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22)
을 위한 세계는 없다-722화(722/817)
EP.722 너희에게 선사하는 지옥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 일단, 우리부터 서로의 구원이 되어볼까요?
『이 세상에 진정한 구원은 없냐는 변경백의 질문에, 전대 성녀가.』
***
“독자이자, 이강석이지.”
…독자? 읽는 사람?
여명이 놀라지 않은 건, 아슬아슬하게 냉정을 유지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눈매가 일그러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각하는 유리관 옆에 서서 중얼거렸다.
“드디어 사람다운 표정을 짓는군.”
그는 팅! 소리 나게 유리관을 두들기며 덧붙였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이 게임 중독자 놈도 이 세상에 기어들어 오는데, 만화나 소설을 읽은 사람이 있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
바깥에서 온 자… 여명은 생각보다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신에게 놀랐다. 그래, 그의 마음속 어딘가에선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각하가 플레이어와 비슷한 족속이란 걸.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국민들을 학살하는 비인간성, 충성심과 애국심을 버림패로 이용하는 잔혹함… 녀석의 행동은 고작 레벨업을 위해 타인을 학살한 플레이어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하지만 예상이 맞았다는 기쁨 따윈 없었다. 죽여야겠다는 확신만이 더욱 뚜렷해졌을 뿐.
여명은 한층 더 차가워진 눈으로 녀석을 노려봤다.
“그게 내 질문의 답이냐? 독자라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이런 악행을 벌였다고?”
한 걸음 더.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는 가운데, 각하가 역으로 되물었다. 아주 뻔뻔한 얼굴로.
“악행이라니? 왜 내 행동이 악이라고만 생각하지? 오히려 내가 선이고, 네가 악일 가능성은 생각해 본 적 없나?”
“…?”
움찔, 여명은 그제야 진심으로 놀랐다.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1억에 가까운 한국인들을 학살하는 게… 선이라고?”
“그 1억으로 미래의 수천억 명을 구할 수 있다면, 당연히 선이지.”
“….”
“애초에 선악이라는 건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시대, 상황, 공간… 심지어 단순한 오해 때문에 뒤바뀌기도 하는, 변덕스러운 물건이지.”
각하는 플레이어의 시체가 든 유리관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예를 들어 여기, 이 게임 중독자가 사실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이끌어줄 존재였다면?”
“….”
“이 잘못된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구원자였다면… 그렇다면 누가 악이지? 이 녀석? 아니면 이 녀석을 죽인…… 너?”
여명은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좆 까는 소리는 화장실에서나 해라.”
곧, 여명은 공격 사거리까지 녀석에게 접근했다. 뽑아 든 무장 혈청 위로 검붉은 검기가 휘몰아쳤다. 검기는 당장이라도 각하를 찢어발길 듯 일렁거렸지만, 각하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지껄였다.
“내 말이 거짓말인 것 같나? 하지만 이 녀석의 권능은…”
그때, 화악! 여명의 무장 혈청에서 검기가 쏘아졌다. 각하의 대응은 아까 전과 똑같았다. 그의 얼굴 앞에 검은 연기가 피어나며 검기를 막아섰다.
정작 여명의 검기는 조금 전과 달랐다. 날아가던 검기는 연기 앞에서 번쩍! 세 갈래로 갈라졌다.
연기와 충돌한 첫 번째 검기는 그대로 소멸했다. 하지만 갈라진 두 번째와 세 번째 검기는 연기를 넘어 플레이어의 시체가 든 유리관과 각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맨몸 대 검기.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는 물론이고, 뒤쪽 벽까지 썰어버릴 위력이 담긴 검기였지만, 녀석이 고작 검기에 죽을 리 없다는 건 여명이 더 잘 알았다.
이번 공격은 어디까지나 견제구였다. 각하가 사용하는 검은 연기의 발동 간격과 다른 기술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한 견제구.
여명의 노림수는 정확히 먹혀들었다. 검은 연기는 첫 번째 검기를 막고, 아슬아슬하게 각하의 가슴으로 지쳐 들어오는 검기를 막았다. 저 연기를 사용하기 위해선 0.5초 정도의 간격이 필요한 게 분명했다.
아무튼, 마지막으로 연기가 막지 못한 세 번째 검기는…
…!!!
각하의 손바닥과 충돌했다.
충돌을 중심으로 마치 해안가를 때리는 파도처럼 마나가 파도쳤다. 각하의 마나가 세 번째 검기를 찍어 누르는 파동이었다.
여명은 그 파동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나가 딱 저렇게 움직이고 있으므로.
“…파양결?”
