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15)
을 위한 세계는 없다-715화(715/817)
EP.715 Hi There! Dear John. (3)
***
[드디어 마지막이군.]여명이 김일성 거인의 이빨을 피하는 사이, 멸공성검이 중얼거렸다.
녀석의 말마따나, 여명을 향해 달려드는 김일성 거인이 마지막이었다. 거의 서울 인구 전체와 싸우는 것처럼 가득했던 김일성 거인들은 전부 바닥과 하나가 된 지 오래였다.
만일 그에게 주와이외즈와 주가시빌리가 없었다면, 패배하는 쪽은 그였으리라.
새삼스럽지만 오귀스트와 주와이외즈의 원주인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여명은 달려드는 거인의 혹에 칼을 찔러넣었다.
우어어 – !! 거인은 급소라도 찔린 것처럼 몸을 떨다가, 그대로 불타는 경복궁 위로 쓰러졌다. 다른 거인들의 시체에 짓눌린 경복궁은 이미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끝났다. 여명은 드디어 아야톨라를 향해 날아- 가지 않았다.
그때, 그의 눈에 희한한 게 들어온 까닭이었다.
[장군님! 아아, 민족의 영도자시여!!]조금 전 그가 쓰러트린 거인의 혹에서 기어 나온 괴수 한 마리. 거인의 재료가 되다만 건지, 괴수는 반쯤 녹아내린 몸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아, 우리 장군- 케헥!]여명은 염동력으로 괴수를 쑥- 끌어 당겼다. 맥없이 하늘로 끌려온 녀석은 손을 흔들며 발버둥쳤다. 마치, 사람처럼.
“….”
검은 차원문 속 괴수는 버려진 과거 회차의 인간이다… 그 사실을 상기한 여명은 괴수를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동정이라기엔 너무 차갑고, 혐오라기엔 따스한 감정.
그 감정을 공유한 걸까? 멸공성검이 말했다.
[이것이, 공산주의의 말로다.]“….”
[스탈린, 김일성, 폴 포트, 차우셰스쿠… 공산주의는 필연적으로 독재를 부르고, 독재는 압제를, 압제는 인간을 집단을 위한 제물로 만든다. 공산주의는 인간을 산 제물로 만드는 사상이다.]여명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괴수가 된 인간과 그 괴수를 재료 삼아 만들어진 김일성 거인이 그의 눈앞에 있는데.
그렇다고 모든 말에 동의했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공산주의는 실패한 사상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건 사상이 아닌 사람이므로.
탐욕스러운 권력자, 그를 지지하는 대중, 아무 생각도 없이 명령에 따르는 부역자들.
모두가 공범이다. 공산주의라는 이름 뒤에 숨어선 안 된다. 빨갱이한테 속았단 면죄부를 탐하지 마라… 역사의 피해자라고 주장하기 전에, 시대의 가해자란 사실을 상기하라.
거기까지 생각한 여명은 괴수의 목을 콱! 붙잡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역추적을 위해서였다. 거인이 되다만 괴수에게는 애매하게 주문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 흔적은 북쪽 저 멀리-
“…평양.”
아야톨라의 위치를 확인한 여명은 몸을 돌렸다. 그새 몰려든 김일성 거인이 포위망을 만들고 있었다. 번쩍! 하지만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여명의 신성이 터져 나왔다.
한 줄기 빛이 된 그의 몸이 거인들 포위 사이로 파고들더니, 그대로 서울 바깥으로 날아갔다. 가속하는 여명은 붙잡고 있던 괴수를 그대로 집어 던지- 지 못했다.
괴수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한 까닭이었다.
[면죄부를 빼앗아 가시되, 부디 그들에게 속죄의 기회를 주소서. 청소부들도 그것을 바랄 것이옵니다.]“…뭐?”
마나를 불어넣어서 이상해진 건가? 여명이 놀란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는 가운데, 괴수가 너덜너덜한 양손을 들었다.
[찬양하라.] [노동자 대중 해방의 은인을. 민주의 새 조선의 위대한 태양을.]가사가 살짝 바뀐 김일성 장군 찬양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노래를 완성한 괴수는 그대로 녹아내렸다.
여명은 손아귀 사이로 사라지는 괴수를 바라보다가, 다시 하늘을 박찼다.
길게 늘어지는 태양의 빛 뒤로 피가 흩뿌려졌다. 눈물처럼, 구슬프게.
***
허무를 흘리는 자는 눈을 떴다.
저 멀리서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두운 평양시 전체를 밝히고도 남을 강렬한 빛.
