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67)
을 위한 세계는 없다-667화(667/817)
EP.667 The Way It Ought To Be (3)
어마어마한 사건을 겪었음에도, 성도는 침착했다.
신도들은 무너진 중앙 신전의 폐허를 보며 통곡하지 않았다. 이만한 난리가 나고도 사람이 죽지 않은 기적에 감사하거나, 용사의 귀환을 기뻐하며 기도했다.
올림피아를 보러 온 관광객들 또한 별 문제 없었다. 그들은 올림피아 경기가 밀렸다는 사실보다는, 역사적인 현장을 구경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성도를 돌아다녔다.
졸지에 숙소와 신전을 잃은 사제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그들은 신들께서 보여준 기적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고, 중앙 신전을 더욱 크고 아름답게 재건할 계획에 몰두했다.
물론, 혼란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딱 두 부류- 특종을 쫓는 기자와 그런 기자들에게 쫓기는 사람 만큼은 혼란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성검 없는 성기사단의 단장, 지르지스 라크티는 누가 뭐라고 해도 후자에 속했다.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기자가 그에게 마이크를 들이댔으므로.
-지르지스 단장! 어젯밤 전투에 직접 참여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새로운 용사의 얼굴을 보셨습니까?
-혹시, 시카고에서 혜성검을 썼던 바로 그 성기사입니까?
-새로운 용사는 지구인이란 소문이 있던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지르지스 단장! 도망가지 말고 대답해 주십시오!
특종을 향한 욕망인지, 아니면 시민들의 알 권리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기자들은 거의 30초마다 현장을 지키는 지르지스를 괴롭혔다.
어찌나 막무가내로 인터뷰를 요구하는지, 현장을 지키는 성기사들이 기자들을 쫓아내고 또 쫓아내도 끝이 없을 정도.
결국, 성기사들은 기자들 대신 지르지스를 쫓아내기로 했다.
그는 이런 때에 어찌 단장이 쉬냐며 성을 냈지만, 밤새 싸운 단장이 조금이라도 쉬길 바라는 성기사들의 염원을 거부하지는 못했다.
물론, 성기사들이 무턱대고 지르지스를 쫓아낸 건 아니었다. 그들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 게 뻔한 단장의 집이나 붉은 병영 대신, 정원이 딸린 녹색 추기경의 집으로 단장을 안내했다.
그 와중에 파롤 경은 단장 몰래 입이 무거운 성기사들을 시켜 여명과 변경백을 불러들였다.
지르지스가 전대 성녀님의 가족들과 추억을 공유하길 바라는 소박한 배려였다. 배려였는데⋯.
정작 녹색 추기경의 집에 들어선 지르지스가 처음으로 마주한 건, 마당에서 서로 검을 나누는 여명과 변경백이었다.
쩌엉- !
충돌음을 들어보니, 마나까지 쓰며 싸우는 게 틀림없었다. 지르지스는 혹시라도 누가 볼까 싶어 정문을 꼭 닫았다.
“대낮부터 남의 숙소에서 뭘 하는 건지⋯ 아들하고 아빠가 쌍으로 제정신이 아니야. 그렇지?”
마당으로 들어선 그의 말이 향한 건 용사 부자가 아닌, 야외 테이블에 앉아있던 세티였다. 아이스박스에서 이것저것 꺼내 상을 차리던 그녀는 단장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예, 저도 다시 봬서 좋네요. 단장님. 물이랑 커피 중에 어느 걸로 드릴까요?”
“⋯커피.”
지르지스가 맞은 편에 앉자마자, 세티가 컵을 건넸다. 살짝 맛을 보니, 싸움 구경에 어울리지 않는 향긋한 커피였다.
쩌엉, 쩌엉 – ! 변경백과 여명이 검을 나누는 소리가 요란하게 마당을 울리는 가운데, 지르지스가 물었다.
“그래서, 저 부자는 왜 여기 있는 거냐?”
“파롤 경께서 따로 시아버님과 여명을 부르셨어요. 여기는 비료 냄새 때문에 사람이 잘 안 오는 곳이니까, 단장님과 함께 있으면 좋을 거 같다고 하시던데요.”
