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63)
을 위한 세계는 없다-663화(663/817)
EP.663 각자의 복수. (6)
장관의 사생아는 저 멀리 날아가는 파순을 바라봤다. 퍽 웃긴 장면이었음에도,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아마, 입에 문 담배 때문이리라.
그리고 파순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될 때쯤, 그는 세티를 향해 물었다.
“검은 양… 원래 그런 성격이었나?”
“어, 이런 성격이었어. 당신은 몰랐겠지만.”
여명의 볼을 닦아주고 있던 세티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비서의 얼굴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흔들리는 담배 연기를 따라 물었다.
“언제부터 정부와 싸웠지?”
“평생.”
“아, 그러시겠지… 그러면 질문을 바꿔서, 행동으로 옮긴 건 언제부터지?”
“여명과 만난 후부터.”
비서의 눈썹이 씰룩였다. 그는 ‘두 사람은 아카데미에서 만난 게 아니냐’ 물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그런가? 그렇다면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꽁초만 남은 담배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걸 본 여명이 물었다.
“후회하나?”
“후회? 당연히 하지. 씨발, 이렇게 갈 줄 알았으면 금연하지 말 걸… 한 대만 더 피워도 될까?”
여명은 대답 대신 담배 한 갑을 통째로 던져줬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조금 전 여명이 줬던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탁, 탁,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목 잘린 예카테리나의 몸이 차갑게 식어갔다.
비서는 먹먹한 눈으로 시체를 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박진수. 조웅찬 장관의 아들이다.”
“…장관에게 아들이 있었다고? 금시초문인데.”
“성이 다른 걸 보면 알겠지만, 혼외자다.”
“….”
“창녀가 알아서 피임할 거라 생각한 무심한 남자와, 돈 많은 남자의 아이를 낳으면 팔자를 고칠 수 있다고 믿은 멍청한 여자의 합작품이지.”
뭐가 그리 웃긴 건지, 박진수는 킥킥 웃었다.
“권력가 아버지와 창녀의 자식… 난 가끔 너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곤 했다. 검은 ㅇ… 아니. 홍세티.”
그러자 여명이 세티의 앞을 가리며 말했다.
“이제와서 억울한 피해자 연기는 하지 마라. 쓰레기. 진짜 피해자들은 이미 끔찍하게 살해당했으니까.”
살기를 느낀 박진수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그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부러워서 그래.”
“…부럽다고?”
“그래, 너희는 진짜 복수를 하고 있으니까… 시도조차 못 한 나는 다르게.”
이야기가 길어질 걸 예감한 여명은 검을 뽑았다.
하지만 검이 움직이기 전에, 세티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조금만 들어보자’ 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여명은 천천히 검을 내렸다.
그사이 후우- 연기를 내뿜은 박진수가 말을 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살해당했다.”
“….”
“감히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른 죄였지. 경찰이고 뭐고, 대낮에 칼 맞아 죽었어. 창녀치고도 개 같은 죽음이었지.”
부모님의 죽음을 말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덤덤한 목소리였다. 그는 계속 말했다.
“빈말로도 좋은 엄마였다고는 못하겠지만… 내 엄마였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사람. 어머니의 시체를 본 나는 범인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웠다. ”
세티는 망치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친아버지가 범인인 걸 알고 복수를 포기한 거야?”
“하하! 그런 거라면 이렇게 기분이 엿 같지 않겠지.”
“….”
“난… 나는, 아버지의 권력을 보자마자 복수를 포기했다.”
떨리는 담배 연기, 떨리는 목소리.
“나라를 주무르는 거물의 후계자가 될 기회가 주어지자, 머릿속에서 복수 같은 건 싹 사라지더군.”
“…사생아에게 후계자를 맡길 거 같진 않은데.”
여명이 반론하자, 박진수가 픽 웃었다.