아야톨라는 느긋하게 빛의 접근을 기다렸다. 승자는 원래 여유를 부리는 법이므로.
이윽고, 그가 앉아있는 류경호텔이 반짝일 정도로 가까워질 때쯤.
허무를 흘리는 자는 입을 열었다.
“늦었구나.”
“….”
“이미 공희가 무르익었다. 이건 절대 멈출 수 없-”
여명은 대답 대신 검기를 뿜어 그의 목을 베었다. 아야톨라의 목이 잘려 류경 호텔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빡할 시간 뒤.
“소용없다.”
아야톨라가 멀쩡한 모습으로 말했다. 여명은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화산쇄설.
!!!
아야톨라의 몸 전체가 터져나갔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아야톨라는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재생이나, 환상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영상을 뒤로 감는 것처럼, 녀석은 처음 모습으로 돌아왔다.
“천여명, 날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
여명은 그제야 검을 멈추고 아야톨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류경호텔 꼭대기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녀석의 모습은 하늘을 내려다보는 절대자의 그것처럼 오만했다.
“안타깝구나. 만약 옛 용사들처럼 우리의 머리를 치러 왔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을 텐데… 너희는 너무 많은 것을 노렸다.”
“너무 많은 것을 노렸다고?”
여명은 어이가 없다는 듯 팔짱을 꼈다. 아야톨라는 손목을 튕겨 옆에 떠 있던 타락석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죄의 고발, 군의 정상화, 국가 전복….”
녀석의 차분한 목소리를 따라, 타락석 주변으로 어떤 영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낡은 TV처럼 흐릿한 수십 개의 화면 위로 비추는 건, 검은 차원문 바깥, 현재 한반도의 모습이었다.
“너희는 모두 실패했다.”
아야톨라가 가장 먼저 보여준 건 서울로 달려가는 괴수의 모습이었다. 살로메가 있는 올림피아 경기장으로 달려가는 괴수의 모습은 마치 성난 파도가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
여명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야톨라는 보란 듯 다른 타락석을 내밀었다. 그곳에서는 손녀의 손을 붙잡고 쓰러지는 노인이 보였다.
검은 차원문 앞에서 고함치는 데스나이트들이 보였고.
개성 차원문 앞에서 발악하는 군인들이 보였으며.
사람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동료들이 보였다.
세티, 성녀, 미리, 네티… 피와 먼지를 뒤집어쓴 그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노력으로 공희를 멈추는 건 불가능했다.
모든 화면을 마주한 여명의 황금색 눈이 차갑게 식어가는 사이, 허무를 흘리는 자가 말했다.
“모두 끝난 김에, 하나 묻겠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꾸민 것이냐? 대체 네 목적이 무엇이기에, 이리 성대한 실패를 만든 거지?”
여명은 멸공성검을 회수하며 대답했다.
“복수.”
“복수?”
“너희가 죽인 내 가족과 형제들의 복수.”
“….”
아야톨라의 얼굴에 아주 살짝, 당황이 스쳤다.
“이해할 수가 없군. 복수 때문이라면… 정말 용사처럼 우리만 노리는 게 합리적이었을 텐데? 왜 이렇게 크고 비효율적인 일을 벌인 거냐.”
한 걸음. 여명은 녀석에게 다가가며 대답했다.
“단순해. 목숨을 빼앗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졌거든.”
“…부족하다?”
“복수가 뭐라고 생각하지?”
여명은 역으로 질문하면서 한 걸음 더, 타락석에 다가갔다.
“상실, 외로움, 고통, 슬픔… 너희로 인해 겪은 모든 고통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 그건 고작 목숨을 빼앗는다고 채워지지 않는다.”
황금색 눈동자가 아야톨라를 마주한다.
“너희가 만든 국가, 군대, 정의, 명분… 그리고 잘나신 계획까지. 나는, 각하의 모든 걸 망치고 싶었다.”
그것이 우연과 필연, 마음가짐과 깨달음, 그 기나긴 길 끝에 도착한 여명이 선택한 복수였다. 정의의 천벌이 아닌, 땅을 뒤엎는 성실함으로 만들어진 복수.
허무를 흘리는 자는 그 스케일에 놀라면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원대한 목표라도, 실패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너의 복수 또한….”
“끝나지 않았다.”
아야톨라의 말을 끊은 여명이 타락석에 손을 올렸다. 다음 순간, 타락석 위로 올라오던 화면이 변했다.
***
“살로메. 표정 펴. 이쁜 얼굴에 주름질라.”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
총을 보고 바닥에 쓰러졌던 살로메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에는 플라스틱 방패를 든 청년이 서 있었다.
