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64)
을 위한 세계는 없다-664화(664/817)
EP.664 각자의 복수. (7)
잠시 성녀를 노려보던 총대주교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푹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보다 신성하셔야 할 분이 이렇게나 앞과 뒤가 달라서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총대주교께서 앞과 뒤가 다른 걸 지적하시는 건가요?”
“당연히 지적할 수 있소. 아니, 반드시 지적해야 하오. 총대주교야 교인들이 뽑아준 선출직이지만, 성녀님은 신께 직접 선택받은 분이시니 말이오.”
“….”
“그런 의미에서, 다른 죄 또한 기꺼이 지적해드리겠소. 중앙 신전 방화, 총기 관리 위반. 아, 그리고 화염병에 넣을 기름은 어디서 나셨소? 만일 훔친 거라면 절도죄도 추가.”
그렇게 성녀의 입을 막아버린 직후, 그가 여명을 향해 말했다.
“자, 천여명. 일단 자리부터 옮기지.”
여명을 찾아온 거였어? 성녀는 한 번 더 반격했다.
“…자리를 옮겨? 왜요? 총대주교랑 할 말 없는데요?”
“당연히 할 말이 없으셔야지요. 중앙 신전에 불을 지르고도 할 말이 있으면 그게 사람이오? 금수지.”
“그… 교인들을 구하기 위해 지른 불이었거든요?”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시는 거라면, 참으로 유감이오.”
“….”
“혹, 안대가 성녀님의 양심을 담당하는 물건이었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새 안대를 찾아오겠소.”
말싸움에서 밀린 성녀의 이마로 힘줄이 돋아났다.
“레닌이 맞았어! 혁명의 불길은 상징이 아니라 사람부터 태워야 했어!”
“…화형은 천 년도 전에 금지되었소. 공부 좀 하시오.”
이게 진정 성녀와 총대주교의 대화란 말인가.
여명이 마음속으로 다섯 신께 사과드리는 가운데, 총대주교가 말을 이었다.
“천여명, 굳이 다른 사람은 필요 없으니, 너만 와도 된다. 따라오거라.”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뒷수습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다면 나중에 정식으로 부르시거나, 여기에서 해주십시오.”
정중한 거절이었으나, 총대주교는 완강했다.
“변경백이 내 모가지를 치는 걸 보고 싶다면, 여기서 이야기해도 된다.”
“….”
솔직히 보고 싶긴 했다. 하지만 굳이 변경백이 있는 이곳까지 찾아온 걸 보면, 총대주교도 어지간히 급한 일이 있다는 뜻.
여명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성녀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장서시죠. 따라가겠습니다.”
그렇게 총대주교가 등을 돌려 걸음을 재촉하고, 여명이 가짜 쇠똥구리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하는 사이.
살로메가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여명이 물었다.
“살로메, 어쩌다가 총대주교랑 같이 온 거야?”
“그게… 지하에서 공산주의자들이랑 한국 정부의 괴물들을 다 제압했거든요? 근데 포박할 때쯤 갑자기 붉은 차원문이 열리길래….”
“도망쳤어?”
“문제 생기면 도망가도 된다고 한 건 너였잖아…요.”
여명은 괜찮다는 뜻을 담아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잘했어. 괜히 거기 있었다가 인질이 되는 것보다 그게 낫지.”
진심이었다.
붉은 차원문을 연 건 비코프였을 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녀석이라면 살로메 뱃속의 히틀러를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런 여명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로메는 말이라도 고맙다는 듯 미소지었다.
“그렇게 도망친 뒤에는,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지상에 있는 괴수들을 따로 모아서 지하로 옮겨놨어. 정예 괴수들은 다시 회수했고.”
“고생했네. 그러면 총대주교랑은 어쩌다 만난 거야?”
“괴수 정리하는 중에 지하 터널에서 만났어. 호위 사제가 날 보자마자 권총부터 뽑더라. 놀라서 반격할 뻔했다니까?”
“…그야, 괴수를 지휘하는 사람을 보면 누구라도 총부터 뽑겠지.”
상식적인 여명의 대답과 달리, 성녀는 ‘그냥 반격했어야지.’ 라고 중얼거렸다.
여명이 그런 성녀에게 꿀밤을 때린 직후.
크흠! 앞서가던 총대주교가 헛기침으로 시선을 끌었다.
“그래, 용사여. 신을 상대한 기분은 어떻던가?”
여명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베리야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아, 그러면 고차원적 에너지 생명체였나?”
