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94)
을 위한 세계는 없다-694화(694/817)
EP.694 세상에 부럼없어라 (5)
***
여명이 세티에게 반지를 주려다 실패한 다음 날, 여의도 공원.
일제가 세운 공항으로 시작해 독립 후 국제 공항, 공군 기지, 5.16 광장, 그리고 여의도 광장을 거쳐 이제는 공원이 된 곳.
벚나무가 가득 심어진 공원은 역사를 아는 사람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아니, 아는 게 아니라 겪었다고 해야겠지. 박철은 이곳이 공원이 아닌 광장이던 시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학생 운동의 단골 집회 현장.
개성 광장과 서울 광장, 그리고 여의도 광장 셋을 묶어 민주화 운동의 삼대 성지라 불릴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젊은이들의 뜨거운 피, 진한 최루탄의 냄새와 피 끓는 고함, 그리고… 희망.
형을 비롯한 수많은 동지들이 그 희망을 위해 죽었다. 그리고 박철 본인 또한 그 희망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서 민주화를 맞이했다. 죽은 형이 지켜줘서일 수도 있고, 단순히 운이 좋아서일 수도 있었다.
정답이 어느 쪽이건, 살아남은 박철의 어깨에는 의무와 업이 남았다.
살아서 과거를 미래로 전해주는 것, 국민들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진실을 알리는 것.
그는 그것을 위해 살았다. 민주화 시대에는 분쟁 지역으로 달려갔고, 현대에는 정부에 굽실거리는 대형 언론사들의 패악질과 맞서 싸웠다.
그다지 행복한 삶도, 자랑스러운 삶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죽은 형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이었다.
그의 삶은 이 땅의 아이들에게 기억되지 못하리라. 하지만 그들이 누리는 민주주의만으로도 형의 삶은 보상받았다…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진실은 그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잔인했다. 형은 물론이고, 모든 동지들이 개죽음을 당했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을 만큼.
씨이발.
거기까지 생각한 박철은 깊게 숨을 쉬며 공원을 가로질렀다.
팔짱을 낀 커플과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그를 스쳐 지나가고, 도로 저편을 순찰하는 군인들이 눈을 부라렸지만, 그뿐이었다. 누구도 변장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박철 또한 그 사실에 신경쓰지 않았다.
잠시 후, 박철은 곧 길쭉한 공원 부지 중간에 자리한 정자에 도착했다. 연못을 끼고 지어진 정자는 접선 장소로 쓰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그는 복잡한 감정을 삼키며 정자 난간에 앉았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비둘기들이 푸드득 소리와 함께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밥에 익숙해진 비둘기들이었다.
그러나 박철에겐 밥은커녕 과자 쪼가리 하나 없었다. 그걸 모르는 비둘기들은 언제 먹이를 던져줄까, 계속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가 손을 휘저어 비둘기들을 쫓아내 봤지만, 잠시뿐이었다. 비둘기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김만일과 애국자들… 아무것도 모른 채 이 나라의 괴물들이 던져준 희망에 매달리던 과거의 자신처럼.
“쓰으읍, 이런 씨….”
그렇게 박철이 애꿎은 비둘기들에게 욕을 내뱉으려는 순간.
저벅, 저벅- 누군가 정자 위로 올라왔다. 머리가 조금 벗겨진, 평범한 외모의 중년 남자였다.
그는 갈색 빵 봉투를 들고 있었는데, 그걸 본 비둘기들은 기다렸다는 듯 중년인의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러나 중년인은 비둘기들에게 빵을 나눠주지 않았다. 오히려, 박철을 향해 봉투를 던졌다.
“어, 엇!”
반사적으로 봉투를 받은 박철은 놀란 눈으로 중년인과 봉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뒤늦게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놈의 환상은 몇 번을 봐도 익숙해 지질않는군… 천여명.”
대머리 중년인, 그러니까 피눈물의 환상을 뒤집어쓴 천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박철은 빵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드디어… 실행하는 건가?”
“예.”
즉답이었다. 박철은 미래를 생각하며 침을 삼켰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정말로… 내가 발표해도 괜찮겠나?”
그러자 여명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싫으십니까?”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성녀님이나, 자네 같이 나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해도 되나 싶어서.”
망설임과 떨림이 담긴 말. 여명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실을 발표하는데, 직접 취재한 기자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
“돌아가신 형님도 그걸 원하실 테구요.”
