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08)
을 위한 세계는 없다-708화(708/817)
EP.708 삶은 콩으로 만든 부드러운 구조물 (4)
***
기사단장은 기계적으로 땅굴을 파냈다.
현역 시절 참호를 파던 실력이 여전히 몸에 남아있는 건지, 땅을 파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콰앙 – ! 콰아앙 !!!
땅굴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폭발의 후폭풍을 그대로 뒤집어쓰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화산쇄설의 불씨를 단단한 흙 사이에 파묻고, 폭파.
지하 벙커를 만들기 위해 지반 공사를 한 덕분인지, 기사단장이 파낸 땅굴은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고 두꺼운 벙커의 철판까지 이어졌다.
아, 어쩌면 이곳에 묻힌 옛 왕조의 시조가 가호하는 걸지도.
“안식을 방해해서 미안하오. 최대한 빨리 원상복구 해드리겠소.”
이름이 이성계였던가. 이곳이 왕릉이라는 걸 떠올린 기사단장은 무덤 방향을 향해 짧게 묵례한 뒤, 벙커 철판을 향해 메이스를 들어 올렸다. 우선, 무덤 아래에 끼어든 쥐새끼들부터 꺼내드리겠소.
!!!
철판을 두들기는 화산쇄설의 폭발은 평소보다 더 크고, 강렬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화산쇄설은 본디 사악한 지구의 군대를 벌하기 위한 것. 그리고 이 벽 너머에는 상급자에게 반역을 일으키고, 자국민을 살해한 사악한 지구의 군인들이 모여있었다.
‘고맙다. 여명.’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과 불씨가 뒤섞이는 가운데, 기사단장은 여명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냈다.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주어서, 살아서 기사도를 지킬 기회를 주어서.
콰앙!!!
기사의 기쁨과 의지를 따라 폭발이 이어졌다. 단 두 방에 벙커의 외벽이 우그러지고, 땅이 울렸다.
[초인군과 괴수… 당장… 모두에게… 해라! 우리가… 없… 그래… 전부…!]벽과 폭발음 너머에서, 좌절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수의 목소리였다. 기사단장은 메이스에 힘을 더 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
더는 폭발을 견디지 못한 벙커의 벽이 뻥 뚫렸다. 후폭풍에 휩쓸린 탁자와 의자가 쓰러지고, 각종 서류와 흙먼지가 흩날렸다.
“쏴! 당장 쏘란 말이다!!”
조금 전까지 비명을 지르던 참모총장이 권총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벙커를 지키던 병사들과 장교들도 각자 총을 뽑아 들고 사격을 시작했다.
흙먼지 사이로 발포 소리, 금속과 금속의 충돌음, 그리고 악에 받친 목소리 연달아 이어졌다.
“죽여! 죽이라고!!”
그리고 흙먼지가 모두 사라진 직후. 소음의 결과가 드러났다. 기사단장은 멀쩡히 서 있었다. 군인들의 발악은 기사단장의 방패도, 신념도 뚫지 못했다.
그들을 지켜야 할 경호 초인은 이미 폭발에 휩쓸려 날아간 지 오래. 장교들 사이로 짙은 좌절감이 감도는 가운데, 육군참모총장이 미친 사람처럼 웃어 재끼기 시작했다.
“하, 하하…! 대통령, 이 미친 새끼가, 외세를 끌어 들여??”
“….”
“역시, 각하께선 틀리지 않았다! 김강혁, 김규원, 두 연 놈들은 처음부터 반란군이었어! 우리는…!”
그때, 기사단장이 방패를 들어 바닥을 내려찍었다.
쿵!!!
방패 끄트머리에 고인 약식 화산쇄설의 충격이 바닥을 강타하고, 벙커를 뒤흔들었다. 군인들이 우르르 넘어졌다.
“아악!”
“안 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장교들이 비명을 지르고, 바닥에 쓰러진 통신병이 발작적으로 바닥에 떨어진 총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그만.”
기사단장이 선언했다.
“몰타 발표와 제네바 협약에 따라, 그대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바이다.”
“뭐, 뭣?”
“비국제적 무력 충돌과 포로 대우에 관한 협약에 의거, 항복한 순간부터 그대들을 포로로 대우하겠다.”
