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14)
을 위한 세계는 없다-714화(714/817)
EP.714 막간 – 조각들 (5)
***
검은 차원문 속 평양의 중심부, 보통강구역.
여명을 떨쳐 낸 아야톨라는 한때 류경 호텔이라 불렸던 건물 위에 멈추어 섰다.
독재자의 망상과 아집을 위해 지어진 330m 높이의 마천루.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평양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아야톨라의 마음을 울릴 정도로.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곳에서 살던 인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무엇이 되었는지.
동정은 없었다. 그의 마음에 남은 건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거란 차가운 감상-
“…?”
그때, 저 멀리 서울 방향에서 찌릿한 감각이 날아왔다. 그가 소환한 김일성 거인이 우르르 죽어 나가는 감각이었다.
허무를 흘리는 자는 미간을 구겼다.
죽이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거대 괴수는 일반적인 생명체처럼 급소가 있는 것도 아니니, 하나하나 토막을 내고 있다는 뜻인데…
“…붉은 별은 아니었군.”
천여명과 붉은 별이 동일 인물이 아닐까 의심했건만, 아닌 것 같았다. 붉은 별이라면 같은 빨갱이를 무자비하게 죽이진 못 할 테니.
물론, 실망은 없었다. 처음부터 별 기대가 없는 까닭이었다.
천여명과 붉은 별 사이에는 여러 공통점이 있긴 했지만, 그만큼 차이점도 많았다.
애초에 반공 노래를 부르는 검을 들고 다니는 녀석이 스탈린의 유산을 가진 붉은 별과 동일인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나.
그래도 굳이 아쉬운 점을 하나 꼽자면, 주인공과 만나지 못한 것 정도일까.
주인공을 죽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가 아야톨라가 된 이유이거늘.
이번 회차에서는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사석에 버려지지 못한 바둑돌이 그런 것처럼.
아쉬움을 삼킨 허무를 흘리는 자는 붉은 별과의 전투를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곧 그의 주변에 떠 있던 타락석들이 공명하고, 류경 호텔이 전율하며 그의 마나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멀리, 검은 차원문을 넘어, 현재의 한반도까지.
***
풍계리의 검은 차원문을 시작으로, 한반도 전체의 마나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공희. 바친다(供). 희생을(犧).
기뻐하라, 이곳에 구원은 없다.
***
한국과 마탑이 손을 잡고 만들어낸 죄악, 괴수 군인.
그 근본에는 마탑으로 흘러든 나치 잔당의 기술력이 있었다.
독일 유산학술협회, 짧게 줄여 아넨에르베가 차원문이 열리기 전부터 모아 놓은 인체 실험 기록부터 아샤로 넘어와 배운 온갖 흑마법들, 그리고 히틀러를 마왕으로 만들기 위한 금지된 비술들까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괴수 군인들은 마왕 히틀러와 신 나치 제국을 위한 병사였다.
그리고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마왕 히틀러를 봉인한 살로메는 그런 괴수 군인들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그래야 했다.
“할 수 있어.”
경기장 지붕에 선 살로메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할 수 있다. 아니, 해야 한다.
성녀나 세티와 달리, 그녀가 이곳에 남겨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녀가 용사의 믿음에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할 수 있어.”
처형관들을 보내고 혼자 남은 까닭인가, 지팡이를 쥔 그녀의 손이 떨렸다.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은 덤이었다.
긴장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기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기 위해 고개 돌려 피난민들을 바라봤으나, 괜히 긴장만 더 늘어났다.
자신의 어깨에 수만 명, 아니, 수백만 서울 시민의 생명이 걸려있다니.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히틀러, 그 미친놈은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쟁터로 나가 죽으라고 명령할 수 있었을까? 무고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것조차 이렇게나 힘든데…
거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히틀러의 기억을 살짝 훔쳐봤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던 감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
하지만 아무리 봐도, 마왕의 감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알 수 있는 건 히틀러가 미친놈이란 사실뿐이었다.
-살로메! 음향 기기와 증폭 마법 모두 준비 끝났다!
그 사이, 지붕 아래로 내려간 발막이 소리쳤다. 살로메는 숨을 삼켰다. 경기장 위에서 내려다보는 괴수군은 어느새 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더 이상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준비된 마이크를 들고 소리쳤다.
“Liebe Mitbürgerinnen, liebe Mitbürger!”
친애하는 동료 시민 여러분! 그녀의 증폭된 목소리를 들은 괴수군들 사이에서 움찔, 멈추는 녀석들이 보였다. 먹혔나?
