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65)
을 위한 세계는 없다-665화(665/817)
EP.665 The Way It Ought To Be
지옥의 모든 주춧돌에는 ‘정의’란 단어가 적혀있다.
[오크 혁명가 바르두그]살로메가 나이를 먹어가며 깨달은 현실이 하나 있다면, 모든 노력이 보상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란 점이었다. 특히, 그 노력이 선을 위한 것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좁은 복도 가득 쌓인 보물들. 다른 곳에서는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소중한 보물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치유, 수맥, 봉인의 마석에… 반사의 마석까지? 이건 마탑에도 안 남아 있는데!”
에어컨 혁명으로 제작법이 실전된 귀한 마석들.
“해주의 지팡이! 그것도 형제 전쟁 시절에 만들어진 골동품…!”
“어디 보자, 이 팔찌는… 다난 둔의 싸인?! 이거 진품이에요!?”
“세계수 상징이 새겨진 검이라. 음, 이건 뭔지 모르겠네. 쇠미리한테 물어보면 알려나?”
그녀가 어릴 적 책에서 봤던 마도구들, 그리고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비범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수많은 보물까지.
하나하나가 그녀의 관심을 끌 만한 보물들이었다. 이걸 다 가져갈 수 있단 말이지?
“오, 이 망토, 세티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녀가 정체 모를 짐승의 망토를 들어 올리자, 총대주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용사의 망토로군.”
“용사의 망토요? 용사의 물건이 왜 여깄죠?”
“형제 전쟁 이후… 황족들은 쓸 수 없게 되었으니까. 신들께 내전의 죄를 용서받겠다는 핑계로 성도에 기부한 게지.”
“…아.”
뻐꾸기 양반들, 머리 한번 좋네. 그 머리로 나라 걱정부터 했으면 아샤가 이 꼴이 되진 않았을 텐데.
그녀가 속으로 황족들을 씹는 사이, 총대주교가 다른 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용사의 갑옷도 있다네. 강력한 항마력에, 의류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도 있지.”
“오… 그 옛날에 이런 걸 만들다니. 초대 용사님은 역시….”
“크흠.”
초대 용사의 이야기가 나오자, 총대주교가 헛기침했다. 왜 저러지? 고개를 돌리던 살로메는, 문뜩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뒤늦게 주변을 둘러봤다.
침묵.
살기와 숨 막히는 분위기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 침묵.
조금 전 대화가 무색하게도, 여명은 말 한마디 없이 총대주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머지 일행들도 두 사람 사이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제야 분위기를 읽은 살로메는 보물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쭈뼛쭈뼛 여명의 등 뒤에 숨은 직후, 총대주교가 말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엔 보물이 모자라는가?”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뭔가를 심사숙고하듯 미간을 모았다가, 한숨을 쉬는 것처럼 물었다.
“총대주교.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정말로 시한부가 아닙니까?”
“다시 한번 대답하겠네. 아닐세. 혹시 내 제안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나? 그런 거라면….”
여명은 그의 말꼬리를 끊었다.
“그러면, 기어코 제 손에 죽으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움찔, 총대주교의 옆에 서 있던 수행 사제가 크게 놀랐다. 총대주교가 그에게 괜찮다는 듯 손을 젓는 사이, 여명이 말을 이었다.
“아니면 안면 골절 따위로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제가 당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그러자 여태껏 조용히 있던 수행 사제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 무슨…! 총대주교님의 얼굴에 상처를 낸 게 너란 말이냐!?”
“다네이, 잠깐-”
“성하! 아무리 저자가 성도의 용사고, 성녀님의 지지를 받는다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옵니다! 어찌 신들께서 지켜보는 곳에서!”
수행 사제가 성난 얼굴로 소리쳤으나, 이어진 세티가 단 한마디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여명은, 전대 성녀님과 변경백님의 친아들이에요.”
“….”
수행 사제의 몸이 우뚝 굳었다.
경악한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여명과 총대주교를 번갈아보다가, 총대주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한 번 더 경악했다.
그 사이, 여명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번에 당신이 말했지. 똑같은 선택지가 생긴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라고… 지금은 어떻지? 여전히 확신하고 있나?”
또 한 걸음. 조금 전까지 정중했던 말투가 거칠어졌다.
“나는 베리야를 막았고, 성도를 구했다. 당신이 믿는 운명을 바꿨고, 당신이 불가능하다며 포기한 일들을 막았어. 이게 무슨 뜻인지… 당신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베리야가 사라진 걸 보자마자 사제 한 명만 대동한 채 이곳으로 달려온 거야. 자신이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
“자, 이제 확인했지? 어머니가 옳았고… 당신은 틀렸어.”
점점 더 거리가 좁혀졌음에도, 총대주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는 칼에 찔린 사람처럼 의자 손잡이를 꽉 잡았다.
보다 못한 수행 사제가 끼어들었다.
