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60)
을 위한 세계는 없다-660화(660/817)
EP.660 각자의 복수. (3)
누구도 나에게 사람답게 사는 게 어떤 건지 알려주지 않았다.
운명에 휘둘리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 평범한 인생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운명에게 살해당한 사생아가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이름과 성을 버리고 종말에 귀의하는 것뿐이었다.
내게 남은 건 복수뿐이었다.
그것이 나의 길이었다.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천여명의 삶을 보고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 순간에.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복수에 모든 걸 쏟아부은 복수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복수와 사랑을 모두 선택한 매부가 될 수도 없었다.
내가 원한 건 따로 있었다. 복수보다, 어쩌면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일.
아버지, 어머니. 성물지기와 모리네.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천진난만한 동생을 증오할 정도로, 영혼에 사무칠 정도로 사랑했다.
나를 낳아준 모든 기적에 감사하며, 그 기적과 사랑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 나는 여전히 그들의 아들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나는 이미 복수에 몸을 던졌고,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더럽혀졌으니까.
아야톨라인 나는 누군가의 아들로 돌아갈 수 없다.
이것이 악으로 살아온 벌이었다. 사악한 운명과 싸우기 위해 또 다른 악이 된 대가였다.
용서해주세요. 엄마.
나는 벌을 받아들였다. 종말 교단이 내게 내린 명령을 배신하고, 매부를 성녀의 눈으로 이끌었다.
이제 동생과 매부가 이 성물의 방을 떠나는 순간… 나는 소멸하리라.
이름과 성, 그리고 육체마저 잃은 아야톨라에게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동생은 좋은 딸이 되기 글렀지만, 매부는 좋은 사위가 되기를.
그렇게 끝이 다가온 순간.
지구의 신이 나에게 말했다.
『신 앞에서 달관한 척, 완성된 척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바라는 것을 말하라.』
동생과 매부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이건 신이 나에게 주는 기회라는 것을.
속죄의 기회.
나는 운명의 구슬을 받아들고, 그것을 내 몸에 꽂았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운명에게 버려진 내가 마지막에는 운명의 힘을 빌리다니.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 속에 숨겨진 교단의 비밀을 유출했다.
부디, 매부가 나의 속죄에서 뭔가를 얻어가기를.
아야톨라가 뿜어낸 빛을 따라, 새하얀 지평선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른 숲을 태우는 산불처럼 주변으로 퍼지는 어둠.
‘또 기억을 재생하는 건가?’
여명이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찰나, 아야톨라가 말했다.
“매부, 잘 봐둬.”
다음 순간, 어둠이 높이 치솟아 올랐다.
일행을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높게.
정수리 위까지 검게 물드는 걸 본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꿈을 흘리는 자의 권능을 떠올렸다.
뒤틀린 마나가 느껴지지 않아서 망정이지, 다른 곳이었다면 곧바로 목을 쳤으리라.
그런 여명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둠을 펼친 아야톨라는 양손을 모아 기도를 시작했다.
“과거는 고통이고, 현재는 무의미하니… 우리는 미래를 거부하노라.”
불길한 기도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주변 풍경이 뒤바뀌었다.
사아아 – !
창백한 바람이 볼을 스치는 그곳은 만주였다.
정확히는, 만주지원사령부가 내려다보이는 하늘 위.
여명이 발아래를 내려다보자, 폐허가 된 콘크리트 요새가 눈에 들어왔다.
군인과 용병들로 가득했던 건물은 남아있지 않았다.
철근이 다 드러난 콘크리트 무덤 위, 살아 있는 건 먹이를 잃고 서로를 뜯어먹는 괴수들뿐.
뭐지? 여명이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고 느낀 순간.
번쩍!
만주지원사령부의 폐허 아래에서 보랏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만주에서 시작된 빛은 그대로 한반도를 향해 퍼지기 시작했다.
어떤 빛은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는 것처럼 땅을 통해서.
또 어떤 빛은 태풍이 구름을 밀어내는 것처럼 하늘을 통해서.
“공희의 빛? 이거 설마…?”
그 빛의 정체를 깨달은 성녀가 중얼거리는 가운데, 여명은 빛이 퍼지는 방향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어느 빛이 얼마나 멀리, 얼마나 많은 마나를 담고 퍼지는지 외웠다.
그리고 거의 모든 마나의 이동을 외운 직후.