그제야 파롤의 의도를 눈치챈 지르지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뭐, 아무튼. 칼부림은 왜 하는 거고?”
외형만큼은 어린아이인 지르지스가 말하는 게 좀 웃기긴 했지만, 세티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저번 싸움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해서⋯ 라고 하시긴 했는데, 그냥 어색해서 그런 거 같아요.”
“어색해? 이제 알 거 다 아는 사이에 뭐가 어색⋯ 아..”
거기까지 말하던 지르지스는 둘의 배경을 떠올리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학교에 다니는 대신 빗자루를 쥐고 자란 아들과 고자로 살아온 아버지.
각각 전혀 다른 환경과 배경에서 살아온 둘의 사이가 어색한 건 당연했다. 거기다 만난 지 고작 하루밖에 안 된 사이 아닌가. 부자가 베리야를 상대로 함께 싸웠다지만, 어색한 건 어색한 거였다.
뭐, 어쨌거나. 이번에는 세티가 질문했다.
“킴 필비는 어떻게 하셨어요?”
“생포한 KGB 요원들이랑 같이 검은 감옥에 처넣었다.”
“황태자는⋯.”
“⋯못 찾았다. 성기사들이 증언을 듣고 달려갔을 땐, 이미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남기고 도망간 뒤더라.”
“아쉽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딱히 아쉬운 눈치는 아니었다.
지르지스는 현재 살아있는 황족 중 그나마 정상인에 속하는 황태자가 죽으면 여명이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총대주교와 달리, 그는 딱히 정치적인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지르지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제를 돌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올림피아 참가 선수였지? 저기, 두 사람의 칼질에서 뭐 보이는 거 있냐?”
세티는 여명과 변경백의 대련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보려고 노력 중이에요.”
“노력 중이라.”
그런 거치곤 잘 따라가는 거 같은데. 지르지스는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저기, 천여명이 아래에서 위로 휘두르는 검을 잘 봐둬라. 손목 근육에 마나를 불어넣어 일격에 더욱 힘을 싣는 이치가 담겨 있으니까.”
“변경백이 무릎을 앞으로 내밀지? 마나를 느껴봐. 허리에서 종아리로 이어지는 흐름을 증폭해서 언제든 앞으로 튀어 나갈 수 있는 마나의 흐름이 느껴질 거다. 저것만으로도 간격이 몇 배는 늘어나지.”
“방금 봤지? 천여명의 검이 밀리는 거. 저건 순간적으로 마나를 집중하는 테크닉이 변경백보다 부족하다는 증거다. 저건 오랜 수련으로 익숙해지는 수밖에⋯ 아니, 잠깐. 뭐지? 실시간으로 좋아지는 거 같네?”
그의 설명 덕분일까? 세티는 둘의 싸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아지경까지는 아니지만, 정신의 대부분이 저 대련에 쏠려있다는 증거였다.
지르지스는 픽 웃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보여주는 우아하면서도 무시무시한 무술의 경지. 그건 무술가에게 있어, 천문학자가 새로운 별을 발견했을 때만큼이나 커다란 환희를 선사하는 광경이었다.
특히, 갈수록 검의 속도가 빨라지는 모습은 마치 실전같은⋯ 잠깐.
지르지스는 그제야 둘의 대련이 정상적인 대련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걸 깨달았다. 살기만 없다 뿐이지, 검에 실린 힘과 속도는 이미 사람을 토막 내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나마 변경백이 여명의 경지에 맞춰주고 있어서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당장 둘 중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저, 저! 미친놈들이!”
지르지스가 기겁하건 말건, 여명은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베고, 찌르고, 내려찍고.
인간의 신체가 허락하는 모든 자세, 모든 각도로 검이 움직인다. 그 속에 담긴 마나가 힘과 속도를 더하고, 깨달은 이치가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의 검은 닿지 않는다. 검술에 한해서, 그와 변경백 사이에는 아직도 까마득한 격차가 있는 까닭이었다.
여명은 그 사실에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움을 느꼈다. 실전, 혹은 실전에 가까운 훈련 속에서만 검을 휘두르던 여명에게는 참으로 즐거운 경험이었다. 여명은 계속 검을 휘둘렀다.
베고, 찌르고, 올려 치고.
