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00)
을 위한 세계는 없다-700화(700/817)
EP.700 서울의 밤 (4)
***
침묵은 쉽게 전염된다.
그 격언을 증명하듯, 서울 올림피아 경기장에는 짙은 침묵이 깔렸다.
조금 전의 함성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짙은 침묵.
침묵 사이 진공을 두들기는 건 경기장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경보와 포격 소리뿐이었다.
쾅, 쾅, 쾅. 누군가는 저 소리가 그저 장난이길 바랐으나, 서울 하늘에는 저게 포탄임을 증명하는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관중석을 채우는 혼란만큼이나, 어지럽고, 난잡하게.
하지만 관중석 중간, 아빠의 어깨 위에 앉아있는 꼬마는 그런 혼란과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천여명의 팬인 꼬마는 포탄이나 경고를 이해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경기장 위 천여명에게 시선을 빼앗긴 까닭이었다.
그 순수한 팬심 덕분에, 꼬마는 대다수의 관중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휴대폰을 꺼낸 천여명이 홍세티와 함께 휴대폰을 확인하는 것.
당황한 심판이 무어라 소리치는 걸 무시한 채 담담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돌리는 것.
그리고 뭔가 각오한 눈으로 경기장 담벼락 너머를 바라보는 것까지.
기대하던 경기는 아니었지만, 꼬마는 즐거웠다. 좋아하는 히어로 만화 속 주인공이 각성하는 장면을 볼 때 느꼈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즐거움이었다.
물론,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콰아아앙!!!
경기장 외벽을 강타한 포탄을 따라, 관중석이 우르르 흔들린 까닭이었다.
누구 하나 다치진 않았지만, ‘포탄이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이란 생각이 들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꺄아악!!
누군가의 비명을 시작으로, 공황이 퍼져나갔다. 관중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칫해서 누구 하나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대참사가 일어날 만큼 무질서한 모습.
물론, 관중석의 꼬마는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 쾅쾅 소리는 뭔지, 주변 사람들은 왜 비명을 지르는 건지, 아빠는 왜 갑자기 자신을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은 꼬마가 늘 그러하듯, 녀석이 울음을 터트리려는 순간.
쩌엉 – !!
경기장 중앙에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겁먹은 아이와 우왕좌왕하는 어른들 모두가 고개를 돌릴 정도로 큰 소리가.
!!!
한 번 더 소리가 울리며 경기장을 떠나던 사람들마저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천여명의 검과 세티의 망치였다. 두 사람은 보란 듯 무기를 부딪치며 관중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설마 이 상황에서 경기를 치르려는 건가? 경기 시작 싸인이 떨어지긴 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당혹과 의아함, 그리고 격한 시선이 모인 걸 확인한 여명은 후웁- 폐에 마나를 가득 모으며 소리쳤다.
“관중 여러분! 모두 당황하지 마시고 모두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마나로 강화된 그의 목소리는 커다란 경기장 전체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잠시 눈치를 보던 관중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수군거리거나,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천여명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거라 생각했다.
당연한 생각이었다. 국가가 강한 초인을 선망하는 이유는 강한 무기를 원하는 이유와 같았다. 그리고 강한 무기는 긴급 상황에서 빛을 보는 법.
경기장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몰라도, 천여명은 경기장에 모인 수만 명을 위해 기꺼이 무기를 들어야 했다. 그게 초인의 의무였으니까.
한데… 이어진 천여명의 말과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그는 너덜너덜한 경기용 칼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는, 이렇게 소리쳤다.
“곧 여러분을 안전한 곳으로 안내할 사람이 올 겁니다! 이대로 질서를 지키며 기다려주시면, 다치는 사람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직후, 천여명의 발아래로 아침의 햇빛처럼 강렬한 빛이 반짝였다. 관중들 중 일부는 그게 신성이라는 걸 눈치챘지만, 그걸 말할 틈이 없었다.
그보다 더 크고 빠르게 다른 관중들이 소리쳤으니까.
-나, 날아오른다!
그말마따나, 천여명은 빛을 발판 삼아 하늘 위로 걸어 올라갔다.
홍세티의 손을 잡고 빛의 계단을 오르는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했으나, 관중들은 장엄함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우리를 버리고 어딜 가는 거야?!