“성하께선 틀리지 않으셨다. 기도회를 핑계로 이 주변 모든 이들을 대피시킨 게 누구인지 모르겠느냐? 바로 성하시다. 너 혼자 그 많은 목숨을 살린 게 아니란 말이다!”
“그만, 그만하게. 다네이.”
“하지만, 성하!”
“그것이야말로… 내가 틀렸다는 증거일세.”
총대주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운명은 그들의 목숨을 요구했네. 나는 기꺼이 그에 응했지. 전대 성녀를 억류하는 것에 응한 것처럼.”
“성하, 그 무슨…?”
“내가 아는 운명에 의하면, 베리야는… 피의 신은 그들을 잡아먹었어야 했네. 그것이 정해진 시나리오였지.”
다네이는 불현듯 총대주교가 운명과 우연에 관해 질문했던 걸 떠올렸다. 설마, 그 질문을 하신 이유가 이거 때문이었단 말인가?
그 의문과 상관없이, 총대주교가 계속 말했다.
“하지만 피의 신을 쓰러트릴 주인공은 이곳에 오지 않았고… 나는 운명을 배신했네. 그리고 여기에 있을 수 없는 변경백과 그의 아들이 베리야를 막았지. 내가… 틀린 걸세.”
여명의 시선이 총대주교에게 날아와 꽂혔다. 복도를 비추는 다섯 신의 빛 아래, 황금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총대주교를 처음 두들겨 팰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으나, 여명은 검을 들지 않았다. 하다못해 주먹을 들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용서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사과 없는 용서는 없으며, 여명은 일말의 사과조차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그저, 사실을 말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겠지. 운명에 순응한 당신은 틀렸고, 무슨 짓을 해도 그 사실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그것이 총대주교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임을 알기에.
“이제 와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도… 당신의 잘못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으니까.”
“….”
여명은 손을 쥐어 인벤토리에서 단죄의 빛을 꺼냈다. 죄를 벌하는 백색 신의 성물. 새하얗게 빛나는 검날 위로 그와 총대주교의 얼굴이 반반씩 비쳤다.
총대주교는 눈을 감았다. 무릇, 죄 지은 자는 심판 받아야 하는 법. 그는 자신에게 찾아올 심판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여명은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이 원하는 어떠한 죽음도 주지 않겠다.”
“….”
“신들의 생각은 어떨까. 그들이 진정, 당신이 바라는 걸 줄까?”
그렇게 선언한 여명은 어머니를 떠올렸다. 자식을 위해 마왕의 심장을 씹어 삼키던 그녀를 떠올리며 단죄의 빛을 총대주교의 발치에 집어 던졌다.
챙! 떨어진 성물이 빛을 내뿜는 사이, 여명은 등을 돌렸다.
멍하니 멀어지는 여명의 등과 검을 번갈아 바라보던 총대주교는 허리를 굽혀 단죄의 빛을 붙잡았다. 그리고 수행 사제가 반응하기 전에…
검으로 자기 목을 찔렀다.
“성하!”
수행 사제가 기겁했으나, 피는 흐르지 않았다. 성물의 칼날은 목을 꿰뚫긴커녕, 평범한 빛처럼 그의 피부를 스칠 뿐이었다.
여명의 말처럼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인가?
총대주교는 차마 신들께 물어볼 수 없었다. 맥없이 검을 떨어트린 그는 여명의 등을 향해 말했다.
“천여명! 내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네. 누군지 모를 용사가 성도를 구했다는 뉴스는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한 최선이라는 건… 거짓말이 아닐세.”
“….”
여명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마나를 퍼트렸다. 막대한 양의 마나는 전체를 넘어, 보물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윽고, 보물의 소유권이 넘어간 순간. 여명은 주먹을 쥐었다. 인벤토리가 열리며 살로메가 눈여겨보던 몇몇 보물들과 단죄의 빛이 그의 인벤토리로 회수됐다.
“고맙… 네.”
총대주교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여명과 일행들은 복도 바깥으로 나섰다..
끼이익- 문이 닫히고, 총대주교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익숙한 두 남자가 일행을 반겨줬다. 성기사단 단장과 변경백.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
박살 난 주춧돌을 의자 삼아 앉아 있는 두 사람은 겉모습과 달리 마실 나온 중년처럼 여유로웠다. 조금 전까지 미친 공산주의자를 죽이고, 막대한 신성을 하늘로 올려보낸 사람들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이어진 지르지스의 말도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혹시… 죽였냐?”
누구를 죽였냐는 건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여명이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성녀가 대신 대답했다.
“아뇨, 손가락도 안 댔어요.”
“어… 진짜?”
지르지스는 의외라는 얼굴로 여명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복수는 그의 것이 아니었으며, 전대 성녀님을 풀어주지 못했단 점에서 그 또한 공범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자리에서 여명과 같은 복수를 공유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은….
“고생했다.”
“….”