그때마다 변경백은 완벽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그의 수를 받아쳤다. 이걸 이렇게 할 수도 있나 싶은 방법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부모님과 공놀이하는 어린아이처럼.
이윽고,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조차 시원하게 느껴질 때쯤.
여명은 검술 대련이란 선을 넘었다. 그는 손목을 노리는 변경백의 검을 쳐내는 대신, 황금 사냥을 사용했다.
변경백의 검이 허무하게 여명의 손목을 스치고, 그의 검은 그대로 변경백의 목을 노렸다. 완벽한 반격. 하지만 변경백은 당황하긴커녕,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다음 순간, 변경백도 황금 사냥을 사용해 검을 무시했다. 검이 교차하고, 검술 대련에 가전 무술이 더 해졌다.
공격을 무시하는 황금 사냥의 빛이 번쩍이고, 검이 춤을 췄다. 여명은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이란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영원은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법이었다. 그것이 자의건, 타의건 상관없었다. 그리고 여명의 경우에는 타의였다.
훈련용 무기는 더는 이 대련을 버티지 못했다. 마나를 두른 검격이 충돌할 때마다 비명을 지르던 검은, 어느 순간 쩌적- 금이 갔다.
쩌엉 !
마지막으로 검을 맞댄 아들과 아버지는 동시에 거리를 벌렸다. 몇 걸음 떨어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변경백이 먼저 금이 간 검을 들며 말했다.
“여기서 더 싸우는 건 검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구나.”
피로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여명은 이마에 고인 땀방울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검 손잡이를 양손으로 든 변경백이 손잡이를 이마에 가져다 댔다. 아샤 기사의 예법. 여명은 똑같은 예법으로 답례했다.
변경백이 말했다.
“뭔가 느낀 점이 있느냐?”
“그건⋯.”
검술에만 빠져있던 여명은 뒤늦게 이 대련의 이유를 떠올렸다. 저번 전투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는 것.
“⋯잘 모르겠습니다.”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볼을 긁적였다. 청소부 형들에게 혼날 때 곧잘 나오던 습관이었다. 여전히 검에서 손을 놓지 않은 변경백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저번 전투에서, 진의 무술을 적극적으로 쓰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
“그⋯ 사실은, 제 진의 무술 특성상 베리야의 신성을 멋대로 흡수할까 봐 그랬습니다.”
“정말로 그 이유뿐이더냐?”
평소의 여명이었다면 정말 그 이유만이라고 대답했겠지만, 지금의 여명, 그러니까 변경백과 즐겁게 검을 나눈 그는 조금 다른 대답을 내놨다.
“미완성⋯ 무술을 펼치는 게 두려웠던 거 같습니다.”
“베리야가 너무 강해서?”
“예, 자칫 실패했다면 되돌릴 수 없었을 테니까요. 차라리 손에 익은 무술과 검으로 승부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변경백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이구나. 하지만⋯.”
그는 검을 어깨와 수평 높이로 들었다. 정지된 검 끝이 여명의 눈동자를 향했다.
“네 진의는 합리성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
“⋯.”
“검을 놓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무술이라고 누가 그랬느냐.”
“그, 왼손으로 검을 들면 가능합니다. 오른손으로만 사용하는 무술⋯.”
“그걸 누가 정했더냐.”
“⋯예?”
“오직 손으로만 진의를 펼칠 수 있다고 누가 정했더냐. 너의 진의는 오른손에만 깃들어 있느냐?”
변경백은 살짝 마나를 끌어올렸다. 여명은 멍하니 그의 검 끝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오른손을 잃으면 영영 진의 무술을 사용할 수 없더냐?”
“그건⋯.”
“혹자는 검이 손의 연장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검은 도구이며, 도구와 사람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내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내 진의가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
“이 시대의 용사여, 너에게 검은 무엇이더냐?”
여명이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변경백이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명은 느꼈다. 무언가 ‘베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변경백의 손에 들린 검이 쩌적- 갈라지며 최후를 맞이했다. 슬픈 최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샤와 지구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검사의 손에서 마음껏 위용을 뽐내다 죽은 것이니까.
떨어지는 검의 조각 사이로, 변경백이 말했다.
