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8)
을 위한 세계는 없다-68화(68/817)
〈 68화 〉 예정에 없던 편입 시험 (6)
* * *
***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이는 다룰마와 달리, 성녀는 여유로웠다.
느긋하게 감시탑으로 올라온 그녀는 주변을 쑥 훑어보고 말했다.
“여명, 지금 당장 풀어주려고? 괜찮겠어? 한국군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평소처럼 방정맞지만,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 여명은 황금 옥새를 허리춤에 꽂아 넣으며 대답했다.
“그럼 지금까진 가만히 있었냐? 용이 있는 이상 군은 계속 이럴 거다.”
“…그건 그렇네.”
카할 마그두의 갈비뼈를 얻은 그 순간부터, 한국군은 단 한 번도 탐욕을 숨기지 않았다.
노골적인 갑질은 물론이고, 음험한 뒷공작, 그리고 조금 전 뒤통수를 향해 날아온 총알까지.
물론 총을 쏜 건 정 대령의 독단일 가능성이 높지만…
전리품을 인질 삼아 용의 꼬리를 통째로 요구한 걸 보면, 군 상층부의 생각도 정 대령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성녀는 기절한 정 대령을 발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래도 대뜸 총부터 쏠 줄은 몰랐네. 지금 용을 풀어주면 나중에 암살 시도라도 하는 거 아냐?”
“암살 시도라면 이미 했잖아?”
“…응?”
이미 했다고? 성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명은 설명 대신 정 대령과 그녀를 번갈아 가리켰다. 성녀는 그제야 무슨 소리인지 깨닫고 입을 벌렸다.
“아무리 용이 탐나도 그렇지, 성녀를 암살하려고 하다니.”
성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 여명의 뒤에 서 있는 군인을 바라봤다. 고개를 푹 숙이고, 팔을 벌벌 떨고 있는 모습.
“…흐.”
이 상황을 이렇게 끌고 간다고? 성녀는 피식 웃으며 여명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계획은 있어?”
군인이나 다룰마는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 여명도 마찬가지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을 풀어주는 대신, 성녀 암살 사건을 불문에 부쳐주겠다고 제안할 거다.”
“오… 양자택일이네? 성녀 암살을 시도한 군대가 되거나, 아니면 용을 풀어준 군대가 되거나.”
성녀는 약간 감탄했다. 급조한 계획치고는 나름 그럴싸한 계획 아닌가.
총알을 피하고 몇 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그 짧은 사이에 이런 생각을 떠올리다니.
정치적인 감각이나,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혹시… 남을 엿먹일 때 머리가 잘 돌아가는 타입인가?’
그녀는 새삼스레 여명의 얼굴을 바라봤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옳지 못했지만…
그가 배우였다면, 선역보단 악역이 어울리는 외모이긴 했다.
“…생각해보면, 첫 만남부터 월라드를 죽이려고 했었지.”
“갑자기 뭔 소리야?”
“응? 아니, 그냥. 나도 그 계획에 찬성한다고.”
성녀 말을 돌렸다. 여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바라보다가, 옥새를 들어 올렸다.
그가 옥새에 마나를 주입하려는 순간, 다룰마가 끼어들었다.
“이보게, 여명. 정말로 용을 풀어줄 생각인가?”
다룰마는 당황을 숨기지 않았다. 군을 상대로 블러핑을 치는 건 줄 알았지, 정말로 용을 풀어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예, 풀어줄 생각입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여명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다룰마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풀어줄 생각이라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있나?
물론 용의 심장과 뼈가 아깝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 저 용은 둔간중공업의 재산도 아니지 않나.
오히려 무례한 한국군에게 한 방 먹일 기회라고 생각하면, 여명의 생각도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내가 도와줄 일이 있는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다룰마가 말했다. 여명은 잠시 뭔가를 고민하다가, 용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혹시, 지금 당장 기자들을 불러 모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기자? 여긴 군이 관리하는 곳이라 기자들은 못 올 걸세.”
“여기가 아니라, 만주 기지라면요? 위치는 상관없이, 기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그건 가능하지.”
다룰마는 무슨 생각으로 기자들을 불러모으느냐고 묻는 대신, 즉각 휴대폰을 꺼내 직원들에게 기자들을 불러모으라고 연락을 돌렸다.
기자란 단어를 들은 군인의 표정이 푸르죽죽해지는 가운데, 여명이 가볍게 덧붙였다.
“아, 그리고. 기자들에게 좋은 카메라를 가져오라고 해주시겠습니까?”
“…좋은 카메라?”
“기왕이면, 하늘을 나는 용을 찍을 수 있을 만큼 좋은 카메라로.”
***
오르세 타불은 꿈도 꿀 수 없는 기나긴 잠에 빠져있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마취제와 수면제가 만들어낸, 죽음과도 같은 잠.
용의 자아가 그 속에서 헤매고 있던 어느 순간.
그의 몸속으로 따스한 마나가 흘러들었다. 혈관 속 약들을 밀어내고, 굳어있던 심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정체불명의 마나.
