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34)
을 위한 세계는 없다-734화(734/817)
EP.734 막간 – 마지막 조각 (수정)
***
경기도 여주시, 영릉.
조선 역사 최초로 왕과 왕후를 함께 묻는 합장릉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무덤 주변에는, 결계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주변 밤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짙은 결계.
다른 왕릉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결계였다. 당연하게도, 결계를 지키는 각하의 분신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열 명 이상.
분신들의 경계가 얼마나 삼엄한지, 해골용을 타고 공중으로 접근하던 딜라는 두 번이나 격추될 뻔했다.
조금만 운이 나빴다면, 날아오는 마법에 머리가 날아갔으리라.
다음 샌드위치를 먹을 때까지 죽고 싶지 않았던 딜라는 다시 접근하는 대신, 휴대폰을 들고 지원군을 불렀다.
가장 먼저 응답한 건 붉은 차원문으로 한반도 전역을 구원(?)하고 있던 엘프들이었다. 딜라는 차원문 밖으로 나오는 쇠미리를 보자마자 냉큼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이 한반도 왕릉을 타고 흐르는 뒤틀린 마나의 중심지에요. 이곳의 마나를 끊어야 한반도 전역의 결계를 멈출 수 있어요.
딜라는 휴대폰으로 천애란 박사가 보낸 왕릉과 마법진 지도를 짚으며 설명했다. 그녀와 같은 의견이라는 살로메의 문자는 덤이었다.
아무튼, 설명을 들은 엘프들이 내놓은 답은 간단했다.
-전부 터트리죠.
가까운 군사 기지에서 폭약을 가져온 다음, 해골용 위에서 투하한다. 분신들은 버티겠지만, 어차피 목표는 왕릉이었다.
제공권이 이쪽에 있는 만큼, 이보다 합리적인 작전은 없었다.
없었는데….
엘프가 폭약을 대여(?)해올 때쯤, 뒤늦게 도착한 김삼허 중장과 계엄군, 그리고 이시스가 그들의 앞을 막았다.
“언니! 멈춰요!!”
“야 이 미친 새끼들아! 멈춰!! 멈추라고!!!”
격하다 못해 발작에 가까운 반응. 엘프들은 도대체 왜 이러나 싶은 눈으로 다가오는 계엄군과 김삼허를 바라보았다. 후다닥 장갑차에서 내린 김삼허는 저 멀리 왕릉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폭탄?! 폭탄이라니!! 여기가 어딘지 알고!!!”
쇠미리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저 무덤이 뭔데요?”
“세종대왕!! 세종대왕님과 소헌왕후가 잠들어 계신 무덤이다! 저기에 폭탄을 날리겠다고?! 6.25 시절 북한군도 그런 짓은 안 했어!”
세종대왕이 누군지 모르는 엘프들은 시큰둥했다. 김 중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계엄군의 장갑차에서 내린 세티 자매의 막내, 시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언니, 저 무덤에 계신 왕은 미국으로 치면 링컨만큼이나 중요한 위인이세요.”
“아… 그러니까, 저 무덤은 링컨 기념관 같은 곳이구나?”
“….”
“결계를 해제해도 저 무덤이 망가지면 정치적으로 욕을 먹겠네. 자칫하면 국민감정을 건드릴지도 모르고….”
말끝을 흐리는 미리디스는 물론이고, 다른 엘프들도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켜보는 한국인들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하필 링컨 기념관에 비유한 까닭이었다.
엘프들이 링컨 기념관에 테러를 저지른 일은 워낙 유명해서,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김 중장은 세종대왕릉을 최대한 안전하게 탈환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군이 결계를 봉쇄한 뒤, 다수의 초인과 마법사의 지원을 받으며 결계의 보호를 하나하나 해제하는 게 좋겠소.”
미리디스는 그 방법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지 않았다. 대신, 나름의 논리로 김 중장을 설득했다.
“억울한 피해자를 줄이려면 최대한 빨리 결계를 해제하는 편이 좋을 텐데요.”
“아니. 피해자들도 중요하지만, 저 왕릉은 우리에게 세계수… 아니, 아니, 역사이자 이 나라의 일부요.”
세계수란 단어를 들은 엘프들의 눈매가 사나워진 걸 본 김 중장은 재빨리 단어를 바꿨다. 크흠, 헛기침을 한 번 한 그는 부드럽게 설득을 이어 나갔다.