“조씨 가문의 후계자들 중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하는 게 나뿐이라면 말이 다르지. 장남은 하루가 멀다고 뽕이나 빠는 병신이고, 사촌들은 가문의 재산을 갉아먹지나 않으면 다행인 범부들이었다.”
“….”
“난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 눈에 들기 위해 온갖 아양을 떨었다. 무슨 일을 시켜도 복종하고, 또 복종했지. 그렇게 꾸역꾸역 비서 자리를 꿰찼는데….”
박진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죽은 예카테리나를 바라봤다.
타닥, 타닥- 타버린 담뱃재가 아래로 떨어졌다.
“이 여자, 우리 엄마를 닮았어. 머리카락, 눈물점, 그리고… 날 신경 쓰지 않는 것까지.”
“…그래서?”
“그냥… 복수의 허무함 때문에 죽은 여자를 보니, 내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깨달았단 거다.”
“결론은?”
“넋두리에 그런 게 어딨겠나? 유언을 남겨줄 사람도 없고, 그냥… 떠든 거지.”
그 말을 끝으로, 박진수는 예카테리나의 피에 담배를 비벼 껐다.
“안 아프게 죽여주면 좋… 아, 맞다. 천여명, 담배 잘 빨았다.”
그는 돌바닥에 기대어 고개를 들었다. 탁한 눈동자 사이로, 신성이 흩어지는 성도의 밤하늘이 비췄다.
하지만 여명의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세티가 먼저 움직였으므로.
“지르지스, 잠깐 저희끼리만 대화해도 될까요?”
성기사단의 단장은 여러모로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었지만, 이런 곳에서 질문을 쏟아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되도록 빨리 끝내라. 성기사들에게 연락을 돌렸으니까.”
그 말을 남긴 지르지스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세티는 그가 다시 변경백의 옆에 서는 걸 확인한 뒤에야 말했다.
“박진수. 당신은 오늘 죽지 않을 거야.”
“….”
‘살려줄까’도 아니고, ‘오늘 죽지 않을 거야’ 라니?
그건 박진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넋두리에 감동이라도 했나?”
“아니, 그딴 이야기에 감동할 정도로 감정이 메마르진 않았거든. 그 대신, 이용 가치는 있어보이네. 이익을 위해 복수를 포기한 그 쓰레기 같은 마인드… 가끔은 그런 것도 필요하지.”
“….”
“여명, 이 사람 이용해도 괜찮지?”
“네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
답을 받아낸 세티는 곧바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조금 전 파순의 발목을 잡았던 그림자 덩굴이 박진수의 발 아래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본 덕분일까? 박진수는 두려움과 기대감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덩굴과 세티를 번갈아 바라봤다.
“날 어쩌려는 셈이냐?”
세티는 촉수를 움직이며 대답했다.
“질문은 내가 해. 박진수. 장관이 성도에 온 이유, 알고 있어?”
“…성녀의 눈을 챙기기 위해.”
“그럼 그게 진짜 눈이 아닌, 다른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란 것도 알겠네?”
박진수는 슬쩍 성녀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세티는 주머니에서 성녀의 눈, 그러니까 운명의 구슬이 들어 있던 상자를 꺼냈다.
여명이 열기 전과 마찬가지로, 쇠사슬로 꽁꽁 봉인된 상자.
“이게 바로 그 성녀의 눈이야.”
“뭐? 안에 뭐가 들었지?”
“우리도 못 열어서 몰라.”
“….”
세티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속에 들어있던 운명의 구슬은 이미 여명의 인벤토리 속에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계속 거짓말을 이어나갔다.
“이대로 가지고 있기도 그렇고… 이참에 이걸 역으로 이용할 생각이야. 이 상자, 당신한테 줄게.”
“…허.”
“나, 여명, 그리고 당신… 우리 셋이 장관이 실패한 일을 성공시켰다고 정부에게 알리는 거지. 그 성과로 우리는 애국자 중 애국자가 되고, 당신은… 장관의 남은 세력을 규합하고. 어때?”
