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26)
을 위한 세계는 없다-726화(726/817)
EP.726 막간 – 조각들 (6)
***
저게 왜 여기 있지?
섬뜩한 핏빛 조명 아래 우뚝 솟아 있는 피라미드를 본 여명은, 이강석과 처음 마주했을 때만큼이나 크게 놀랐다.
마음 속으로 미그니움을 불러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도적인 침묵.
확실한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여명은 미그니움이 웃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종말 교단의 신이 미그니움이었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여명이 의문을 삼키던 그때, 피라미드 앞에 둥둥 떠 있던 이강석이 갑자기 네 개의 팔을 활짝 들어 올렸다.
[추방되고, 봉인된 신이시여!]녀석은 소리쳤다. 도취한 목소리로, 승리를 확신하면서.
[여기! 제물이 준비되었나이다! 운명의 핏줄이! 미라가 아닌, 살아 숨 쉬는 핏줄이 있나이다!]마나가 비명을 지르고, 심상이 뒤틀렸다. 아니, 이게 진짜 심상이 맞기는 한 걸까? 여명은 무언가 거대한 것이 자신을 옥죄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그저 보고, 듣기만 하는 신이시여! 내가 운명을 바치오니, 나의 공양을 받으소서, 나의 구원을 받으소서! 나의 손으로 느끼고, 나의 입으로 맛보소서!]쿠구궁! 녀석의 목소리를 따라 뒤편의 피라미드가 요동쳤다.
철판이 파르르 떨리고, 쇠창살 사이로 검고 기름진 점액이 흘러내렸다. 뒤틀린 마나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며 노래를 불렀다.
[처음이란 유일무이한 것이니! 이 순간을 기쁘게 기념-]이강석의 주문은 거기까지였다. 창처럼 강렬한 검기가 머리를 향해 날아온 까닭이었다. 용사의 무술 2초식.
그는 재빨리 검은 연기를 펼쳐 검기를 막아냈다. 하지만 날아온 검기가 어찌나 강렬한지, 검기 중 일부는 검은 연기를 뚫고 그의 어깨와 볼, 그리고 뒤편의 피라미드를 강타했다.
!!!
쇠창살이 울리며 쇳조각과 돌, 그리고 먼지가 쏟아졌으나, 그뿐이었다. 피라미드는 굳건했다. 이강석 또한 순식간에 상처를 재생하며 여명을 바라보았다.
검기를 쏘아낸 여명은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자신을 겨눈 검을 본 이강석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사적인 분노였다. 감히 기도를 방해하다니.
처음부터 그러했지만, 여명에게 베풀 자비는 없었다. 그의 힘, 그의 분노를 막아설 방해꾼도 더 이상 남지 않았다.
그는 손을 합장했다. 마치,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처럼.
심상이 한 번 더 뒤틀렸다.
***
여명은 움찔,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뒤바뀐 풍경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배경과 쇠창살 피라미드 대신, 낯선 도심이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아스팔트 도로가 갈라지고, 건물 곳곳이 불타는 도심.
망가진 간판에 적힌 한글 덕분에 한국이란 건 알 수 있었지만, 워낙 난장판이라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려웠다. 서울인가? 아니면 다른 도시?
의외로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망가진 건물 사이에서 튀어나온 두 명의 소녀 덕분에.
“네티! 엎드려!”
마총을 든 성녀와 그녀를 뒤따라 나온 네티.
두 사람은 무언가에게 도망치듯 깨진 문을 넘어 망가진 도로를 내달렸다. 여명이 이게 무엇인지 묻기도 전에, 성녀가 허리를 뒤로 돌리며 마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터엉 !!!
총알은 여명을 그대로 관통해버렸다. 환상? 아니, 이건 영상이었다. 현재의 성녀를 보여주는 영상.
여명은 총알이 날아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쨍그랑! 무지막지한 탄환이 그나마 남아 있던 유리창을 깨부수며 무너진 건물을 관통했다.
성녀가 소리쳤다.
“하나 잡았어!”
그녀의 목소리에 기쁨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 순간, 같은 건물에서 두 명의 추적자가 튀어나왔으니까.
각각 검과 창으로 무장한 이강석.
녀석들은 영혼이 없는 멍한 표정으로 두 소녀를 쫓았다. 누가 봐도 사악한 뒤틀린 마나를 풀풀 풍기는 채였다.
“뒤져!”
성녀가 한 번 더 마총을 발사했으나, 두 녀석은 가볍게 산개하며 총알을 피했다. 반응 속도만 따지면 일류 초인 이상.
여명과 마주한 진짜 이강석과 비교하면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지만, 문제는 숫자였다.
“언니, 앞에!”
내달리는 성녀와 네티의 반대편에서, 조선식 갑옷을 입은 이강석이 튀어나왔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포위 당한 형국이었다..
네티는 걸음을 멈추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쓰읍… 어쩌실래요?”
성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어쩌긴, 싸워야지.”
“괜찮으시겠어요? 여기서는 지원도 못 받을 텐데.”
“지원은… 조금만 버티면 성기사들이 올 거야.”
“조금만이 얼마인데요?”