아니었다. 괴수군들은 아주 잠깐 멈췄을 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뭐지? 왜 통하지 않지?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마이크로 소리쳤다.
“Ich weiß es….”
그때, 그녀의 목소리에 실린 마나가 역류했다. 우웩! 그녀는 갑자기 넘어오는 위산을 억누르며 뒤로 물러났다.
살로메는 당황했다. 왜 안 통하는 거지?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런가? 아니야, 분명 내 목소리를 들었어. 설마, 한반도를 뒤덮은 마법진이 내 마나까지 영향을 미친 건가?
그녀의 고민이 깊어지던 그 순간-
탕!
괴수군 사이에서 저격총이 불을 뿜었다.
***
저 드높은 만주의 백두산부터, 땅끝의 해남까지.
한반도가 전율한다. 마나와 뒤틀린 마나가 뒤엉키며 대지를 뒤흔든다. 맷돌이 콩을 으스러트리듯, 두 개의 마나는 자신들 사이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향해 탐욕스러운 힘을 내민다.
생존은 농담에 불과하다. 죽는다. 모든 한국인이 죽는다.
그들이 선출한 적 없지만, 그들을 지배한 지도자를 위해 죽는다.
모두가 경험치다.
***
서울, 성수대교 남단, 압구정역.
포장이 벗겨진 도로가 거칠게 흔들렸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가 비명을 내지르고, 바쁘게 내달리던 자동차들이 비명을 질렀다. 놀란 시민들의 비명 사이로 공포가 전염됐다.
-모두 질서를 유지해 주십시오!
-고장 난 차량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모두 내려서 성수대교 방향으로 가주십시오!
-넘어진 사람 밟지 마! 씨발, 밟지 말라고!
그 사이에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건 군인들뿐이었다. 애국단, 진압군, 조금 전까지 쿠데타에 가담하고 있었던 수방사 군인들까지.
하지만 도망치는 수만 명의 시민을 안내하기엔 턱 없이 부족했다. 특히 저 멀리서 촉수와 이빨을 드러낸 괴수군이 몰려오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우리라도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야? 가서 다리를 끊으면….
-닥쳐, 이 개새끼! 니가 그러고도 군인이냐!
-시발, 살 사람은 살아야지!
이윽고, 군인들마저 포기하고 성수대교로 도망쳐야 한다고 주장하던 그때.
지이잉 – !
압구정역 앞 허공에서 붉은 원이 생겨났다. 역사에 해박한 노인 몇몇이 그게 붉은 차원문이라는 걸 깨닫고 빨갱이를 찾았지만, 정작 그 속에서 나온 건 빨갱이와 거리가 멀었다.
전신 갑옷과 방패, 그리고 각각 검과 메이스를 든 기사 두 명.
쿵! 거친 쇳소리와 함께 착지한 두 기사는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한 채, 괴수군이 몰려드는 방향을 바라봤다.
“마탑의 아가씨가 실패한 모양이군.”
기사단장이 적들의 수를 헤아리며 말하자 그의 옆에 서 있던 산초가 대답했다.
“전쟁이라는 게, 원래 작전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아닙니까.”
어느새 함께 늙어버린 전우의 말. 기사단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전쟁은 변하지 않았지만… 자네는 변했잖는가. 그 아가씨에게 가지 않아도 괜찮겠나?”
그 아가씨가 누군지는 물을 것도 없었다. 산초는 어깨를 으쓱였다.
“애란이는 제가 없어도 알아서 잘할 겁니다.”
어느새 이름까지 부르는 사이가 됐나. 기사단장은 주름 깊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결혼하길 바라긴 했지만, 이렇게 깨가 쏟아지는 걸 보니… 좀, 그렇구먼.”
“….”
“아무래도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어.”
“그러면 일단,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가야겠군요.”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두 기사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불씨를 휘날렸다.
***
불타는 서울 위, 방송국 소속 헬기 한 대가 한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곳에 타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성물에게 선택받은 기자, 박철이었다. 헬기 난간에 몸을 묶은 그는 하나 남은 팔로 카메라를 꽉 붙잡고 있었다.
때때로 그가 타고 있는 헬기가 흔들리며 초점이 망가졌지만, 그는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불타는 서울을 기록하는 것. 그것이 기자인 그가 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박 기자님! 보이십니까? 한남 대교가 끊어졌습니다!]박철이 불타는 서울을 찍는 사이, 그를 위해 방송용 헬기를 끌고 온 조종사가 말을 걸어왔다. 박철은 곧장 몸을 돌려 무너지는 한남 대교를 확대했다.