용은 그것이 신께서 축복한, 신성한 마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오래전, 다섯 신의 사제들이 그를 축복하며 나눠주었던 마나와 흡사했으니까.
신께서 그를 구하시려는 걸까?
용의 자아는 마나를 따라 약 기운에서 벗어났다. 축 늘어졌던 근육들이 꿈틀거리고, 멈춰 있던 마나가 혈관을 타고 맥동했다.
피와 마나가 뇌로 쏟아지며 자아가 돌아왔다. 삽시간에 약 기운과 잠을 전부 떨쳐버린 용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났다.
“드디어 일어났네.”
용의 커다란 눈꺼풀이 스르르 올라갔다.
누가 그를 깨웠나 바라보니, 손에서 새하얀 빛을 내뿜고 있는 인간 암컷이 눈에 들어왔다.
[…성녀.]오르세 타불은 멍한 눈으로 그녀의 새하얀 사제복과 안대에 가려진 얼굴을 바라봤다.
[제가 어째서 살아있나이까?]치유에 정신을 쏟고 있던 성녀는 대답 대신, 옆자리를 향해 눈짓했다.
용은 목을 들어 옆을 확인하려 했지만, 무언가가 그의 목과 몸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가축에게나 쓸법한 구속구였다. 용은 반사적으로 몸에 힘을 주었다.
쿠구궁…
구속구가 흔들리며 비명을 토해냈지만, 그뿐이었다. 두꺼운 구속구들은 여전히 용의 몸을 압박하고 있었다.
용은 본능적으로 이 구속구가 용을 붙잡기 위해 제작됐음을, 그리고 그가 전력을 다해도 쉽게 풀지 못할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 브레스를 내뿜고 싶었으나… 성녀님이 눈에 걸렸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눈동자만 움직여 성녀의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익숙한 인간 수컷이었다.
[너는…]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의 날개와 다리를 잘라내고, 눈에 총탄을 먹인 바로 그 인간 수컷.
“오르세 타불. 이제 막 깨어나서 혼란스럽겠지만, 우선 내 이야기를…”
그가 무어라 말을 끝내기도 전에, 용의 입으로 마나가 모여들었다.
고오오
온몸이 묶여 있다 해도, 용은 용.
그는 구속구와 눈앞의 인간 수컷을 동시에 전부 쓸어버릴 생각으로 브레스를 준비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인간이 들어 올린 물건을 본용은 입을 딱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황금 옥새. 그의 친우가 남긴 마지막 유산.
용의 외침이 쩌렁쩌렁 창고를 울렸다. 깜짝 놀란 성녀가 귀를 막았고, 옥새를 든 인간도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아, 좀… 말 좀 하자.”
[말이라고? 도축하기 전에 조롱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성녀여!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지구인과 손을 잡다니! 공산주의자에게 박해받은 수천만 교도들의 원한이 보이지 않…!]용이 기나긴 분노를 토해내는 순간, 인간 수컷이 옥새를 냅다 집어 던졌다. 용은 기겁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용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 구속구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팔을 들어 저 지구인을 짓밟아 버렸을 텐데!
그가 억울함에 무어라 더 소리 지르려는 순간,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에 가해지던 압박이 사라졌다.
몸을 억누르고 있던 구속구가 일제히 풀리는 감각.
갑자기 자유를 되찾은 용은 화를 내던 것조차 잊고 당황한 눈으로 인간 수컷을 바라봤다.
[잠금 해제? 이게 무슨…]인간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잠시 후, 그의 손으로 옥새가 돌아왔다.
잠금 해제는 물론이고, 회수까지? 인간 수컷을 보는 용의 눈동자가 부르르 떨렸다.
[어떻게? 나조차 모든 능력을 사용하지 못했거늘. 대체 누구에게 인계받은 것이냐?]“당신도 잘 아는 사람.”
[…감히! 나를 우롱하려 하느냐?]용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자, 마나가 터져 나오며 창고를 뒤흔들었다.
주변에서 용을 지켜보고 있던 군인들은 반응을 놓치지 않고 총을 들었다.
수많은 총구와 긴장한 군인들의 시선이 용에게 쏠렸다.
그러나 인간 수컷도, 용도 군인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인간 수컷이 옥새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혈통은 흐려지고.”
[…]“동상에는 녹이 슬고, 맹세는 잊혀진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용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고, 눈동자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아직 재생되지 않은 눈동자의 상처가 찢어지며, 용의 눈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눈물처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영원한 우정을 바라노라.]용은 몸을 낮추고 상대와 눈높이를 맞췄다. 세로로 길게 갈라진 파충류의 눈동자 위로, 인간 수컷의 모습이 담겼다.
“이거면 믿을 수 있겠어? 내가 당신이 잘 아는 사람과 만났다는 걸.”
[…믿겠다.]오르세 타불이 순순히 대답하자, 성녀를 비롯한 창고에 있는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특히 다룰마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대의 이름을 밝혀라.]“내 이름은 천여명. 당신을 쓰러트린 인간이다.”
[오르세 타불, 용이다.]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드워프 왕과 달리 칭호 욕심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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