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39)
을 위한 세계는 없다-739화(739/817)
EP.739 닉슨 쇼크. (5)
***
아샤, 머큐리 시티의 차원문에서 29KM 떨어진 포장도로.
하늘 위에서 지평선을 바라보던 알파 원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숲에서, 도시로 향하는 금빛 눈동자의 남자가 보였다. 알파 원은 남자의 바로 위까지 날아가 입을 열었다.
“변경백.”
다음 순간, 변경백이 발을 멈췄다. 겉으로는 피 한 방울 뭍지 않았으나, 그에게선 옅은 피 냄새가 났다.
알파 원이 물었다.
“이제와서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
“제가 뭐, 비난하려는 건 아니고, 진짜로 궁금해서 그럽디다. 죽일 거라면 변경백 전쟁이나, 핵 맞은 뒤에 죽였어야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이제서야 피를 보는 겁니까?”
변경백은 말없이 검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렸다. 알파 원은 뒷짐을 풀며 주먹을 쥐었다.
“바게트 놈들이 드디어 선을 넘은 겁니까? 녀석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
“거, 뭐라고 말 좀 해보십쇼. 알고 있잖습니까. 당신이 차원문을 넘는 순간, 무수한 민간인들이 죽을 겁니다. 위정자들은 차원문과 그 주변의 시민들을 모조리 죽이는 한이 있어도, 당신이 지구를 돌아다니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알파 원은 후우- 한숨을 쉬며 물었다.
“변경백의 맹세에는 분명, 무고한 자를 죽이지 않겠다는 내용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맹세를 어기실 생각입니까? 아니면 치매라도 걸린 겁니까?”
맹세를 운운하고 나서야, 변경백이 입을 열었다.
“내가 죽인 건 군인뿐일세.”
“아직까지는 그렇지요. 하지만 이 선을 넘는 순간, 그런 구분은 사라질 겁니다.”
“….”
그러자 변경백은 뭔가를 고민하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알파 원 또한 별말 없이 대답을 기다렸다.
여기서 시간을 끄는 만큼, 대피하는 민간인의 숫자도 늘어날 테니까.
아무튼, 한참과 잠시 사이의 애매한 시간이 지난 직후. 변경백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맹세 이전에… 의무가 있네. 내 평생 짊어질 줄 몰랐던 의무….”
“…의무? 무슨 의무 말입니까?”
“아버지의 의무.”
“…??”
알파 원이 무어라 더 묻기도 전에, 변경백이 검을 들며 말했다.
“알파 원. 나머지 빅 쓰리 두 명을 호출하게. 셋이 나와 싸우면, 차원문을 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네.”
그러자 알파 원의 눈썹이 길게 휘어졌다.
“펜타곤이 이미 호출했습니다만… 우리 셋을 동시에 상대할 생각이십니까? 자살이라면 훨씬 온건한 방법이 있으셨을 텐데요.”
변경백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중요한 건 내 목숨이 아니라, 자네들의 목숨이지. 운명은 절대 자네들을 포기할 수 없을 테니.”
“….”
“이제, 시작하겠나?”
알파 원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저 멀리서 자신을 찍고 있는 방송용 헬기를 바라봤다.
평소라면 감히 겁도 없이 촬영질이냐며 빔을 쐈겠지만… 그는 헬기를 내버려 둔 채 땅에 착지했다. 아무래도, 이번 싸움은 보는 눈이 많아야 할 것 같았으니까.
“…좋습니다. 시작하시죠.”
***
“일어났어?”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여명은 눈을 떴다.
대체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건지 모르겠지만, 온몸이 찌뿌둥했다. 그가 본능적으로 크게 기지개를 켜자, 과일을 깎고 있던 세티가 픽 웃었다.
“잘 잤어?”
“응. 오랜만에 푹 잤어… 근데,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거야?”
세티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대충… 이틀하고 두 시간 정도?”
“….”
그렇게나 오래? 놀란 여명이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자, 낯선 병실이 보였다. 복잡한 의료 기기와 분홍색 약물, 그리고 과일 바구니가 놓인 공간.
놀란 여명이 눈을 깜빡거리자, 세티가 그의 입에 자른 사과를 넣어주며 말했다.
