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19)
을 위한 세계는 없다-719화(719/817)
EP.719 1인칭 관찰자 시점 (3)
***
가스탄을 집어삼킨 결계가 거칠게 일렁거리는 순간.
!
여명은 결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무장 혈청이 붉은 반달을 그리자, 검기가 터져 나오며 결계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벌어진 결계 너머로 보이는 건 가스 연기에 가려진 구멍뿐이었다. 마치 무저갱의 입구처럼 짙은 어둠으로 가득한 구멍.
“갑니다.”
선두는 역시 여명 본인이었다. 두메아 가주조차 농담 대신 검을 쥐는 가운데, 여명은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후욱-! 가장 먼저 차가운 밤 공기 대신 끈적한 어둠이 피부를 훑었다. 그다음은 자욱한 독가스가, 마지막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아래로.
분명 정면으로 들어왔을 텐데, 구멍을 지나자마자 그의 몸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다른 데스나이트들도 마찬가지였으나, 누구도 허우적거리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여명은 침착하게 얼음 발판을 만들어냈다.
자신이 아닌, 데스나이트들을 위한 발판이었다. 곧 데스나이트들이 발판을 밟으며 속도를 줄이는 사이, 여명은 그냥 중력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쿵!
착지의 충격이 몸을 때렸으나, 여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재생하며 주변을 훑었다.
그가 떨어진 곳은 일렁거리는 가스와 어둠으로 휩싸인 통로였다. 쓰러진 괴수와 인간들, 그리고 폭발한 가스탄의 파편들이 가득한 통로.
미리의 예상이 맞았다. 아마 입구로 떨어진 침입자를 몰아붙일 생각이었겠지만… 오히려 모여있는 게 독이 되었다. 가스탄은 사신의 낫처럼 녀석들을 수확했다.
혹자는 꼭 이런 잔인한 방법을 써야 했느냐고 따질지 몰랐다. 하지만 이건 마왕성을 공략하는 정의로운 용사의 싸움이 아니었다. 국제법을 비롯한 규칙은 이미 싸움판 아래로 내던져진 지 오래였다.
복수란 결국 피비린내 나는 비극일지니. 타인의 피를 흘린 자는 그 대가를 감당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여명 본인이 바로 그 대가였다.
내가 왔다.
어둠 속에서, 여명은 폭발적으로 마나를 일으켰다. 은신이란 단어는 없었다. 그는 범위에 있는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마나를 내뿜었다.
뒤따라올 데스나이트들을 위해서, 그리고 통로 너머에 있을 모든 쓰레기를 향해서.
각하란 이름 뒤에 숨은 겁쟁아, 내가 왔다.
방향을 잡은 여명은 통로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피와 오물을 짓밟으며, 구불구불한 통로를 가로질렀다.
방해물은 거의 없었다. 좁은 통로에서 터진 다발의 가스탄은 사신의 숨결이나 다름없으니까.
생존력 하나만큼은 생물을 넘어선 괴수들, 그리고 반쯤 초인이 되다만 교도들이 종종 앞길을 막았지만, 그뿐이었다. 여명의 검은 단 한 번의 번뜩임만으로 녀석들을 어둠 속으로 돌려보냈다.
인천의 청소부가 너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
분노를 따라 살기가 들끓고, 검붉은 주가시빌리가 엘프 가스와 뒤섞이며 통로를 채웠다. 무장 혈청이 번뜩이며 막아서는 모든 것을 토막 냈다.
붉은 무신론자들의 유산이 교단을 유린하는 가운데, 여명의 마나가 울부짖었다.
이제, 가족의 피 값을 받겠다.
****
마지막 프랑스 초인이 기절한 순간, 변경백은 검을 내렸다.
그를 중심으로 무수한 군인들이 쓰러져 있었음에도, 그의 칼날에는 단 한 방울의 피도 묻어있지 않았다.
그걸 본 오귀스트가 말했다.
“자비에 감사드리오.”
그의 말투는 정중했고, 고개를 숙인 예법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변경백은 검집에 검을 꽂으며 대답했다.
“고마울 것 없소. 양심을 위해 같은 나라의 군인을 공격하는 용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나를 부끄럽게 하시는구려. 나는 그저 내 조국의 양심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오.”
오귀스트의 대답을 들은 변경백이 빙그레 웃었다. 명예를 아는 자와 함께 싸우고, 대화를 나누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물론,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적어도 오귀스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펑!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운 하늘에서 무언가 번쩍인 까닭이었다. 변경백의 위치를 알리는 섬광탄이었다.
프랑스군은 여전히 포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변경백이 피를 보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더욱 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오귀스트가 전투에 끼어들 정도로 추악한 짓거리였다.
오귀스트가 한숨을 삼키며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사이, 변경백이 뒷짐을 지며 말했다.