누군지 모를 관중의 비명을 시작으로, 다른 관중들이 아우성쳤다. 가지 마. 살려줘. 우리를 지켜야지. 초인의 의무를 지켜라….
모든 말들이 엉키며 포탄 소리만큼 커다란 소음이 되는 가운데, 아빠 품에 안긴 꼬마만큼은 눈을 반짝였다.
천여명의 새로운 기술을 본 덕분이기도 했지만, 하늘로 날아오르던 천여명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그를 향해 날아 온 덕분이기도 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아이 아빠와 주변 관중들이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 어?!”
놀란 관중들이 입만 벙긋거리던 바로 그 순간… 쾅!!!
천여명의 몸 바로 앞에서 포탄이 폭발했다. 관중들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안았으나, 이번에도 사상자는 없었다.
어째서?
질문의 답은 허공을 휘감는 포탄 연기와 파스스 흩날리는 마나 가루, 그리고 상의가 너덜너덜해진 여명에게 있었다.
포탄이 그의 앞에서 터진 게 아니라, 천여명이 직접 몸으로 포탄을 막은 모습.
짧은 순간 보호막을 펼친 걸까? 마나 가루 사이로 보이는 팔다리는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물론,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그의 피부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
그 모습을 본 관중들은 어떤 경외감, 혹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여명은 어디서 꺼낸 건지 알 수 없는 새 옷을 걸치며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곧 여러분 모두를 안전한 곳으로 모실 사람들이 올 겁니다! 몇 분 걸리지 않을 테니, 모두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말을 끝낸 여명은 곧장 빛 덩어리 위에 앉아 있는 세티를 향해 걸음을 돌렸다.
포탄에 압도된 관중들이 감히 그를 붙잡지 못하는 가운데, 오직 한 명. 계속 여명을 바라보고 있던 꼬마가 힘껏 소리쳤다.
“형! 나쁜 놈이랑 싸우러 가는 거예요??”
포탄 소리 사이에서 그 목소리를 어떻게 들은 건지, 천여명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응. 나쁜 놈 잡으러 가는 거야.”
꼬마는 웃었다. 좋아하는 히어로 만화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환하게.
“응원할게요! 이기고 와요!”
천여명은 대답 대신 미소로 화답했다. 짧게 미소를 교환한 그는 다시 하늘에 떠 있는 세티에게 향했다.
-자, 잠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관중들이 그를 붙잡으려는 순간, 세티의 손을 붙잡은 여명은 번쩍! 그대로 섬광이 되어 경기장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여명이, 밤을 맞이하기 위해 움직였다.
***
“끄으응….”
박 총리는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기억과 감각이 흐릿한 가운데, 이마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리고 그가 진짜로 이마가 찢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겁할 때쯤.
“일어났군.”
익숙한 목소리가 국무총리의 귀를 찔렀다. 그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번 더 기겁했다.
“대통령 각하…! 상태가…?!”
“걱정하지 말게. 죽을 상처는 아니니.”
덤덤한 말과 달리, 김규원 대통령의 몸은 곳곳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팔, 다리, 옆구리… 포션을 뿌리고 지혈까지 한 상태였으나, 초인도 아닌 대통령이 오래 버티긴 어려워 보였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입….”
중얼거리던 총리는 뒤늦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렸다. 무장한 군인들에게 붙잡히고, 이마에 강제로 무언가가 새겨지던 기억.
“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대통령과 총리가 동시에 피범벅이 되다니. 이건 흡사-
“쿠데타일세.”
“…쿠, 쿠데타라뇨? 마, 말도 안 됩니다! 가, 각하께선 그걸 용납하실 리 없습니다!”
김규원은 총리가 말하는 ‘각하’가 자신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바로 그 각하께서 직접 군부를 움직이셨네.”
“그, 그, 그럴 리가! 왜 우리를?”
우리는 충실한 꼭두각시였잖습니까! 차마 꺼내지 못한 총리의 뒷말을 예상한 대통령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잘 모르겠군. 그냥 심심하셨거나… 고작 기자 한 놈 때문에 생긴 일을 수습하기 위해 꼬리를 자르는 걸지도.”
“….”
총리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그, 그럴 리 없습니다! 지, 지금 당장 각하를 뵈야겠습니다!”