한반도 저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노인, 아이,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는 비명.
비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1분도 지나지 않아, 한반도 전역에 비명보다 섬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
그 침묵을 깬 건, 개성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였다.
이 머나먼 만주 땅에서 보일 정도로 짙푸른 빛을 뿜어내는 무언가.
그것은 지진 같은 굉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젤리처럼 출렁거리는 몸, 태백산맥만큼이나 거대한 크기, 몸속에서 뿜어내는 은은한 푸른 빛.
그건 마왕이었다. 여명이 봤던 그 어떤 마왕보다도 무시무시한 마왕.
단순히 크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문제는 마왕의 몸에서 나오는 푸른 빛이었다.
“여명, 저 푸른 빛이 뭔지 알아?”
“체렌코프 현상.”
“…체렌코프?”
“방사능의 빛이야.”
마왕은 그 말을 증명하듯 하늘 위로 포효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다.]다음 순간, 마왕은 만주 방향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긴장하며 녀석을 마주 보던 여명은 문뜩, 저 손의 목표가 자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녀석이 손을 뻗은 건 만주가 아니라, 옛 소련의 영토였다.
뒤늦게 여명이 고개를 돌리자, 옛 소련의 영토 전역에서 무수한 양의 미사일이 발사되는 게 보였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 핵.
놀란 여명이 숨을 삼킬 정도로 짧은 시간이 흐른 직후, 미국, 텅 비어버린 중국, 유럽에서 차례차례 미사일이 솟구쳤다.
“핵….”
여명은 고개를 들었다.
죽음을 담은 미사일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던진 야구공처럼 기나긴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공을 받아줄 아버지는 없었다.
핵을 기다리는 건 무고한, 혹은 그렇다고 믿는 인간들뿐.
[이것이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끔찍한 기도 뒤로, 첫 번째 핵폭발의 소리가 이어졌다.
!
섬광, 충격파, 그리고 거대한 버섯구름.
사방에서 죽음이 솟구치는 가운데, 성녀가 겁을 먹는 게 느껴졌다.
여명이 그녀를 꼭 끌어안는 순간, 또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에 그를 기다리는 건… 새까만 비가 내리는 도시였다.
쏴아아 – !
이곳이 미국인지, 소련인지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빗속에 섞인 방사능 앞에서는 누구라도 평등하니까.
운 나쁘게도 죽지 못한 생존자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사실, 비를 피해도 별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더러운 핵이 퍼트린 방사능은 이미 대지를 뒤덮은 뒤였다.
방사능 피폭은 피할 수 없다. 누군가는 피부가 벗겨지고, 누군가는 암에 걸리지만, 결말은 언제나 똑같다.
죽는다. 모두 고통스럽게 죽는다. 지구인 모두가 죽는다.
살아남은 건 저 멀리, 한반도에서 핵을 쏘아낸 마왕뿐이다. 그것은 죽음의 땅이 된 지구를 보며 웃었다.
하- 하- 하-
마왕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열한 웃음.
한참을 웃어 재낀 녀석은 그대로 개성 차원문으로 향했다. 녀석은 자기 손바닥보다도 작은 개성 차원문을 붙잡더니, 그대로 거대한 몸을 욱여넣기 시작했다.
…혐오스러운 광경이었다. 차원문을 넘어간 녀석이 무얼 할지 알기에 더더욱.
녀석의 몸 중 절반 정도가 차원문 너머로 사라질 때쯤, 여명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신을 올려다봤다.
호루스, 성녀처럼 오드 아이를 지닌 신은 이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아야톨라의 영혼에 새겨진 비밀. 교단이 추구하는 종말이다.』
방사능 마왕이 강림하고, 그 마왕의 힘으로 핵전쟁을 일으키는 것.
이 끔찍한 미래가 교단의 목표라고? 여명은 혐오감에 입술을 씹었다.
아니, 아니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단순히 종말을 추구한다던 교단의 목표를 정확히 알게 되지 않았나.
문제가 하나 있다면-
“방사능을 뿜고, 다른 국가의 핵 발사 권한을 멋대로 조종할 수 있다니… 저걸 막을 순 있는 겁니까?”
호루스는 딱! 부리를 부딪친 뒤 대답했다.
『그대가 올바른 답을 찾는다면.』
올바른 답…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여명이 떠올릴 수 있는 답은 딱 하나뿐이었다.