“이만하면 충분하오. 오귀스트, 이제 돌아가시오.”
“변경백, 나는….”
“고작 이런 싸움으로 날 죽일 수는 없소.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싸움은 내 발을 묶기 위한 것이오.”
“….”
발을 묶기 위해서라고? 곧 다른 나라의 초인들과 전투기까지 동원된다는 걸 알고 있는 오귀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변경백은 완고했다.
“그대가 이곳에 있는 것이야말로 운명이 원하는 일이오. 돌아가시오.”
“운명? 변경백 그게 무슨-”
“그대의 속죄도, 진심도 내 잘 알겠소. 그대 같은 사람이 프랑스의 10강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대는 더욱 이 싸움에 끼어들어선 안 되오.”
“….”
“그대는 더 이상 전쟁터의 병사가 아니오. 그러니 가시오. 한 명의 영웅으로서 조국의 잘못을 되돌리시오.”
변경백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오귀스트 또한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 공세 정도는 막아줄 수 있으리라. 그가 다가오는 프랑스군 방향으로 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변경백이 갑자기 남쪽 하늘을 보며 말했다.
“신족통…?”
뭐? 오귀스트는 고개를 돌려 변경백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저 머나먼 하늘 위, 반으로 갈라진 구름 사이로 두 가지 색 깃털이 흩날리고 있었다.
***
결계 내부 돌입 후 1분 47초.
전대 두메아 가주, 롭 리어 두메아는 드디어 여명을 따라잡았다.
가스와 어둠이 시선을 가리는 와중에도 데스나이트의 감각은 정확히 여명의 마나를 감지했다. 강렬한 주가시빌리의 살기 덕분이기도 했지만, 여명의 걸음이 멈춘 덕분이기도 했다.
그래, 빠른 속도로 달리던 여명은 멈췄다. 적과 맞서기 위해서.
적은 괴수… 아니, 양치기라 불리는 개조 인간들이었다. 하나하나가 말머리 급, 독가스를 버텨낼 정도로 강력한 양치기들.
-합세하겠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두메아 가주의 목소리와 동시에, 데스나이트들이 여명의 싸움에 가담했다. 양치기들은 그것에 호응하듯 로켓을 발사했다.
!!!
좁은 공간에서 터진 로켓의 후폭풍이 가스를 밀어내고, 폭발과 불길이 소용돌이치며 파편이 튀었다. 변경백령 전쟁의 참호전만큼이나 살벌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두메아 가주는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있어 치열한 전쟁은 삶의 일부였고, 그건 되살아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젊어서는 검과 방패로, 죽기 전에는 포탄과 총알 사이에서 싸워온 삶.
가장 암울한 순간에도 검을 들었던 그였다. 용사이자 손녀 사위와 함께 악을 참하는 이 순간에 겁을 먹는 건 우스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건 그와 함께한 데스나이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끄아악!
이름 모를 양치기의 비명과 동시에, 가주는 여명과 나란히 양치기 사이로 파고들었다. 전열의 앞줄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증오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들은 번뜩이는 검 앞에 절규했다.
그의 백업을 받으며, 여명이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전투의 고함도, 승기의 환호도 없었다. 사실, 그런 건 필요 없었다.
용사의 길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두메아 가주는 웃으며 날아오는 수류탄을 반으로 갈랐다. 뒤에서 쏘아낸 벨라디바의 손도끼와 듀크의 총알도 비슷하게 로켓을 터트리거나, 혹은 수류탄 핀을 뽑은 녀석의 머리를 저격했다.
통로를 가득 채운 포화 중 일부에 불과했지만, 여명의 돌진을 보조하기엔 충분했다.
양치기들의 공격에 맥이 끊긴 순간, 여명이 빠르게 돌진했다. 그의 검은 조금 전보다 격하게 전열을 후려쳤다.
화산쇄설의 불씨를 머금은 검이 폭발하며 통로를 집어삼켰다. 휘말린 양치기들은 대부분 시체가 되어 통로 바닥에 쓰러졌다. 사지가 멀쩡한 놈은 운이 좋은 경우였고, 대부분은 충격에 휩쓸려 형체를 유지하지 못했다.
물보라 치는 피, 타오르는 가스, 멈추지 않는 죽음.
데스나이트들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두메아 가주, 바라나 카시, 벨라디바, 두하칸, 듀크, 세디달- 전쟁이 무엇인지 아는 그들은 한 번 무너진 전열이 다시 일어날 수 없도록 맹공을 펼쳤다.
양치기들은 패배를 직감한 듯 자폭을 시도했다.
-이런 미친놈들.
자폭하려는 양치기의 목을 친 두메아 가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의 지독함 때문은 아니었다.
