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95)
을 위한 세계는 없다-695화(695/817)
EP.695 세상에 부럼없어라 (6)
***
무전기를 뚫고 나오는 고함에 진여명은 화들짝 놀랐다.
전국 통신망을 건드릴 수 있다고? 폐기된 벙커에 그런 시설을 왜 남겨 놓은 거야?
속으로 멍청한 상관들을 욕한 그는 곧바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전원 움직여! 당장 출동! 출동이다! 두더지 일과 두더지 이는 나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고, 두더지 오는 국회 의사당 지하, 두더지 사는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서 포위해!”
명령을 받은 괴수 군인들이 우르르 움직이기 무섭게, 진여명 본인도 부대를 이끌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일반 시민들은 군인과 함께 움직이는 그의 얼굴을 보고 관심을 보였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잡는다. 내가 가장 먼저 잡는다.
이걸로 승만 시티의 실수를 바로잡고, 위로 올라가야 했다. 천여명이란 놈한테 이름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한직을 전전하다가 죽을 수는 없었다.
콱, 입술을 씹은 진여명은 지하로 향했다. 괴수 군인들을 앞세운 그는 한때 이곳이 여의도 공항이던 시절, 지반 아래 숨겨놓은 기다란 벙커의 입구를 뚫었다.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그를 반겨준 건 축축한 벙커의 어둠이었다. 어둠은 침입자를 거절하는 것처럼 서늘한 먼지 냄새를 토했다.
하지만 괴수 군인들은 그 냄새 사이에서 다른 냄새를 잡아냈다.
“캬릉, 킁.”
말은 아니었지만, 손을 들고 벙커 너머를 가리키는 것만으로도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누군가 이곳을 지나갔다.’
진여명은 곧바로 전진하라는 제스처를 보낸 뒤, 무전기를 들었다.
“여기는 두더지 일. 흔적을 찾았다. 당장 달려! 포위망을 좁히란 말이다!”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무전기를 집어넣은 진여명은 괴수들을 따라 어두운 벙커를 내달렸다.
그리고 얼마나 달렸을까? 그의 부대는 먼지가 소복이 쌓인 곳을 발견했다.
녹슨 철문을 기점으로 네모반듯한 방이 주욱 늘어선 공간.
바닥에 굴러다니는 낡은 종이들과 먼지 쌓인 전화기만 봐도 여기가 버려진 전통사 벙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넌 독 안에 든 쥐다. 이 씹새끼.”
진여명은 곧장 철문을 넘어갔다. 콰직! 바닥에 굴러다니는 전화기를 짓밟는 그와 괴수 군인들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쫓는 놈은 전투 능력 하나 없는, 일개 기자 나부랭이였으니까.
“박철!! 이 매국노 새끼야!! 당장 나와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따라 벙커 속 어둠이 떨렸다. 괴수들이 호응하듯 코를 킁킁거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감각으로 인기척이 잡혔다.
괴수 군인과 전혀 다른, 일반인의 기척.
“찾았다…!”
이제 다시 파벌로 돌아갈 수 있어! 진여명은 기쁨 속에서 인기척을 향해 내달렸다. 쿵! 쿵! 이미 변신을 끝마친 괴수 군인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인기척의 주인과 마주한 순간.
진여명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벙커 구석에 앉아있던 박철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인사해 왔으니까.
“여어.”
“….”
“생각보다 빨리 왔군.”
뭐지? 왜 이렇게 여유롭지? 뭐, 다 포기하고 자폭이라도 하려는 건가? 진여명은 승진용 제물에 문제라도 생길까, 조심스레 박철의 몸을 훑었다. 하지만 박철의 후줄근한 옷 아래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허세인가? 진여명은 비릿하게 웃었다.
“…박철, 이 불쌍한 인간아. 성물을 얻었으면 애국을 해야지… 나라를 배신하다니. 민주 열사인 형에게 부끄럽지도 않나?”
저벅. 진여명은 박철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당장 무릎 꿇고 자비를 구해라. 내 특별히 기회를 주지. 성물을 이용해 조국에 입힌 피해를 보상하고, 애국할 수 있는 기회를.”
“….”
박철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먼지 쌓인 책상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더니, 앞뒤로 몰려오는 괴수 군인들을 싹 훑었다.