어딘가 비꼬는 듯한 어투였다.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고차원적인 것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녀석은 노골적일 정도로 일차원적인 목표로 움직였으니까요. 그러니까…”
여명이 말끝을 흐리기 무섭게 총대주교와 성녀, 두 사람이 동시에 그의 말꼬리를 가로챘다.
“잡신이었네.”
“잡신이었군.”
다음 순간, 성녀와 총대주교는 서로를 노려봤다. 무슨 러시아 혁명 시절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처럼 살벌하게.
…종교인들이란.
여명이 호루스를 대신해 성녀의 이마에 한 번 더 꿀밤을 먹이는 사이, 총대주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녀석이 신이건, 신이 아니건 간에… 저 높은 곳에서 내려온 존재임이 확실하지. 그리고 넌 그걸 쓰러트렸다.”
갑자기 칭찬을? 여명이 쑥스러움보다는 의심의 날을 세우는 가운데, 총대주교의 칭찬이 계속 이어졌다.
“내가 보증하지. 옛 용사가 불사의 왕을 쓰러트리고, 변경백이 히틀러를 쓰러트린 이후로… 가장 위대한 업적일세.”
“…불사의 왕?”
“옛이야기라네.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겠다며 천상으로 올라간 미치광이가 아샤 전역을 위협한 사건이었지. 데스나이트, 흡혈귀, 타이탄… 현재까지도 인류를 위협하는 수많은 악이 그때 탄생했다.”
“….”
“당시의 용사와 그 일행은 불사의 왕을 쓰러트리고,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올 수 없도록 봉인했다. 자신들의 신을 잃은 네크로맨서들은 하찮은 도굴꾼으로 전락했지.”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여명은 성녀를 향해 ‘알고 있었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성녀도 모르는 이야기라. 여명은 총대주교의 의도를 읽기 위해 천천히 대답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
“그렇겠지. 변경백이 히틀러를 쓰러트린 것과 마찬가지로… 숨겨야 할 것이 많은 이야기였으니.”
파삭. 총대주교는 중앙 신전의 유리였던 무언가를 밟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나?”
“글쎄요, 저도 똑같이 비밀로 해달란 겁니까?”
“아니, 정반대일세. 난 오늘 일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 자네를 불렀네.”
“…예?”
총대주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보란 듯 폐허를 가리키며 말했다.
“중앙 신전이 파괴되고, 하늘 높이 불길이 치솟았다. 거기다 누가 들어도 포탄이 분명한 소리가 계속 성도를 계속 울렸지. 지금이 휴대폰도 없던 옛날도 아니고… 영상과 사진이 그대로 남아있으니 부정해봤자 비웃음만 살 터.”
“….”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데, 용사만 한 뉴스거리가 있겠나?”
그와 변경백이 베리야와 싸우는 동안 그런 식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나.
이 양반은 진짜….
그때, 여명은 문뜩 총대주교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그런 목적이라면, 굳이 저에게 말해주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총대주교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그냥 내 멋대로 알려도 되네. 하지만 그러면 성녀가 내게 총을 쏘거나… 화염병을 던지겠지. 안 그런가?”
성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총대주교는 쓰게 웃었다.
“…코뼈가 부러진 것도 못 견디겠는데, 총까지 맞고 싶진 않군.”
뭔가 다른 뜻이 더 숨겨져 있는 것 같았지만, 여명은 굳이 추궁하지 않았다.
“말씀해주신 건 고맙지만, 제가 용사라는 건 밝힐 수 없습니다.”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게. 용사의 정체는 비밀로 할 테니.”
“…?”
익명? 그게 무슨 뜻인지 예상한 여명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떠 오르기 무섭게, 총대주교가 손을 펼쳤다. 마치, 신문을 펼치는 것처럼.
“정체를 숨긴 용사가 몰래 공산주의자를 쓰러트리고 사라졌다… 내일 뉴스의 헤드 라인을 채우기에 완벽한 제목 아닌가.”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나름대로 여명을 배려한 말이 틀림없었다.
어디까지나, 나름대로.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당연히 모두가 믿을 걸세. 왜냐면, 내가 다섯 신의 이름을 걸고 이 말이 사실인 걸 맹세할 테니까.”
“….”
그러자 성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신을 향한 맹세를 언론플레이에 쓰겠다고요? 진짜 미쳤어요?”
“성녀, 제발, 이래 보여도 난 총대주교요. 최소한의 존중을 보이시오.”
“….”
