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31)
을 위한 세계는 없다-731화(731/817)
EP.731 너희에게 선사하는 지옥 (9)
***
“말, 도… 아, 안 돼. 어, 어, 어떻게… 운명이, 벼, 변경백의 무술을…?”
각하는 피를 질질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한 번 더 여명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손을 뻗기 무섭게, 여명의 발이 그의 얼굴을 걷어차 버렸다.
퍼억! 각하는 바닥을 굴렀다. 깨진 바닥 파편이 튀고, 그 위로 흘러내린 핏물이 길게 선을 만들었다.
“커헉… 케흑, 아… 아직이야… 끄, 끝나지 않았… 어.”
재생력이 남아 있던 걸까? 각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웩! 한 번 더 피를 게워낸 그는 입에 묻은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미친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 심상에서 그를 구해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명이 구현한 시체 창고는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끝났다.
아니야. 이런 게 내 끝일 리 없어. 각하는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천여명이란 이름의 현실은 여전히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차가운 황금빛 눈동자, 그리고 그 속에 응어리진 복수심.
각하는 등을 돌렸다. 그는 도망쳤다.
차가운 얼음송곳이 날아와 종아리를 꿰뚫어도, 바닥에 쓰러져 무릎이 까이고,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필사적으로 여명에게서 멀어졌다.
여명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쫓았다. 상처 입은 먹잇감을 뒤쫓는 맹수처럼,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게.
“허억, 헉… 이런, 개 같은….”
각하는 숨이 찰 때마다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여명과의 거리는 벌어지긴커녕 계속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최대한 공포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조금씩.
“씨발, 씨발….”
각하는 그런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계속 도망쳤다. 시체와 화염으로 가득 찬 창고를 벗어나 바깥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가로지르고, 출입구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이중으로 잠겨 있는 두꺼운 철문.
각하는 재빨리 잠금을 풀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손으로 당기고, 어깨로 밀고, 주먹으로 두들기고, 머리를 부딪혀도 철문 요지부동이었다.
“열어, 열라고!”
문과 씨름하던 각하가 뒤를 돌아보자, 여명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검을 들고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죽음을 구현한 것처럼 차가웠다.
각하는 미친 사람처럼 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꺼내줘! 신들이여! 아야톨라! 불사의 왕…!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꺼내달라고!”
쾅, 쾅! 철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비명처럼 메아리치길 잠시. 각하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도망은, 끝이냐?”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를 따라, 그림자가 손을 들었다.
시작은 오른팔이었다.
***
옛날에.
쇠똥구리가 월급보다 비싼 청소 장비를 두 번이나 망가트릴 정도로 어린 시절에.
작업반장님은 밤마다 쇠똥구리에게 여러 종교의 경전을 읽어주곤 하셨다.
겉으로는 한글을 가르쳐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지만, 쇠똥구리는 알고 있었다. 동화책을 읽어주기엔 너무 쑥스러워서 그러셨다는걸.
그리고 지금, 복수의 바로 앞에서.
여명이 된 쇠똥구리는 반장님이 읽어주시던 경전의 구절을 떠올렸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복음이었던가, 레위기였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여명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에.
-이 세상에서 품은 원한은 원한으로 갚는다고 풀어지지 않으리니 원한을 버릴 때만 풀리리라.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이다.
법구경이었던가, 금강경이었던가? 중요하지 않았다. 여명은 불교도가 아니었기에.
-피는 피로 씻기지 않으리니, 피를 닦기 위해선 피가 아닌 물이 필요하노라.
검은 신이었던가, 적색 신이었던가? 개의치 않았다. 여명은 다섯 신의 교인이 아니었기에.
-나는 이제야 남의 가족을 죽이는 것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남의 아버지를 죽이면 남이 나의 아버지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이 나의 형을 죽인다. 내가 직접 죽이지 않았다 한들, 결국은 내가 죽인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건 기억났다. 맹자. 심지어 이 구절을 처음 듣던 순간까지 떠올릴 수 있었다.
일반인들은 출근을 준비하고, 야간 업무를 끝낸 청소부들이 노곤한 잠자리를 준비하던 시간.
따듯한 국밥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떠오르는 해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때, 그 순간.
맹자의 구절을 들은 쇠똥구리는, 낡은 이불 속에서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의 아버지가 없으면 어떻게 하죠?’
당돌한, 아직 뭣도 모르는 아이라서 할 수 있었던 질문이었다.
작업반장님은 아이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대신, 빙그레 웃으며 복수와 도덕에 대한 일장 연설을 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사자랑 풀어야지.’
그 말씀이 옳았다. 복수의 매듭은 당사자와 풀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 여명은 검을 들어 각하의 어깨를 내려쳤다.
“으각, 으아아악!!!”
자비는 없었다. 잘린 팔이 펄떡이며 피가 쏟아졌다.
“자, 잠깐… 처, 천여명… 잠깐, 내 말을….”
녀석이 무어라 지껄이건 말건, 여명은 각하의 몸을 자세히 살폈다. 마왕이 됐던 탓일까? 흘러내리는 피 사이에 희미하게나마 검은 액체가 섞여 있었다.
역시, 녀석의 육체는 이미 인간을 벗어나 있었다. 심장이 뽑혔는데도 살아있는 것부터 그랬지만, 고작 과다출혈이나, 쇼크로는 죽지 않으리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여명은 발에 마나를 모았다. 그리고-
-쾅!!
그대로 각하의 복부를 걷어찼다. 어찌나 강하게 찼는지, 뒤에 있던 철문이 찌그러지며 녀석과 문이 동시에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우웨에엑!!”
