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88)
을 위한 세계는 없다-688화(688/817)
EP.688 막간 –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로메는 자신이 멍청하단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 그녀는 이런 일… 성적인 일에 있어서 젬병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평범한 지구인만도 못했다.
귀족 가문이라면 으레 배우는 성교육? 할머니만 계신 그녀의 가정 형편상 배우지 못했다.
마탑에서 가르치는 성교육? 마탑 골방 마법사들의 성교육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판타지의 영역에 있었다. 아니면 아예 경험이 없거나.
-성교육은 육시랄, 이것들이 누구 놀리나!
그녀는 성교육을 빙자해 발길질을 하던 적색 처형관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뭐…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히틀러를 담기 위한 그릇이었다. 마법이면 모를까, 성교육 같은 걸 굳이 알려줄 이유가 어디 있겠나?
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인터넷이나, TV에서 봤던 으슥한 자료들과 귀동냥으로 들은 정보가 전부였다.
속옷은 무조건 야한 걸로 입어야 한다거나, 남자는 남들 앞에서는 성녀, 침대 위에서는 탕녀인 여자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정보들.
아, 휴지를 잔뜩 준비하라는 조언도 있었다. 성녀가 한 조언이라 무시할 거지만.
어쨌거나, 크게 한숨을 내쉰 살로메는 숙소 침대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으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명상에 빠지자마자 생각을 정리하긴커녕, 미뤄둔 온갖 잡념이 떠올랐다.
목욕하고 기다려야 하나? 진짜 회색 속옷을 입을까? 와인이나 간식을 준비할까? 아니면 향수를 뿌릴까? 마탑에서 배웠던 것처럼 촛불을 잔뜩 깔아놓나?
격해진 심장 박동을 따라 온갖 생각이 이어졌다. 발끝과 손끝이 저릿하고, 가슴과 배 언저리가 후끈거리는 거 같았다.
결국 버티지 못한 그녀가 눈을 뜬 순간.
-띵동.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살로메는 놀란 눈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올 시간이 아닌데? 역시 여명도 기다릴 수 없었던 걸까?
살로메는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려다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아픔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정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문을 연 그녀를 마주한 건-
“…시스?”
세티 자매의 막내, 이시스였다. 이 시간에 왜? 세티가 뭔가 시켰나?
살로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왔냐고 묻기 전에- 시스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달라고? 뭘?”
“유니콘의 뿔로 만든 손잡이요. 언니한테 받아온 거 알아요. 이제 필요 없잖아요?”
“….”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살로메는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를 보며 뒤늦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 그걸… 누구한테….”
“성녀님이랑 미리 언니한테 들었어요.”
“이, 이 운터멘쉬 같은 ㄴ….”
아니, 러시아 혈통과 빨갱이를 이렇게 부르면 진짜 차별이지. 가까스로 분노를 참은 살로메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저기, 시스야?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유니콘은 순번 같은 게 아니란다.”
“맞는데요?”
“….”
“비 오는 날 나뭇가지를 들고 가던 사람 다섯이 전부 벼락에 맞았어요. 그러면 그 나뭇가지는 피뢰침일까요. 아닐까요?”
“피뢰침이… 맞지.”
“그렇죠?”
할 말이 없어진 살로메는 숙소로 돌아가 짐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여명의 사진, 세티와 함께 찍은 사진 등 용사 파티와의 추억이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녀가 가방 깊숙한 곳에서 유니콘의 뿔을 밖으로 꺼내자, 유니콘이 비명을 질렀다.
[처녀여! 안 된다!]“….”
[아, 어찌 이리도 무력하단 말인가! 이럴 순 없다! 다섯이라니… 다섯이라니! 이럴 순 없단 말이다!]유니콘의 목소리는 간절하다 못해 애절했다. 하지만 살로메의 기쁨과 기대감을 밀어내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살로메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시스에게 유니콘의 뿔을 건넸다.
그리고 시스가 유니콘의 뿔을 붙잡자마자, 유니콘이 입을 다물었다.
“….”