“엘프도 이해하겠지만, 우리처럼 역사가 긴 나라는 사람과 역사, 모두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오. 아시겠소? 부디 여기서부터는 우리 군의 뜻을 따라주시오..”
옆에 있던 시스는 고개를 끄덕여 김 중장의 의견에 동의했다. 미리가 다음 말을 할 때까지만.
“하지만 저 결계가 각하에게 힘을 주고 있으면요? 만약 저 결계가 여명과 각하의 싸움을 결정지을 무게추라면… 어쩌실 거죠? 계엄 사령관님, 문화재를 지키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죽고 죽이는 전쟁에요. 저 무덤을 지키기 위해 낭비할 시간의 담보는 여명의 목숨이고요. 세종대왕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여명이 더 중요해요.”
짧게 줄이자면, 여명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시스는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당장 터트려요! 형부… 아니, 후손을 위한 거니까, 세종대왕님도 이해해주실 거예요!”
김 중장은 니가 그러고도 한국인이냐고 따지지 못했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정론인 까닭이었다.
결계가 정말 각하에게 힘을 주는 게 맞는지, 저 결계를 남긴다고 여명에게 악영향이 가는 게 맞는지… 그런 걸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군인은 언제나 최악을 대비해야 하는 법이고, 결계의 정체가 불분명한 지금은 차악을 선택할 여유가 없었다.
역사서에 세종대왕님의 묘를 파괴한 인간으로 기록될 각오를 마친 김 중장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하아… 제기랄. 어쩔 수 없군. 후방 부대에게 연락해 포격을 지원하겠소. 결계 속 초인들이 포대에 접근할 수 없도록 방어선을 준비해주시오.”
작전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의 명령을 들은 계엄군 사이에서 ‘엘프랑 네크로맨서의 손을 잡고 세종대왕님의 묘를 파괴하는 게 맞냐’는 상식적인 불만이 튀어나왔지만, 군인은 본디 까라면 까야 하는 존재.
그렇게 후방의 자주포가 결계를 조준하고, 해골용의 갈비뼈 사이에 산더미 같은 화약을 담을 때쯤.
뭔가를 느낀 딜라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북쪽을 향해서.
그녀는 작전 시작 싸인이 떨어진 뒤에도 계속 북쪽을 바라보았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시스가 해골용의 머리 위에 올라타며 물었다.
“샌드위치, 준비 안 하고 뭐 해요?”
“저의 신께 귀 기울이는 중입니다.”
신? 네크로맨서의 신? 시스는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권총을 뽑았다. 그리고 머리에 총구가 겨눠지건 말건, 딜라는 웃었다. 샌드위치를 먹을 때만큼이나 잔잔한 미소였다.
“끝났습니다.”
“…뭐요?”
“미스터 샌드위치가 승리했습니다.”
시스는 그게 사실이냐고 묻지 않았다. 저 멀리, 결계 주변을 호위하고 있던 분신들이 갑자기 몸부림치기 시작했으니까.
고통스러운 듯 목을 부여잡고, 머리를 떨던 녀석들은 어느 순간 파악! 먼지로 분해됐다. 허무하다면 허무하고, 다행이라면 다행인 끝이었다.
“문화재를 지켜서 다행이군. 한국인.”
마나를 펼쳐 정말로 분신들이 사라진 걸 확인한 엘프들이 덤덤하게 승리를 확정하고, 김 중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딜라가 해골용의 뿔을 잡으며 말했다.
“자, 이제 결계를 해제하러 갑시다.”
***
끝났다.
장만은 서서히 사라지는 결계와 검은 차원문을 보며 확신했다. 기나긴 준비와 싸움, 그리고 복수가 끝났다.
주름진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그래, 장만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이제 살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운 몸뚱이건만,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순수했다.
“천 반장… 보고 있는가?”
장만은 눈물이 흐르게 내버려 둔 채, 죽은 친우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장만은 확신했다. 천 반장과 청소부들이 이 순간을 보고 있음을, 아들과 형제가 복수를 이룬 순간을 보며 편히 눈을 감았을 거라 확신했다.
“참… 잘 키웠어. 그 꼬맹이가 이리 어른이 될 지, 누가 알았겠나?”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장만은 먼지를 털고 일어나 무너진 도시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늙은 밀수꾼은 이제 퇴장할 시간이었다.