대통령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쉽지만, 당장은 어려울 것 같군. 이곳에서 나갈 수가 없어서.”
그제야 총리는 주변을 확인했다. 그가 대통령과 나란히 앉아 있는 공간은 묘하게 익숙했다.
두꺼운 철로 사방이 막혀 있고, 포션과 의료 상자 등 긴급 물품과 마법진으로 뒤덮인 방.
설마, 여기는…
“…대, 대통령 전용 긴급 벙커??”
“맞네.”
곧, 대통령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철문 너머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김규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나오지!
두꺼운 철문을 뚫을 정도로 크고, 거친 목소리. 마나가 듬뿍 담긴 그 목소리의 주인은 대통령 경호처장이 틀림없었다.
“으… 으….”
경호처가 직접 대통령과 총리를 숙청하기 위해 움직였다고? 그건 각하께서 직접 내린 명령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실을 깨달은 총리는 몸을 벌벌 떨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
“대, 대통령 각하! 이 벙커는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그는 이 벙커가 각하께서 생각을 바꿀 정도로 오랫동안 버티길 바라며 물었다.
“글쎄… 경호처가 폭탄을 쓸 수는 없을 테니. 아마 항마력 마법진이 해체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걸세. 항마력 마법진이 전부 사라지면, 곧바로 마법을 써서 문을 날려버리겠지.”
“….”
“뭐,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이 마법진을 해제하려면 경무대 지하 벙커의 모든 마법진을 박살 내야 할 테니.”
그제야, 총리는 문 너머에서 들리는 끼기긱-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경무대 지하 전체에 마법진을 제거하는 소리일까?
총리가 재차 물었다.
“저, 정확히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10분.”
“…예?”
농담하는 건가? 대통령 벙커가 고작 10분밖에 못 버틴다고? 총리가 경악하건 말건, 대통령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이런 보안 마법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위치 아닌가. 경호처는 벙커의 마법진 위치를 전부 알고 있을 테니… 아마 못해도 15분 정도면 모조리 갈아버릴 수 있을 걸세.”
“15분? 조금 전에는 10분이라고 하셨….”
“자네와 내가 여기 들어온 지 5분쯤 지났네.”
“그, 그러면 통화! 통화라도…!”
“아쉽지만, 통신은 이미 차단된 지 오래일세.”
그건 총리의 희망을 박살 내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죽음을 확신한 총리는 대뜸 흐어엉 눈물을 터트렸다.
대통령은 좀 조용히 있으라고 지적하는 대신, 품에서 낡은 사탕 통을 꺼내며 말했다.
“박 총리, 그거 알고 있나? 나는 말일세, 이 사탕이란 놈을 참 싫어한다네.”
“….”
“웃기는 게 뭔지 아는가? 우리 누이는 평생 내가 사탕을 좋아하는 줄 알았단 걸세.”
총리는 지금 같은 상황에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눈물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통령은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사탕 통을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내가 처음으로 먹은 사탕은, 누이가 개성 차원문 앞에서 구걸해서 얻어온 사탕이었지. 소련군의 전투 식량에 들어 있는, 그 눅눅한 사탕 말일세.”
“….”
“솔직히 말해서, 나는 미군이 주는 초콜릿을 더 좋아했네. 소련제 사탕은 뭐랄까… 달기만 하고 영, 입에 안 맞았거든.”
대통령의 말은 총리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건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누이는 그것도 모르고 늘 사탕을 가져왔지. 심지어 공장에서 받은 첫 월급으로 사 온 선물도 사탕이었어.”
“….”
“좆 같은, 싸구려 왕사탕….”
대통령은 무언가 확인하려는 것처럼 사탕 통을 흔들었다. 통 속 사탕이 춤추는 소리가 벙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뒤섞였다.
“좆 같은 빨갱이 새끼들. 노동자를 위한다면서, 정작 소련의 명령에 죽고 살았던 그 새끼들도 이 왕사탕을 그리 좋아했어.”
“….”
“공장에서 일하다 기침병에 걸려 죽은 누이가 남긴 마지막 유품도, 이 좆 같은 왕사탕이었고….”
대통령의 목소리는 무언가 억누르는 것처럼 거칠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감정적인지, 총리는 눈물도, 두려움도 잊은 채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박 총리. 나는 말일세, 정말로… 사탕이 싫어. 내 쓰디쓴 인생을 싫어하는 것보다도 더.”