“글쎄, 십 분?”
“쟤들이 우리 둘 다 죽이고, 라면 끓여 먹어도 남는 시간이네요.”
성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뭐, 그래도 부상병 캠프로 가게 내버려 두는 것보단 낫잖아?”
네티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녀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면, 어디 한 번 죽어볼까요?”
그녀의 말에 호응하듯, 어깨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주가시빌리. 이성의 끈이 얇아진 네티는 가장 가까운 이강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전투는 용맹한 동시에, 처절했다. 여명에게 이 풍경을 보여준 진짜 이강석이 미소지을 정도로.
[푸른 양과 성녀, 어느 쪽을 먼저 죽이는 게 좋을 거 같나?]“….”
녀석은 건물 위에서 성녀와 네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을 등진 녀석은 신화 속 아수라처럼 네 개의 팔을 동시에 까딱거리며 말했다.
[골라봐라. 네가 선택한 쪽은 자비롭게 목을 잘라 죽여주마. 그 대신, 선택받지 못한 년은 개먹이로 던져주지.]여명은 곧장 녀석을 향해 뛰어들었다.
!!
살벌한 검기가 녀석의 검은 연기와 격돌했다. 이강석은 뒤로 밀려나는 와중에도 아래를 보며 입을 놀렸다.
[날 상대하고 있어도 되겠나?]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성녀와 네티를 확인했다. 우연치곤 절묘하게도, 네티의 어깨에 칼이 박히고 있었다.
저게 진짜일까? 아니면 거짓? 어느 쪽이건, 도우러 가는 건 불가능했다. 이강석은 그를 비웃었다.
[넌 아무도 구할 수 없다. 용사.]분노한 여명의 검이 녀석의 목을 노리는 가운데, 이강석은 다시 한번 합장했다.
[절망해라.]***
엘프들은 싸우고 있었다.
서울과 멀리 떨어진 덕분에 쿠데타를 피해 간 도시들, 공희에 죽어가던 지방 도시들, 그리고 왕릉의 결계에 삼켜진 도시에서 싸우고 있었다.
비밀스럽게 쿠데타를 돕는다는 기존의 원칙은 이미 무너졌다. 그들은 휴대폰 카메라 앞에서, 방송용 카메라 앞에서 싸워야 했다.
왕릉에서 튀어나온 적은 그런 걸 신경 쓰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기존의 원칙을 포기한 건 엘프뿐만이 아니었다. 한국군, 공식적으로 엘프와 적대하는 군은 ‘엘프를 도우라’는 계엄 사령관의 명령을 따랐다.
반공을 국시로 삼은 국가와 빨갱이의 합공은 감동적이었지만, 그뿐이었다. 전쟁은 감동이 아닌 힘의 법칙을 따른다.
이미 반나절 넘게 전투를 이어온 엘프들의 체력은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왕릉에서 튀어나온 각양각색의 각하들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군이 보유하고 있는 탄창과 엘프들의 마나가 바닥나는 순간, 방어선은 무너지리라.
하지만 미리디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옆구리의 상처를 붙잡은 채,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이 용사를 향한 그녀의 믿음의 증명이었다. 설사 그 믿음의 대가가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녀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엘프란 그런 족속이었으니까.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여명이 그녀의 분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
물론, 그가 원해서 보는 건 아니었다.
[엘프들은 좋은 재료지. 저 귀쟁이의 모습을 충분히 봐둬라. 다음에 볼 땐 물약 병에 들어 있을 테니.]이강석은 처절하게 싸우는 그녀의 모습을 비추며 속삭였다.
[감히 이 나라에서 내게 반기를 든 대가를 치러라.]녀석이 합장했다.
***
[절망하라.]살로메는 갑자기 귓가를 간지럽히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 누가…?”
그녀가 멍하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자마자, 옆에 있던 괴수군이 그녀의 머리를 눌렀다.
“엎드려!!!”
곧, 콰앙! 그녀와 괴수군의 머리 위로 전차포가 지나갔다.
만주군의 전차가 다가오는 이강석을 향해 발포한 포탄이었다. 그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포격음이 온 세상을 울렸다. 서울 도심을 휘몰아치는 포탄의 충격파 속에서, 이민현 병장은 하늘을 확인했다.
어둑한 새벽 밤하늘은 왕릉에서 시작된 결계로 덮여 있었다. 무엇을 위한 결계인지, 무슨 기능을 하는 결계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냥 장교들이 결계라고 소리치니 결계라고 알고 있을 뿐.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반투명한 결계는 보기만 해도 불길한 무언가를 내뿜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반쯤 폐허가 된 서울 풍경 때문일까? 하늘이 마치 지옥의 하늘처럼 보였다.
염병, 이민현 병장은 평생 이 광경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게 좋은 의미일지, 아니면 나쁜 의미일지 알 수 없었지만 될 수 있으면 좋은 의미로 남기를 소망했다. 아까 전 그를 구해준 아샤의 기사와, 목숨을 건 상병 녀석을 위해서라도.
-재장전!!