애초에 마왕이 탄생할 수 없도록 막는 것.
아야톨라가 이런 미래를 보여준 이유도 아마 그것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여명은 기도하는 아야톨라를 바라봤다.
그에게 보여준 풍경의 대가인 건지, 녀석의 눈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아슬아슬한 모습.
여명이 이제 녀석이 어떻게 되냐고 묻기 전에, 성녀가 먼저 물었다.
“저… 이제 아야톨라는 어떻게 되나요?”
『보여줘선 안 되는 것을 보여줬으니. 본인이 속박된 종말로 돌아갈 것이다.』
“…녀석을 구할 수는 없나요?”
호루스가 되물었다.
『왜 구하려느냐?』
“예?”
『진실을 흘리는 자는 악이다. 가까이는 천여명을 죽일 뻔했고, 멀게는 호주의 생물들을 오염시켰다. 인간의 법으로도 사형이고, 신의 법으로도 사형이다. 그런 악한을 왜 구하려느냐?』
“….”
성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에 대답한 건 여명이었다.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죽음은 속죄다.』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예, 그런 죽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아닙니다. 이건 도망가는 겁니다.”
『도망…? 죽음이 도망이라.』
호루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여명과 눈높이를 맞췄다.
『너는, 아니… 그대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 다르군.』
“….”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려온 것인즉, 나는 그대를 존중하겠다.』
그렇게 말한 호루스의 눈동자가 한층 더 반짝거렸다. 기쁨 때문인지, 아니면 슬픔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호루스가 말했다.
『그대가 원하는 일을 하라.』
“…저는 방법을 여쭸습니다.”
『답은 그대에게 있다. 저것은 아야톨라가 지불한 미래의 악몽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미 저것보다 강력한 악몽을 끝낸 적 있다.』
“더 강한 악몽이라면… 꿈의 권능?”
『그래, 그대는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왔지?』
여명은 곧바로 대답을 떠올렸다.
꿈의 핵을 파괴해서.
그렇다면 지금 꿈의 핵이 뭘까? 진실을 흘리는 자 본인? 아니면 그가 건넨 운명의 구슬?
정답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꿈을 흘리는 자를 참살했던 그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이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어둠 그 자체가 꿈의 핵이라고.
어쩐지 꿈을 흘리는 자의 악몽과 비슷하게 느껴지더라니.
딱히 증거는 없었지만, 그렇게 확신한 여명은 멸공성검(?)을 내버려 두고 이 순간에 가장 적절한 무기를 꺼냈다.
성물지기가 그에게 건네준, 성물. 단죄의 빛.
아샤의 태양을 머금은 새하얀 검이 악몽 속에서 번쩍였다.
빛을 본 성녀가 말했다.
“마음속에 태양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리니.”
다른 사람의 기도였음에도, 성물은 그 기도에 응답했다.
번쩍이는 백색 빛이 사방을 비췄다. 여명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성자로 산다는 건 편안함과 거리가 멀다.
특히 세기의 로맨스로 태어난 혼혈 성자라면 더더욱.
-저 사람 어머니가… 그?
-다섯 신이시여.
-아무리 성자님이라지만, 성검과 맞바꿀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겁니까?
사제들의 수군거림, 신도들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
-난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모든 게 나의 삶을 짓눌렀지만, 나는 견딜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부모님 덕분에.
성물지기 호르아와 푸른 쥐 모리네. 두 분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나는 엇나가고 말았을 거다.
개새끼만 보면 쏘고 싶은 병에 걸린 다거나, 상스럽게 총대주교의 험담을 하고 다닌다거나….
심지어 잠자리에 친구와 애인을 동시에 끌어들이는 방탕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그건 방탕이 아니라 사랑인데?-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혹시라도 부모님께 폐가 될까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나를 성자로 뽑아주신 다섯 신께 최선을 다한 덕분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나도 저렇게 살았거든?-
오죽하면 저 오만한 총대주교조차 나에게 세상이 마냥 깨끗하지 않은 걸 배워오라며 지구 행을 추천할 정도였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떨어지는 건 아쉬웠지만,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다.
세상을 모르고 어찌 성자라 칭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내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만주라 불리는 땅이었다.
예지에 의하면 시베리아 장벽을 넘어온 괴수에 의해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가 날 곳.
고대하던 입학식이 날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차마 희생될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오랜 기간 수련해온 총기를 들고 혼자서 만주를 구하기 위해 떠났다.