“흐음, 너무 빠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러자 박철은 여유롭게 시계까지 확인하며 말했다.
“시간만 보면 내가 나타나자마자 반응한 거나 다름없군. CCTV로 봤다고 해도 불가능한 속도야. 이건… 꼭, 내가 움직일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거 같은데.”
“…일개 기자 주제에, 한국군의 감시망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우습게 보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거다.”
진여명은 살짝 짜증을 느꼈다. 그가 원한 그림은 이런 게 아니었다. 울고불고 비는 박철과, 그런 박철을 포박하는 자신… 기분이 상한 그는 날카롭게 되물었다.
“현실적이건 아니건,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네 계획은 이미 물거품이 됐다.”
“내 계획? 내 계획이 뭔데?”
마지막까지 숨기려는 건가? 진여명은 쯧, 혀를 찼다.
“옛 전통사의 시설을 이용해 전국 통신망을 장악하려고 했겠지. 왜, 전국에 고발 방송이라도 할 생각이었나?”
“….”
정곡이었던 걸까, 박철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턱을 쓸며 말했다.
“과연, 거기까지 눈치챘다 이거지… 어르신의 예상대로군.”
“…?”
예상대로라고? 뭔가 이상함을 느낀 진여명이 괴수 군인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박철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고, 내 계획이 실패했다고? 진여명, 나는 창작물 속 악당이 아니다. 진짜로 너희가 내 계획을 막을 가능성이 있었다면, 내가 여태껏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시간을 끌었을 것 같나?”
“….”
“15분 전에 이미 시작했다.”
“뭐, 뭣?”
15분 전? 자정에 이미 시작했다고? 놀란 진여명은 재빨리 진통사 책상과 잔해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작동하긴커녕,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날 속여? 그가 다시 박철을 노려보기 무섭게, 박철이 어깨를 으쓱였다.
“좋네. 이 대사 나도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이 새끼가…!”
자신을 놀렸다고 생각한 진여명은 쏜살처럼 날아가 박철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짝! 망설임 없이 뺨을 후려쳤다. 초인의 힘이 실린 손바닥이었고, 박철은 그대로 고개가 꺾이며 입에서 피…
…가 아닌 푸른 가루를 흘렸다. 마나 가루?
“설마… 분신?”
진여명의 질문에 대답하듯, 가짜 박철의 발과 손끝이 가루가 되기 시작했다.
‘분신이라고? 안 돼, 그렇다면….’
그가 고개를 들자마자, 허리에 건 무전기에서 성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여명 이 병신 새끼야! 뭐 하고 있는 거야!! 지금 전국 TV에 박철이 나오고 있다!! 당장 녀석을 막아!! 막으라고!!]진여명은 멍하니 무전기를 들고 대답했다.
“소, 소장님. 여기가 아닙니다.”
[뭐?]“여기서 방송하는 게 아닙니다… 지하 비밀 벙커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개새끼가 지금 뭐라….]무전기 너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쾅! 문이 열리는 소리, 누군가 다급히 떠드는 소리, 그리고 성난 목소리가 연달아서 들려왔다.
일반인에게는 그저 소음에 불과했지만, 초인의 청각을 가진 진여명은 소음 사이에 섞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대통령 지하 벙커. 경무대가 뚫렸다.
***
자정까지 5분 남은 시점.
두꺼운 철문 앞에 선 박철은 빵 봉투에서 열쇠를 꺼냈다.
진짜 열쇠는 아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열쇠’는 훨씬 투박했다.
네모 반듯한 황금 덩어리.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천여명이 직접 전해줄 만큼 귀한 마도구였다.
경무대 주변 지하 벙커 터널의 문을 비롯해 모든 문을 마음껏 열 수 있는 만능열쇠… 그래, 이게 전설 속에서 전해지는 드워프 왕가의 황금 옥새였다.
저 미국의 드워프 재벌들이 천금을 주고서라도 사고 싶어 하는 바로 그 물건.
비록 그가 초인이 아니라서 미리 담아 놓은 천여명의 마나가 떨어지는 순간 기능이 정지하겠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래, 충분하지.”
시간을 확인한 박철은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까지 1분.