“…아도 오빠??”
“오냐, 오빠다.”
아도-길로, 그녀를 따라 로드 하우 아카데미로 넘어온 그녀의 유전-오빠이자 호위.
기습적으로 날아온 총알을 막아낸 그는 반쯤 구멍 난 방패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마나를 둘러봤자 플라스틱은 플라스틱. 이만한 거리가 아니었다면 죽었으리라.
살로메는 벌덕 일어나 오빠의 상태를 살폈다.
“여, 여기에는 어떻게 온 거야? 오빠는 아카데미에 있어야지!”
“교장 선생님이 신경 써 주셔서, 시이나랑 같이 왔어. 천여명이 네가 여기 있다고 알려줬고.”
“….”
“어허, 어디 오빠한테 그런 눈을.”
아도는 까탈스러운 동생을 향해 미소 지었지만, 살로메는 표정을 피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부리부리한 눈으로 오빠를 바라봤다.
“오빠 손까지 빌릴 정도로 절박한 상황 아냐.”
“방금 전 총알, 내가 아니었으면 가슴에 맞았을 거야. 알지?”
“그건….”
할 말이 없었던 살로메는 휙 고개를 돌려 경기장을 향해 소리쳤다.
“발막 – ! 소리 더 키워주세요!”
직후, 경기장 음향기기가 울렸다.
-나한테 화풀이하지 마라.
마법으로 한층 더 증폭된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가 징징 울릴 정도였다. 이만하면 몰려오는 괴수군에게도 충분히 들리리라. 그녀가 바닥에 떨어트린 마이크를 집어 드는 가운데, 아도가 말했다.
“내가 원로들의 눈치나 보던 못난 오빠라지만, 그래도 방패는 될 수 있다.”
“…가족을 인간 방패로 쓰라고? 필요 없어.”
“그래? 그럼 이건? 이것도 필요 없어?”
살로메의 대답을 유도한 아도는 기다렸다는 듯 아공간 박스를 꺼내 들었다. 기껏해야 반지 케이스만 한 아공간 속에서는, 커다란 옷가지가 튀어나왔다.
“받아. 에케모랑, 마탑주님이 보내신 거야.”
“…마탑주께서?”
“응, 이게 용기를 줄 거라던데.”
마도구인가? 살로메는 혹시나싶어 옷가지를 받아들였다. 군복 상의와 모자… 두 옷은 마도구가 맞았다. 목소리를 키워주는 마법이 걸려 있는 마도구.
이런 거까지… 마탑주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던 살로메는, 옷을 넓게 펼치자마자 정색했다.
“나치 군복??? 미쳤어??”
그러자 아도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탑주님이 좀 이상하다지만, 진짜 나치 군복을 보냈겠어? 옷이랑 모자 앞에 붙은 문장을 봐.”
아도가 가리킨 문장을 보자 확실히, 나치의 만(卍)자와는 다른, X 두 개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문장만 다르지, 디자인은 똑같-
그녀가 이의를 제기하기 전에, 아도가 덧붙였다.
“찰리 채플린이 만든 위대한 독재자란 영화의 소품이야.”
“…뭐?”
“히틀러를 풍자하는 영화잖아. 혹시 몰라? 이 영화 속 주인공 힌켈은, 히틀러와는 다르게 억압자들과 독재자들에게 저항하고 자유와 사랑을 나누자고 연설했-”
“나도 그 영화가 무슨 영화인지 알아. 지구 문화 수업 때 봤어.”
말을 끊은 살로메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리고 이거, 마탑주님이 아니라, 오빠가 준비한 거지?”
“일단 마법 자체는 마탑주님과 에케모가 걸어준 게 맞는데… 티나?”
“응, 엄청 티나.”
지구 문화, 특히 영화에 심취한 아샤인이 어디 한 둘이던가. 그녀는 옷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한숨과 함께 어깨 위에 걸쳤다.
그냥 입기엔 가슴이 조이고, 어깨와 손목이 너무 헐렁한 탓이기도 했고, 애써 준비한 선물을 버리기도 아까운 까닭이었다.
마지막으로 XX자가 그려진 모자를 푹 눌러쓰자, 아도가 말했다.
“아, 참고로, 이거 진짜로 영화 촬영에 쓰이던 옷을 마도구로 개조한 거다?”
“….”
살로메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영화 소품을 걸친 그녀는 조금 전의 긴장도, 히틀러를 이해해 보려던 마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건 마법사였다. 용사 파티의, 마왕을 봉인하고, 히틀러를 끝장낼 마법사.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오빠는 상자에서 플라스틱 방패를 하나 더 꺼내며 말했다.