아니, 혼자서란 표현은 수정하겠다. 만주는 거친 땅이었다. 그리고 거친 만큼 강인한 자들이 있었다.
용병들. 특히 드워프와 관련된 용병들은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었다.
개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었다.
노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몸, 거칠지만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용사를 떠올리게 하는 황금빛 눈동자까지.
천여명이란 이름을 지닌 그녀는,
–푸하하핫! 그녀래! 남자 대 남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지?-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재능만큼이나 깊은 마음의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사심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슬픔에 깊게 공감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거리는 쉬이 좁혀지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조심스러운 탓도 있었지만, 끝없는 싸움이 이어진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우리는 함께 사악한 해골용을 막고, 괴수와 싸우고, 미쳐버린 용을 쓰러트렸다.
그리고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는 날… 그녀는 내게 고백했다.
이제는 다시 만나지 말자고. 당신 때문에 내 복수가 흔들린다고.
나는 그녀를 이해했다. 나 또한 성자라는 자리에 묶인 몸, 사랑은 나와 그녀 모두에게 치명적인 독이었다.
-에이, 둘이 키스도 안 하고… 이거 언제까지 봐야 해?-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하지만 우리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빨갱이들을 막기 위해 차원문을 넘은 날.
제미니 시티에서 불우한 기사를 막던 때.
그리고 LA와 시카고에서 사악한 종말 교단을 쓰러트린 순간까지… 우리는 우연과 필연 속에서 함께했다.
특히 시카고에선 어머니를 구하러 온 아버지와 만났을 때가 인상 깊었는데.
–우리는 이때 키스도 다 하고 그랬는데.-
아버지는 그녀의 당찬 모습에 깊은 인상을 느끼신 듯했다. 심지어 아끼는 성물을 그녀에게 직접 건네줬다.
-이 다음에 유니콘이랑 작별했고.-
성물을 든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아카데미로 향하는 배에서 나는 처음으로 녹색 신의 축복을 빌었다.
-바로 본선 직행? 발랑 까진 것 좀 보게.-
그날 밤. 그녀가 옷을 벗는 소리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자극적이었다.
-히히, 못 꺼. 끝까지 다 보자고.-
침대에 앉아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나를 향해, 그녀가 말했다.
성자님, 저를 사랑하시나요?
예, 사랑합니다. 저희 부모님만큼.
마마보이. 하지만 성자님의 그런 점도 좋아요.
내 사랑,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나는 성자가 아니오. 그러니. 이름으로 불러주시오.
알겠어요. 켄티… 켄티 이르티. 나의 성자님.
그녀의 손이 내 얼굴을 덮었다.
거칠지만 따스한 손이 볼을 간지럽히고, 내가 고개를 돌린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내 뺨을 때렸다.
짝!!!
아야톨라는 볼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충격에 눈을 떴다.
어찌나 강하게 맞았는지, 눈앞에서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입술은 파르르 떨리느라 열리지 않았다.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잠시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의 외눈 위로 두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신이 비쳤다.
“….”
아야톨라는 그들에게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봤다.
성물의 방 허공에는, 조금 전까지 그가 경험하던 꿈이 정지 상태로 떠 있었다.
어두운 방에서, 여자 천여명과 조심스레 손을 맞잡은 성자.
그는 본능적으로 치솟는 부끄러움을 억누르며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 시대의 용사와 성녀의 기억. 두 개를 뒤섞어, 네게 박힌 운명의 구슬에 주입했다.』
무덤덤한 호루스의 대답.
“처남을 구하려면 영혼의 이름과 성을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위로는 아니지만, 이게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조금 더 세밀한 천여명의 대답. 그리고-
“푸하핫! 오늘 나는 성자가 아니다!!”
반쯤 정신줄을 놓은 성녀의 웃음소리까지.
아야톨라는 지그시 머리를 누르고 생각을 정리했다.
조금 전까지 떠올리던 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의외로 빨리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소멸하는 날 살리기 위해 내가 버린 이름과 성을 찾으려 했고, 그 방법으로 운명의 구슬을 사용해 꿈을 꾸게 했단 말입니까?”
『정확하다. 켄티, 우리는 너의 이름을 찾았고, 이렇게 되살렸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고작 이런 거로 교단의 속박을 풀 수 있을 리가….”