“운명이 주인공을 위해 준비한, 다른 세상의 무공.”
그리고 그런 주인공과 같은 무공을 익힌 각하.
주인공을 대신하겠다는 욕심인가, 아니면 주인공의 무공으로 주인공을 죽이겠다는 의지인가. 어느 쪽이건 악취미가 분명했다.
그사이 탁! 가볍게 손을 턴 각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계속 나만 대답하는 건 좀 불공평한 거 같군. 이번에는 내가 질문하지.”
“….”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날 방해하는 거냐? 내 이름도 모르고, 정체도 몰랐으면서… 왜?”
여명의 대답은 간결했다.
“복수.”
“…복수?”
여명과 대화를 시작한 이래, 녀석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라고 할만한 게 떠올랐다.
실망. 압도적인 실망.
“고작 그딴 이유로?”
“….”
“허, 이거 참, 황당하군… 뭐 대단한 이유라도 있을 줄 알았건만, 복수? 왜, 내가 네 자식이라도 죽였나? 아니겠지. 나이를 생각하면 기껏해야 부모나 형제가 죽었겠지. 지금이 무슨 춘추 전국시대도 아니고… 불구대천이라니.”
여명의 숨소리가 길어졌다. 차갑게 식는 머리와 달리, 심장이 쿵쾅쿵쾅 비명을 질렀다. 각하는 계속 지껄였다.
“무엇보다 내가 직접 죽였을 리도 없고… 설마, 정부 방침에 따라 죽은 걸 따지러 온 거냐? 왜, 내가 키운 이 나라의 혜택을 보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이 나라를 위해 희생된 건 억울한 일인가?”
궤변. 대답할 가치가 없는 궤변이었다. 여명은 들끓는 감정을 진의와 뒤섞어 무술을 사용했다. 만박불통의 무술, 천도무친. 그의 발아래에서 시작된 바람이 몸을 타고 휘몰아치는 가운데, 각하가 쐐기를 박았다.
“정원을 손질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꽃을 꺾기도 하고, 떡을 주무르다 보면 손에 떡고물이 묻는 법이다.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 그것이 인류 역사 이래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진실이다. 스탈린이 히틀러와 싸우기 위해 수천 만을 희생했다고, 죽은 소련군의 가족들이 스탈린에게 복수하겠다고 나서던가? 오히려 그의 결단력을 칭송했으면 칭송했지.”
“….”
“이거야 원, 고작 제 가족만 소중한 줄 아는 정신병자 때문에 이렇게 좋은 회차를 망칠 뻔하다니, 어이가 없…”
그때, 여명이 녀석의 말을 끊었다.
“고맙다.”
“…뭐?”
“내 예상을 뛰어넘는 쓰레기 새끼라서.”
바람이 휘몰아치고, 쌓여온 복수심이 폭발했다.
***
여명은 몇 번이고 이 순간을 상상해 왔다. 복수심에 밤을 지새우던 순간에도, 빗자루를 들고 증오를 되새기던 순간에도,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들의 온기에 위로받던 순간에도.
그는 이 순간을 위해 성장했다. 이 순간을 위해 다큐멘터리와 함바집 머슴밥에 만족하던 청소부는 10강의 영역에 도달한 초인이 되었다.
바로 이 순간, 원수의 목에 칼날을 박아 넣는 순간을 위해서.
“천도무친… 만박불통 무술과 함께 그의 실수도 계승한 건가? 애써 천지불인을 만들어준 보람이 없군.”
녀석이 뭐라고 지껄이건, 여명의 검은 이미 녀석의 얼굴을 강타하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일어나며 여명의 검을 막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불씨가 피어올랐다.
천도무친의 증폭을 더한 화산쇄설.
!!!!!!
검은 연기와 폭발이 쌍소멸하는 동시에, 후폭풍에 휘말린 두 유리관이 와장창 깨지며 내용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여명도, 그리고 이강석도 그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신경은 검은 연기가 다시 피어나기 위한 0.5초의 간격에 쏠려 있었다. 여명의 검은 그 사이로 파고들어 각하의 몸을 찔렀다.
각하의 대응은 단순했다. 그는 검을 향해 손날을 내려쳤다.
검과 손날. 파양결과 파양결.
!!!!
첫 폭발만큼이나 강렬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그건 인간을 벗어난 육체의 충돌이 만들어낸 화음이요, 파도치는 두 종류의 마나가 성난 바다처럼 서로를 후려치며 만들어낸 고함이었다.
이강석과 여명은 동시에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주가시빌리, 세계수의 마나에 용의 뒤틀린 마나까지? 정말 마구잡이로 처먹었군. 복수가 그렇게 간절하던가?”
