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28)
을 위한 세계는 없다-728화(728/817)
EP.728 너희에게 선사하는 지옥 (6)
***
번쩍!
각하의 몸에 생기가 돌아오고, 쌓였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처음 싸움을 시작하던 순간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강한 힘이 폭발했다.
여명은 검을 든 자세 그대로 밀려났다. 바닥을 두 번 구르고, 시체 더미에 부딪혀 간신히 몸을 멈춰 자세를 다잡자, 이강석이 하늘을 향해 웃어 재끼는 모습이 보였다.
[하하하!! 역시, 신께선, 나의 승리를 바라신다!!]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웃던 녀석은, 여명이 제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휙 고개를 돌렸다. 반쯤 기울어진 눈동자가 즐거움으로 번뜩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몰릴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이강석은 강화된 육체를 음미하듯 네 개의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말했다.
[인정하지. 도금된 인형아. 넌 신의 제물로서 모자람이 없다.]“…퉤.”
여명은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생이 끝난 몸 사이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두 재생 괴물이 서로를 노려보길 잠시.
이강석이 웃으며 말했다.
[아쉽겠구나, 천여명. 너 같은 게 어떻게 이 결계를 쓸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내 분신들이 이 나라 곳곳에서 경험치를 퍼오고 있다.]“….”
[아, 느껴진다…! 이 죽음, 이 경험치! 천여명! 그거 알고 있나? 국회의원은 경험치를 아주 많이 퍼준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의원 수를 두 배로 늘리는 거였는데!]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강석 또한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네 개의 주먹을 동시에 꽉 쥐었다.
[플레이어의 시체와 권능을 애써 개조한 보람이 있어… 아, 그러고 보니, 천여명, 플레이어를 죽인 게 너였던가?]“….”
[흐하하하! 너는 결국, 내 승리의 밑거름에 불과했구나…!]승리 선언이나 다름없는 말. 여명은 잠시 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지랄은 끝났냐?”
[지랄?]“각하, 넌… 너무 말이 많아. 독자라면서, 말 많은 악당이 무슨 꼴을 당하는지도 모르나 보지?”
[감히, 내게 클리셰를 가르치려고? 멍청한 놈. 아까도 말했듯, 나는 악이 아니다.]“….”
[너희 운명에 맞서 승리할 존재이자… 이 쓰레기 같은 세상과, 반도의 구원자…! 그게 나다! 내가 아니었으면, 이 땅의 버러지들은 통일조차 못 했어! 이 나라의 국민들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게 감사해야 한다!]녀석의 외침에는 한점의 거짓도 없었다. 그래, 각하는 단 하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이 악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 천여명! 이제 네가 지껄일 차례다. 내게 절망이 어쩌고 지껄였었지! 어디 한 번 또 지껄여봐라. 내 레벨 업을 어떻게 막을지, 그 가벼운 혓바닥으로 지껄여보란 말이다!]아무 말도 하지 못할 거란 확신이 담긴 외침. 하지만 여명은 대답했다.
“만박불통의 무술은, 분신을 만들 수 있다.”
직후, 각하는 그 짧은 말속에 숨겨진 의도를 간파했다.
[하! 천도무친의 분신은 만박불통 본인이 사용해도 한 두 마리가 한계다. 고작 그걸로 내 분신들을 쓰러트리고, 경험치 수급을 막겠다고? 내가 그딴 망상을 가만히 두고 볼 거 같으냐?]각하는 네 팔을 활짝 펼치고 여명에게 달려들었다. 여명은 마찬가지로 무기를 들며 대답했다.
“난 너처럼 말이 많지 않아서 말이지.”
[뭐?]“이미 시작했다.”
그럴 틈 따윈 없었- 이강석은 문뜩, 조금 전 인천에서 예카테리나와 싸우던 순간을 떠 올렸다. 그때, 여명은 그보다 늦게 인천에 도착했었다.
설마, 그때?
그가 놀라 눈을 크게 뜬 순간, 여명의 검이 2차전을 알렸다.
***
같은 시각. 대구, 애국단의 비밀 벙커.