그건 앞선 어떤 말보다도 박철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정자 너머, 한때 여의도 광장이었던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 과거는 남아 있지 않았다. 학생 운동도, 최루탄도, 그의 형도.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각오를 삼킨 박철은 천천히 빵 봉투를 열었다.
그 속에는 비둘기를 위한 빵이 아닌, 그가 원하던 것이 들어있었다.
진실을 위한 열쇠가.
***
그동안 미뤄진 일정을 만회하려는 듯, 올림피아 8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첫 경기는 전윤성과 브라질 출신의 학생이었는데, 관객들은 목조차 풀지 못했다. 환호는 둘째 치고, 경기 자체가 2분 만에 끝난 까닭이었다.
같은 나이대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 차.
브라질 선수는 8강까지 올라온 강자임에도 제대로 된 비기나 오의 한 번 펼쳐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 온 브라질 응원단이 기가 죽을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히, 다음 경기는 환호가 가득했다.
파순의 부상 덕분에 부전승으로 올라온 인도계 초인과 성녀의 대결.
인도 초인은 종교 탄압으로 유명한 자칭 신… 정확히는 인도 초인 군벌의 자식이었는데, 그를 응원하러 온 인도인들과 성녀를 응원하는 교인들의 함성 대결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물론, 경기 자체도 흥미진진했다.
자칭 신의 아들이 의외로 제대로 된 전략을 들고 온 덕분이었다. 인도의 전통 방패를 든 녀석은 방어적인 자세로 싸움을 시작했다. 경기용으로 지급된 성녀의 탄창을 모두 낭비하게 만들고, 근접전으로 몰아가기 위한 전략.
그건 꽤나 효율적인 전략이었고, 실제로 근접전까지 끌고 가며 승리할 뻔했으나… 성녀의 근접전 능력은 녀석의 상상 이상이었다.
그녀는 리볼버를 거꾸로 쥔 채 복날의 개 패듯 녀석을 패버렸고, 마지막으로 코뼈를 깨버리는 것으로 경기를 끝냈다.
그래도 자비로운 성녀답게 직접 상처를 치유해 줬는데, 치유 받던 녀석이 대뜸 ‘미래의 신이 될 나의 성녀가 되어주오’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다가 성녀의 총알을 맞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다행히 성녀의 오랜 지병(?)에 대한 건 알려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걸 본 여명이 살기를 흘린 사실 또한 알려지지 않았다. 일행들이 필사적으로 그를 틀어막은 덕분이었다.
뭐, 아무튼.
세 번째 경기는 세티와 오시리의 경기였다. 무대의 주인공인 한국인이 나오는 경기답게, 앞선 경기의 몇 배나 되는 호응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두 자매는 그런 호응에 걸맞은 경기를 보여줬다.
한국의 자랑인 태번벽력공을 휘감은 세티의 망치와 화염 마법과 환상 마법을 사용하는 시리의 경기는 눈과 귀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수많은 도박사들의 예상대로 세티의 무난한 승리로 끝나서? 아니, 이번 경기는 마지막 경기를 위한 에피타이저에 불과했으니까.
한국의 천여명과 마탑의 살로메.
두 사람의 경기장으로 올라오는 순간, 한국의 거의 모든 채널이 올림피아 경기장을 비췄다.
식사 중에, 휴식 중에, 심지어 업무 중에 TV 앞에 모인 한국인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홈 어드벤테이지와 평소 실력을 생각하면 여명의 승리로 끝나는 게 당연한 경기였으나…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뜻대로만 굴러가던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손에 땀이 차는 긴장감 속에서 경기를 시청했다. 개중 누군가는 뉴스와 인터넷에서 본 전략 분석을 풀어놓으며 천여명이 이길 거라 호언장담했고, 또 어떤 사람은 신께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개중 가장 이상한 사람들은 도박꾼들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역배당을 노리며 살로메를 응원했다. 원래 돈 건 쪽이 우리 편이라나?
어쨌거나, 여명과 살로메의 경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벼락과 냉기를 중심으로 한 72번의 공격 마법, 보호막을 비롯한 58번의 방어 마법, 그 외에 기름막, 섬광, 환영, 치통(?) 등의 기상천외한 마법들까지.
살로메는 합이 100번이 넘는 주문을 쏟아냈다. 여명의 경기복에 붙은 광고들이 그을리고 뜯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여명을 쓰러트리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모든 마법을 막아내고, 뚫어내고, 받아쳤다.
그의 검과 살로메의 지팡이가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격렬한 공방. 그 끝은 역시나 각자의 비기였다.