포격에 끊어진 다리와 길 잃은 피난민들의 망연자실한 얼굴, 필사적으로 시민들을 안내하는 군인들, 그리고-
[조종사 양반! 지금 당장 성수대교 쪽으로 가주게!] [성수대교요? 피난민을 찍으실 생각이라면 여기가 더-] [제기랄, 자네는 저기 다리 무너지는 거 안 보이나?!]조종사는 뒤늦게 성수대교를 확인했다. 박철의 말마따나, 피난민들로 가득한 다리 중앙에 쩌저적- 금이 생기고 있었다.
박살 난 차량과 버려진 전차, 그리고 바글바글한 피난민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건지, 아니면 조금 전에 떨어진 포격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피난민이 몰린 다리가 무너지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게 분명했다.
헬기가 빠르게 성수대교로 다가가는 가운데, 박철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확성기를 꺼냈다.
[여러분!! 다리가 끊어지고 있습니다!! 당장 벗어나셔야 합니다!]애타는 목소리를 들은 피난민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비명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하는 사람이 반, 헬기를 향해 태워달라는 듯 손을 흔드는 사람이 반.
박철은 헬기 헤드셋에 대고 물었다.
[조종사! 이 헬기에 몇이나 태울 수 있나?] [기껏해야 열 명이 한계입니다! 죄송하지만, 저 사람들 태우러 내려가는 건 자살 행위입니다!]제기랄. 박철이 자신의 무력감을 실감하는 가운데, 쩌적-! 다리의 균열이 더욱더 커지기 시작했다.
***
가장 먼저 이상이 생긴 건 할머니였다.
평소에도 지병이 있으셨던 할머니는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손녀를 불렀다.
애타는 부름을 받고 달려온 건 쿠데타 방송을 보고 있던 아들이었다. 어머니의 상태를 본 아들이 급하게 휴대폰을 들어 119를 부르려 했으나, 그는 구급차를 부르지 못했다.
커헉.
아들이 쓰러졌다. 할머니는 아들을 보며 손을 바둥거렸으나, 소용없었다. 다행인 점이 하나 있다면, 그녀는 손녀 또한 같은 상태라는 걸 알지 못했다.
시집간 딸이, 그녀의 이웃이, 이 지역의 모두가 그렇게 쓰러진 걸 알지 못했다. 그리고 곧 제 죽음조차 알지 못 하리라.
다행이었다.
***
몸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자마자, 천애란은 물약을 입에 물었다.
타닥, 타닥- 그녀의 키보드 소리를 따라 박제된 애국단원들의 머리가 번쩍거렸다.
***
지하 철로로 도망치던 시민들 중 가장 먼저 쓰러진 건, 박번준이란 이름의 공익요원이었다.
비록 천식 때문에 현역은 가지 못했지만, 군인들과 함께 용감하게 피난민들 안내하던 그는 갑자기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안타깝게도, 쓰러지는 그를 붙잡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과 1초도 지나지 않아, 그를 따라 철로를 걷던 모두가 쓰러졌으므로.
***
만탑산의 깊은 어둠 속에서, 각하는 밀려드는 힘을 음미했다.
그가 오랫동안 준비해 온 잔학은, 주민등록번호란 이름의 낙인을 수확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흘러드는 생명은 너무나 달콤했다. 삶을 죽음으로 이끄는 맛이란! 고통은 최고의 감미료고, 영혼은 최고의 재료다.
인간 특유의 복잡한 정신과 감정, 그리고 절규가 뒤섞이며 그와 머리 없는 시체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개중에는 아직 소화되지 않은, 인간이 아닌 식물의 힘 또한 살짝 섞여 있었다.
…엘프?
귀쟁이들이 끼어든 건 의외였지만, 그뿐이었다. 엘프와 싸운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주인공은 언제나 그의 적이었고, 엘프 공주는 종종 주인공 옆에 있었으니까.
그래, 주인공.
그는 무수한 주인공들을 떠 올렸다. 흐릿한 기억을 따라 메마른 그의 마음속으로 연민과 증오- 그리고 기쁨이 차례대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텅 빈 마음만 남은 그 순간- 각하는 미소 지었다. 주인공이 나타난들 이미 늦은 까닭이었다.
공희는 무르익었고, 두꺼운 껍질 속에 숨겨져 있던 진미는 이미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이제 남은 건 힘을 취하는 것뿐… 그는 아직 열리지 않은 성녀의 눈을 만지작거리며 확신했다. 이제, 누구도 그의 승리를 막을 수 없다.
압도적인 폭력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