이 자폭이 아직 살아있는 후방의 병력을 후퇴시키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임을, 그리고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지휘관이 가까이에 있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손녀 사위, 아무래도 속도를 높여야겠네. 지휘관이 가까이에 있어.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슬쩍 손녀 사위란 단어를 입에 올렸던 두메아 가주는 껄껄 웃으며 양치기들을 추격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주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
?
망치로 괴수의 머리를 내려치던 세티는 문뜩, 손을 멈췄다.
안 좋은 예감이 등 허리를 쓸었다. 그녀는 여명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곧 붉은 차원문을 요청했다.
***
결계 내부 돌입 후 3분 53초.
여명은 처음으로 방이라고 할만한 곳에 도착했다. 후퇴하는 양치기들이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간 곳.
거대한 철문을 통째로 터트리며 안으로 들어간 여명은, 내부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무장 혈청을 꽉 쥐었다.
-오, 맙소사….
여명의 뒤를 따라온 데스나이트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방의 내부는 끔찍하다 못해 역겨웠으니까.
연골과 뼈로 만들어진 바닥과 벽으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와 살이 흘러내리는 방.
괴수나 동물의 사체로 만든 걸까? 마치 구토처럼 끈적한 살덩이 사이로 삐쭉 고개를 내민 손가락과 익숙한 악취가 저 살 덩어리들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었지만, 데스나이트들은 애써 그 사실을 외면했다.
가장 앞선 여명이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여명은 차갑게 말하며 방의 정중앙을 노려봤다. 그곳에는 마치 여왕을 호위하는 것처럼 서 있는 양치기들과 그런 양치기의 호위를 받는 소녀가 서 있었다.
이 장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늘하늘한 백색 원피스에 하얀 양 가면을 쓴… 소녀.
그녀는 가면 아래, 새하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환영합니다. 천여명.”
“….”
“그리고 동시에, 규탄합니다. 이곳의 누구도 당신을 초대한 적 없습니다. 가족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가족? 데스나이트들 중 희생양 자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특히 시리의 혈육인 세디달은 저 소녀가 누군지 예측할 수 있었다. 한국의 잔혹함이란. 그녀는 적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여명은 오히려 촤르륵- 무장 혈청을 회수하며 대답했다.
“초대? 이거, 내가 눈치가 없었네. 난 집들이 선물을 가져오면 괜찮을 줄 알았지.”
“집들이 선물…?”
“가스탄. 별로였어? 애인이 특별히 챙겨준 물건인데.”
두메아 가주에게 옮은 것일까? 여명의 말투는 어딘가 능글맞은 면이 있었다. 이 순간에 어울리는 말투가 아니었으나, 데스나이트들은 그 말투가 분노에서 비롯됐다는 걸 눈치챘다.
그 사실을 모르는 소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리깔았다. 여명은 웃지 않았다.
“동생의 연인이라고 기대했건만… 생각보다 훨씬 천박하군요.”
“천박한 건 내가 아니라 너희겠지.”
“….”
“너희는 아직도 내가 세티 때문에 여기 왔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래서… 하얀 양의 복제품을 배치한 거고?”
소녀는 대답 대신 가면을 벗었다.
양가면 아래에는 아름다운 얼굴이 있었다. 부드러운 눈매와 병든 것 같은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인. 그녀의 몸과 얼굴, 심지어 목소리마저 세티와 닮았으되, 달랐다.
소녀는 목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복제품이 아니야. 제부.”
“….”
제부. 그 단어를 들은 데스나이트들이 여명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지만,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차가웠다.
“세티가 싫어하는 음식은?”
“…?”
“그러면 네티가 좋아하는 장르는?”
“….”
“시리가 어째서 붉은 구두만 신고 다니는지 알아?”
“그건….”
여명의 질문에 하나도 대답하지 못한 소녀는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여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죽거리며 해골 지팡이를 꺼냈다.
“세티는 콩을 싫어하고, 네티는 로맨스를 좋아하지. 그리고 시리의 신발은 어머니가 선물해줬기 때문이야.”
“….”
“자매들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 복제품이 아니라고… 좋아, 그렇다고 치자.”
말을 마친 여명은 곧장 데스나이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시 회수하겠습니다.”
갑자기? 데스나이트들이 의아해하는 사이, 오직 벨라디바만은 여명은 무슨 짓을 벌이려는 지 깨닫고 소리쳤다.
-야 이 미친놈아! 저건 시체가 아니…!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스나이트들이 인벤토리로 회수되었다.
갑자기 혼자가 된 여명을 보며 양치기들이 이빨을 드러내는 찰나.
여명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주문을 외웠다.
자신이 처형이라 주장하는 하얀 소녀가 아니라, 벽에서 흘러내리는 살덩이와 그가 여태껏 만들어 온 모든 시체를 향해서.
“시체 폭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