박진수는 꿀꺽, 침을 삼켰다.
“날 이용해 우리 아버지의 세력을 이용하겠다…? 생각은 좋지만….”
“…우리 사이엔 신용이 없지. 알아.”
박진수의 말꼬리를 가로챈 세티는 작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목줄은 있어.”
“목줄? 잠복성 독약이라도 먹일 생각이냐?”
“아니, 그보다 더 좋은 거.”
스멀스멀 돋아난 그림자 촉수는 어느새 먹이를 노리는 문어의 발처럼 박진수의 머리를 향해 겨누어졌다.
그가 불길한 생각을 떠올린 직후, 세티가 말했다.
“성녀, 눈 감아.”
성녀는 그렇게 했다. 그녀가 여명의 뒤편에 숨어 눈을 질끈 감은 바로 다음 순간.
푸푹-! 무언가 찔리는 소리가 성녀의 귀를 채웠다.
박진수가 비명을 질렀으나, 구멍 난 그의 목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세티의 ‘세뇌’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성녀가 눈을 뜨기 전에 끝낼 정도.
세트의 신성을 얻기 전과 비교하면 몇 배는 빠른 속도였다.
아무튼, 작업을 끝낸 세티는 박진수에게 명령했다.
“일어나.”
박진수는, 정확히 그의 육체가 세티의 명령을 따랐다.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부러진 뼈 때문에 표정이 일그러지면서도.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박진수는 비명을 삼켰다. 세티는 그에게 여분의 포션을 던졌다.
“이 포션으로 응급 치료한 뒤에, 숙소로 돌아가. 정부에는 우리 셋이 성녀의 눈을 탈취했다고 보고하고.”
“….”
박진수는 상처에 포션을 바르며 말했다.
“심연을 보면 심연도 너를 바라보지. 너희도… 한국 정부와 다를 게 없군.”
세티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한국 정부는 일이 끝난다고 풀어주지 않을걸?”
“…뭐?”
박진수는 움찔, 몸을 떨었다. 포션의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풀어주겠다는 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여명이 끼어들었다.
“그녀의 약속은 내가 보증하죠. 그러니 일단, 돌아가서 당신 아버지의 인맥을 흡수할 준비부터 하세요. 내 이름이 도움이 될 겁니다. 박진… 아니, 조진수.”
박진수는 여전히 긴가민가한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아버지나 검은 양이나, 누가 그를 조종하건 결국 권력만 잡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좋아. 정부에 돌아가서 성녀의 눈을 얻었다고 보고하겠다. 한국에서… 답변이 오면 연락하지.”
등을 돌린 그가 뚜벅뚜벅, 폐허 너머로 사라지길 잠시.
성녀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아, 드디어 끝났다.”
피곤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하기야, 주가시빌리를 다루는 여명조차 피로가 쌓일 정도였으니, 가녀린(?) 성녀가 피로를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빨리 샤워하고 자고 싶어.”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끝이라고 생각했을 땐 끝이 아니라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를 잃어버린 예카테리나의 시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놀란 성녀가 리볼버를 뽑는 것과 동시에, 세티의 망치가 움직였다.
그렇게 세티와 성녀가 예카테리나의 시체에 시선이 쏠린 순간.
여명의 눈은 다른 걸 쫓았다.
예카테리나가 흘린 피 웅덩이. 피와 담뱃재가 뒤섞인 그곳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장 혈청.’
그리고 세티의 망치와 성녀의 총알이 시체를 후려친 찰나.
피 웅덩이에서 무장 혈청이 튀어나왔다. 새끼 여우 형상의 무장 혈청.
신성을 가득 품은 녀석은 뒤에서 대기 중인 가짜 쇠똥구리를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이미 준비를 끝낸 여명의 검보다 빠르진 못했다.
!
