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78)
을 위한 세계는 없다-678화(678/817)
EP.678 옻을 바르고 숯을 삼킨다. (4)
***
딜라 카탁포이어. 위대한 카탁포이어 가문의 말예이자 불사의 왕이 이 땅에 내린 새끼손가락은, 여명의 종아리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마약 다큐멘터리 속 마약 중독자들과 비슷한… 아니,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그, 그냥 만들어 달라는 건 아니에요…! 시키시는 건 뭐든 할게요! 뭐든 할 테니까, 지, 지금 당장…!”
당황한 여명이 ‘얘 왜 이러냐’는 표정으로 네티를 바라보자, 네티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뜻을 담아 어깨를 으쓱였다.
샌드위치에 이상한 걸 넣었던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그가 만든 샌드위치를 가장 많이 먹은 건 딜라가 아니라 세티인데, 세티는 멀쩡…
‘…하지 않은 거 같기도 하고.’
여명은 세티의 이빨 자국이 새겨진 어깨를 만지작거리다가, 민달팽이처럼 슬금슬금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딜라를 강제로 잡아 일으켰다.
“딜라, 그만하고 정신 좀 차려. 샌드위치야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
“예, 예! 뭐든지 시켜주세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여명은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네티의 시선을 피해 실험실 안으로 들어갔다. 초췌한 딜라의 상태와 달리, 실험실 내부는 예상보다 깔끔했다. 어디까지나, 예상보다.
낡았지만 깔끔한 스테인리스 작업대, 깜박거리는 벙커의 전구, 그리고 네크로맨서 특유의 음산한 도구들.
여명은 장의사 도구와 구분할 수 없는 물건들을 작업대 옆으로 밀어내고, 인벤토리에서 요리 도구와 샌드위치 재료를 꺼내며 말했다.
“샌드위치는 어떤 식으로 해줄까? 아카데미에서 먹던 식으로? 아니면 한국에서 해줬던 식으로?”
“다, 당신께서 만들어주시는 거라면 저, 전부 좋아요!”
“….”
진지했던 네크로맨서의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기도하는 것처럼 꼭 모은 양손 너머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아하니, 명령만하면 발이라도 핥을 기세였다.
살짝 질색한 여명은 일단 요리부터 시작했다. 가스버너에 펜을 올리고, 치즈를 녹이고, 햄과 토마토를 자르고….
요리는 금세 끝났다. 샌드위치라는 음식 자체가 원체 간단한 요리였으니까. 정성을 들일 부분이라고 해봤자, 내용물이 넘치지 않게 자르는 것 정도?
어쨌거나, 여명은 완성한 샌드위치를 접시에 담아 딜라에게 내밀었다. 샌드위치를 딜라는 조금 전의 광기는 어디 갔냐는 듯, 아주 침착하게 접시를 들었다.
양손으로 접시를 든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흡사, 신전의 음식을 옮기는 옛 사제들의 모습이 떠오를 정도였다.
‘그냥 샌드위치인데….’
좋아할 거면 최선을 다해 만드는 국밥 같은 걸 좋아해야 하지 않나? 여명이 조금 어긋난 감각으로 딜라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녀가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
오물, 오물- 마치 햄스터처럼 양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샌드위치를 입에 머금은 딜라는 천천히 턱을 움직였다.
참 복스럽게도 먹네.
여명은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그녀를 보며 미소 짓… 지 못했다.
“흐윽, 흑.”
딜라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 까닭이었다. 아니, 너무 맛있어서 우는 게 가능한 일이었어?
여명이 당황하건 말건, 딜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샌드위치를 먹어 치웠다.
“더 주세요.”
“….”
그는 미리 만들어둔 샌드위치를 접시 위에 가득 담아 딜라에게 건넸다. 그리고 혹시라도 모자랄까, 재료를 더 꺼내 새로운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여명이 빵 끄트머리를 잘라내는 그때, 장만 어르신이 다가와 물었다.
“여명아, 나도 하나 먹어보고 싶구나. 괜찮겠니?”
“예, 물론이죠. 재료는 많으니까, 원하시는 만큼 드셔도 됩니다.”
여명은 곧바로 어르신께 샌드위치를 건넸다. 말없이 따라온 네티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여명이 만들고, 세 사람이 먹길 잠시.
딜라와 여명을 번갈아 바라보던 장만 어르신이 말했다.
“익숙한 맛이로구나. 청소부들이 종종 안줏거리 대신 먹던 것과 비슷한데….”
“…예, 제임스 형이 종종 만들어주던 요리법을 조금 변형한 겁니다.”
장만은 쓰게 웃었다. 청소부들을 향한 여명의 진한 그리움을 느낀 탓이었다.
몸에 깃든 습관부터, 생각하는 법, 그리고 이런 사소한 요리법까지. 청소부들은 여명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들은 흉터가 되어 여명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인연이란 그런 것이었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옛 시절을 떠올리던 장만은 문뜩, 인연이 깊을수록 이별의 아픔 또한 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복수심과 그리움은 나눌래야 나눌 수 없는 관계. 장만은 여명이 다른 사람도 아닌 딜라부터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했다.
