠시 옥새를 내려다보다가, 다룰마의 얼굴 위로 겹쳐진 드워프 왕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걸로는 부족해.”
물론, 옥새는 용의 시체보다 가치 있을 것이다.한 종족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담긴 유물 아닌가.
하지만 여명이 원하는 건 그런 추상적인 가치가 아닌, 실용적이고 즉각적인 힘이다.
용의 뼈와 비늘, 그리고 심장으로 얻을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옥새가 가진 능력은…기껏해야 땅굴을 파는 마법뿐.
용처럼 수십 년을 기다려서 화산을 터트린다면 이보다 더한 무기도 없겠지만, 여명에겐 그만한 시간도, 그만한 시간을 기다릴 이유도 없었다.
[부족하다니, 옥새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서 하는 말인가?]“…땅굴 파는 마법?”
[하필 가장 단순한 능력만 알고 있군. 왕을 상징하는 물건인데, 설마 그거밖에 없겠는가?]지구에선 왕을 상징하는 물건이라고 딱히 대단할 건 없는데.
여명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왕은 옥새를 용을 향해 집어 던졌다.
정확히는, 용을 억누르고 있는 구속구들을 향해서.
달칵!
옥새가 구속구에 닿자마자, 구속구의 잠금장치들이 풀렸다.
정지된 세계라서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지만, 시간이 움직이는 즉시 일제히 용의 몸에서 벗겨지리라.
[봤는가? 이게 옥새의 주인에게 허락된 능력 중 하나라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잠금을 푸는 것.]왕이 손을 들어 올리자, 옥새는 또다시 왕의 손으로 돌아왔다.
“좋은 능력인 건 알겠어. 하지만 딱히…”
[…딱히?]“내게 쓸모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다른 건 없나?”
[마나만 충분하다면 금제나 봉인도 풀 수 있다네. 아쉽지만 이 주변에 봉인이 없어서 딱히 예시를 보여줄 순 없군.]봉인과 금제를 푸는 능력. 왕의 상징치고는 단출하기 그지없는 능력이었지만…
여명은 옥새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금제를 풀 수 있다는 말을 들을 그 순간.
머릿속에 금제를 달고 사는 한 소녀가 떠오른 탓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