변경백, 똑같은 운명의 피해자인 그는, 담담하게 여명의 어깨를 두들겼다.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 울음을 참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청소부 형들에게서 느끼던 감정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청소부 팀의 막내가 아니었다. 애써 감정을 추스른 여명이 주변을 둘러보는 가운데, 지르지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자, 일단 기자들이 몰려오기 전에 여기서 벗어나자고. 혹시 갈 곳이 있나?”
“올림피아 숙소랑 여관 지역에 빌려둔 방이 하나 있습니다.”
“둘 다 기자들 미어터지는 곳이네… 끄응, 그냥 나를 따라와. 내 집으로 가자.”
그렇게 말한 지르지스는 앞장서서 일행을 이끌었다. 관광객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인적이 드문 길로 걸었지만, 어쨰서인지 주변을 통제하고 있던 성기사들은 척척 그를 찾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중앙 신전을 비롯한 중앙 구역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겉은 멀쩡해도 충격과 화재에 망가진 건물이 태반입니다.
-관광객들의 휴대폰을 압수할까요?
-현재까지 확인된 부상자는 371명,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에 휘말린 교인 3명이 위독합니다만, 지금까지 사망자는 없습니다.
지르지스는 일행을 안내하면서도 꼬박꼬박 명령을 내렸다. 파괴된 구역을 통제하고, 휴대폰은 내버려 두고 접근만 막을 것, 그리고 부상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사제들을 보낼 것 등등.
어쨌거나, 관광객들의 눈을 피해 얼마나 걸었을까? 일행은 성도 중앙에서 벗어난 전통적인 아샤식 목조 건물에 도착했다.
“도착. 모두 사양 말고 들어가.”
장식 하나 없는 허름한 2층집은 성기사단 단장의 집이라기엔 지나치게 검소했지만, 일행들이 들어가기엔 충분했다.
적어도, 싸움에 지친 몸을 눕히기엔 충분-
“형부!”
-하지 않았다. 여명은 먼저 집에 있던 네 사람을 보고 웃어버렸다.
“다들 무사했구나.”
시리, 시스, 미리, 그리고 라쉬크.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그들은 여명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심지어 라쉬크마저 그에게 달려들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시발, 위험수당 내놔!”
아, 좋아서 달라붙은 건 아니구나. 쓴웃음을 삼킨 여명과 일행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지르지스가 그 꼴을 보며 어지러운 표정을 짓기를 잠시.
여명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손과 발이 묶인 채로 기절해 있는 남자. 그는…
“…킴 필비?”
저 인간이 왜 여기 있어? 여명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 무섭게, 쇠미리가 설명했다.
“아, 저희가 제압해서 묶어놨는데, 성기사들에게 잡혀가기 전에 여명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끌고 왔어요.”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그게 뭔데?”
“몰라요. 여명 앞에서 말해야겠다는데요?”
난 할 말 없는데. 난색을 보이는 여명을 향해, 지르지스가 물었다.
“너 진짜 빨갱이는… 아니지?”
“아니라니까요.”
여명은 변경백의 눈치를 봤다. 마치, 나쁜 짓을 들킨 아이처럼. 하지만 눈치를 보는 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킴 필비가 깨어난 까닭이었다.
“천여명… 왔군.”
“….”
그는 피범벅이 된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상태가 안 좋은지, 인공 성물로 재생된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흐를 정도였다.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호흡이 힘든 건지, 그는 바로 말하지 않고 가쁜 호흡을 정리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베리야님은, 죽었나?”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죽인 거냐?”
“그래.”
“신성은?”
“전부 돌려보냈다. 고작 이런 걸 물어보려고 날 기다린 거냐?”
킴 필비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꺼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의 부활에 대한 너의 견해는 무엇이냐.”
세티를 붙잡고 소파에 눕던 성녀는 물론이고, 시리와 시스의 인사를 받고 있던 변경백마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여명은 당황하지 않았다. 남산에서 이미 한 번 들어본 질문이었으니까.
그는 침착하게 똑같은 대답을 내놨다.
“아무 관심도 없다.”
“그 모든 유산을 가지고도?”
“그래.”
여명이 대답한 직후, 인벤토리속 멸공 성검(?)이 부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첫 죽음은 빨갱이가 좋겠다고 했던가? 좋아, 여명은 조용히 검을 꺼냈다.
검이 그에게 빨갱이의 피를 보라고 속삭였지만, 여명은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킴 필비의 레닌 훈장에서 마나가 흘러나와서? 아니, 그 훈장을 따라 인벤토리 속 다른 또 다른 물건들이 떨렸으므로.
적기 훈장과 금성 메달. 스탈린에게 받은 두 훈장은 킴 필비의 레닌 훈장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역시 노림수가 있었나. 여명이 다시 한번 검을 든 그때.
쿵! 킴 필비가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국가보안위원회 주석 예하 자문위원회 회장, 중앙 사무국의 부국장. 해럴드 에이드리언 러셀 킴 필비가 새로운 서기장 각하를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