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698)
을 위한 세계는 없다-698화(698/817)
EP.698 서울의 밤 (2)
***
16시 22분.
쿠데타 시작까지 8시간가량 남은 시점.
[국정원의 언론 대응팀, 국방부, 외교부 모두 난리가 났다. 언론의 입을 막는 것 외에는 사실상 답이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경기장 선수 대기실에 앉아있던 여명은 장만 어르신의 문자를 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적들은 흔들리고 있었다. 박철과 성녀에게 이 연타를 맞은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고, 정부는 대응법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 갑자기 정체가 까발려진 애국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였다. 계획대로인데…
“…이 세상에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 따윈 없다.”
그렇게 여명이 아샤의 격언을 중얼거린 순간, 누군가 끼어들었다.
“어린 용을 위한 비석 중 발췌. 맞지?”
방정맞은 목소리. 여명이 고개를 돌리자, 투명 망토를 훌러덩 벗는 성녀가 보였다.
여명이 대답했다.
“정답.”
“맞췄으니까 상 줘.”
“키스해 줄까?”
“… 요즘 여자한테 너무 익숙해졌어. 아, 속옷만 봐도 놀라던 풋풋한 여명이 그립다.”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성녀는 쪼르르 여명의 옆자리에 앉았다. 물론 키스는 하지 못했다. 맞댄 어깨 너머로 작은 떨림이 느껴졌으므로.
그녀답지 않게 긴장이 역력한 모습. 여명이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는 가운데, 성녀가 말했다.
“다음은… 살로메지?”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랑 세티의 경기가 끝나자마자, 살로메가 경기장에 올라와서 군부와 마탑이 저지른 인체 실험을 고발할 거야.”
그렇게 삼 연타를 맞은 한국 정부가 흔들리면, 대통령이 혼란 수습을 명분으로 계엄령을 내린다. 그리고 김강혁 장관이 군부의 수뇌부를 모은 뒤… 쿠데타를 시작한다.
계획을 되새긴 성녀는 후우- 길게 숨을 삼켰다. 여명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한 번 더 어깨를 다독이다가, 뭔가 떠올린 듯 몸을 옆으로 뺐다.
“아, 맞다. 이걸 안 줬네.”
“응? 뭘?”
성녀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오르는 사이, 여명은 인벤토리를 열어 장비를 꺼냈다.
“저번에 못 챙겨준 거.”
시작은 퀴니 코완의 마총이었다. 성녀의 리볼버보다 한층 더 묵직한 대구경 권총.
여명이 그녀에게 총을 내밀자, 성녀가 눈에 띌 정도로 당황했다.
“이건 나, 나보다는 여명이 쓰는 게….”
“난 킴 필비한테 빼앗은 컴비네이션 건이 있잖아.”
“하, 하지만….”
“성녀, 너 성도에서 총알 부족으로 고생 좀 했잖아. 이게 도움이 될 거야.”
“그, 그치만? 이, 이걸 쓰면 용사 파티인 게 걸리잖아?”
“그게 왜? 이제 더는 숨길 필요 없잖아.”
여명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성녀도 더는 거부하지 못했다. 총을 받아 든 그녀는 무언의 감동이 담긴 몸짓으로 총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쇠똥구리’가 적힌 부분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이름이 적힌 보물을 주다니. 꼭 결혼 예물 같다.”
이번에는 여명이 당황할 차례였다. 이런 걸로 무슨 결혼 예물이야?
“총이 무슨 예물이야. 차라리 이게 더 결혼 예물에 가깝지.”
“뭐?”
여명은 용사의 팔찌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정교한 금빛 팔찌를 본 성녀는 화들짝 놀라 여명과 팔찌를 번갈아 보다가, 못 믿겠는지 안대를 벗고 한 번 더 확인했다.
“파순이 했던 말 기억 안 나?! 이, 이런 거 주면 죽는 게 클리셰잖아!”