버려진 깡통처럼 바닥을 구른 각하는 왈칵 피를 토했다. 녀석은 자신이 흘린 피 웅덩이 위에서 꿈틀거리다가, 다가오는 여명을 보곤 꾸역꾸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으, 으, 케흑! 아, 아직… 으어… 아직이야….”
통증 때문에 언어가 되지 못한 웅얼거림을 내뱉으며, 각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건 심상이 덮이지 않은 결계의 어둠뿐.
하지만 어둠보다 다가오는 여명이 더 두려웠던 그는 방향도, 높이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걸음을 돌렸다.
한걸음, 한걸음, 도망칠 때마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비릿한 피 냄새를 따라, 텅 빈 결계가 마왕의 피에 반응했다.
조종권은 여전히 여명이 가지고 있었지만, 여명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결계는 피 속에 담겨있는 심상을, 그리고 기억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
옛날에.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국민들의 분노가 대통령을 끌어 내리고, 부통령이 되지 못한 누군가의 가족이 집단 자살을 시도한 그 시절에.
독자는 이강석이 되었다.
이강석에게 독자가 빙의한 건지, 아니면 단순히 이강석이 독자의 기억을 주입 받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고.
중요한 건 이 세상이 독자가 자주 보던 소설과 똑같았다는 사실이었다.
차원문으로 뒤틀린 역사와 마나, 초인과 아샤.
독자는 전율했다. 가장 먼저 자신이 꿈꾸던 세상에 떨어졌다는 사실에 전율했고, 다음으로 이 세상의 리얼함에 전율했다.
냄새, 맛, 촉감, 감정, 기억… 모든 것이 현실과 똑같았다. 그는 이강석의 집에 남아 있던 초콜릿을 먹으며 확신했다.
이곳은 낙원이었다. 오직 그를 위한 낙원.
그리고 낙원에 떨어진 모두가 그러하듯, 그는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했다. 성욕, 식욕, 권력욕- 모든 게 간단했다.
-대박입니다! 엘프 전쟁으로 우리가 투자한 영약 회사가 대박을 냈습니다!
-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정말로 호치민이 죽었습니다!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 미래 지식.
-그의 태생이 뭐가 문젭니까? 이 나라에 초인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아, 거참, 연좌제 없는 거 몰라요?
-민족의 초인!
이강석이 타고난 재능, 그리고 어떤 무술보다도 강력한 치트 능력은 그를 강대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으니까.
그는 자연스레 정치인… 아니, 지배자가 되었다.
지식과 자본, 그리고 힘이 있는 자에게 정치란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역사적으로 유능한 인물들을 포섭하고, 감히 반항하는 자들은 무참히 죽였다. 미국과 소련의 견제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고작 십수 년 만에, 그는 전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그리고 한 명의 지배자!
전쟁과 식민 지배로 지쳐있던 국민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물론, 그의 욕망은 고작 이 코딱지만 한 한반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 무기를 만들고, 군인을 징집해 3.8선을, 압록강을 넘었다.
국민들은 그를 사랑했다. 베이징과 도쿄를 불태울 때도, 전차를 몰고 만주를 점령할 때도, 이 땅의 아들딸들이 전쟁의 톱니바퀴 속에서 으스러질 때도.
그는 영웅이었다.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민족의 강토를 되찾고, 짱깨와 쪽발이들을 징벌하고, 빨갱이들을 불사른 진짜 민족의 영웅을, 누가 감히 막겠는가?
하지만 영광은 거기까지였다.
역사를 바꿀 때마다 그가 가진 미래 지식이 힘을 잃어서? 단 한 명의 초인으로 전황을 바꾸기엔 현대 전쟁이 너무나 복잡해서?
아니, ‘진짜’ 역사를 움직이던 괴물들은 언제나 그의 머리 위에 있었으니까.
스탈린, 샤를 드골, 아이젠하워…
이 세계의 정치인들과 강대국들은 소설 속 엑스트라가 아니었다. 그들은 세계를 움직이는 진짜 권력자들이었고, 세계 대전을 겪은 노회한 괴물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독자는 되다만 히틀러에 불과했고, 한반도는 반푼이 독일에 불과했다.
고작 몇 번의 전쟁 끝에, 한반도는 패배했다. 그는 굴욕적인 평화 조약에 서명하고, 압록강 아래로 후퇴해야 했다.
유엔군이 평양과 서울을 불태우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그가 핵을 가지고 국제 사회를 협박한 덕분이었다.
-강대국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국제법을 거부한다! 우리는 소말리아, 겔차 왕국과 함께 국제기구에서 탈퇴하겠다!
-우리 민족의 강토를 위협하는 자들은 그 누구라도 핵의 불벼락을 맞게 될 것이다!
-핵실험은 한민족의 권리이며, 자주적인 방위 행위이다!
핵과 인민의 목숨을 인질 삼아 간신히 나라 꼴을 유지하는 파시즘 독재 국가.
그게 그가 세운 한반도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독자의 탓이 아니었다. 적어도 독자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강대국들의 도구나 다름 없는 역겨운 국제기구와 무능한 부하들, 그리고 열등한 민족성이 아니었다면, 이 나라가 패배했겠는가?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애국자들이 많았다면! 모든 게 그의 탓이라며, 감히 그를 끌어내리려는 반란군들이 없었다면, 그가 이렇게 몰락했겠는가?
그 질문의 대답은 의외로 한반도가 아닌, 미국에서 왔다.
그를 암살하기 위해 미국이 보낸 자.
그 초인을 본 순간, 각하는 깨닫고 말았다.
이 세상은 그를 위한 낙원이 아니고, 그는 주인공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