상념이 더 길어지기 전에,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명령에 따랐다. 포탄이 장전되는 걸 확인한 이민현 병장은 귀를 막았다.
포격음 속에서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본 그는, 빨리 여명이 오길 기대했다.
***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서쪽에 있는 다섯 개의 언덕을 뜻하는 이곳은 조선의 8대 왕인 예종을 비롯한 19대 왕 숙종, 그의 아내인 인헌왕후와 장희빈 등이 묻힌 거대한 집단 왕릉이었다..
왕이 둘이나 묻힌 만큼 풍수지리상 명당 중의 명당이었고, 그만큼 교단이 심혈을 기울여 타락시킨 땅이기도 했다.
가짜 이강석이 하나도 아니고 다섯이나 튀어나올 정도.
그러나 이곳을 막아선 건 딱 한 명, 홍세티뿐이었다.
그리고 직접 결계를 펼친 이강석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홍세티는 홀로 고립된 채 결계 속에 갇혔다.
승리의 여신은 그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구원은 없다. 홍세티는 감히 가축우리를 벗어난 죄로 죽을 것이다. 사지를 찢고 시체를 짓밟아, 다른 가축들의 본보기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저 도금된 인형은 그 시체를 보며 진정한 절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이강석은 합장했다. 천여명에게 홍세티의 처절한 최후를 보여주기 위해서.
짝!
곧, 주변의 풍경이 뒤바뀌며 서오릉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르던 천여명이 움찔, 검을 멈췄다.
[자, 보아라!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다음 순간, 이강석은 입을 다물었다. 홍세티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녀는 죽기는커녕, 처절한 투쟁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앉아 있었다. 대체 어디서 불어오는 건지 알 수 없는 모래바람 가운데 서서, 다섯 이강석의 시체를 의자 삼아 앉아있었다.
의자라곤 하지만, 얽기설기 쌓인 이강석들의 시체가 기울어지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시체 곳곳에 검은 꼬챙이가 박혀 있는 까닭이었다. 피라미드의 쇠창살과 닮은 검은 꼬챙이들.
아래 고인 피 웅덩이가 모래바람을 따라 출렁거리는 가운데, 진짜 이강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절망의 절정이 되어야 할 그림이 이렇게 망가지다니?
[….]그는 천여명의 얼굴을 확인했다. 역시나, 녀석의 얼굴에 깃들어 있던 격한 감정들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 얼굴에 남아 있는 건 작은 깨달음이었….
…깨달음?
이강석은 놀란 눈으로 천여명의 시선을 따라갔다. 홍세티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바깥에서 내부를 보는 건 불가능했다. 이건 교단의 결계와 그의 심상이 뒤섞인 독자적인 공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순한 우연이라기엔, 홍세티의 푸른 눈동자와 천여명의 금빛 눈동자가 너무나 선명하게 겹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 이강석은 당장 합장해 심상을 바꿨다.
짝!
손뼉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은 다시 피라미드 앞으로 돌아왔다.
이강석은 짜증을 삼키며 다음을 준비했다. 아직 괜찮다. 절망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본격적으로 계집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하고, 벌레 같은 반역자들의 피가 이 땅을 적시면… 이 싸움은 그의 승리로 끝난다.
천여명은 그를 상처입힐 수 없다. 시간은 그의 편이다. 그의 편인데… 그를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는, 어딘가 이상했다.
[희망은 절망으로 가는 관문일지니, 너는-]이강석이 무어라 말하려는 그때, 천여명이 말을 끊었다.
“검은 연기와 무효화는 해석할 수 없었어. 아마 독자의 권능이라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결계는 다르다.”
[….]천여명은 인벤토리를 열어 붉은 구슬을 꺼냈다. 이강석이 이를 갈았다.
“광란의 심장…!”
피를 흘리는 자가 수많은 인간의 심장을 쥐어짜 만들어낸 보석. 조 장관의 사생아, 녀석이 분명 회수했다고 했거늘. 천여명의 손에 있었단 말인가?
이강석이 사생아를 살생부에 올리건 말건, 여명은 광란의 심장을 콱 쥐며 말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많이 봐왔어. 교단의 술식, 공희의 마법진… 그리고 너의 결계까지. 전부 눈에 담았다. 마법에 그리 재능이 없는 나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뭣…?]“무술과 달리 마법은 한 번 보는 걸로 익히기 어렵지만… 이 정도면 쓸 수 있지.”
[일견즉해…!]역겨운 핏줄 같으니. 이강석은 그 재능에도 한계는 있다고, 이 결계를 다루기 위해선 재능이 아닌 신의 인정이 필요하다고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여명의 마나가 결계로 침투하는 걸 느끼자마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 어떻게?
당황한 각하의 얼굴을 본 여명이 말했다.
“각하, 내게 절망을 알려주겠다고 했지? 그 말 그대로 돌려주마.”
꽈악, 보석을 쥔 여명은 그대로 두 손을 모았다. 이강석의 합장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자세였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쿠구궁…!
피라미드가 요동치며 소리 없는 웃음소리가 울리고, 결계가 뒤흔들리며, 이강석이 놀란 눈으로 여명을 바라본 순간.
심상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