“스스로의 한계를 재단하지 말고, 마음속에 세운 진의를 따르거라. 한계는 진짜 끝에 부딪힌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정신은 이미 내면 깊숙한 곳으로 내려갔으니까.
무아지경.
“이야, 저딴 조언에서 깨달음을 얻네.”
지켜보던 지르지스가 투덜거렸다.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변경백은 쓴웃음과 함께 뿌리만 남은 검을 검집에 꽂았다.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진의란 부모조차 어쩔 수 없는 자신만의 것, 남은 건 여명의 몫이었다.
이제 조용히 깨달음의 결과를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세티가 벌떡 일어나 변경백에게 다가왔다.
“시아버님.”
며느리가 너무 많아서 인가,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단어였다. 변경백은 애써 티를 내지 않고 대답했다.
“무슨 일인가?”
“저⋯ 외람되지만, 저도 가르침을 청할 수 있을까요?”
“안 될 것 없지만⋯ 저 아이만 한 결과는 보장할 수 없구나. 네가 걷는 길은 나와 결이 다르니 말이다.”
세티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르침을 청하는 건, 무술이 아닙니다.”
“⋯무술이 아니다? 그렇다면?”
“신성의⋯ 사용법을 알려주세요.”
“⋯.”
“어젯밤, 베리야의 신성을 천상으로 되돌리는 걸 보며 고민했습니다. 무술만 익히신 분이 어떻게 신성을 다룰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시아버님께서 신성 사용자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변경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 세티는 눈동자를 빛내며 말을 이었다.
“용사란 모든 재능을 가진 자⋯ 변경백께서는, 은거하신 동안 은밀하게 신성을 익히신 거죠?”
“⋯눈치가 빠르구나. 굳이 이걸 내게 말하는 건⋯ 은밀하게 신성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고 싶은 거로구나. 그렇지?”
“예.”
즉답. 변경백은 잠시 세티를 내려다보다가, 무아지경에 빠진 여명을 힐끗 바라봤다. 이윽고,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미 운명은 어긋났으니. 내 기꺼이 알려주마.”
여명은 익숙한 냄새를 따라 눈을 떴다.
페트병 속 남은 음료수의 달콤한 냄새, 비닐 속에서 썩어가는 음식물의 역겨운 냄새, 물에 젖은 종이, 그리고 찌든 오물들의 냄새.
그건 너무나 익숙한 생활 쓰레기의 냄새였다. 여명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골목이 그를 반겨줬다.
‘또 여긴가.’
인천 유흥가의 뒷골목. 여명은 놀라지 않았다. 여기는 무아지경 속 심상일 테니까.
가볍게 기지개를 켠 그는 그대로 골목 바깥으로 향했다. 저번에 카할 마그두를 만났던 때와 다르지 않았다. 유흥가가 잠들고, 도시가 깨어나는 사이- 이슬과 새벽, 그리고 밤이 뒤섞인 유흥가의 풍경.
이 순간만큼은 청소부들이 이 거리의 왕이었다. 아니, 군림하는 왕보다는 시민에게 봉사하는 서기장에 가깝⋯ 아니, 아니, 대통령에 가까웠다.
아무튼, 익숙한 감각에 몸을 맡긴 여명은 터덜터덜 유흥가를 가로질렀다. 가끔 눈에 거슬리는 쓰레기를 주워 비닐에 챙겨 넣거나, 빈 가게를 힐끗거리며 이 순간을 즐겼-
그때, 여명의 눈으로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푸른 진주’란 간판을 단 싸구려 술집에 앉아 홀로 술잔을 홀짝이는 여자.
네온사인이 꺼진 허름한 술집조차 그녀의 농염한 분위기를 감출 수 없었다. 질끈 묶은 검은 머리카락과 아찔한 미모, 그리고 터질듯한 몸매까지.
몽마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이었지만,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빈 술잔에 다시 술을 채우던 그녀도 여명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침묵. 불쾌한 시선이 오가는 침묵.
그 침묵을 밀어내고 먼저 입을 연 건 여명이었다.
“⋯예카테리나.”
왜 여기 있지? 내가 안 죽였는데? 여명이 뒷말을 내뱉기도 전에, 예카테리나가 먼저 말했다.
“천여명. 너 씨발, 대체 정체가 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