여명은 무장 혈청을 쌍수로 쥐며 대답했다.
“난 적어도 산 사람은 처먹지 않았어.”
“아, 그래. 복수에도 선이 있다. 이거냐? 그거참 얄팍한 복수심이군.”
여명은 두 개의 무술로 화답했다. 오른손에는 다중 검기, 왼손에는 화산쇄설. 복수심으로 들끓는 검이 허공을 가르며 각하의 목과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이강석은 애써 칼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상반신을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검은 연기를 일으키며 발재간을 펼쳤다. 비각술이었다.
그래, 한국 정부의 무술을 녀석이 모를 리 없었다. 여명은 녀석이 오의인 진각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할 거라 확신하며 화산쇄설을 폭발시켰다.
콰아아앙 – !!!!
검은 연기와 폭발이 서로 상쇄되고, 또다시 0.5초의 여유가 생겨난다. 발차기와 검술, 여명의 검기가 날아오는 종아리와 부딪혔다. 이번에는 둘 중 누구도 밀려나지 않았다.
둘 다 균형을 잃는 한이 있어도 서로에게 치명상을 만들기 위해 억지를 부렸다.
근육에 힘을 주고, 마나로 혈관을 압박하고, 몸을 강제로 한계까지 몰아붙인다.
0.5초의 찰나 속에서, 격렬하게 죽음이 오갔다. 태풍을 따라 몰아치는 파도처럼, 격렬하고 무자비하게.
그리고 0.5초의 간격 직후.
검은 연기가 다시 피어나며 여명의 머리를 뒤덮었다. 반응할 시간도, 대응할 방법도 없는 공격이었고, 여명은 빠르게 몸을 빼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치이익 – !!
아슬아슬하게 피한 머리 대신, 연기에 휩싸인 왼팔과 어깨가 통째로 ‘분해’ 되어 사라졌다.
살점은커녕 피조차 남지 않는 섬뜩한 공격. 사라진 팔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아니었다면 당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리라.
하지만 여명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0.5초를 번 걸 기회로 삼았다.
한 걸음 더, 앞으로. 서로의 급소를 노릴 수 있을 만큼 가까이.
각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기꺼이 오른 다리를 휘둘러 팔을 잃은 여명의 약점을 공략했다. 여명 또한 지지 않고 하나 남은 손으로 녀석의 목을 노렸다.
크로스 카운터? 아니, 미세하게나마 각하의 공격이 더 빨랐다. 이대로라면 여명의 턱주가리가 먼저 날아간 뒤, 검은 연기에 머리가 분해되어 마무리될 터였다. 그랬을 터인데-
!
그 순간, 여명의 검이 검게 물들었다. 화려한 다중 검기 아래 숨겨져 있던 진짜 노림수.
진의 무술.
만물을 끌어당기는 검은 인력이 날아오는 각하의 발목을 흔들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각하의 공격을 늦추기엔 충분했다.
그래, 여명의 검이 한 발 더 빨리 각하에게 닿았다.
푸확! 검게 물든 무장 혈청이 각하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잘린 머리가 떠오르며 피가 튀고, 허공에 붉은 선을 남겼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시 0.5초. 잘린 머리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검은 연기가 여명의 몸을 휘감았다.
여명은 빠르게 몸을 뒤로 뺐다. 훌쩍 뒤로 물러난 그의 시야로, 잘린 머리를 들어 올리는 각하의 몸이 보였다.
‘목이 잘려도 안 죽나.’
두려움이나, 실망은 없었다. 앞으로 재생하지 못할 때까지, 계속 다시 잘라주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렇게 다짐한 여명이 분해된 왼팔을 재생하며 자세를 다잡는 사이, 잘린 머리를 붙인 각하가 여명을 노려봤다.
목이 잘린 게 어지간히도 당황스러운 걸까? 녀석의 표정에는 살짝 당황이 깃들어 있었다. 여명이 이죽거렸다.
“뭐해? 계속 아가리 놀리지 않고.”
그러자 이강석은 꿀꺽- 잘린 목구멍으로 넘어온 핏물을 삼킨 뒤 물었다.
“조금 전, 그 검은 무술은… 뭐냐?”
“궁금증은 머리 가죽을 벗긴 뒤에 풀어주마.”
“….”
각하의 늘어진 눈썹이 한층 더 깊게 내려앉았다. 싸늘한 시선이 여명을 찔렀다.
“좋아…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기세등등할 수 있는지 보자.”
녀석은 곧바로 손을 들어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다음 순간, 저 멀리 날아간 플레이어의 시체가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