그가 여명을 위해 한 행동은 알려지지 않는 편이 나았다. 이제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 술집에서 여생을 보내야 하리라.
칠레에서 도망쳤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칠레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실패가 아니란 점이었다. 젊은이는 살아남았고, 어쩌면… 아니, 확실하게 가족을 만들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장만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시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계엄군의 기지를 지나, 폐허 속으로 떠나려는 순간.
장만의 발에 무언가가 밟혔다.
눈 부분이 깨진 가면… 눈물을 흘리는 자의 가면이었다.
***
독자는 눈을 떴다.
푸하- !
그는 가장 먼저 억눌려 있던 숨을 내뱉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근육들이 경련하는 탓에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죽기 전에 겪었던 끔찍한 고통 때문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소용돌이에 집어삼켜지는 고통.
문자 그대로 온몸이 분해되는 그 고통은 회귀 속에서 수도 없는 세월을 살아 온 독자조차 처음 겪는 종류의 것이었다.
어찌나 섬뜩한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허억, 허억-! 그는 기억을 떨쳐내기 위해 몇 번이고 심호흡했다. 하지만 육체의 흉터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정신의 흉터 또한 오랫동안 기억되리라.
특히 마지막까지 그를 노려보던 금빛 눈동자. 그것만큼은 절대….
‘…떠올리지 마. 잊어라.’
독자는 자신을 다잡았다. 고통은 기억할 필요 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 무얼 하느냐였다.
‘어느 순간으로 회귀했는지 모르겠지만… 김강혁과 대통령, 우선 두 놈부터 죽인다.’
쓸만한 개새끼라서 살려뒀건만, 감히 주인을 물다니. 그는 이를 갈며 다른 살생부를 작성했다. 박철, 김삼허, 모카 딕, 천애란, 희생양, 불사의 왕, 그리고 천여명.
그 엿 같은 청소부 새끼는 감히 그를 쓰레기라고 불렀다. 하! 그래, 이겼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증명하는 것처럼, 회귀하는 그를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이야말로 운명의 적이었다. 운명을 쓰러트리고, 이 세상을 손에 넣을 진정한 주인은 그였다. 천여명은 그저 한 번의 회차를 망치고, 그에게 몸뚱이를 상납할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은 독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봤으나, 짙은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어디지? 결계 안? 아니면 만탑산의 지하?
한계까지 마나를 펼쳐봤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대체 언제로 회귀한 거야?
독자가 출구를 찾아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또각, 또각…
무언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지옥의 발소리가 이러할까? 걸음걸이마다 진한 피 냄새와 살타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아.’
그것의 발소리가 끊긴 순간, 독자는 조금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거대한 뭔가를 감지했다.
『기쁘구나.』
그것의 목소리가 울렸다. 섬뜩하면서도 낯선 목소리.
그 목소리는 독자의 바로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독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거대한 계단식 피라미드였다.
“…!!”
피라미드는 평범한 돌과 흙이 아닌, 쇠창살과 철판으로 지어진 피라미드. 그것은 종말 교단이 찾은 봉인된 신의 봉인이었다.
『독자.』
독자의 눈이 흥분으로 물드는 가운데, 피라미드의 정상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어코, 우리가 얼굴을 마주하였다.』
독자는 고개를 들어 피라미드를 바라봤다. 쇠창살이 가득한 피라미드 중턱에선, 인간의 형태를 가진 어둠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귀부인의 그림자처럼 여성스러운 몸매를 드러내는 드레스를 입고, 덤덤한 자세로 피라미드 계단에 서 있는 존재.
독자는 당신이 교단이 기다리던 그분이냐고, 내가 드디어 당신에게 간택됐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놀란 그는 입을 더듬었다.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 순간, 입을 더듬던 손에서 감각이 사라졌다. 그다음에는 다리가, 끝으로 몸통의 감각이 사라졌다.
이 세계에서 허락되는 것이 그것뿐이라는 듯, 눈, 코, 귀를 제외한 모든 육체가 감각을 잃었다. 그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왜?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하지만, 윤허하지 않겠다.』
그것은 독자를 내려다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피라미드는 마치 악기처럼 그것의 웃음소리를 증폭시켰다. 섬뜩한 웃음이 독자의 귓가를 때렸다.
