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21)
을 위한 세계는 없다-721화(721/817)
EP.721 1인칭 관찰자 시점 (5)
***
“자네도 날 각하라고 부르나?”
어둠 속의 남자는 여전히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명은 주문과 무술들을 준비하며 대답했다.
“그쪽 실명을 모르거든.”
“그런가? 그거 참 우스운 일이군.”
여명은 뭐가 우습냐고 묻지 않았다. 각하가 먼저 이렇게 말했으므로.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계획을 망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
여명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 가운데, 죽은 박사의 머리를 들고 있던 각하가 양치기들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무어라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건만, 양치기들은 곧바로 쓰러진 박사의 몸을 주워 각하 앞에 대령했다. 각하는 잘린 머리를 몸통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습기 그지없어.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여명의 대답은 검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각하의 머리 위로 무장 혈청을 내려쳤다.
각하는 피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양치기가 몸을 던져 대신 검을 맞은 덕분이었다.
푸확! 무장 혈청이 그대로 양치기를 일도양단했다. 피가 튀며 시야를 가리는 가운데, 여명은 곧바로 반대편 손을 휘둘렀다. 빈손에서 무장 혈청이 뽑혀 나오며 그대로 각하의 목을 베-
-지 못했다.
무장 혈청이 각하의 목을 베기 직전, 여명의 본능이 경고등을 켠 까닭이었다. 여명은 즉시 검을 회수하고 뒤로 물러났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대로 검을 휘둘렀으면 당했다. 그의 본능이 그렇게 판단했고, 각하는 그 판단을 증명했다.
“감이 좋군.”
곧, 각하의 목덜미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야톨라의 권능만큼이나 섬뜩한 연기.
저게 각하의 무술인가? 하지만 마나가 움직이는 건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여명이 검은 연기를 파악하기 위해 눈을 굴리던 순간.
단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각하와 여명의 시선이 마주했다.
“실망스러운걸. 대화를 나눌 생각으로 나왔건만, 정작 짐승처럼 싸울 생각뿐이군.”
“…머리 가죽이 벗겨지고도 계속 지껄일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자.”
여명이 이죽거리자, 각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 그래도 입담은 있군.”
그가 재밌다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사이, 머리가 잘렸던 박사가 흐읍!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을 잡은 채 여명과 각하를 번갈아 바라봤다.
“가, 각하… 저는.”
“괜찮네. 누구나 방심은 할 수 있는 법이지.”
각하는 그대로 박사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 손길에 어찌나 애정이 가득한지, 주름이 자글자글한 박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물론, 보고 있던 여명 입장에선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었지만.
“지랄하고 있네.”
참지 못한 여명의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알파 빔. 섬광보다도 빠르게 날아간 광선은 각하와 박사를 동시에 노렸다. 양치기가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고, 실제로 양치기들이 몸을 날리기 전에 광선이 적에게 닿았다.
하지만 알파 빔이 으레 가지고 오던 죽음은 없었다. 각하 주변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알파 빔을 통째로 집어삼켰으므로.
알파 빔도 막아? 저건 대체 무슨 기술이지? 일견즉해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연기를 훑는 사이, 각하가 천천히 검지 손가락을 들어 여명을 가리켰다.
“너무 흥분하지 말게.”
“…뭐?”
“용사면 용사답게. 주인공이면 주인공답게… 찬찬히 단계를 밟을 줄 알아야지.”
“….”
“난 어디 가지 않는다. 마지막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디, 죽지 않고 도착해봐라.”
그렇게 말한 각하는 박사에게도 한 마디를 더했다.
“좋은 최후를 맞으시게. 벗이여.”
“예, 각하.”
박사가 깍듯하게 경례를 올리기 무섭게, 각하가 등을 돌렸다. 하지만 여명은 그를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화르륵!
여명은 각하의 얼굴을 향해 주와이외즈를 일으켰다. 강철을 녹여버릴 정도로 강렬한 화염이 허공에서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이번에도 검은 연기가 주와이외즈의 불길을 막아냈지만…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그리고 녀석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멈췄다.
큰 귀, 끝이 축 처진 눈썹, 그리고- 티베트 여우처럼 반개한 눈.
예상과 달리, 그 얼굴은 여명이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한국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의 아들을.