“그리고 무엇보다, 틀린 점도 없지 않소? 변경백도 용사고, 천여명도 용사고… 베리야는 공산주의자지. 내 말 어디에 거짓이 있소?”
“용사의 정체를 비밀로 한다면서요! 이건-”
“-거짓말은 아니지. 그냥 내가 대답하지 않는 것뿐이니.”
여명은 딱히 총대주교의 말을 지적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기보단,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성녀는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했다.
“고작 그런 이야기 하려고 우리를 끌고 왔어요?!”
“고작이라니. 때때로 정치란 모든 것이오. 평화, 전쟁… 그리고 운명까지. 전부 정치와 얽혀있소.”
“….”
그의 말에서 전대 성녀를 떠올린 여명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리고 그 표정을 오해한 성녀가 리볼버에 은근슬쩍 손을 올리는 순간.
길을 안내하던 수행 사제가 입을 열었다.
“성하. 찾았습니다.”
찾았다고? 뭘? 일행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자, 폐허 사이로 문 하나가 보였다.
운 좋게 참화를 피한 문.
주변이 모조리 박살 난 낡은 문은, 문보다는 사막에 홀로 서 있는 선인장처럼 보였다.
‘문? 왜 저런 걸 찾고… 아.’
여명이 그의 의도를 깨닫기 무섭게, 총대주교가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미리 말하지 않았지만, 난 무언가를 부탁할 때 절대 공짜로 부탁하지 않네.”
총대주교는 그대로 문을 열었다. 끼이익- 낡은 경첩의 하품 소리와 함께,
백, 흑, 청, 적, 녹. 다섯 개의 빛으로 물든 복도가 드러났다.
성물의 방… 정확히는 성물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를 본 일행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우와… 이렇게 정교하게 공간을 분리하다니… 이거 누가 만든 거야?”
복도를 보며 학구열을 불태우는 살로메, 그리고…
“…총대주교, 미쳤어요?”
복도를 보며 기겁하는 성녀. 여명과 세티의 반응은 성녀와 똑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봤을 때는 의자 하나만 달랑 놓여있던 복도에는, 온갖 보물들이 쌓여 있었으니까.
검, 도끼, 망토, 심지어 각종 마석들까지.
모든 보물들은 성물의 방에서 가져온 것들이 틀림없었다. 멍하니 보물을 바라보던 여명이 물었다.
“…성물의 방에 있던 보물들을 빼돌린 겁니까?”
“그래, 설명 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보는군.”
“이것들이 대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보물을 옮기는 이유야 뻔하지 않나. 약탈을 피하기 위해서지.”
성물의 방에 침입자가 있을 걸 미리 알고 있었다- 라는 뜻이 담긴 말.
‘총대주교는 대체 어디까지 운명을 알고 있는 거지?’
여명은 의문을 삼키며 총대주교를 따라 복도로 들어갔다. 끼익- 문이 닫히고, 총대주교는 낡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용사의 이름을 파는 대가일세. 자, 여기서 원하는 걸 가져가게.”
“어?! 정말요?!”
살로메는 파리를 약탈하는 나치처럼 눈을 빛냈지만, 성녀는 버럭 소리 질렀다.
“총대주교, 미쳤어요?! 이거 전부 함부로 반출하면 안 되는 교단의 보물인 거 몰라요?!”
정론이었다. 하지만 총대주교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반론을 꺼냈다.
“그건 성녀로서의 의견이오. 아니면 교단의 가장 중요한 보물을 날려 먹은 남녀의 딸로서 하는 말이오?”
“….”
“여기에 있는 모든 보물들은 원래라면 침입자들에게 약탈 당할 물건이었으니, 신들께서도 날 벌하지 않을 것이오. 성물은 신들께서 직접 사용자를 선택하시니,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성녀의 입을 틀어 막은 총대주교는, 여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떤가, 이거면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엔 충분한 대가인가?”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복도에 쌓인 보물들을 보며 생각을 정리한 뒤, 짧게 물었다.
“총대주교, 혹시… 불치병에 걸리셨습니까?”
“…아니, 난 아직 건강하네. 뜬금없이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건가?”
“지금 총대주교의 모습이, 제가 어릴 적에 본 시한부 어르신이 죽기 전에 하던 행동과 똑같아서요.”
자칫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총대주교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여명이 부러트렸던 턱에 힘을 주고,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아닐세. 이건 그냥… 내 나름대로의 복수지.”
여명이 뒷말을 기다렸지만, 총대주교는 끝끝내 누구를 향한 복수인지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