“왕릉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튀라고! 시발, 일단 살아야 할 거 아냐!”
“아오, 경주 땅은 글렀다니까! 거기 왕릉이 몇 개인데! 방어선 구축하지 말고 전부 경부 고속도로로 피난 보내라고!”
“내 말 잘 들어요. 결계 내부에 들어가면 통신 전부 끊기니까, 무조건 도망처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을 끌라고요! 알겠어?!”
벙커의 연락망으로 전국의 시크릿 소사이어티 요원에게 소리치던 천애란은,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벙커의 벽을 가득 채운 애국단의 머리통들이 겁에 질린 듯 파르르 떨어서? 아니, 아니었다.
쿵! 쿵!
그녀가 있는 작전실 저 멀리, 벙커 입구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누군가 벙커문을 두들기는 소리.
“아, 시발….”
도망가야 하는 건 요원들이 아니라 나였나. 천애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래, 그녀는 죽음이 두려웠다.
그렇게나 수많은 양치기를 만들어내고, 용서받지 못할 인체실험을 벌였음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다.
천애란은 속죄하고 싶었다. 살아서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도 물 건너갔다. 도주는 불가능했다.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벙커를 포위했을 테니까.
자포자기한 그녀는 허리춤의 권총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죽더라도 일은 끝내고 죽어야지.’
그녀는 쿵쿵 소리를 무시한 채 컴퓨터 앞에 앉았다.
타닥! 키보드를 두들기자 거대한 마법진 두 개가 그려진 한반도 지도가 모니터에 떠올랐다.
천애란은 재빨리 한반도의 모든 왕릉의 위치를 검색해 지도와 겹쳤다. 마법진은 묘하게 왕릉의 위치와 겹쳐져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둘 다 한반도 지맥에 흐르는 마나를 이용하는 거였으니까.
쿵, 쿵!
소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그녀는 재빨리 왕릉과 이어지는 지맥 라인을 그렸다. 지맥의 마나를 이끄는 핵심적인 왕릉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론적으로, 거기만 파괴하면 이 지랄을 끝낼 수 있었다. 끝낼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녀는 생물학 박사였지, 지맥 전문가가 아니란 점이었다.
“시발.”
아무리 지도를 살펴봐도, 명쾌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나치년과 샌드위치 중독자가 봤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까? 적어도 그녀보다는 더 나은 답을 내놨으리라.
판단을 끝낸 그녀는 곧장 지도 파일을 두 사람에게 보냈-
그 순간, 콰앙!!!
바로 뒤 금속 문에 구멍이 뚫렸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낯선 얼굴이 구멍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천애란 박사.]“….”
[배신을 되돌릴 기회를 주겠다.]“기회를 주겠다고?”
그녀는 놀란 눈으로 대답하면서, 슬그머니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낯선 남자가 말했다.
[당장 이 문을 열고, 벌레들의 통신망을 교란해라. 애국심을 증명해라.]“….”
천애란은 조금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가늠하며 말했다.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 알아?”
[뭘 말이냐?]“애국심은, 좆 까라.”
탁! 그녀는 키보드를 눌러 파일을 전송했다. 하지만…
[통신 연결 오류, 인터넷을 확인해 주세요.]…파일은 전송되지 않았다. 이미 결계가 주변을 뒤덮어 통신을 끊은 탓이었다.
“하, 인생.”
끝까지 지랄이구나. 그녀가 허탈하게 웃는 순간, 콰직!!
문이 뜯겨 나가며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피에 젖은 옷을 입은 남자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리석구나. 천애란 박사.]“….”
[이런다고 네 죄가 사라질 거 같으냐? 멀쩡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냔 말이다.]“…멀쩡한 사람이라.”
그녀는 허탈하게 웃으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한때 그녀가 가장 존경하던 사람, 그리고 연이은 실패 끝에 조국에게 버려진 사람.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아버지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아버지란 사실을 떼고 봐도, 천부명 박사는 애국심과 실력을 모두 가진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당연히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부 몰래 숨어 밑바닥 인생들을 모아 청소부가 된 것도 황당한데, 심지어 누군지도 모를 애새끼를 주워 기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게 싫었다. 특히, 쇠똥구리, 그 빌어먹을 애새끼가 싫었다. 녀석을 향한 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싫었다.