그렇게 말한 대통령은 꽈악- 사탕 통을 쥐었다.
그는 사탕이 싫었다. 누이가 죽은 뒤로 단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을 정도로.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사탕 앞에 있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언짢아서? 아니면 이 나라의 꼬락서니를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알 수 없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위해 목숨 바친 청년이 아니었고,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정치인도 아니었으니까.
그는 여전히 누이가 구걸해 얻어온 사탕을 쪽쪽 빨아 먹던 꼬맹이요. 누이의 죽음에서 의미를 찾던 풋내기이자, 혁명 동지를 배신한 개자식이고, 합종연횡과 협잡질로 권력을 잡은 정치인일 뿐이었다.
그나마 위안거리가 있다면, 그가 끝이 아니란 점이었다. 이 나라에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었다.
천여명과 희생양 자매들… 그들은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은 어른이 될 것이다.
그래, 그 아이들이 있기에 후회는 없었다. 비록 자신은 계획의 끝을 보지 못하고 여기서 죽겠지만… 괜찮았다.
‘누이, 천 박사님…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한 대통령은 오랫동안 열지 못한 사탕 통을 내려다봤다.
누이의 유품이자, 평생을 그저 바라만 보던 사탕 통… 이제는 열어봐도 될 것 같았다.
달깍. 그는 조심스레 통의 뚜껑을 열었다.
예상대로, 통 속의 사탕은 볼품없었다. 사탕의 설탕들은 실처럼 늘어져 있었고, 색은 흐릿해져 있었다. 그래, 사탕은 그 만큼이나 늙어있었다.
이 정도면 세월을 함께한 동료라 해도 손색이 없으리라… 감상에 젖은 김규원은 맨 위의 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인생은 이렇게나 쓰디쓰건만, 누이가 동생을 위해 남긴 사탕은 여전히 달달했다. 누이가 살아있던 그 시절만큼이나.
김규원은 사탕을 입에 문 채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다가오는 소리를 귀에 담았다.
지이잉-! 마법진을 갈아내는 소리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총리의 훌쩍거림은 들리지 않았다. 그가 건네준 사탕을 입에 문 덕분이었다.
하필 이런 엿 같은 늙은이가 길동무라니. 끝까지 엿 같은 인생이었다.
김규원은 사탕을 한 개 더 입에 물며 죽음을 기다렸다.
이윽고, 갈아내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게 된 순간.
-각하. 설마 자살하신 건 아니겠지요. 제가 각하를 섬긴 게 몇 년인데, 모가지는 주셔야 할 거 아닙니까?
경호처장의 조롱과 동시에, 벙커의 철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쿠웅!
두꺼운 벙커의 철문이 쓰러졌다. 대통령 경호처의 초인들은 철문을 밟으며 벙커 안으로 들어와 총리와 대통령을 내려다봤다.
대통령은 자신을 겨누는 무수한 총구를 보며 말했다.
“개새끼도 키워준 주인은 알아보거늘.”
그러자 경호처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 우리가 개새끼라지만, 진짜 주인과 가짜 주인을 구분할 줄 압….”
아쉽게도, 녀석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뒤늦게 대통령에 대한 미련이 생긴 건 아니었다. 그저, 벙커 천장이 붉게 물든 탓이었다.
“붉은… 차원문…?”
경호처의 초인 중 누군가 그 붉은 빛의 정체를 깨달은 직후.
붉게 물든 천장이 반으로 갈라지며 다섯 명의 인영이 튀어 나왔다.
금발, 은발, 외눈, 외팔… 하나 같이 특이한 외모를 지닌 남녀.
그 다섯 명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가 미남미녀인 동시에, 붉은 별을 품은 나무가 그려진 판초우의를 입고, 길쭉한 귀를 가지고 있다는 점.
“엘ㅍ…?!”
상대의 정체를 눈치챈 경호원이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선두에 있던 금발의 소녀가 검을 휘둘렀다.
푸확! 총을 든 팔이 하늘 위로 치솟고, 혁명의 그것처럼 붉은 피가 퍼지는 순간.
소녀가 선언했다.
“세계수 혁명단, 혁명을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