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71)
을 위한 세계는 없다-671화(671/817)
EP.671 The Way It Ought To Be (7)
녹색 추기경이 안내한 방에 들어간 여명은 약간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안내받은 방이 너무 익숙한 탓이었다.
베리야와 싸우던 때, 녹색 신과 만났던 바로 그 방.
설마 이 방을 안내받을 줄 몰랐던 여명은 혹시나 싶어 방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천장에 뻥 뚫린 구멍은 이곳이 녹색 신과 마주했던 방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천장 구멍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드럼통이 통째로 들락거릴 수 있을 만큼 큰 구멍이었으나, 차가운 밤공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벽난로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모르는 마법 덕분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이리라.
잠시 벽난로를 바라보던 여명은 천장 구멍에서 조금 떨어진 침대에 앉아 책을 꺼냈다. 코르부스가 예전에 해주었던 조언 때문이었다.
‘깨달음이 진의를 따라가지 못한다.’
까마귀 스승은 그것을 두고 태풍을 불러올 수 있으나 작은 그릇을 채우지는 못하는 불균형이라고 하셨었다. 그때보다 한층 발전한 여명이었지만, 그녀의 조언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여명은 천천히 책을 펼치고 깨달음을 정리했다. 다행히 달빛 덕분에 랜턴이나 전구는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독서는 길지 않았다. 밤이 새벽으로 건너갈 때쯤, 누군가 똑똑- 방문을 두들긴 까닭이었다.
여명은 누군지 묻는 대신, 문 너머로 감각을 확장했다. 익숙한 나치- 아니, 살로메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들어와.”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명은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
대답 대신 사박사박,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발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여명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달빛 아래, 얼굴이 시뻘게진 살로메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데, 그녀의 복장이 좀… 노골적이었다. 속이 비치는 잠옷 아래, 누가 봐도 신경 쓴 게 틀림없는 레이스 달린 검은 속옷이 훤히 드러나 있었으니까.
“…???”
달빛 사이로 살며시 드러나는 아름다운 몸매와 상관 없이, 여명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정작 살로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애꿎은 잠옷만 꼼지락거렸다.
침묵. 어딘가 어색하고, 쌉싸름한 침묵.
그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여명은 담요를 쥐고 일어났다. 그리고 살로메의 어깨 위에 담요를 덮어주며 물었다.
“살로메, 갑자기 무슨 일이야? 혹시 소화 중인 히틀러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나름대로 배려가 담긴 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거 말고는 살로메가 이 밤 중에 반쯤 속옷 차림으로 자신을 찾아올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우물쭈물하던 살로메의 표정에 균열이 일어났으니까.
“너, 너…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
“…농담?”
여명이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걸 깨닫는 사이, 살로메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내, 내가 얼마나 각오하고 왔는데! 또, 또 놀리기나 하고! 하, 하다못해 예쁘다는 말이라도 해주던가!”
“….”
설마…? 여명은 숨을 한 번 삼킨 뒤 물었다.
“살로메, 혹시… 아까 내가 침실로 오라고 해서… 이러고 온 거야?”
“….”
그녀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무언의 긍정. 여명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둘 사이에 침묵이 기어 오기 전에, 살로메가 불현듯 뭔가를 깨달았다.
“설마… 농담이었어?”
물론, 여명은 농담이었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적절한 대답을 떠올렸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침묵했고, 곧이어 침묵의 뜻을 이해한 살로메의 얼굴이 폭발 직전의 수류탄처럼 시뻘게졌다.
“아니, 살로메, 저, 그게… 예쁘네. 응, 엄청 예뻐.”
여명이 뒤늦게 그녀를 위로하려 했지만, 살로메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아… 으….”
언어가 되지 못한 웅얼거림, 혹은 부끄러움에 질식해 버린 비명.
“으아아……!”
살로메는 어느새 얼굴을 넘어 목, 손바닥까지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기에, 여명은 그녀를 안아 들었다.
흔히 공주님 안기라 불리는 자세.
팔뚝을 타고 살로메의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한차례 미소를 참은 여명은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살로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침대에 누울 때까지 얼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푹신한 침대 위로 벽난로의 냄새, 잘 마른 이불의 냄새, 그리고 두 사람의 온도가 뒤섞였다.
그리고 그녀의 떨림이 조금 줄어들 무렵, 여명이 말했다.
“예쁘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명은 침대 머리맡에 몸을 기울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 나하고 가단 학부장하고 대화하는 걸 네가 몰래 엿듣고 있었잖아.”
“….”
“내가 아도 선배 팔을 잘라버린 것도 그렇고… 참, 우리가 이런 인연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는데. 그지?”
