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35)
을 위한 세계는 없다-735화(735/817)
EP.735 닉슨 쇼크.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모든 것은 운명이다.
[-???]***
결계가 사라지고, 한반도를 관통하던 지맥의 마나가 정상이 된 순간.
-어???
-여, 여기는 어디야?
-그아악! 내 팔! 시발, 의무병! 의무병!!
미쳐 날뛰던 초인군들이 정신을 차렸다. 물론, 정신을 차린 것과 정상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총에 맞아 사지에 구멍이 뚫린 놈, 피를 뒤집어쓴 채 비명을 지르는 놈, 그리고 그대로 기절하는 녀석까지.
초인군은 너 나 할 것 없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 마치 지옥에서 벗어난 사람들처럼.
목숨을 걸고 그들을 막았던 개성 차원문 수비대로서는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드디어 끝났다.
적어도 정마필이 보기엔 그랬다.
조금 전 방어전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간이침대에 누워있던 그는, 피에 젖은 붕대를 만지작거리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수비군들은 만세를 외치지 않았다. 그럴 체력이 없었다. 일반 군인들 대부분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나마 체력이 남은 녀석들은 무기를 버리고 부상병들에게 달려갔다.
-눈 떠! 시발, 지금 눈 감으면 뒤지는 거 몰라?!
-아,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물약 기운 사라지는 순간 그대로 뒤진다고!
-수혈팩! 당장 병원 가서 피 가져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살리려는 그 모습에 마음이 동한 걸까?
차원문 너머로 피난길을 이어가던 일반인들이 슬쩍 눈치를 보는 가운데, 한 노인이 피난 행렬에서 빠져나와 낑낑거리며 부상병을 옮기는 병사를 도왔다.
그리고 그 노인을 신호 삼아, 다른 시민들도 우르르 피난 행렬을 벗어났다.
-여기! 여기 부상자 옮기는 것 좀 도와줘!
-저, 전 구급요원입니다! 제가 도와도 괜찮겠습니까?
-야 이 시발, 옮기는 것보다 먼저 지혈부터 해! 붕대 가진 사람… 아니, 케이블 타이건 뭐건 상관없이 묶을 거 가져와!
적과 아군, 그리고 민간인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부상자를 옮기는 풍경은 어딘가 기묘하면서도 인간적이었다.
저런 모습을 보기 위해 목숨을 걸진 않았지만, 정마필은 뿌듯함을 느꼈다. 군인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감정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차원문 앞이 반쯤 응급 병원이 될 때쯤, 정마필은 고개를 돌려 방어선을 바라봤다.
녹아내린 아스팔트와 자동차, 그리고 바리케이드 사이로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용의 불길이 보였다.
아이러니한 불길이었다. 만주를 무너트리려던 용의 불길이 아니었다면, 지금 서로를 돕는 저 사람 중 9할은 이미 저승에 있었을 테니까.
천여명이 용을 살린 선택이 이렇게 이어지다니.
정마필은 자신도 모르게 픽 웃었다. 천여명이 이끌 이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자니, 웃음이 나왔다.
새로운 시대가 왔다.
그는 그렇게 믿으며 간이침대에 누워 기절하듯 잠들었다.
덕분에, 정마필은 누군가 차원문을 넘는 걸 느끼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
박철은 오랜만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탁, 탁- 땀에 젖은 라이터가 힘겹게 불을 내뿜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짧은 숨, 깊은 연기.
혈관 사이로 니코틴이 돌자 머리가 맑아졌다. 하지만 반대로 몸은 더 무거워졌다.
긴장이 풀린 건지, 아니면 뒤늦게 피로가 몰려온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이대로 기절하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아직은 아니다. 그의 마음속, 고집스러운 기자가 말했다.
-아직 기절하면 안 돼. 아직 일면에 올릴 사진을 찍지 못했잖아.
피곤한 중년 남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대답했다.
-용을 탄 천여명 사진이 정도면 일면에 올리기에 충분하지 않나?
기자는 동의했다. 그리고 동시에, 부정했다.
-그건 그렇지만, 네가 바라는 일면 사진은 그런 게 아니잖아.
-내가 바라는 사진?
-형에게 바칠 수 있는 사진… 이 일에 가담한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웃는 사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박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담배 필터를 아그작아그작 씹으며 생각했다.
‘무슨 깨달음을 얻은 초인도 아니고,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있어?’
오글거림을 떨쳐낸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전투는 끝났지만, 아직 찍어야 할 참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서울의 전경을 찍었다.
찰칵.
카메라 소리를 따라 푸른 신의 성물이 무너진 서울을, 그리고 그 사이에서 떠오르는 여명을 찍었다. 그럴싸하긴 했지만, 만족스러운 사진은 아니었다.
폐허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여명을 가리고 있었으므로.
박철은 카메라를 내리고 맨눈으로 햇빛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밝히는 여명은 찬란했지만, 여전히 아직 아침은 오지 않았다.
***
하늘로 떠오른 만탑산은 멈추지 않았다.