그를 아껴주는 어르신들이 아닌, 네크로맨서를 찾아온 이유.
곧 그의 예상을 증명하듯, 여명이 딜라에게 말했다.
“딜라, 먹는 중에 미안하지만, 부탁 하나 하자.”
“예, 옙. 뭐든, 우물, 시켜만, 꿀꺽, 주세요!”
활력을 되찾은 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은 바로 조건을 꺼내는 대신 장만을 힐끗 바라봤다. 마치, 어른 앞에서 나쁜 짓을 저지르기 전의 아이처럼.
다른 청소부들에게 시비를 걸던 양아치들의 뒤통수를 개박살 낼 때 딱 저런 표정을 지었었지. 옛 생각을 떠올린 장만이 먼저 말했다.
“내게 보여주기 불편한 일이라면, 자리를 비켜주마.”
“…아닙니다. 봐주셨으면 합니다.”
조금 진지하게 대답한 여명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딜라를 바라봤다.
“딜라, 금제에 걸린 시체가 하나 있는데… 혹시 언데드로 부활시키면서 금제를 풀 수 있을까?”
딜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샌드위치를 입안 가득 채운 탓이었다. 빠르게 샌드위치를 삼키려다가 목이 막힌 그녀는, 여명이 건넨 콜라를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푸하- 뇌와 영혼, 둘 중 어느 쪽에 금제가 걸렸나요?”
“둘 다. 뇌에 걸린 금제는 어떻게 풀 수 있지만, 영혼에 걸린 금제는 될지 안 될지 알 수가 없어서.”
“아…… 우선 시체부터 보여주실래요?”
“밥 다 먹고 보는 게 낫지 않겠어?”
“괜찮아요. 밥 먹으면서 시체를 보는 건 익숙해서.”
“….”
네크로맨서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네티는 네크로맨서가 아니었고, 여명은 그녀가 샌드위치를 모두 먹고 나서야 시체를 꺼냈다.
세티가 쏴 죽인 조웅찬 장관의 시체.
전쟁터나 다름없었던 성도의 지하에서 건져낸 장관의 시체는 빈말로도 좋지 않았다. 시체에 익숙한 장만 어르신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러나 네크로맨서인 딜라는 아무렇지 않게 시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샌드위치는 아주 조심스레 옆으로 밀어둔 채로.
“금제… 금제….”
죽은 장관의 상처를 확인하고, 머리에 마나를 불어넣고, 눈꺼풀을 들어 올리길 잠시.
딜라는 뒤틀린 마나를 끌어올려 조심스레 시체에 불어넣었다. 사체가 펄떡거리며 반응하고, 언데드 특유의 불길함이 실험실을 가득 채운 순간.
!?
딜라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시체에서 손을 뗐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여명은 넘어지는 그녀의 몸을 붙잡고 물었다. 딜라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조웅찬 장관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 누가 절 봤어요.”
“봤다고?”
딜라는 몸을 벌벌 떨며 말했다.
“심상인지, 아, 아니면 영혼이 연결된 건지 모르겠지만… 묘, 묘한 눈을 가진, 펴, 평범한 한국인처럼… 생긴, 남자가….”
“…묘한 눈의 남자?”
“누, 눈을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뒤틀리면서, 입만 남았, 어요… 제가, 보는걸, 눈치챈, 것처럼….”
여명은 그와 비슷한 걸 본 적 있었다. 만박불통의 심상에 남아있던 ‘각하’의 이미지.
설마, 딜라가 장관의 시체를 통해 각하를 본 걸까? 여명이 혹시 다른 건 보지 못 했느냐고 질문하려는 순간.
딜라가 울컥, 피를 토했다. 흡사 몸속의 피를 전부 토해내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피였다.
갑자기 피를 뒤집어쓴 여명이 반사적으로 물약을 꺼냈으나, 딜라는 물약을 마시는 대신 계속 말을 이었다.
“부, 불사의 왕의 배신은 익숙하다고… 네크로맨서는, 주인공의, 경험치나 될, 쓰레기라고… 해, 했어요.”
“그만, 그 이상 말할 필요 없어. 일단은 이 물약부터….”
여명은 억지로 그녀의 입에 물약을 부었지만, 딜라는 물약을 삼키긴커녕, 우웩!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시, 시간이 없어요… 저, 저 시체는 바로 소각, 하, 하세요… 함정, 이에요. 저 시체에서, 정보를 캐내려고 하면, 저, 저주가….”
“알겠어. 알겠으니까, 일단 안정을… 젠장, 네티! 당장 성녀한테 연락해!”
여명은 급격하게 식어가는 딜라의 몸을 느끼며 소리쳤다. 비록 그녀가 인질로 잡힌 네크로맨서라지만, 그녀를 심판하는 건 자신이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각하의 손에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저, 저는 이미, 느, 늦었어요… 미, 미스터 샌드위치….”