민족의 태양, 이승만의 양자이자 민족의 달, 이기붕의 아들.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19세손…
“…이강석?”
그의 이름을 부른 여명은 피가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인물을 마주했다는 사실만큼이나 섬뜩한 이강석의 미소 때문에.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쓰나.”
“….”
“하기야, 더러운 황금 피를 이어받은 녀석에게 뭘 바라겠느냐마는.”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걸까, 어느덧 부활을 끝낸 박사가 살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쳐라!!”
등을 돌린 각하가 멀어지는 가운데, 방을 채우고 있던 양치기들이 일제히 여명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
여명의 금빛 눈동자가 달려드는 적들을 빠르게 훑었다.
닭 머리 스물, 호랑이 머리 열, 하얀 양 넷, 그리고 그 외에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괴수와 하위 양치기들.
녀석들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힘을 쌓아온 것 아닌가. 하지만 시간, 녀석들을 처리할 때까지 걸릴 시간이 문제였다.
각하… 아니, 이강석에게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여명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판단을 내렸다.
판단은 곧 행동이 되었다. 여명은 인벤토리를 열어, 여섯 데스나이트를 다시 소환했다.
-이거 참, 지구의 동물 농장은 참 험악하구먼!
농담부터 꺼내는 두메아 가주와 달리, 다른 데스나이트들은 일제히 무기를 쥐었다. 설명도, 대화도 필요 없었다.
적이 눈앞에 있었고, 여명이 그들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 데스나이트들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음 순간, 여명이 가장 앞서 달려온 닭 머리 양치기의 목을 토막 내며 소리쳤다.
“적의 두목이 도망가는 중입니다! 빠르게 처리하겠습니다!”
데스나이트들은 각자의 검과 총으로 호응했다.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용사와 죽은 전쟁 영웅들의 전진이 시작됐다. 3미터 앞, 호랑이 머리와 닭 머리 다섯이 옆구리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바라나의 주먹이 닭 머리를 그대로 날려버리지만, 호랑이 머리가 쏘아낸 저주가 그의 늑골을 파고들었다. 고통은 없었다. 그는 이미 죽은 시체였으니까. 하지만 바라나는 이 죽은 몸뚱이에 타격이 쌓이면 망가질 수 있음을 안다.
호랑이 머리 양치기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데스나이트들에 비견되는 괴물들이었고, 이 자리에 그런 놈이 두 자릿수였다.
그러나 그게 어쨌단 말인가? 지구-아샤 전쟁 당시, 그들은 적들이 더 강하다는 걸 알면서도 싸웠다. 승리를 추구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적의 강함에서 눈 돌리지 않는 것, 자신들의 약함을 극복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 그들에게는 용사가 있었다.
“감히.”
여명의 목소리가 울린 바로 다음 순간, 번쩍!
알파 빔이 호랑이 머리의 머리를 관통했다. 쓰러지는 녀석의 빈자리로 무장 혈청을 든 여명이 파고들고, 두메아 가주와 세디달이 그 뒤를 보조했다.
그렇게 난전이 시작된 순간. 양치기 뒤에 서 있던 박사가 소리쳤다.
“발사!!!”
곧, 기관총을 든 양치기들이 사격을 시작한다. 일반인은 드는 것조차 엄두를 못 내는 중 기관총이 여명과 양치기 모두를 향해 불을 뿜었다.
텅텅텅텅- !!!
아군 오사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공격.
엿 같지만, 영리한 공격이었다. 숫적 우위, 그리고 무조건 복종하는 부하를 한껏 이용한 공격- 여명은 가장 가까운 양치기의 가슴에 칼을 꽂은 뒤 그 시체를 방패 삼아 앞으로 나섰다.
곧 총격이 그에게 쏠렸다. 귀를 때리는 격렬한 사격을 따라 피 묻은 살점이 튀어 올랐다. 방패인 시체와 여명 자신의 살점이.
하지만 그것이 여명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데스나이트들과 달리 그는 총탄 앞에서도 당당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대응 사격을 할 시간을 끌기 위해서.
탕!
듀크 중령의 총알이 포물선을 그리며 총을 든 양치기를 저격했다. 백발백중, 샤프슈터의 저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었다.