뒤틀린 마나와 화염 결계에 휩싸인 그것은 한반도의 동쪽으로, 바다를 향해 계속 날아갔다.
희생양 자매 중 넷째, 오시리는 그런 만탑산을 쫓고 있었다. 그녀의 임무는 불타는 결계를 유지하고, 형부를 백업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만탑산은 그 거대한 크기와 달리 사람의 발로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시리는 어쩔 수 없이 탈것의 힘을 빌려야 했다.
작은 화물 트럭.
교단이 사용하던 물건이 틀림없는 차량은 덜컹, 덜컹! 거칠게 산길을 내달렸다. 물론, 운전하는 건 시리가 아니었다.
“동서쪽 방향! 괴수 두 마리가 탈출했어요! 빨리 밟아요!”
그녀는 화물칸에 앉아 만탑산에서 탈출하는 교단의 괴수들을 감지하고 있었다. 탈출하는 괴수의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녀석들이 탈출해 주변 민가를 덮치는 건 막아야 했다.
아무튼, 자연스레 운전대를 잡은 건 분홍 머리의 연금술사… 라쉬크였다.
“…지금도 최대한 밟고 있는 거야!”
라쉬크는 투덜거리면서도 능숙하게 차량을 몰았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차체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속도를 올렸다.
어차피 그녀 차도 아니고, 무엇보다 탈출하는 괴수들을 처리하는 동시에 만탑산을 쫓으려면 이만한 속도를 계속 유지해야 했다.
아무튼, 차량이 산에서 뛰어내린 괴수가 보이는 곳까지 다가가자, 시리는 곧장 화염 마법을 시전했다. 화르륵! 흔들리는 차에서 던진 불덩이는 정확히 괴수의 몸에 적중했다.
곰을 닮은 괴수 두 놈은 불길에 괴로워하다가, 이내 재가 되어 사라졌다. 불길이 사라지는 걸 확인한 라쉬크는 곧장 자동차 엑셀을 밟-
-지 않았다.
“…멈췄어.”
동해로 날아가던 만탑산이 정지한 까닭이었다. 라쉬크는 운전대를 잡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이대로 바다까지 날아가면 어쩌나 싶었는데.”
“….”
“그보다 왜 멈춘 거지? 설마, 승부가 난 건가?”
라쉬크는 간절한 눈으로 만탑산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에 천애란 박사가 보낸 결계 지도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여명에 관한 기사를 보면 이쪽이 이기고 있는 게 분명했는데… 그 괴물 같은 여명이 질 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그녀는 금세 그 이유를 깨달았다.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불타는 만탑산도, 주변의 공기도, 그리고 시리도.
라쉬크는 곧장 고개를 돌려 화물칸을 확인했다.
“시리?”
시리는 굳은 얼굴로 만탑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르르 몸을 떨고,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게,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왜 그래? 혹시 마나가 바닥난 거야?”
라쉬크는 이럴 때를 위한 물약을 꺼낸 뒤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리고 화물칸에 올라 뽕! 물약 뚜껑을 연 순간.
시리가 어깨를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뭔가… 뭔가가, 들어갔어요.”
“뭐?”
“사, 산에… 겨, 결계를 뚫고….”
조금 전까지 괴수를 불태우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그녀는 계속 말을 더듬었다.
“어, 언니를… 불러야, 해, 요… 빠, 빨리… 혀, 형부를… 도우… 우웩!”
그때, 시리의 입에서 피가 한가득 쏟아졌다. 선명한 붉은 피. 마법의 반작용이었다. 대체 뭐가 들어갔기에, 감지한 것만으로 이만한 반작용이 온단 말인가??
라쉬크는 당장 시리를 눕히고, 그녀의 입에 물약을 퍼부었다.
시리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계속 입을 벙긋거리는 가운데, 물약을 비운 라쉬크는 휴대폰을 꺼냈다.
***
“이번이 몇 번이지?”
변경백은 검을 털며 물었다. 가문의 보검에 묻은 붉디붉은 피가 바닥을 적시는 가운데, 피의 주인이 대답했다.
“뭐?”
“시간을 가지고 노는 게, 몇 번째냐고 물었네.”
양복을 입은 흑인, 이름보다 첫 번째 대행자라는 칭호로 더 자주 불리는 남자는 변경백과 길게 잘린 양복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부터…?”
변경백을 보는 그의 눈에는 황당함을 넘어선 경악이 가득했다. 정작 변경백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쪽의 발목을 자르려 했을 때부터.”
“….”
대행자는 입술을 씹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변경백은 그와 마주친 순간부터 발목을 노렸으니까.
역시 명불허전인가. 감탄스러운 속마음과 달리, 대행자의 입에서는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오만하군. 변경백. 그 오만은 용사 혈통의 특징인가?”
변경백은 검을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친애하는 나의 동료, 마하간은 이런 말을 남겼다네. 하수는 고수의 말을 오만으로 듣는 법.”
“….”
“더 할 말 있는가?”