묵직한 동시에, 자연스러운 선언. 그것을 들은 장교들은 물론이고, 군인들조차 충격을 숨기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샤인이 그들에게 국제법을 운운하다니!
졌다. 명분도, 실력도… 어떠한 변명도 없는 패배였다.
그렇게 군인들이 좌절하는 순간, 육군 참모총장이 한 번 더 광소를 터트렸다.
“항복? 하앙복? 그래, 까짓것 해주지! 항복!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 야만인아. 이미 초인특수군과 남한에 있는 모든 괴수군이 서울로 진격 중이다!”
“….”
“하하, 하! 너희가 이긴 거 같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우리 지휘부가 잡힌다 해도, 군은 절대로 멈추지 않을 거다! 대통령은 절대 살아서 서울을 빠져나갈 수 없을 거다!”
주변 장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미친 자식, 저러다가 포로 대우고 뭐고 다 죽이려 들면 어쩌려고?
하지만 그들의 걱정과 달리, 기사단장은 담담했다.
그는 이보다 더한 진짜 전쟁을 겪어 온 기나긴 전장의 경험자였고, 패배가 사람을 어떻게 망가트리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이런 같잖은 도발을 그냥 넘길 정도로 호인이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기사단장은 쓰러진 육군참모총장 앞으로 다가간 뒤, 메이스를 허리에 걸고 – 퍼억!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커헉!”
합법적이고, 정당한 폭력이었다. 참모총장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아무튼, 그는 한 손으로 참모총장의 멱살을 붙잡아 올리며 말했다.
“사내란 무릇 명예를 위해 살고, 군인은 무릇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법이거늘.”
참모총장은 고통에 신음할 뿐,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기사단장은 차갑게 덧붙였다.
“넌 죽일 가치도 없다. 그러니 살아서 똑똑히 보거라. 네가 얼마나 수치스러운 선택을 했는지, 저 도시에… 누가 있는지.”
기사단장은 그대로 참모총장을 바닥에 내던졌다. 눈치 빠른 장교들은 우르르 총을 버리고 양팔을 머리 위로 들며 항복했다.
그렇게 벙커 내부를 정리한 직후, 기사단장은 무전기를 꺼냈다.
“여기는 기사단장, 계획대로 지휘부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백돌이 바둑판 위에 깔렸다.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군. 그렇지 않나?』
청색 좀비는 재밌다는 듯 지껄였다. 말투가 살짝 경박해진 게,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듯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예상과 달리 바둑은 백돌에게 유리하게 흐르고 있었고, 앞으로 정석만 지켜도 승리가 확실한 상황이었으니까.
이 바둑판이 벌어지고 몇 없는… 아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르는 승리.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 또한 그 흐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장고했다.
왜 승기가 기울었는가? 갑작스러운 폭발로 바둑돌의 위치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왜 다시 판을 뒤집을 수 없는가? 상대가 이기는 수만 두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간단한 만큼, 어이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돌 통에 손을 넣고 잘그락, 잘그락 돌을 만져댔다. 짜증, 분노, 그리고 흥미가 뒤섞이며 바둑돌이 들썩거렸다.
그렇게 그가 답을 내리지 못하는 동안, 청색 좀비가 바둑판 위의 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통령과 김강혁이 만나 계엄령을 내렸고, 만주군 사령관은 계엄 사령관이 되었다. 나머지 팻감 중 쓸모가 있는 건… 허무와 눈물, 초인군과 남은 괴수군 정도인가. 허어, 노예는 이리 많은데, 정작 쓸만한 인재가 없다니.』
잘그락.
『그러게 삼 김은 살려서 쓰자고 했잖아.』
잘그락.
『여기, 이 행마 보이나? 이대로면 개성과 서울을 넘어… 이 반도 땅 전체로 퍼질 거다.』
잘그락.
『쯧, 판이 너무 커졌어. 이대로면 미국까지 끼어들겠군. 누가 벌인 건지 몰라도, 아주 독한 놈이야. 대체 누가 범인일까? 흐음, 생각해 보니, 후보가 너무 많….』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남자가 흑돌을 내려놓았다. 마치, 좀비의 입을 막으려는 것처럼.