주와이외즈와 분해 광선.
고작 학생 수준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술이 두 남녀의 손에서 펼쳐지자마자, 해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천여명, 타오릅니다! 천여명!!
다음 순간, 타오르는 불길과 광선이 충돌하며 빛이 터져 나왔다. 관객들은 입이 떡 벌린 채 눈을 감아야 했다.
이윽고, 경기장을 뒤덮었던 빛이 사라지고… 움푹 파인 경기장 중앙에 당당히 서 있는 천여명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에 비해 폭발을 견디지 못한 건지, 살로메는 저 멀리 경기장 구석에 쓰러져있었다.
승자가 누군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해설가가 비명처럼 여명의 승리를 선언하는 가운데, 여명은 쓰러진 살로메에게 손을 내미는 훈훈한 모습을 연출했다.
물론, 진실을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연기였지만.
이미 얼굴 가죽이 두꺼워진 여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로메를 경기장 밖으로 안내한 뒤, 인터뷰를 기다리는 기자들 앞으로 향했다.
관객들의 환호 소리가 귀를 울리는 사이, 조금 전 승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수한 기자들이 그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천여명 선수! 4강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셨는데요, 도박사들은 천여명 선수의 우승을 점치고 있습니다!
-전윤성 선수의 코치진은 팍팍한 일정에 불만을 제기했는데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형적인 아부와 전윤성과의 차이를 부각하는 질문.
참으로 노골적이었지만, 질문을 던지는 기자들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천여명은 언제나 정석적인, 그러니까 바른 생활 청년 특유의 뻔하디뻔한 대답만 해왔으므로.
하지만 오늘의 천여명은 달랐다.
“기자님들께는 죄송하지만, 오늘 주신 질문들은 나중에 대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옷에 달린 대형 언론사의 광고를 카메라 앞으로 내밀며 대답했다.
“오늘 밤, 세티와 함께 이시우와 김유진의 JS 쇼에 출현합니다. 질문의 답은 거기서 확인해 주세요.”
***
반나절 뒤. 자정까지 4분 남은 시점.
여의도에 주둔 중인 개성 차원문 방위군 막사.
“JS 쇼? 염병, 그거 야밤에 남자 아이돌들 우르르 나오는 예능 아니냐? JS 엔터에서 자기 아이돌들 얼굴 팔아 먹는 쓰레기 방송일 텐데.”
담배를 피던 진여명이 거칠게 말하자, 깜빡이는 전구 아래 고개를 숙이고 있던 군인이 고개를 들었다.
두꺼운 방탄모 아래, 군인이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탁했다.
-크르릉….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 또한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웠다.
“대답 하나 제대로 못하냐? 이래서 속성으로 만들어진 괴수는 안 된다니까.”
쯧쯧 혀를 찬 진여명은 다시 담배를 쭈욱- 빨았다.
“천여명, 이 새끼도 안 되겠단 말이지… 초인 대표가 말이야, 얼굴 팔아먹을 생각부터 하고. 완전 전용섭이랑 똑같은 테크타는 거 아니냐 이거?”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으나, 진여명은 개의치 않았다. 장교인 자신이 이런 날에 뺑이를 치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인데, 멍청한 괴수 새끼들이 대수랴.
어쨌거나, 그는 계속 담배를 피우며 명령을 기다렸다.
한 개비, 두 개비, 세 개비… 그렇게 거의 담배 반갑을 비우고 나서야, 군용 무전기에 신호가 잡혔다.
[여기는 두더지 삼. 예상 지점에서 목표물을 확인했습니다.]그는 다급하게 무전기를 들었다.
“어디냐?”
[여의도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예측 자료’에 의하면 옛 전통사 비밀 벙커 방향입니다.]전통사. 정확한 명칭은 전략 통신 사령부… 그곳은 군의 유, 무선 통신을 관리하던 국방부 직할 부대의 이름이었다.
현재는 국군 지휘 통신 사령부로 이름이 바뀌고 본부 또한 경기도에 있을 텐데? 비밀 벙커에는 왜 가지? 거기에 뭐가 있다고?
잠시 고민하던 진여명의 무전기로, 상급자의 무전이 끼어들었다.
[이 새끼… 방송을 노리고 있다.]방송? 진여명이 괴수 군인을 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무전 너머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옛 전통사 벙커에는 전국 통신망을 움직이는 긴급 통신 권한이 있다! 그 좆 같은 매국노 기자 새끼가 사고 치기 전에, 당장 가서 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