그 모든 게 어쭙잖은 속죄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를 잃고 다시 쇠똥구리와 만나고 나서야, 그녀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속죄가 아니었다.
고작 아이 하나 키우는 걸로, 어떻게 그 커다란 죄를 속죄한단 말인가?
그건… 선의였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애새끼에게 베푼, 순수한 선의.
훌륭한 일이었지만, 속죄와는 거리가 멀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에겐 속죄의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리라.
그녀는 똑바로 속죄할 것이다. 빌어먹을 나라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지난 죄로 법정에 서라면 서고, 공개적으로 비난 받아야 한다면 비난받을 것이다.
그렇게 끝끝내 속죄해서, 죽은 자들을 애도하고, 다시는 억울한 자들이 없도록 할 것이며, 사랑하는 가족을 만들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선 못 죽어.”
휙! 그녀는 권총을 뽑아 남자를 겨눴다. 남자는 같잖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너희 부녀는 항상 잘못된 선택을 하는군.]천애란은 대답 대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알이 정확히 남자의 가슴을 때렸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천애란을 향해 걸어왔다.
탕, 탕, 탕!
이어지는 추가 사격. 하지만 탄창을 다 비워도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꽈악! 그녀의 모가지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네 머리는 잘 이용해주마. 이곳에 모인 머리통들과 마찬가지로.]“케흑, 켁….”
그렇게 남자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고, 천애란의 목뼈가 꺾이는 순간.
푸욱!
붉은 칼날이 남자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왔다. 마치 피처럼 붉은 검이었다.
“…?”
놀란 남자가 뒤를 바라보기도 전에, 방패가 날아와 남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퍼억! 남자의 목과 머리가 분리되고, 잡혀 있던 천애란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쿨럭! 산, 초… 씨?”
천애란은 시퍼렇게 멍든 목을 붙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갑옷을 입은 아샤인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애란. 괜찮소?”
“예, 괜찮아요… 나의 기사님.”
“…늦지 않아서, 다행이오.”
그렇게 두 사람이 포옹하길 잠시.
뒤에 서 있던 금색 눈동자의 청년이 정색했다.
“…어우, 씨.”
“쇠똥구리…?”
산초는 조심스레 그녀의 등을 받치며 말했다.
“여명이 그대를 구했소. 그가 차원문을 열지 않았다면, 늦었을 거요.”
“아… 쇠똥구리, 고마….”
그녀가 난생처음 고마움을 표하기도 전에, 여명이 대뜸 말을 끊었다.
“솔직히 전 기사단장님의 유언 때문에 말 안 하고 있었는데… 산초, 꼭 이런 거랑 사귀어야겠어요? 아무리 봐도 산초가 아까운데.”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
여명은 그녀의 대답을 듣지 않고 대뜸 검은 차원문을 열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등장만큼이나 재빠른 퇴장이었다.
아니 진짜 저 새끼가… 천애란은 여명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욕을 해야 할지, 아니면 고마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하던 일을 하기로 했다.
“산초, 일으켜 줘요.”
“괜찮겠소?”
“예, 괜찮아요.”
그녀는 산초에게 매달려 꾸역꾸역 자리에서 일어난 뒤, 컴퓨터 앞에 앉았다.
벽을 장식한 수많은 애국단의 머리가 묘한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딸깍, 통신이 연결된 모든 인원에게 지도를 전송했다.
***
터엉 – !!
달려드는 이강석의 머리통을 향해 발포한 성녀는 재빨리 바닥을 굴렀다.
!
곧, 그녀가 서 있던 자리로 커다란 창이 날아와 박혔다. 아스팔트가 출렁거리는 게, 직격당했다면 즉사를 면하기 어려울 위력이었다.
제기랄. 성녀는 침을 삼키며 무너진 상가 뒤로 숨었다. 네티가 미리 와서 엄폐하고 있던 곳이었다.