“자, 한 번 더 가자.”
“내가 뭐 하는 건지는 알아?”
“나야 잘은 모르지. 말 안 해줬으니까. 하지만… 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건 알아.”
“….”
“내 동생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지만, 살로메. 넌 좋은 사람이야.”
“오빠….”
“솔직히 좋은 동생은 아니지만.”
하, 살로메는 웃었다. 긴장을 완전히 떨쳐버린 그녀는 지붕 위에 똑바로 섰다. 또다시 사격이 날아왔지만, 아도의 방패가 티이! 한 번 더 총알을 막아냈다.
두려움은 없었다. 살로메는 선명하게 보이는 괴수군을 보며 오빠가 말한 영화 속 채플린을 떠 올렸다.
영화 속 연설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더랬다.
[군인들이여! 그대들을 경멸하고, 노예처럼 다루고, 그대들의 행동과 사고와 감정과 삶을 통제하며, 짐승처럼 다루고 사육하고 조련하여 총알받이로 만드는 이 극악무도한 자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살로메는 그 연설을 그대로 읊었다. 독일어가 아닌, 한국어로.
***
천애란은 머리만 남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국과 싸우기 위해 목숨을 버리고, 시체마저 저장고로 사용한 남자. 잘해봐야 여명의 또래로 보이는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있었을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 평생 알 수 없으리라.
하지만 머리의 주인은 슬퍼하지 않았다. 천애란은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걸 알 수 있었으므로.
천애란은 잘린 머리에 선을 연결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암호화된, 그러니까 아직 해석되지 않은 온갖 정보가 들어 있었다.
오직 한국의 비밀 연구소 출신만 해석할 수 있는 정보.
무수한 애국자의 머리에 선을 연결한 천애란은 키보드를 두들기며 머릿속의 암호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대구 가야산 중턱, 11번 좌표 3번 바위 아래.”
“울산 가지산 정상석 바로 뒤.”
“황해도 역 위, 해옹선 33번째 철로 아래.”
“인천시장, 맥아더 동상 내부.”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 우측 화장실 샤워실.”
랩퍼만큼이나 빠르게 읊조리는 그녀의 말은 곧장 군용 통신을 타고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참모본부가 통신을 장악하고 있을 때는 미처 켜지 못한 통신.
그 통신의 끝에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만주 유민들이 주축이 된 시크릿 소사이어티였다.
***
만주 사태로 집을 잃은 부찰민수는 자신과 가족들을 받아준 한국 정부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정부가 시키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건 순순히 따랐다. 심지어 대통령을 위해 시위에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만주 사태 자체가 한국 정부의 음모라는 걸 알게 된 이후, 그의 고마움은 복수심으로 변했다. 신의를 모르는 반도 놈들 같으니!
물론, 그렇다고 진짜 복수하진 못 했다. 고향의 복수보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딸이 더 중요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에게 복수의 순간이… 아니, 딸을 지킬 기회가 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른 그는 말뚝을 들어 통신이 알려준 자리에 묘한 냄새를 풍기는 물약을 뿌리고, 말뚝을 박았다.
가야산 중턱, 11번 좌표 3번 바위 아래… 숨이 가빠지는 가운데, 부찰민수는 돌을 들고 말뚝을 내려쳤다.
까앙!
땅 속 깊숙한 곳에 말뚝이 박히고, 그곳에 흐르던 마법진의 마나가 흔들렸다.
***
맥아더 동상을 마주한 박지란은 퉤! 침을 뱉으며 대전차 로켓이 든 상자를 내려놨다.
영웅의 동상에 흠집을 내는 건 영 내키지 않았지만, 이건 그의 할머니를 살려준 천여명의 부탁이었다.
시장 입구에 모인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도망가건 말건, 그는 동상에 로켓을 조준했다.
미안합니다.
맥아더에게 사과한 그는 로켓 방아쇠를 당겼다.
***
만주 난민 회장, 김승덕은 숨을 죽였다. 오랜 군 생활로 다져진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총리공관은 지옥이라고.
두두두두 – !!
저 멀리서 들려오는 총알 소리는 지옥의 묵시록이요, 드문드문 터지는 수류탄의 폭발음은 지옥의 교향곡이라.
그는 총리공관 바로 앞 나무에 숨어 공관을 점령한 괴수군과 쿠데타군을 확인했다. 드문드문 창문 너머로 보이는 종말 교단의 사제들은 덤이었다.