침묵. 조금 전까지 제발 그만하라고 외치던 게 거짓말로 느껴질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유니콘을 휘감았다.
‘뭐지, 대체 뭘 느꼈길래 저래?’
살로메가 의아하게 보건 말건, 우라간의 손잡이를 챙긴 시스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살로메 언니.”
“…으, 응.”
“아, 그리고 언니, 술로 시작하는 것보단, 맨정신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딱 하루뿐인 날이잖아요?”
“…??”
“저는 이만 가볼게요. 좋은 밤 되세요!”
술?? 살로메는 멀어지는 시스의 등을 바라보다가, 문을 닫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불현듯,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막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했다.
그녀의 볼은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빨개져 있었다.
‘무슨 복숭아 같네.’
거울을 보던 살로메는 문뜩, 자신의 눈동자가 이렇게나 풍부한 감정으로 빛난단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그 놀라움이 사라지기 전에, 더 큰 놀라움이 그녀의 귀를 찔렀다.
“뭐해?”
허공에서, 그것도 바로 뒤통수에서 여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로메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비명을 질렀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딸꾹-
그녀는 돌에 맞은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리액션이 얼마나 재밌는지, 투명 망토를 벗는 여명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거, 몰래 온 보람이 있네.”
“어, 어어어어언제 왔어-”
살로메가 간신히 묻자, 여명은 열린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전에.”
“으, 아, 오, 우….”
‘그렇구나. 그냥 정문으로 와도 됐는데’ 라는 뜻이 담긴 웅얼거림. 여명이 그 웅얼거림을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해하지 않은 건 확실했다. 투명 망토를 챙긴 그는 능숙하게 인벤토리에서 음식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샌드위치나 과자 같은 간단한 간식들. 살로메가 무어라 묻기도 전에, 여명이 먼저 말했다.
“저녁 안 먹었다길래. 군것질거리 좀 챙겨왔어.”
“….”
니가 기다리라고 하는 바람에 저녁을 걸렀다고 말할 수 없던 살로메는, 옷자락을 꾹 쥐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곧 여명이 술로 보이는 병을 꺼내며 물었다.
“마실래?”
조금 전 시스의 조언을 떠올린 살로메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여명은 ‘나도 술 싫어해’ 라고 말하며 적당한 주스와 음료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이윽고, 상이 다 차려진 직후.
아직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살로메를 대신해 여명이 먼저 대화의 물꼬를 텄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고, 성녀가 어땠고, 자기가 좋아하는 다큐멘터리는 자연 다큐멘터리고- 뭐 그런, 가볍고 사소한 이야기들.
누가 봐도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말이었고,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살로메는 조금 전보다 풀어진-하지만 여전히 평소보다 긴장된- 상태로 여명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겸사겸사 샌드위치도 하나 집어 먹고.
그렇게 대화가 조금 더 깊어질 무렵, 그녀는 뭘 잘못 먹었는지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여명은, 나 좋아해?”
펭귄의 생태에 대해 말하고 있던 여명도, 말을 꺼낸 살로메도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놀랐느냐면, 전적으로 살로메였다. 여명은 곧바로 미소 지었으므로.
“당연히 좋아하지.”
총알처럼 빠른 대답이었다. 살로메는 총에 맞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물었다.
“그… 왜? 왜 날 좋아해?”
혹시라도 나쁜 대답이 돌아올까, 그동안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1초가 1년 같은 침묵. 괜히 이야기를 꺼낸 건가, 살로메가 차라리 ‘두메아 가주님이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다’ 라는 대답이라도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여명이 역으로 물었다.
“그건 내가 더 궁금하네. 살로메는 왜 날 좋아해?”
살로메는 대답 대신, 애꿎은 샌드위치를 오물거렸다. 하나만 꼽기엔 이유가 너무 많은 까닭이었다.
그는 그녀를 그릇이란 운명에서 구해줬고, 가문의 구세주였으며, 마탑의 구원자였다. 용사라는 혈통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혈통으로 얻은 권리는 휘두르면서, 의무를 외면하는 자들을 너무나 많이 봐 왔으므로.