여명의 무장 혈청이 순식간에 여우를 토막 냈다. 피로 이루어진 여우는 푸확! 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채 한 줌의 핏물로 돌아갔다.
한데… 핏물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중력에 순응하는 대신 여명의 무장 혈청으로 흡수 됐다.
이거 뭐야?
여명은 재빨리 무장 혈청을 거둬들였다. 실수였다. 핏물은 무장 혈청을 따라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었으니까.
“…여명? 괜찮아?!”
놀란 성녀의 목소리를 따라, 핏속에서 흐르는 무장 혈청의 양이 확 늘어난 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있을까, 여명은 힘껏 마나를 끌어 올리고 혈관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흡수된 무장 혈청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의 무장 혈청과 뒤섞여 품고 있던 피의 신성을 뱉어내는 게 아닌가.
가짜 쇠똥구리가 흘러나온 신성을 흡수하는 가운데, 여명은 흡수한 무장 혈청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결론내렸다.
베리야 때와 마찬가지로 그냥 흡수된 건가. 자세한 건 나중에 라쉬크에게 물어봐야 하리라.
살짝 마음을 놓은 여명이 마나를 거두자, 성녀 또한 리볼버 총구를 아래로 내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 이제는 끝난 거 맞지?”
“아마도?”
성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티 또한 긴장이 풀렸는지, 망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치적인 문제랑, 총대주교랑, 빨갱이 잔당 정도가 남아있긴 하지만… 응. 이 정도면 다 끝났네.”
“거, 정말 깔끔하게도 끝났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녀는 맥이 탁 풀린 상태였다. 몸을 반쯤 기울인 그녀는 여명을 향해 손짓했다.
손짓이 뭘 뜻하는지 말할 것도 없었다.
여명이 다가가 그녀의 옆에 앉자, 성녀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올렸다.
그리고 이에 질세라, 세티도 자리를 바꿔 여명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모든 게 끝난 뒤에 찾아온 짧은 여유. 위아래로 연인들의 무게를 느낀 여명은 미소지었다. 저 위에서 지르지스의 살벌한 눈빛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아무튼, 여명의 허벅지에 볼을 비비던 성녀가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방금 저 박진수란 놈한테 준 성녀의 눈… 저 상자 그냥 줘도 돼? 운명의 구슬은 이미 여명 주머니에 있잖아.”
“응 괜찮아. 우리 중 여명 밖에 못 열었잖아? 쉽게는 못 열거야.”
“하지만 열 방법이 있으니 추적한 거 아닐까? 분명히 열 수 있을 텐데….”
“뭐, 그건 박진수가 감당할 문제지.”
“….”
와, 이 못된 년. 성녀는 세티의 악랄함에 감동했다.
“그 짧은 사이에 그 계략을 떠올렸다고? 그러면… 풀어준다는 것도 거짓말이야?”
“아니? 진짜인데? 물론, 각하와 정부의 죄악이 온 세상에 공개된 이후에 풀어줄 거지만.”
“….”
그때 풀어줘봤자 감옥행 아닌가? 성녀는 악당이 된 기분으로 미소지었다.
“홍세티, 이 나쁜 계집애”
“…성도에 불 지른 성녀만 할까?”
성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깔깔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등 뒤에서 들려온 살로메의 목소리 때문에.
“저, 성녀님…?”
독일어가 아니라서 못 알아들을 뻔. 성녀는 자연스럽게 농담거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살로메와 함께 서 있는 남자를 본 순간, 그녀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총대주교.
수행 사제 한 명만 이끌고 온 그는, 어느 때보다 굳은 얼굴로 말했다.
“성도에 불을 질렀다니. 농담이리라 믿소. 성녀.”
“다, 당연히 농담이죠!”
“다섯 신께 맹세할 수 있소?”
“….”
빈말로도 다섯 신께 거짓을 고할 수 없던 성녀는 침묵했다. 총대주교의 한숨이 뒤섞인 침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