“둘은 좀 다르지. 반지가 아니라 팔찌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전투 용이라고.”
“어? 그, 그런가…?”
성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여명은 재빨리 팔찌를 벌려 그녀의 손목에 채웠다.
“보호막을 펼칠 수 있으니까, 혹시라도 위험해지면 써. 알겠지?”
성녀는 우물쭈물 팔찌를 만지작거리다가, 대뜸 여명을 콱 끌어안았다.
“…고마워.”
이런 선물 하나하나에 기뻐해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명도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여명은 품에 안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예물이라고 하긴 했는데… 이거 진짜 예물은 아니야. 알지? 진짜 예물은 다 끝난 뒤에… 제대로 줄게.”
“….”
성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더 강하게 그를 끌어안았을 뿐.
그렇게 서로의 온기를 느끼길 잠시. 슬슬 경기장 바깥의 인기척들이 늘어날 때쯤, 누군가 여명의 대기실 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와.”
여명이 말하기 무섭게, 문을 열고 전윤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녀석은 성녀와 포옹하고 있는 여명을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어… 내가 좀 눈치 없는 타이밍에 온 건가?”
“이런 눈치는 또 좋네.”
여명이 능글맞은 대답을 내뱉자, 성녀가 퍽, 퍽! 그의 가슴을 때렸다. 웃으며 그녀를 놓아준 여명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제시한 거래는 어떻게 됐어?”
전용섭에게 마법진 정보를 받는 대신, 한국 바깥으로 무사히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거래.
전윤성은 주머니에서 작은 USB를 꺼내며 대답했다.
“내가 직접 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너희 아버지가 순순히 거래를 받아주실 줄은 몰랐는데.”
“…우리 아빠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러면 적당히 나쁘신 분이야?”
“…아마도?”
차마 좋은 사람이라고 하진 못하는구나. 여명은 아빠 쪽 인성만 빼면 완벽한 부자 관계라고 생각하며 USB를 챙겼다.
“나도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냥… 내 제안이 덜컥 받기엔 좀, 그렇잖아?”
“…협박으로 이해하시긴 하더라.”
하지만 이건 협박이 아니었다. 오히려 관대하다면 관대한 제안이었지.
쿠데타가 일어날 서울에서 따로 도주 경로를 만들어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그 대상이 전 국민의 미움을 받는 배신자라면야.
전용섭은 뒤에 있는 미국을 믿는 거 같았지만, 각하와 종말 교단이 미국 국적 따위를 신경 쓸 리가….
아무튼, 여명은 인벤토리에서 서류와 기억 전이 마법이 걸린 종이를 꺼내 전윤성에게 내밀었다.
“이건?”
“이 서류가 있으면 너희 아버지랑 경호원들, 그리고 미 대사관에 있는 외교관들까지 전부 시크릿 소사이어티가 서울 밖으로 안내해 줄 거야. 접선 장소는 기억 전이 마법으로 확인하고… 서울을 빠져나간 뒤에는 부산으로 가. 그리고 맨 아래 있는 표 있지? 그게 대마도를 경유해서 일본으로 가는 배편이야.”
“….”
설마 여명의 제안이 진짜인 줄 몰랐던 걸까. 전윤성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
“이런 준비를 해뒀다는 건… 서울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구나.”
“응.”
내가 그 무슨 일을 벌이는 장본인이지만… 뒷말을 삼킨 여명은 이렇게 덧붙였다.
“괜히 휘말리지 말고. 아버지랑 빠르게 떠나.”
“….”
전윤성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대로 대기실을 떠났다.
그렇게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던 여명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
18시 01분.
쿠데타 시작까지 6시간가량 남은 시점.
나라 곳곳으로 번지는 혼란과 상관없이, 올림피아 4강전 경기는 일정대로 진행되었다.
성녀와 전윤성의 경기가 취소되긴 했지만,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오늘의 메인 이벤트… 아니, 한국의 메인 이벤트는 바로 이 경기였으니까.