-시발, 나도 총질이나 배울걸!
그에 비해 벨라디바의 도끼질은 투박하고, 난폭했다. 물론, 위력이 부족하진 않았다. 그녀의 손에서 발사된 손도끼는 후방의 양치기들을 문자 그대로 박살냈으니까.
뒤늦게 사격조가 총구를 돌렸지만, 너무 늦었다. 데스나이트들의 보조를 받은 여명이 이미 그들 사이로 뛰어든 뒤였다.
주가시빌리의 아지랑이, 주와이외즈의 불길, 화산쇄설의 불씨, 알파 빔의 빛, 그리고- 위선과 오만까지.
여명은 여태껏 그가 익힌 모든 무술을 펼쳐냈다. 양치기와 괴수들이 거칠게 저항했지만, 격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는 이미 10강의 영역을 밟은 강자요, 기꺼이 선을 넘을 복수자였으니,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무장 혈청을 따라 양치기들의 피가 끝없이 이어졌다.
개중 하얀 양의 클론들이 그의 공격을 쳐내고, 때때로 세티를 닮은 얼굴로 그를 현혹하려 했지만, 그뿐이었다. 여명은 당황하는 대신 이 불쌍한 복제품들에 안식을 내려주었다.
불과 피로서.
“죽여라!! 물러서지 마!!”
되살아난 박사는 그 꼴을 보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볼썽사나우면서도 간절한 모습이었다. 여명은 다시 한 번 알파 빔으로 그의 목을 날려버리려다가, 좋은 최후를 맞으라던 각하의 말을 떠올렸다.
좋은 최후는 줄 수 없지.
여명은 번쩍! 알파 빔으로 박사의 머리 대신, 팔을 날려버리며 소리쳤다.
“어르신! 뒤는 맡기겠습니다!”
-그래, 마무리는 우리가 할 테니, 먼저 가게!
여명은 그대로 전열을 이탈해 각하가 사라진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양치기들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는 듯 달려드는 가운데, 팔이 날아간 박사가 처절하게 소리쳤다.
“도망치지 마라!! 맞서 싸워라!!”
여명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비각술을 펼쳤다. 파양결의 파도치는 마나와 하나가 된 그의 발은 순식간에 어둠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얼마나 달렸을까? 데스나이트들과 양치기의 전투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때쯤.
여명은 각하의 방에 도착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아니, 문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의 뼈를 쌓아 만든 거대한 아치가 그를 반겨주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길고 좁은 뼈의 계곡이 드러났다. 불쾌한 공간이었다. 여명은 빠르게 그곳을 넘어갔다.
살벌한 입구와 달리, 방 내부는 말끔했다. 까놓고 말해서, 만탑산 지하에서 만난 모든 공간 중에서 가장 깨끗했다.
무균실처럼 창백한 백색의 방… 하지만 여명은 지울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방 중앙에 세워진 두 개의 유리관 때문에.
머리 없는 시체가 담긴 유리관과 잘린 소녀의 머리가 둥둥 떠다니는 유리관.
‘플레이어의 육체와… 하얀 양의 머리.’
그건 시체로 이루어진 방만큼이나 혐오스러운 물건이었다. 여명은 구역질을 참으며 한걸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순간, 방 전체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각하의 목소리였다. 여명은 유리관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각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설마, 스킵한 건 아니겠지?”
여명의 목구멍이 턱 막혔다. 분노 때문에 이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당장이라도 녀석의 머리를 뽑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는 애써 냉정을 유지했다. 패배와 실패는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은 분노가 아니라, 상처를 도려내는 외과의처럼 차가운 이성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여명은 한 걸음, 더 녀석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이강석. 대체 넌 뭐냐, 대체 뭐가 잘못돼서… 이런 악행을 벌인 거냐?”
“흐음?”
“이승만이나 이기붕이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전 국민을 제물로 쓸 양반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너는 대체 뭐가 문제라서 이딴 짓을 벌인 거냐?”
이강석은 의외라는 듯 축 처진 눈썹을 씰룩이다가, 뭔가를 고민하듯 턱을 긁적였다. 그리고 여명이 짜증을 느낄 때쯤.
녀석이 말했다.
“나는, 독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