없었다. 대행자는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후방을 확인했다. 마나로 강화된 그의 시선으로, 이쪽을 감시하고 있는 프랑스의 초인들이 보였다.
병신 같은 프랑스군, 좆 같은 OAS.
녀석들은 나름 포위망을 유지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깟 포위망은 변경백이 원하면 언제든 성긴 그물처럼 찢어질 게 분명했다.
물론, 포위 후 고화력을 퍼붓는 게 일반적인 대 초인 전략인 건 맞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초인일 때 먹히는 전략이었다. 변경백은 ‘일반적’이란 수식어를 초월한 존재였다.
멍청한 동맹은 유능한 적군만큼이나 위험한 법이었다. 대행자는 프랑스에 희망을 거는 대신, 홀로 시간을 끌기로 했다.
대행자가 말했다.
“변경백, 그 여유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하군. 그거 알고 있나? 프랑스군이 당신의 위치를 찾은 건 우연이 아니다.”
“….”
“호세 아기날도… 그가 당신을 안내했지.”
변경백의 눈썹이 슬쩍 휘어졌다. 대행자가 원하는 반응이었다.
“당신의 팬으로서 꼭 듣고 싶군. 제자에게 배신당한 기분이 어떻지?”
명백한 도발. 대행자는 날아올 공격에 대비해 근육을 긴장시키고, 마음속 권능의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변경백은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지적하자면, 호세는 내 제자가 아닐세.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협박 당한 사람을 배신자로 몰 정도로 파렴치하지 않다네.”
너희와는 다르게 말이지.
대행자는 변경백의 뒷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부끄러움은 없었다. 변경백만 한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선, 협박보다 더한 수단도 허용되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변경백이 이쪽의 사정을 전부 눈치챈 건 예상외였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면, 왜 프랑스군과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던 거지?
대행자는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느낌 때문에 작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대행자는 심호흡하며 발끝에 마나를 모았다.
그리고 변경백이 검을 들고, 프랑스군의 포가 이쪽을 겨눈 순간.
“잠깐!”
변경백의 바로 옆으로, 제3의 인물이 등장했다.
마치 포탄이 날아온 것처럼 길게 흙먼지를 풍기는 그는 구릿빛 피부에 기다란 코, 그리고 선글라스 너머로 보일 정도로 탁한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포시스?”
탈주한 3번 대행자, 온 미군이 쫓고 있는 녀석이 왜 하필 여기에??
1번 대행자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건 말건, 포시스는 변경백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등장을 미리 감지한 건지, 변경백의 검은 정확히 그의 얼굴을 겨누고 있었다. 당장 검에 힘을 주면 머리가 두 쪽날 위치.
포시스는 검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무시한 채 말했다.
“변경백, 당신께 전할 말이 있습니다.”
“….”
“미끼는 실패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전하면 이해하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직후, 변경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프랑스군에게 무차별 포격을 당할 때도 짓지 않은 표정이었다.
***
누가 말했던가? 복수의 끝은 허무뿐이라고.
여명은 그 말 속에 담긴 뜻을 이해했다. 복수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원수와 마찬가지로 손에 피를 묻혔으니,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누가 말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중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가 한 말은 틀렸으니까.
그래, 복수를 끝냈음에도, 여명은 어떠한 허무도 느끼지 않았다.
그가 느끼는 건 기쁨과 무거운 피곤, 그리고 짙은 그리움이었다.
원수를 죽인 기쁨, 연이은 전투로 인한 피로, 청소부들을 향한 그리움.
그 모든 감각이 하나가 되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여명은 그 무게를 견디는 대신, 그대로 털썩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는 결계의 어둠을 올려다보며 여기까지 오면서 겪은 모든 일을, 모든 인연을 되새겼다.
장만 어르신, 세티, 성녀, 미리, 네티, 살로메, 스승님, 드워프 등등….
모두가 너무나 소중한 인연이었다. 당장 목숨을 바쳐도 아쉽지 않을 만큼 소중한 인연.
앞으로 남은 그의 인생은 전부 그들을 위해 쓸 생각이었다.
한국을 정상화하고, 성도에서 성녀를 빼앗고, 엘프들을 돕고… 절대 심심할 일 없는 미래를 생각하면서,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아, 물론, 별로 소중하지 않은 인연들도 있었다.
파순이나, 빨갱이들 같은 거.
녀석들과도 언젠가 매듭을 지어야겠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었다.
지금은 쉬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여명은 누운 자세 그대로 인벤토리를 열어 휴대폰을 꺼냈다. 혹시라도 다친 동료가 없는지부터 확인을…?
‘…?!’
그때, 뭔가가 여명의 감각을 찔렀다.
만탑산을 둘러싼 결계와 연결된 감각.
‘…무언가 들어왔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었다. 단순히 거대하다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뭐지? 상념을 지운 여명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결계 바깥에 있는 데스나이트들을 인벤토리로 회수하는 일이었다.
그다음은 결계를 움직여 스승님과 프레아 칸을 불러올 생각이었다.
대체 누가 이곳에 침입한 지 모르겠지만, 세 사람이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