천여명 대 홍세티.
한국인, 그것도 연인 사이의 두 초인이 나란히 올림피아 4강에 올라 싸운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천여명! 천여명! 천여명!!
-애인끼리 너무 심하게 싸우지 마라!! 내일 결승전도 치러야지!!
-세티 언니!! 여기 봐주세요!!
환호와 고함, 흥분과 열기.
선수용 출입구에 서서 잠시 관객석을 바라보던 여명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왔어?”
그러자 허공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응. 조금 늦었지?”
투명화 마법을 뒤집어쓴 살로메의 목소리. 여명은 살짝 감탄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왔네. 그 짧은 사이에 전용섭이 준 자료를 다 해석한 거야?”
“별로 어렵지 않았어. 마하간이 만든 마법진을 이리저리 표절했더라고. 참… 학위는 어떻게 딴 건지 모르겠더라.”
“….”
마법진도 표절이 있어? 여명은 크흠, 헛기침한 뒤 말했다.
“자료는?”
“당연히 다 준비 해놨지. 대형 환영 마법으로 경기장에 있는 모두에게 보여줄 거야. 그리고 내 발표가 끝나자마자, 모든 언론사 대표 메일로 관련 자료가 발송될 예정이고.”
“….”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완벽했다. 이제 남은 건 직진뿐.
그가 짧은 긴장을 삼키는 가운데, 출입구 끄트머리에 있는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선수 입장 신호였다.
곧, 살로메가 그의 등을 밀며 말했다.
“다녀오세요. 나의 용사님.”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여명은 그녀를 남겨둔 채 경기장으로 향했다.
-와아아아아!!!
귀를 찌르는 환호성과 동시에 강렬한 빛이 경기장을 비췄다. 여명은 반대편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세티와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며 경기장에 올라섰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자, 경기장을 채운 함성이 한층 더 두터워졌다.
소리가 얼마나 큰지, 심판과 해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사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해야 할 일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화려하고, 길게.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연예인처럼… 아니, 문자 그대로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두 사람은 쇼를 준비했다.
경기가 끝난 직후 이어질 살로메의 발표를 보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그리고 잠시 후, 심판이 두 사람 사이에서 손을 들었다.
…준비!
함성 속에서도 뚜렷이 들리는 소리를 따라, 여명은 검을 들었다. 세티는 이미 망치에 벼락을 머금었다.
교차하는 눈동자, 맞춰지는 호흡, 그리고 등을 타고 올라오는 긴장감.
다음 순간, 심판이 손을 내려쳐 경기를 시작…
…하지 못했다.
함성 소리를 꿰뚫을 정도로 커다란 폭발음 때문에.
콰아아앙!!!!!
높은 경기장의 벽을 뚫고 올 정도로 섬뜩한 소리.
여명은 그 소리가 뭔지 단번에 눈치챘다. 그건 포탄이 터지는 소리였다.
폭발음은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연이어 쾅, 쾅, 쾅!!!
곧 경기장을 뒤덮은 환호와 함성이 당혹스러운 침묵으로 변했다. 여명은 검을 든 자세 그대로 포탄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서울 도심 한 가운데. 경무대와 국방부 본관이 있는 방향.
“여명, 이거 설마….”
같은 곳을 바라보던 세티의 목소리가 떨리는 가운데,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
우웨에에에에엥 – !!!
그리고 이어지는 경보 방송.
[국민 여러분, 여기는 수도 방위 사령부 경보 통제소입니다. 실제 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 현재 시각 서울 전역에 실제 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 극장, 운동장, 백화점 등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영업을 중지하고, 대피 명령에 따라주시길 바랍니다.]공습 경보를 내리면서 누가, 어디에, 무슨 공격을 하는 지 언급하지 않았다… 방송을 들은 여명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쿠데타.
그는 놀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