“….”
얼굴을 가린 살로메의 손이 떨렸다. 여명은 침착하게 그녀가 안도하길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과 잠시 사이 시간이 흐른 뒤. 살로메는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여명을 바라봤다. 몸의 떨림은 억눌렀지만, 눈의 떨림은 여전히 억누르지 못한 상태였고, 첫 질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 기분 나쁘진 않아?”
“…기분이 나쁘다니 왜?”
“그… 나처럼 부족한 애가 갑자기 이러고 와서….”
부족해? 여명은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다가, 사라졌다. 살로메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꺼낸 말 때문이었다.
“세티나… 성녀님에 비하면… 난….”
여명은 그제야 살로메의 몸짓과 말투 속에 숨어 있던 기묘한 열등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세티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이유가 설마? 아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히틀러를 봉인하기 전 살로메는 커뮤니케이션에 좀 문제가 있었으니까. 히틀러를 봉인한 뒤에는 그놈의 나치 소리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고.
그동안 너무 히틀러에게 집중하느라, 진짜 그녀의 마음을 놓치고 있었구나.
여명은 미안함을 삼키며 말했다.
“부족하기는. 오히려 과분한 동료지.”
“…동료.”
“응, 아직은 동료야. 그러니까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게.”
그렇게 말한 여명은 살로메가 주눅 들기 전에,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대신, 오늘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자. 동료가 아닌, 연인이 되기 위해서.”
“….”
여명은 그대로 살로메의 손등에 키스했다. 그녀는 또 한 번 움찔, 어깨를 떨었다. 은은한 달빛을 등진 여명의 미소가 그녀를 마주했다.
살로메는 언제부터 나에게 호감이 있었냐고 물어볼 만큼 당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원래 이렇게 느끼했어?”
“호감 있는 사람한테는?”
책임이 아닌 호감. 그 말 속에 숨겨진 뜻을 깨달은 살로메의 얼굴이 또 한 번 붉어졌다.
“…진짜 초대 용사혈통 맞네.”
“그런가?”
“어, 이러다가 초대 용사처럼 모녀까지….”
그때, 여명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지금은 초대 용사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를 하자. 밤은… 짧으니까.”
진지한 목소리, 은은한 금빛 눈동자. 살로메는 자신도 모르게 분위기에 압도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난 인천에서 자랐어. 청소부는….”
여명의 말을 따라 ‘Halt Deine Schnauze!!!’ 내면의 히틀러가 평소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살로메는 개의치 않고 여명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다음 날 아침, 녹색 추기경의 집 거실.
각종 화분과 녹색 신의 상징물로 장식된 벽면 사이로, 오래된 TV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채널은 당연히 백색 교단에서 운영하는 종교 채널이었다.
[성녀님께서는 부상자들을 방문하시어, 직접 치유의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만주와 시카고에 이어 성도까지. 성녀님께선 기적이 우리 곁에 있다는걸….] [성녀님께서 교인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말하길, 신들께선 우리를 사랑하신다….] [성녀님께선…] [성녀님….]TV를 보던 여명은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다섯 신 교단의 방송이라지만, 너무 성녀 타령만 하는 거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어진 성녀의 연설 장면은 한술 더 떴다.
-사랑하는 교인 여러분, 백색과 흑색 사이, 지혜와 사랑, 그리고 투쟁을 품은 모든 분께 말씀드립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신들께선 우리를 가호하고 계시니, 여기서 올림피아를 멈추는 건 테러리스트들의 의도에 놀아나는 것이나 다름 없….
단호하지만 자애로운 목소리, 안대를 찬 신비로운 외모, 그리고 어딘가 신성한 몸짓까지.
주변 사람들이 괜히 그녀를 아끼는 게 아니라는 듯, ‘방송용’ 성녀는 완벽했다. 다섯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하지만 진짜 성녀의 모습을 아는 입장에서, 저건….
그때, 거실 문이 쾅! 거칠게 열렸다.
여명은 물론이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살로메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너덜너덜해진 문 사이로 성녀가 등장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여명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기 무섭게, 성녀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명! 보고 싶었어!”
고작 며칠 못 봤을 뿐이건만, 성녀는 여명의 품에 안기자마자 부비부비 볼을 비볐다. 애정 가득한 강아지 같은 행동이었고, 여명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옆에서 보고 있던 살로메가 부담스러운 듯 옆으로 물러날 때쯤, 성녀가 뒤늦게 TV에서 나오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 보고 싶었으면 따로 연락을 하지.”
“….”