좀비는 바둑판을 보지 않고 남자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남자가 말했다
“허무는 붉은 별이 주인공이라 했다. 빨갱이 주인공. 그게 사실일까.”
『공산주의의 악의는 무한하다. 특히 스탈린… 그 미치광이는 무슨 짓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지.』
좀비는 픽 웃으며 백돌을 내려놨다. 백의 승리를 굳히는 수였다.
그 수가 고민에 영향을 준 것일까? 돌을 잘그락거리던 남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 확실히 스탈린이라면 그러고도 남겠지.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
남자는 바둑돌을, 아니, 돌 통을 통째로 들어 올렸다.
“나는, 지금 이 땅에 주인공이 있다고 확신한다.”
다음 순간, 남자는 돌통을 거꾸로 들어 바둑판 위에 돌을 쏟아냈다. 촤아악! 무수한 흑돌이 바둑판을 뒤덮으며 백돌과 흑돌이 모두 쓸려나갔다.
이윽고, 돌통의 모든 돌이 바둑판을 뒤덮은 시점에서 남자가 선언했다.
“놀이는 여기까지다.”
짙게 깔린 목소리를 따라, 어둠이 전율했다.
“공희를 시작하자.”
남자는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그의 뒤로,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던 모든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반도를 지옥으로 만들 무리가 움직이는 가운데, 바둑을 두던 청색 좀비만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그와 상관없었고, 무엇보다… 바둑판 위에 아직 돌이 남아있는 까닭이었다.
조금 전 바둑판의 형세를 바꾼 백돌.
『…오.』
그 돌은 흑돌로 뒤덮인 바둑판에서 밀려나긴커녕, 바둑판의 정중앙… 천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형부, 시작됐어요.”
긴장 가득한 처제의 목소리를 따라, 여명은 눈을 떴다.
짧은 휴식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심상 속에 잠겨 있던 정신이 위로 솟구치고, 몸의 감각이 서서히 돌아왔다.
고개를 들자, 작은 불꽃을 든 시리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어깨까지 자라난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 아래, 호박석처럼 선명한 눈동자가 그를 마주했다.
여명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물었다.
“시간은?”
시리는 손목시계를 확인한 뒤 대답했다.
“11시 22분이요. 쿠데타 시작부터 아직 여섯 시간도 안 지났어요.”
“자정도 안 됐는데, 벌써 움직인다고?”
예정보다 빠르네. 그가 잘 대처한 덕분인지, 아니면 상대가 숨겨놓은 패가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여명은 검을 뽑았다.
한데, 인벤토리 바깥으로 나온 멸공성검은 여명이 앉아있던 소나무를 보자마자 시… 아니, 군가를 읊었다.
[젊은 넋 숨져간 그 때 그 자리. 상처 입은 노송(老松)은 말을 잊었네-]여명이 비록 미필이긴 했지만, 굳이 검의 목소리를 막지 않았다. 딱 이 순간에 어울리는 군가였으니까.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시리 또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군가의 뒷부분을 받아 불렀다. 여명은 소나무가 자란 산등성이 위로 올라가며 마지막 구절을 받았다.
“전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
멸공성검이 만족스럽게 몸을 떠는 가운데, 여명은 자신이 부른 구절 그대로 산등성이 너머를 노려봤다.
해발 2,200m의 드높은 산 위로 드러난 화강암들이 마치 무수한 탑처럼 보인다하여, 만탑산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곳.
하지만 박철 기자가 목숨을 걸고 공개한 그곳의 진실은, 조금 더 끔찍했다.
풍계리 종말 교단 본부.
무수한 군용 차량과 종말 교단의 사제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그 산을 보며, 여명은 만박불통의 무술, 천도무친을 사용했다.
휘몰아치는 바람, 증폭되는 위력, 그리고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한마디.
‘반격의 기회를 줄 거 같으냐.’
어마어마한 마나가 끓어오르고, 처제가 재빨리 환상 마법을 해제하는 가운데, 여명은 검붉은 검기가 휘감긴 검을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계속, 내 차례다.”
다음 순간, 용사의 검이 만탑산을 향해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