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84)
을 위한 세계는 없다-684화(684/817)
EP.684 주인공을 위한 반란은 없다. (5)
***
소년은 꿈을 꾸고 있었다.
멸망으로 나아가는 세계의 꿈을.
-모두 무릎 꿇어라! 신의 화신께서 우리를 이끄신다!
-나를 보아라, 내가 바로 그분의 아들일지니! 그분의 이름으로 백인들을 벌하겠다!
마나에서 비롯된 계급 갈등이 그의 눈을 찌른다. 아샤의 초인들이 귀족을 자처한 것처럼, 스스로 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지구의 초인들이 보인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 우리는 죽어라 일할 수록 가난해지는데, 부자들은 끝없이 부유해진다!
-우리는 빵을 원한다!
거듭된 경제 불황으로 인한 빈부격차가 귀를 파고든다. 배고픈 아이의 울음소리와 성난 노동자의 고함이 동시에 고막을 두들긴다.
-차원문을 넘어온 다섯 악마가 우리의 터전과 영혼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대로 참아선 안 됩니다! 성전! 더 많은 성전!
-신께선 위대하다!
권력을 탐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추악한 입냄새, 그리고 총칼을 들고 벌어지는 새로운 종교 전쟁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피와 화약, 타버린 시체의 냄새였다.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꺼진 줄 알았던 불길이 다시 피어난다. 제국과 열국들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를 태워버릴 혁명의 불길이 피부를 지졌다. 소련이란 화상 위로 새로운 화상이 피어난다.
모든 것들이 맞물린다. 거짓된 권력을 탐하는 자칭 신들, 평등한 종말을 꿈꾸는 빈자들, 힘을 갈망하는 종교인들, 과격한 수단밖에 모르는 혁명가들… 모두가 시곗바늘을 움직인다.
똑딱, 똑딱, 지구 종말의 시계가 자정을 향해 나아간다.
누구도 멈추지 않는다. 종말은 멀리 있고, 힘은 코 앞에 있다고 믿었으므로. 비대칭 전력이 아니면 절대로 미국을 상대할 수 없다고 믿었으므로.
그렇게 지구와 아샤 모두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멸망한다. 그것이 예정된 미래다. 우리가 개입하지 않을 경우 주어진 미래다.
핵의 불길에 사라진 제국 수도는 시작일 뿐이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버린 수십만은 그저 예고편에 불과하다.
하지만 막을 수 있다. 이 세상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새로운 지도자가 있다면, 모든 종말을 막을 수 있다.
너는 그것을 위해 태어났다.
주인공 없는 세계의……
세계의…
…?
제국 수도는 핵을 맞지 않았는데?
그 순간, 위화감을 느낀 소년은 꿈에서 깨어났다.
***
미국산 무술의 특징은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다.
심플 이즈 베스트. 간단한 것이 가장 강하다.
이 특징의 정점은 누가 뭐래도 알파 원의 주력 무술인 알파 빔이라 할 수 있었다. 눈에서 붉은 광선을 발사하는, 너무나 간단명료한 무술.
그 원리가 간단한 만큼, 광선을 막아내는 방법 또한 단순했다. 광선의 추적을 떨쳐낼 수 있을 정도로 빠르거나, 더 강한 힘으로 받아치거나.
여명을 마주한 미국인들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명의 눈에서 붉은 광선이 나오는 걸 보자마자 반응할 수 있었다.
!
시작은 흑인 경호원이었다. 그는 알파 빔을 피하는 대신,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광선에 담긴 힘은 주먹 이상이었고, 붉은 광선이 그대로 그의 주먹을 꿰뚫고 올라가 팔꿈치를 통째로 베어버렸다.
“OFR!”
그렇게 여명이 한 번 더 눈을 깜빡이려는 순간, 전용섭이 대응 명령을 내렸다. 남은 경호원 두 명은 먼저랄 것도 없이 폭발적으로 마나를 뿜어내며 공간을 장악했다.
단순히 학생을 납치한다는 수준을 넘어서, 진심으로 10강의 무술을 상대하기 위한 대응. 하지만 경호원과 전용섭이 대비한 10강의 무술은 주와이외즈였지, 알파 빔이 아니었다.
!!!
잔뜩 끌어 올린 마나가 몸을 둘러싸기도 전에, 두 번째와 세 번째 광선이 찰나의 틈을 두고 대기실을 가로질렀다. 곧 광선 특유의 지이잉 소리와 함께 차례대로 다른 경호원들의 팔다리가 몸에서 분리됐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면, 하다못해 알파 빔을 쓴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겠지만… 싸움의 승패는 원래 찰나의 순간 속에서 정해지는 법.
그나마 제대로 된 대응을 보여준 건 전용섭이었다. 잠깐의 여유가 있던 그는 네 번째로 날아오는 광선을 향해 방울 달린 완드, 황주령을 휘둘렀다.
“팔장신(八將神), 세살(歳殺)!”
힘에는 힘으로. 복잡한 수식과 함께 뻗어 나온 청색 주문은 그대로 광선과 충돌했다. 지이잉!! 전용섭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황주령에 달린 방울들이 부르르 떨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아무리 알파 빔이라지만, 이게 정말 학생의 힘이라고? 그가 충격 속에서 반격을 준비한 순간.
화르륵!
불길이 그의 시야를 메웠다. 그 어떤 화염 마법보다도 강렬한 열기. 주와이외즈였다.
열기와 마주한 전용섭은 이를 악물었다.
10강의 무술 두 개를, 연속으로? 오귀스트야 PTSD에 걸린 늙다리라서 그랬다지만, 알파 원 이 개자식은 대체…!