아야톨라는 믿을 수 없다는 말끝을 흐렸다. 이에 호루스가 답했다.
『운명의 구슬과 나는 ‘고작 이런 것’이 아니다.』
“예, 운명의 구슬은 대단한 보물이죠. 하지만 당신은… 운명에게 휩쓸린 지구의 신에 불과하잖습니까?”
호루스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인간은 쉽게 망각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아까 전에 말했듯, 나는 너를 안다.』
“….”
『성녀가 태어나지 않았던 회차에서, 나는 너에게 깃들어 있었노라.』
이전 회차? 아야톨라… 아니, 이름을 되찾은 켄티는 놀란 눈으로 호루스를 바라봤다.
『나는 봉인되어 있었고, 네가 종말로 뛰어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무수한 시간을 넘어… 너는 구원 받았다.』
신의 고백 앞에서 켄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 여명 또한 침묵하는 가운데, 오직 성녀만이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웃다가 사레가 들린 탓이었다.
진짜 미친년인가? 켄티는 복잡한 기분으로 성녀의 등을 두들기는 여명에게 물었다.
“신께선 그런 이유가 있었다지만, 천여명 넌… 왜 날 구했지? 그냥 그대로 소멸하게 내버려 둬도 됐을 텐데.”
천여명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눈에 박은 운명의 구슬, 그거 빌려 드린 겁니다. 되돌려 주셔야죠.”
“….”
그는 죽은 자신에게서 뽑아가면 그만 아니냐고 되물을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았다.
‘…그냥 도와줬다고 하면 될 것을.’
아야톨라를 셋이나 참살한 용사치고는 부끄러움이 많은 매부였다.
아니, 부끄러워야 하는 건 이쪽인가.
“그래, 돌려줘야지.”
켄티는 간신히 호흡을 되찾은 성녀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눈에서 운명의 구슬을 빼내려는 순간.
여명이 물었다.
“그래서, 뭐 때문에 교단의 비밀을 보여준 겁니까?”
“….”
“육체는 이미 내 손에 죽었고… 여기 있는 건 아마 영혼 비슷한 뭔가 아닙니까. 여기서 죽으면 진짜로 죽는 걸 텐데. 무슨 깡으로요?”
켄티는 왜 그런 걸 물어보냐고 묻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성녀와 호루스의 표정에 답이 담겨 있었으니까.
“날 동정하는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야톨라를…… 왜?”
“그건… 음, 잘 모르겠습니다.”
“….”
여명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쪽이 처남이라서 돕는 걸 수도 있고, 멋대로 죽는 걸 두고 보자니 기분이 꿉꿉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그때, 성녀가 호응했다.
“응? 종말 교단을 엿 먹이려고 그런 거 아니었어?”
“아, 그런 이유도 있네. 그걸로 하자.”
“….”
켄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너희는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성물지기와 모리네? 그건 욕 아닌가?
여명이 의문을 삼키는 사이, 켄티가 조금 전 질문에 대답했다.
“천여명, 솔직하게 대답하마. 네가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순간에… 복수 말고 다른 걸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운명을 향한 복수가 아니라는 걸.”
복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여명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켄티는 얼굴을 쓸어 내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원하는 걸 얻기엔 난 너무 멀리 왔고, 내게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속죄.”
“…속죄라.”
여명은 호루스를 힐끗 바라본 뒤 물었다.
“원하는 일은 뭐였습니까?”
“환생.”
즉답이었다. 여명과 성녀의 눈썹이 동시에 휘어졌다.
“환생…?”
“그래, 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거기까지 말한 그의 외눈이 정지된 성물지기와 모리네에게로 향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들로.”
켄티의 목소리는 조금 축축했다. 꿈속 효자 소리가 빈말이 아니었던 건가?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부모님을 모시던 덕배 형을 떠올렸다.
물론, 성녀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어… 그건 힘들걸? 우리 아빠 거세당했거든.”
“….”
“….”
『….』
여명과 아야톨라, 심지어 신마저 뜨악한 눈으로 성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사제들이 아빠만 보면 다들 그랬어. 아랫도리를 함부로 놀린 대가로 그 뭐시냐… 컷! 당했다고.”
성녀는 보란 듯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참 노골적인 시늉이었고, 여명은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우리 아빠가 고자인 걸 왜 말하고 다니겠… 아, 미안. 시아버지는 유명하시지.”