성녀는 마총의 노리쇠를 당기며 물었다.
“동생, 괜찮아?”
“예, 아직은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네티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지 않았다. 당장 팔꿈치부터 잘린 팔을 재생하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네티는 고통을 잊으려는 듯, 애써 말을 돌렸다.
“우리가 지금 몇 놈째 쓰러트렸죠?”
“네 놈. 이제 두 마리 남았어.”
“또 보충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재수 없는 소리 할래?”
성녀는 정색했다. 당장 지금 두 사람을 압박하는 두 놈도 중간에 끼어든 놈들인 까닭이었다.
여기서 한 마리라도 더 추가된다면, 두 사람의 목숨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말이 곧 씨가 된다고 하던가? 다음 순간, 허공에서 갑자기 검은 차원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이야, 이게 진짜 증원이 오네. 네티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이 씨가 될 줄은 몰랐는데… 쓰으읍, 이럴 거면 아예 저기서 형부가 나오면 좋겠네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성녀의 총구가 검은 차원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차원문 너머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성녀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정말로 네티의 말이 사실이 되었으니까.
“…여명?”
차원문에서 튀어나온 여명은 슬쩍, 그녀에게 시선을 준 뒤 곧바로 적들이 있는 방향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투의 소음.
성녀와 네티가 멍하니 여명의 뒷모습을 바라보길 잠시.
무장 혈청이 분신들의 목을 쳤다. 후두둑! 날아오르는 목을 따라 분신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더 말할 것도 없는 광경이었고, 성녀는 곧바로 여명에게 달려갔다.
“여명!”
그리고 이어지는 격한 포옹.
성녀는 으스러질 정도로 강하게 여명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뒤늦게 재생을 끝마친 네티가 다가올 때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명을 밀어냈다.
“…분신이네?”
여명의 위아래를 훑는 성녀를 보며, 네티는 어떻게 포옹으로 분신인 걸 알아챘냐고 묻지 않았다.
아무튼, 분신은 땀에 젖은 성녀의 이마를 닦아주며 대답했다.
“응, 이건 분신이야. 본체는 아직 싸우고 있어.”
“…분신이 있다는 건 아직 여력이 있다는 거지?”
“응.”
“좋아, 그러면 나도 힘낼게. 내가 뭘 해주면 될까?”
여명은 대답 대신, 검은 차원문을 열었다. 어디로 연결되는지 모르겠지만, 필시 평화로운 곳은 아니리라.
차원문을 보던 성녀는 후우- 한숨과 함께 마총을 허리춤에 꽂았다.
“성녀가 하다 하다 검은 차원문에도 들어가네.”
“다섯 신께서도 용서하실 거야. 사람을 구하기 위한 일이니까.”
픽 웃은 성녀는 여명의 가슴을 툭, 친 뒤 바로 차원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네티는 성녀가 사라진 문과 여명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두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형부, 꼭 이겨요.”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 부끄러웠던 걸까, 그녀는 대답을 듣지 않고 곧장 차원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라진 차원문을 바라보던 분신은, 이내 새로운 검은 차원문을 열었다.
***
서울, 다리가 끊어진 한강 주변.
아카데미 하수도의 용, 오르세 라날은 오랜만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아악!! 이제는 날아다니잖아!!]그녀가 비명을 지르는 대상은 이강석의 분신이었다. 그것도 날개가 달린 분신.
날개가 달린 개체답게 만주군의 방어선을 뚫은 녀석은 오르세 라날을, 정확히는 그녀가 끄는 배에 탄 채 한강을 넘어가는 피난민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척 봐도 좋은 의도로 날아오는 건 아니었다. 라날은 있는 힘껏 배를 끌며 소리쳤다.
[인간들아! 꽉 잡아!! 빠져도 난 모른다!]풍덩! 그녀는 반쯤 잠수한 채 속도를 높였다. 유려한 지느러미가 물결치며 한강을 가르고, 그녀의 몸에 묶인 끈이 꽈악! 당겨지며 배가 가속했다.
-조금 더 빨리!
-용용아, 제발!