여러 생각이 동시에 떠오르며 머리가 어지러워졌지만, 상황은 그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1초, 아니, 1초를 난도질한 찰나의 순간 속에서 그는 모든 잡념을 밀어내고 주와이외즈와 알파 빔을 동시에 상대하기 위한 최선의 수를 찾아 머리를 굴렸다.
곧, 이성이 답을 찾았다. 시간을 되돌리는 도돌이표의 권능을 써야 한다고.
하지만 그의 감성은 이성을 외면했다. 예언자께서 내려주신 권능은 운명의 적에게 쓰기 위한 힘이었다.
차라리 알파 빔을 맞았으면 맞았지, 아들 또래의 소년에게, 그것도 용사가 아닌 게 분명한 놈에게 권능을 쓰는 건 그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고집이 승부를 갈랐다.
“삼살방(三煞方), 재살(災煞)!”
전용섭이 애써 공격 주문을 휘두르고, 반투명한 청색 주문이 주와이외즈의 불길을 밀어낸 그 순간.
붉은 광선이 그의 오른 어깨를 꿰뚫었다.
****
희생양 자매의 막내, 녹색 양 이시스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성원에 감사드려요!”
…이 씹새끼들아.
그녀가 어떤 뒷말을 삼켰는지 모르는 악성 팬들이 환호하고, 기자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시스는 한 번 더 거짓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곧 다음 경기가 열리니까, 모두 경기장으로 돌아가 주세요!”
그러나 발걸음을 돌린 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경계선을 넘어 싸인 용 종이를 내밀거나, 인터뷰를 따겠다며 마이크를 들이댔다.
-이시스 양! 천여명 선수가 오늘 승리하면 다음 경기에서 천여명 선수와 만나게 되는데요, 각오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선수촌에서 외설스러운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이번에 유명 속옷 회사와 광고 협약을 맺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지금도 입고 계신가요?
다음 경기에 대한 질문부터, 누가봐도 성희롱이 분명한 질문들까지. 팬들에게 싸인을 해주던 시스는 기자들의 대가리를 깨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저번 올림피아 때는 자살하라며 갈구던 것들이. 이제는 아예 지랄을 하네.
그녀는 삐져나오는 살기를 꾹꾹 눌러 담은 뒤, 기자가 코앞까지 들이민 녹음기를 붙잡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인터뷰는 저희 소속사로 문의해 주시겠어요?”
물론, 그녀에겐 소속사 따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한국 정부 그 자체가 소속사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녀의 경고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눈치 빠른 기자들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눈치가 없는 기자들은 콰지직! 그녀가 붙잡은 녹음기를 으깨버리고 나서야 물러났다.
“자, 그러면, 모두 조심히 돌아가세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진짜로 머리통을 박살 내주마. 웃는 얼굴로 욕을 삼킨 시스는 선수 대기실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대기하고 있던 정부 측 코치와 경호원들이 그녀를 선수촌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시스는 형부를 핑계로 그들을 떨쳐냈다.
평소 같았으면 명령에 따르라며 지랄 했을 양반들이, 형부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꼬리를 내리는 모습은 참으로 통쾌했다.
‘기자들한테 시달리는 동안 구경만 하던 것들이, 어디서 명령이야.’
물론, 이대로 선수촌으로 돌아가 언니를 돕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형부와 단둘이 있을 기회를 놓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그런 바보는 살로메나 시리 언니로 충분했다.
뭐, 어쨌거나.
형부의 선수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는 조용했다. 형부가 양아치 연기를 하며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게 싫다’ 고 한 덕분이었는데… 너무나 조용한 탓이었을까? 복도 저편에서 갑자기 우당탕! 뭔가 박살 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형부의 대기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여느 어린 용들이 그러하듯, 시스는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그녀는 복도를 박차며 전속력으로 복도를 가로 질렀다.
날카롭게 곤두선 마나를 따라 마법과 신성이 동시에 준비되고, 대기실 복도의 배경이 휙휙 빠르게 지나가길 잠시.
대기실에서 몇 칸 남지 않은 시점에서, 누군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범인? 아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한국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얼굴.
“…전윤성.”
그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부의 뒤통수를 친 것 같지는 않은데… 시스가 은밀하게 공격 주문을 완성하는 가운데, 전윤성이 그녀를 바라봤다.
“아, 시스, 마침 잘 됐다.”
“잘 됐다고?”
“나 혼자 가면 막기 어려울 거 같았는데… 일단 천여명에게 가자.”
“같이? 그쪽하고? 내가 왜?”
시스가 이죽거리자, 전윤성의 얼굴이 살짝 서글퍼졌다. 하지만 그는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대기실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
어차피 같은 곳으로 가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
잠시 그의 등을 노려보던 시스는 그대로 그를 지나쳐 형부의 대기실로 내달렸다. 지금 중요한 건 전윤성이 아니라 형부였으니까.
그리고 잠시 후, 형부의 대기실에 도착한 그녀는 문을 쾅! 발로 차며 안으로 들어섰다.
“형부! 괜찮…!”
방 내부를 본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레이저에 절단된 듯, 깔끔하게 바닥에 널브러진 팔들 때문에? 아니면 팔이 잘린 채 기절한 미국 경호원들 때문에?
아니, 아니었다. 그녀가 놀란 건, 대기실 벽에 처박힌 전용섭의 말 때문이었다.
“그, 그랬군. 알파 원은 이미… 아, 알고 있었군… 너, 넌… 용사가 아니야.”
“….”
“이, 이 시대의 용사는… 내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