“….”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아야톨라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음울한 웃음이었다.
“그러면 내 소망은 처음부터 헛된 것이었군. 내 탄생이 그랬던 것처럼.”
“….”
켄티는 완전히 체념한 표정이 되었다. 여명은 애써 그를 위로했다.
“확실한 건 아니라고 했으니, 또 모르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 성물지기는 채찍질을 당했지 거세를 당하진 않았습니다.”
“….”
“거기다 이름도 되찾았고요.”
“그래, 내 이름… 켄티 이르티.”
그는 오랜만에 찾은 자신의 이름이 어색한지, 혓바닥 위로 몇 번 더 이름을 굴렸다.
“이상한 이름이야.”
성녀가 괜히 심술을 냈다. 켄티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메켄티 이르 에르티만큼이나 이상하지.”
“내 이름은 이상한 게 아니라 특별한 건데?”
“….”
여명이 듣기엔 둘 다 정상이 아니었지만, 굳이 그 감상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름으로 치면 쇠똥구리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뭐, 아무튼. 여명은 치졸한 말싸움을 피해 호루스를 바라봤다.
“신이시여. 환생이라는 게 정말로 가능합니까?”
『나는 순환과 재생의 지배자이니, 천상과 현실이 만나는 이곳이라면 불가능하지 않다. 아마 모리네에게 그의 영혼을 이끌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
『하지만 물리적인 임신은 또 다른 이야기다. 처녀 수태나, 성 기능 장애 치료는 내 영역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거세는 성녀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성물지기께서 죄의 대가로 채찍질 당했지, 거세당한 적 없습니다.”
직후, 성녀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내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어머니의 품에서 성불할 것이다. 켄티 이르티. 너는 진정 죽음의 안식이 아닌 그것을 바라느냐?』
“….”
그는 모리네를 보며 대답했다.
“네, 그것을 원합니다. 사무치도록 원합니다.”
호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세트의 계승이 끝나는 대로 너의 꿈을 이뤄주겠-』
그때, 세티의 목소리가 신의 말을 끊었다.
“아, 이쪽은 이미 끝났어요.”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신의 힘을 다 받아들인 세티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명이 물었다.
“언제 깨어났어?”
“음, 성녀가 거세 이야기할 때부터?”
“….”
하긴, 다른 부부의 거세 이야기에 끼어드는 건 좀 그랬겠지. 여명이 다가온 그녀의 손을 맞잡자마자, 성녀가 말했다.
“세티, 뭔가… 변한 게 없네?”
“그야, 그냥 화신이 되었을 뿐이니까…. 환골탈태는 내 수준에서는 아직 안 된다더라.”
“…아직?”
나중에는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놀라는 성녀를 향해 웃어준 세티는 호루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막의 왕이시여, 바로 시작하면 될까요?”
『그래, 시작하라.』
시작해? 뭘? 여명이 의아한 얼굴로 세티를 바라보기 무섭게, 세티가 호루스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푸확! 호루스의 노란 눈동자에서 피가 쏟아졌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신의 피가 철철 흘러내리며 눈을 바닥을 적셨다.
갑자기 뭐야? 일행 모두가 놀란 눈으로 세티를 바라봤다. 그녀는 뻗었던 손으로 주먹을 쥐며 말했다.
“이집트 신화에서, 세트와 호루스는 왕권을 두고 경쟁한 라이벌이자 적이었어. 호루스는 세트를 몰아냈고, 세트는… 호루스의 눈을 뽑았지.”
“….”
성녀가 물었다.
“지금 그걸 구현한 거야?”
“응, 세트가 아니라면 호루스의 눈을 뽑을 수 없어. 내가 화신이 되지 않으면, 너도 화신이 될 수 없는 구조야.”
“…뭐? 왜?”
세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맹금류의 그것처럼 선명한 노란빛 눈동자가 얹혀 있었다.
“네가 화신이 되기 위해선, 눈동자 두 개가 필요하니까.”
성녀는 더 질문하지 못했다. 세티의 손바닥 위 눈동자를 본 직후, 그녀는 무언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어?”
직후, 성녀의 검은색 눈동자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노란색 검은색 오드 아이가 아닌, 온전한 한 쌍의 눈동자.
“자, 잠깐만! 아직 잡신의 화신이 될 마음의 준비가-!”
놀란 성녀가 소리쳤지만, 계승은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