딜라는 여명의 팔뚝을 꽉 붙잡았다.
“부, 부탁해요. 마, 마지막으로… 새, 샌드위치, 를, 먹고… 싶어요….”
이런 상황에 무슨 개소리야. 여명은 재차 그녀의 입에 물약을 부었으나, 딜라의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물약의 치유 효과 보다, 그녀의 몸이 망가지는 게 더 빨랐다.
제기랄. 참다 못한 여명은 그녀를 들고 방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기도 전에, 장만이 여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르신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는 사람 소원은 막는 게 아니다.”
“….”
장만의 말마따나, 딜라의 몸에선 급격하게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일이 진행될 줄 몰랐던 여명은 입술을 씹으며 고민했다.
성녀가 있는 선수촌까지 가려면 족히 몇십분은 걸릴 텐데, 그때까지 딜라가 살아있을까?
답은 ‘아니오’ 였다. 조심스레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은 여명은 옆으로 밀어둔 샌드위치를 챙겨왔다.
“고, 고마워요….”
딜라는 피가 가득한 손으로 샌드위치를 집었다. 그리고 처음 그에게 샌드위치를 받았을 때처럼, 경건하게 샌드위치를 물었다.
이깟 샌드위치가 뭐라고… 여명이 착잡한 눈으로 그녀의 마지막 식사를 내려다보는 가운데, 그녀는 꿋꿋이 샌드위치 하나를 전부 먹어 치웠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고 찾아오는 망각을 받아 들……이지 않고, 여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 하나 더요.”
“….”
여명은 기꺼이 더 내어주었다. 둘, 셋, 넷, 다섯, 여섯….
이윽고, 여명이 뭔가를 이상함을 느끼고, 딜라가 미리 만들어둔 샌드위치를 모조리 먹어 치운 직후.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네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뒤늦게 물약의 효과가 나타난 걸까요. 아니면 샌드위치가 저주를 푼 걸까요?”
“….”
“후자라면 좀 무서운데요… 형부, 대체 저희한테 뭘 먹이고 있었던 거예요?”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조웅찬 장관의 시체가 갑자기 부풀어 올랐으므로.
시체 폭발의 전조. 여명이 보호막을 만들어 조웅찬 장관의 시체를 덮는 것과 동시에, 네티가 염동력으로 주변을 압박했다.
!!
시체를 덮은 보호막이 피로 물들었다. 애써 챙겨 놓은 증거가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제기랄. 여명이 질끈 눈을 감는 가운데, 조심스레 피를 닦아낸 딜라가 그를 불렀다.
“저, 미스터 샌드위치…?”
“네 탓이 아니니까, 자책할 필요 없어. 그리고 이상한 별명 말고, 이름으로 불러.”
“아, 넵. 미스터 천여명… 저기… 제가, 조금 전 그 남자 말고도 본 게 있는데요….”
“봤다고? 뭘 ?”
그러자 딜라는 이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다.
“목이 잘린 시체랑… 시체랑 연결된 어떤 여자요.”
“…여자?”
목 잘린 시체가 누군지는 예상이 갔다. 플레이어의 몸. 하지만 여자라니? 여명은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며 되물었다.
“혹시… 그 여자가 세티랑 닮은, 흰색 머리의 여자였어?”
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눈치 챈 네티가 경악하는 가운데, 여명은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풍계리 실험장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
“…각하?”
두꺼운 유리관 앞에 서 있던 박사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각하. 이제는 이름보다 익숙해진 그 명칭을 들은 남자는 저 멀리, 서울 방향에서 시선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듣고 있네. 박사. 계속하게.”
그러자 박사라 불린 남자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주인에게 복종하는 개에 가까운 자세였다.
“예, 각하.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테스트는 이미 모두 완료했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시면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박사는 그 부분에 힘을 줘서 말했다. 각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가 만든 작품을 감상했다.
커다란 유리관 속, 목 없는 시체와 그 시체에 연결된 새하얀 여자아이.
그것은 생명 공학과 마법학, 그리고 뒤틀린 지식이 조잡하게 뒤섞인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조잡한 돌덩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법. 중요한 건 이것으로 무얼 할 수 있느냐였다.
남자는 손을 뻗어 조용히 관을 쓰다듬었다.
“만주군이 서울로 남하할 때까지, 얼마나 남았지?”
“일주일입니다. 김 중장을 숙청하는 즉시, 남하하도록 명했습니다.”
“좋군.”
각하는 그 이상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짜 권력자에게는 말이 필요 없는 법이었으므로.
그의 뜻을 받든 박사가 한 번 더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나는 사이, 각하의 눈동자가 유리관 위로 비췄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욕망이 뒤섞인 눈동자.
그 눈동자는 목이 없는 시체의 머리가 있어야 할 부분과 정확히 겹쳤다. 마치, 그 몸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