그는 옥새를 꽉 쥐었다. 마나를 느끼진 못하지만, 옥새를 든 손에서 어쩐지 태양처럼 뜨거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부디 이 기운이 그를 도와주길 바라는 사이, 삐. 삐. 삐! 그의 시계가 자정을 알렸다.
작전 시작을 알리는 알람.
후우- 크게 숨을 들이쉰 두꺼운 철문에 옥새를 가져다 댔다. 끼기긱-! 묵직한 소음과 함께 문의 기계장치가 움직이고, 문이 열리며 그의 통행을 허락했다.
두꺼운 철문을 넘은 그는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장만이 아지트로 이용하던 벙커를 지나, 머리 위로 군부대가 있는 곳을 가로지르고, 이윽고 경무대가 있는 곳까지.
종군 기자 시절의 체력이 아직 남아있는 건지, 그는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도 제시간에 경무대 지하에 도착했다.
대통령 지하 벙커.
전쟁이나 재난 시 대통령이 몸을 피해 임시 지휘부가 되는 곳임에도, 이곳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여명이 아무도 없을 거라고 장담하긴 했지만… 정말로? 이만한 시설에 아무도 없다고?
숨을 헐떡이며 불을 켠 박철은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전구 아래 드러난 이곳은 대통령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아니,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여긴 마굴이었다.
벽에는 붉은 물감… 아니, 피로 쓰인 마법진들이 가득하고, 탁자나 소파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해골이 가득 쌓인 제단이 놓인 곳.
우웁.
박철은 구토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남미의 미친 독재자들이 만들던 ‘양식장’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이런 시발….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간신히 구토를 삼킨 박철은 제단을 피해 벙커의 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나 더 뛰었을까? 그는 마굴이 아닌 목적지에 도착했다.
벽에는 실시간으로 각종 방송이 나오는 디스플레이가 가득 들어차 있고, 각종 서버 장치와 영상 조절 장치, 그리고 통신 장치들이 가득 차 있는 커다란 방.
마치 대형 방송국의 부조실을 몇 배로 키워 놓은 것 같은 그 공간에서, 무뚝뚝한 남자가 그를 맞이했다.
“11초 늦으셨습니다.”
“….”
대통령 경호원… 이름이 주단이었던가? 박철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로 그에게 다가갔다. 경호원이 말했다.
“통신 장악 준비는 끝났습니다. 그쪽 준비는?”
박철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가방을 흔들었다. 그곳에는 그의 노트북과 각종 영상 자료가 들어 있었다.
“얼마나 방송할 수 있지?”
“경호처의 대응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1분. 최대 3분입니다. 그 이상으로 진행하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목숨을 보장하지 않으면?”
“5분까지도 가능합니다만… 권하지 않습니다.”
권하지 않는다? 박철의 눈썹이 휘어지자, 경호원이 덧붙였다.
“대통령께서 이 나라를 다시 세우려면, 인재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뜻있는 언론인은 특히 구하기 어려운 인재죠.”
“….”
설마 대통령 경호원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던 박철은 움찔, 손을 멈췄다.
쑥스러움 때문일까? 그는 관리 장치에 준비한 USB를 꼽고, 자신을 찍을 카메라를 세팅한 뒤에야 경호원에게 대답했다.
“…내 연설은 1분으로. 그 후에는 준비한 영상을 틀고 도망치지.”
경호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계기판과 서버 장치를 만지작거리자, 벽을 가득 채운 디스플레이가 흔들렸다.
“준비됐습니다.”
드디어… 박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뒤늦게 전 국민에게 연설한다는 긴장이 몰려왔다. 식은 땀이 나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실수하면 어쩌지? 그저 장난으로 여긴다면?
그가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리던 그때, 벽면 디스플레이에서 한 예능 방송이 보였다. 천여명이 어떻게든 국민 한 명이라도 더 TV 앞으로 불러내기 위해 나간 방송.
심각한 이쪽과 달리 천여명과 홍세티가 짓궂은 MC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참, 뭐랄까…
“…다들 고생이구만.”
그래, 고생이다. 모두 고생하고 있다. 천여명도, 홍세티도, 저 경호원도, 그리고 자신도.
어째서일까, 그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주먹에서 힘을 뺀 박철은 경호원에게 신호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달깍.
대통령 권한이 발동되며 전국의 모든 방송 채널이 경무대 지하를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