제기랄. 기관총 진지로 무장한 기지는 이미 하나의 벙커나 다름없었다. 지원 없이 뚫는 건 불가능하다.
시크릿 소사이어티 한국 지부 이사로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그는 무전기를 꺼내 지원을 요청했다.
잠시 후, 그의 기대에 부응하듯 붉은 차원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타난 건…
“엘프?”
당황하는 그를 향해, 금발의 엘프가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지부장님. 공관의 어디를 무너트려야 한다고 했죠?”
엘프라니??? 김승덕은 당황하면서도 계획을 설명했다.
“고, 공관 우측 화장실 샤워실이오. 일단 기관총 진지가 설치된 정문을 피해서 우측으로….”
한데, 엘프는 그가 세운 계획을 듣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아공간에서 군용 나무 박스를 통째로 꺼내며 말했다.
“차량 있나요?”
“…차량?”
그녀는 덜컥! 나무 상자를 열며 대답했다.
“시간도 없는데, 그냥 차에 폭탄 채워서 박아버리죠.”
“….”
그녀가 연 나무 상자에는, 군용 폭탄이 가득 들어 있었다. 기절한 국무총리가 한 번 더 기절할 만큼 많은 양이었다.
***
아야톨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당황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주먹을 꽉 쥔 그는 여유롭게 타락석을 만지작거리는 여명을 향해 말했다.
“공희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여명은 폭발하는 총리공관을 보며 대답했다.
“더 이상 진행되지도 않지.”
“….”
“왜 그렇게 당황하지?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여명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아야톨라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처음이라. 하하!”
회귀를 염두에 둔 것 같은 말. 허무를 흘리는 자는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에 섰다.
“우연은 없다. 모든 것은 운명이니… 인상적인 반격이었다. 과연, 이런 여유를 부릴 정도는 되는구나.”
“별말씀을.”
“하지만 이건 승리가 아니다. 천여명, 이 정도의 시련은 이미 수없이 겪어봤다. 진정한 승리는 적을 무너트리고, 그의 권능을 찢어버리는 것. 이건 승리가 아니다. 그리고 너는 우리가 거쳐 갈 시련에 불과해.”
녀석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걸까, 평양 전체가 울렁거리며 뭔가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김일성 거인. 서울에 있던 것보다 배는 많은 거인들이 드높은 평양의 빌딩 사이로 꾸역꾸역 모습을 드러냈다.
“압도적인 폭력은 모든 걸 뛰어넘는다. 그 알량한 계획은 여기까지다.”
여명은 거인들이 등을 돌려 서울 방향, 정확히는 검은 차원문을 향해 달려가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의 머릿수에 놀라서? 아니, 녀석의 말에 공감했으므로.
“그래, 맞아. 폭력은 모든 걸 뛰어넘지. 도덕, 정의… 심지어 양심까지도”
“….”
갑자기 말장난을? 아야톨라의 눈썹이 길게 휘어지는 가운데, 여명이 덧붙였다.
“이제야 알겠어. 에케모의 차원문 너머에 있던 신들이, 어째서 여기에 없는지. 그는 진짜 세상의 멸망을 꿈꿨지만, 너희는… 다양한 크기의 제물만 준비했군.”
네가 그걸 어떻게-? 허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여명이 먼저 말했다.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다. 너희에겐 그 어떤 자비도 필요 없다. 너희가 이룬 모든 것… 이 과거조차 남기지 않겠다.”
“….”
“아야톨라, 마지막으로 네가 한 말을 돌려주마. 넌 그저, 내가 각하에게 가기 위해 거쳐 갈 시련에 불과해.”
아야톨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여명이 갑자기 투명 망토를 쓰고 사라진 까닭이었다. 그는 희미한 마나의 잔향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여명은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초인의 육체조차 버틸 수 없는 극한의 높이로.
불길한 무언가를 느낀 아야톨라는 여명을 따라 솟구치면서, 거인들에게 검은 차원문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뭘 꾸미는 건지 몰라도, 녀석은 정상이 아니었다. 주인공도 아닌 녀석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깊은 집념을 품는단 말인가.
허무를 흘리는 자가 빠르게 솟구치는 가운데, 여명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별의 바다와 지구의 하늘 사이, 하늘보다는 궤도라 불러야 마땅한 위치.
흔히 하늘에서 사람이 점으로 보인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 위치에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옛 신들은 그렇게나 잔인하게 사람을 처벌할 수 있었으리라.
비록 여명이 신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 순간, 그는 잔인한 신이었다. 한때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한숨을 삼킨 그는 손을 쥐었다, 폈다.
인벤토리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