-젠장, 따라붙는다!
하지만 날개 달린 분신보다 빠를 순 없었다. 배에 탄 사람들의 아우성이 커지고, 그때마다 거리가 좁혀졌다.
이윽고, 각하의 분신이 민간인이 탄 배를 향해 날개를 접고 강하하는 순간.
배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새벽의 어둠조차 가릴 수 없는, 거대한 파충류의 그림자였다.
배를 향해 강하하던 분신은 고개를 돌려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보았다. 붉은 비늘을 반짝거리는 용의 꼬리를.
짜- 악!!!
용의 꼬리는 그대로 분신을 때렸다. 분신은 그대로 한강 위에 떨어지며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켰다. 배에 탄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환호하는 가운데, 라날이 물 밖으로 고개를 들었다.
[오빠?!] [오랜만이로구나. 누이여.]그랬다. 갑자기 끼어든 용은 오르세 타불, 드워프들의 친구이자 만주를 뒤엎어버릴 뻔했던 용이었다. 몇몇 한국인들이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겁을 먹었지만, 오르세 타불은 신경 쓰지 않고 날개를 활짝 펼쳤다.
[아쉽게도, 지금은 인사할 때가 아니니, 어서 강을 건너라.] [에이, 급한 불도 다 껐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부터….]그녀는 끝까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촤악! 물속에서 조금 전 추락한 각하의 분신이 튀어나온 까닭이었다.
[으악!]라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영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을 태운 배가 급하게 이동하는 사이, 타불의 등 위에서 누군가 뛰어내렸다.
모두가 그의 모습을 알아봤다. 이 나라에서 유일한, 아니, 어쩌면 이 시대의 유일한 드래곤 라이더. 지구 너머 아샤의 용사를 닮은 검은 머리카락에, 짙은 금색 눈동자의 주인공.
천여명.
하늘에서 추락한 그는 날아오른 분신의 머리를 붙잡고, 그대로 쩌저적! 얼려버렸다. 급속 냉각. 물에 젖은 분신은 꽝꽝 얼어붙은 채 다시 한강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붉은 용이 날아와 선회 비행하며 다시 천여명을 등에 태웠다.
[전선으로 향하겠다.]놀랍도록 장엄한 광경이었고, 배에서 촬영 중이던 시민들은 그 모습을 SNS에 올렸다. 개중에는 기자도 있었다. 운이 좋았던 그 기자는 당장 노트북을 꺼내, 기사를 썼다.
기사의 제목은… 구원자, 천여명.
***
경주에서, 불씨를 날리는 기사와 천여명이 시민들을 구하는 영상이 공유되었다.
***
평양에서, 천여명이 평양 방위 사령부를 구했다는 증언이 들려왔다.
***
개성에서, 계엄군이 용을 탄 천여명과 함께 차원문을 보호하는 사진이 업로드되었다.
***
충청남도 공주시의 한 공무원은, 계엄군이 용을 탄 천여명과 함께 무령왕릉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올렸다. 보고를 가로 챈 한 언론인은 곧장 기사를 썼다.
***
각하는 그 모든 걸 느끼고 있었다. 전국에서, 그에게 들어오는 경험치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그는 격하게 주먹을 쥐었다. 전국에 펼친 결계가 독이 되었다. 상대가 검은 차원문을 열 수 있게 된 시점에서, 결계는 녀석을 위해 깔린 고속도로나 다름없었다.
[….]분노가 그의 목을 쓸고 지나갔다.
천여명을 향한 분노, 운명을 향한 분노, 그리고 패배를 떠올리는 자신에 대한 분노.
아직이다. 아직이야. 승리의 여신은 아직 그의 편이었다. 경험치는 지금도 꾸준히 들어오고 있었고, 주가시빌리의 대책도 있었다.
패배는 없다. 최후의 승자는 그였다. 이건 그저 시련일 뿐이…
그때, 천여명이 손바닥을 들어 까딱, 그에게 손짓했다.
“이게 끝이냐?”
간단한 도발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이강석이자 독자는 곧장 여명을 향해 달려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