“아니면… 정숙한 성녀님이 보고 싶었던 걸까? 응? 당신만의 성녀가 필요해?”
성녀는 은근히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것도 성녀라고. 여명은 웃으며 그녀의 볼을 쿡쿡 찔렀다.
“그만, 다른 신도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 어쩌려고.”
“보면 보는 거지 뭐. 내가 용사님이랑 꽁냥대겠다는데, 지들이 어쩔 거야?”
“….”
어쩌긴, 성녀를 빼앗아 간 용사를 저주하거나… 성녀님을 돌려달라며 무기를 들지 않을까? 최악의 미래를 상상하던 여명이 그녀의 볼을 쭈욱- 꼬집는 찰나.
“성녀님… 제발, 체통을 지키십시오.”
열린 문 너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시선을 돌리자, 총대주교를 보필하던 수행 사제가 보였다. 이름이 다네이였던가?
아무튼, 성녀는 그가 따라온 걸 알고 있었다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내가 기계도 아니고, 남들 안 볼 땐 이럴 수도 있죠.”
“…신들께서 보고 계십니다.”
“그래요? 그러면 더 괜찮네. 신들께서 허락한 거니까.”
그렇게 말한 성녀는 보란 듯 여명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여명은 그녀를 밀어내는 대신,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어… 저분은 왜 오신 거야?”
“아, 오늘 성물의 방에서 챙겨온 보물을 나눌 거라며? 그때 아무거나 막 집어 와서 보물들이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 잘 모르잖아? 그래서 보물 설명하라고 내가 불렀어.”
“….”
고작 그런 이유로 저만한 어르신을 불러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다네이는 딱히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른 일행들이 들이닥쳤다.
“뭐야, 성녀가 가장 먼저 왔네?”
“…성녀가 저리 남자를 밝혀서야.”
세티와 미리디스.
“안녕하세요.”
“형부, 안녕!”
희생양 자매와, 맨 뒤에서 은근슬쩍 따라오는 라쉬크까지.
“모두 잘 왔어. 근데… 라쉬크는 왜 왔어요?? 난 라쉬크한테 보물 준다고 한 적 없는데?”
여명이 농담으로 일행을 맞이하자, 모두가 킥킥 웃으며 거실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물론, 구더기 공주는 여명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지 못해 진땀을 뺐다.
“라쉬크, 농담이에요. 들어오세요.”
“…이 시발 새끼.”
라쉬크가 여명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막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살로메를 바라보길 잠시.
여명은 인벤토리를 열어 거실 한가운데에 보물을 쏟아냈다. 갑옷, 망토, 검, 마석… 온갖 보물들이 수북이 쌓인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작품 같았다. 물론, 실용적인 면에선 훨씬 더 나았고.
아무튼, 일행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라쉬크였다.
“아무거나 챙겨가면 돼?”
“아뇨, 일단 각자 필요한 것부터 챙기고. 그 이후에 남은 것들을 나누죠.”
“필요한 게 뭔지 알고?”
여명은 대답 대신 다네이 사제를 바라봤다. 늙은 사제는 익숙하게 앞으로 나서서 가장 가까운 보물, 그러니까 엘프가 만든 게 분명해 보이는 검을 들었다.
“이건 마글르핀의 검입니다.”
여명에게는 낯선 이름이었으나, 미리디스는 곧장 반응했다.
“마글르핀? 용사의 손자?”
“…예, 맞습니다. 용사와 요정 여왕의 손자인 바로 그 마글르핀이 직접 휘두르던 검입니다.”
“아….”
미리디스의 눈빛이 반짝이는 가운데, 다네이 사제가 양손으로 검을 들며 말했다.
“칼날은 지금은 실전된 기술로 담금질 된 마나 메탈이며, 엘프의 마나를 증폭해 주는 여러 수식이 장식을 따라 새겨져 있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확인은 못 했습니다. 성도에는 엘프가 없다보니.”
때마침 이곳에 엘프가 있었다. 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미리디스는 냉큼 검을 잡아 마나를 불어 넣었다. 직후, 화아악! 부드러운 바람이 검을 중심으로 피어올랐다.
“…엘프?”
놀라는 다네이와 상관없이, 미리디스는 부드럽게 검을 늘어트리며 마나를 회수했다. 잠시 반짝이는 눈으로 검을 바라보던 그녀는 여명에게 말했다.
“이건 제가 가져도 되죠?”
여명은 당연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네이 사제는 미리디스가 자신의 아공간에 검을 넣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크흠- 헛기침하며 다음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여명도 아는 물건이었다. 무슨 생물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거친 털가죽으로 만들어진 망토.
“…용사의 망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