『나는 시끄러운 제물을 싫어하노니. 너는 그저 보고, 듣기만 하라.』
그것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의 손에는 뭔가가 들려 있었다.
『나는 너희의 멍청함도, 신들의 발악도 아무 관심도 없다. 하지만 내 간택자가 직접 바친 공물을 도둑질하다니. 그 죄가 너무나 무겁다.』
그것이 들고 있는 건 한 구의 시체였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축 늘어진 시체.
독자는 시체를 보며 숨을 삼켰다. 그에겐 너무나 익숙한 시체인 까닭이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바로 조금 전까지 그의 몸의 일부였던 시체인데.
플레이어의 시체.
『너희를 벌하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지만, 이번 처벌은 참으로 불쾌하구나.』
그것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들고 있던 시체를 피라미드 아래로 집어 던졌다.
시체가 쇠창살과 철판 계단을 굴렀다. 터덩, 터덩.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를 따라 피라미드에 기다란 피의 길이 생겨났다.
그렇게 시체가 바닥에 떨어진 순간, 시체는 마치 그림자처럼 피라미드 아래로 사라졌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독자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간택자가 바친 공물, 도둑질, 죄-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머리 굴리지 말라.』
그것은 독자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속삭였다.
『어떻게, 용사의 혈통이 살아서 지구를 배회하는가.』
『어째서, 세계수의 새싹이 너를 막았는가, 마탑의 그릇과 다섯 신의 딸이 어째서 너의 꿈을 망가트렸는가?』
『정답은 오직 하나다. 독자.』
피라미드 계단과의 높이 차이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그것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하게 독자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가, 나의 간택자다.』
피라미드와 어둠이 동시에 침묵했다. 마치 지배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처럼, 경건하고, 무겁게.
독자는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내가, 내가 운명과 싸웠다. 그가 아니라 내가 싸웠다. 내가 당신에게 간택 받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존재다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입이 막혀 있어도, 눈은 움직일 수 있었다. 독자는 단어가 되지 못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대체 왜 녀석을.
그것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독자가 아니라, 그것이 말할 차례였기에.
『너는, 재미가 없다.』
『운명과 싸우려는 이유는 한심하고.』
『핵전쟁을 벌이려던 이유는 진부하다.』
독자는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전부 당신을 위한 거였다고, 나는 재미가 아닌 의무감으로 행동했다고 항변했다.
그것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너는 그저, 또 다른 운명이 되고 싶을 뿐이지.』
그것은 딱! 손가락을 튕겼다.
소리를 따라 어둠이 출렁거리고, 주변의 그림자가 솟아오르며 독자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런 너를 선택한들, 운명을 반복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미국인 대신 한국인을 죽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왜 더 약하고, 더 지루한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것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피라미드 아래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림자가 휘몰아치며 발목부터 독자의 몸을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독자는 거꾸로 허공에 고정됐다. 마치 도축장에 걸린 가축처럼.
『그래도… 제물의 가치는 있구나.』
그것이 한 번 더 손을 휘두르자, 독자를 휘감은 그림자가 마치 뱀처럼 길게 늘어지며 전신을 휘감았다.
『내 기쁘게, 간택자가 준비한 공물을 받겠다.』
그것이 선언하자, 그림자는 순식간에 독자의 몸을 조이기 시작했다. 독자는 몸부림쳤다.
안 돼, 안 돼, 안 돼-!!
그 순간, 살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가 그의 입을 움직였다.
“…살려주소서! 무엇이건 하겠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으아악!!!”
독자가 뭐라고 떠들건, 그림자는 무심하게 그의 몸을 조였다. 고통은 없었다. 하지만 영혼이 그림자에 먹히는 공포는 생생하게 그를 파고들었다.
“■■! 제발!! ■■이시여!!! 저는, 저는-!! 우읍!”
그림자가 녀석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의 입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비명을 질렀다.
소리 없는 비명.
『너는 그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다.』
그것의 선언을 끝으로, 독자의 몸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작게, 그가 죽여온 사람들의 타락석만큼이나 작게.
이윽고, 독자였던 영혼은 단단하게 굳은 사탕처럼 동그란 구슬이 되었다. 그것은 손짓 한 번으로 그것을 끌어와 손바닥 위에 올린 뒤 말했다.
『이것으로, 준비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