여명은 그런 자들과 달랐다. 그는 사람들을 구했다. 복수의 길을 걸으면서도 쓰러진 풀잎을 외면하지 않았고, 귀찮은 동료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그래,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수십 년, 아니, 평생을 함께 나란히 걷고 싶은 사람. 그래서 그녀는 그가 좋았다. 이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만약 여명의 곁에 그녀를 위한 자리가 없었더라도… 동료로서 평생을 함께했을 터였다. 전대 용사 파티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다행히도, 여명의 품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그녀는 물론이고 다른 용사 파티가 모두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문제는, 정말로 그녀가 거기에 들어가도 되냐는 점이었다. 만약 여명이 의무감이나, 동료로서 어쩔 수 없이 받아주는 거라면….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던 찰나, 여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로메는 다가오는 여명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곧, 여명은 서로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앉았다.
“흐음, 왜 대답을 못 하실까.”
“….”
“설마… 날 좋아하는 이유가 없는 거야?”
살로메는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입에 남아 있던 샌드위치를 꿀꺽, 급하게 삼킨 뒤 머릿속에 있던 모든 생각을 쏟아냈다.
자신을 구해준 것부터, 외모, 행동, 용사 파티, 굵은 팔뚝, 성녀 때리기, 가끔 빨갱이처럼 말하는 것, 요리 실력, 청소 실력, 목소리 등등 그녀가 평소에 여명에게 가지고 있던 호감을 전부 고백했다.
그 고백이 얼마나 긴지, 웃고 있던 여명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을 정도.
그리고 그렇게 모든 걸 쏟아내고 나서야, 살로메 또한 부끄러움에 전염됐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물었다.
“이, 이제 여명 차례야.”
“….”
뜻밖의 공격에 당황했던 여명은, 그제야 준비한 말을 꺼냈다.
“살로메, 우리가 그동안 함께 싸우면서… 우리가 서로를 위해 몇 번이나 목숨을 걸었는지, 기억해?”
“으, 응?”
여명의 손이 살며시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의 손가락은 이내 그녀의 손을 완전히 옭아맸다.
“마탑에서도, 성도에서도, 그리고 곧 벌일 쿠데타도… 전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잖아. 그래도 너는 기꺼이 목숨을 걸었고, 앞으로도 걸 거야. 그렇지? 그게 단순히 용사 파티라서 그런 건가?”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러자 여명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조금 더 내밀었다.
“그거야 살로메, 난 날 위해 목숨을 거는 미녀를… 다른 남자에게 보낼 정도로 착하지 않아.”
“…다, 다른 남자라니. 그런 건 생각해 본적도 없어.”
그보다 미녀라니. 그렇게 생각해 주고 있었구나. 그의 목소리 때문에 볼이 붉게 물들었다.
살로메는 빨개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얼굴을 돌렸다. 부끄러움을 감추고 싶었지만, 여명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 대신 네 몸에 히틀러를 몸에 봉인한 그때부터, 넌 내 거였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라는 질문보다 먼저, 여명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리고 성도에서 날 위해 죽음을 감수한 그 순간부터… 되돌릴 수 없게 됐고.”
급격히 가까워지는 얼굴, 부딪히는 입술.
살로메는 입술이 맞닿을 때 느껴지는 감각에 전율했다. 진짜 키스는 TV 속 드라마나, 인터넷 연애담과 전혀 달랐다.
그녀의 얇은 어깨 위로 그의 손길이 올라왔다. 긴장한 어깨에 힘이 빠지면서, 그녀의 상체가 서서히 무너졌다. 여명이 그녀의 몸을 누르고, 두 사람은 더더욱 가까워졌다.
좋았다. 모든 게 다 좋았다. 그의 숨결, 그의 손, 그리고 입으로 파고드는 혓바닥. 그녀는 그 모든 것들 앞에서 그대로 굴복…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봉인된 히틀러가 비명을 질렀으므로.
[wie schrecklich!!!!!!] [아악!!!] [역겨운 빨갱이의 체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