“널 위한 전용 중환자실이야. 구조할 땐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처음에는 죽는 줄 알았다니까.”
“….”
“성녀는 막 울고, 라쉬크는 자기가 수술하겠다고 난리를 치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상황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여명은 입에 문 사과를 씹어 삼킨 뒤 대답했다.
“고마워.”
“고마우면 뭘 해야 하죠?”
세티는 보란 듯 볼을 내밀며 말했고, 여명은 픽 웃으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짧은 감촉, 긴 웃음.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길 잠시. 세티가 과일 접시를 내려놓고 아래에서 얇은 서류 뭉치를 꺼냈다.
“이거 읽어봐.”
“…이게 뭔데?”
“기자회견 대본.”
“…기자회견?”
여명이 서류를 슬쩍 들춰보는 가운데, 세티가 설명했다.
“나라 전체에 그 난리가 났는데, 아무 일 없었겠어? 대통령이 나서서 쿠데타를 종식하고 문제를 다 처리했다고 했지만, 쿠데타랑 사상자는 어떻게 숨길 수가 없잖아.”
“….”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 하나 접으며 말했다.
“겸사겸사 중지된 올림피아 덕분에 외교적으로 압박받고 있고, 그 와중에 외교부는 망했고, 도와줄 마탑은 공범 취급을 받고 있고, 교단도 혼란스럽고….”
마지막 검지 하나를 남겨둔 세티는, 그 검지로 여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엇보다, 여명, 네가 너무 큰 관심을 받았어. 용을 타고 전국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모습이 오죽 많이 찍혔어야지. 입이 싼 사람들은 벌써 너를 신시대의 용사라고 부르더라.”
“….”
“오죽하면 한국 정부의 해명보다, 네가 깨어나서 하는 말이 더 중요하다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야.”
그래서 기자 회견인가. 여명은 한국 정부와 종말 교단, 그리고 자신에 대해 길고 그럴싸한 변명이 적힌 대본을 훑었다.
“그래서, 기자 회견은 언제 하면 돼?”
“원하면 언제든지. 이미 병원에서 반쯤 숙식하는 기자들이 수십 명이야.”
“….”
“외신 기자들이라 쫓아낼 수도 없고… 용사 파티도 다들 기자 피하느라 고생이라니까.”
성녀는 하루종일 투명 망토 쓰고 있어. 세티가 웃으며 덧붙였다. 여명은 대본과 그런 세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지금 바로 하자.”
“응?”
“기자회견 말이야. 지금 당장 기자들 모아줘.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게 좋잖아.”
“하지만 여명, 너 몸이….”
여명은 보란 듯 팔뚝에 힘을 줬다. 하지만 세티를 안심시키지는 못했는데, 다음 순간 그의 코에서 주륵, 코피가 흘러내린 까닭이었다.
“….”
몸에 힘 좀 줬다고 실핏줄이 터진 건가? 여명은 무안함을 숨기려는 듯 재빨리 코피를 닦은 뒤, 변명을 덧붙였다.
“뭐, 기자회견에서 힘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반대해도 할 거지?”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입장 표명은 빠를수록 좋을 테니까.”
세티는 부정하는 대신,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잠깐만 기다려, 옷 챙겨올 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명이 인벤토리에서 정장을 꺼냈다. 아주 옛날에, 만주에 처음 갈 때 세티가 사줬던 캐주얼한 정장이었다.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평생 가지고 있어야지. 네가 처음으로 사준 옷인데.”
“….”
세티는 무어라 대답하려다가, 애꿎은 사과를 씹었다. 아삭, 아삭- 사과 소리를 따라 세티의 볼이 선물용 사과만큼이나 붉어지길 잠시.
여명이 환자복을 벗는 걸 본 세티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기자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병실에서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 병원 1층에서는 난리가 났으리라.
아무튼, 옷을 전부 갈아입은 여명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가실까요?”
세티는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기 무섭게 우당탕! 문에 딱 붙어 있던 사람들이 안으로 넘어졌다.
성녀와 살로메, 네티를 비롯한 처제들과 라쉬크, 심지어 파순까지.
“….”
여명이 한데 뭉쳐 바닥에 쓰러진 소녀들을 내려다보길 잠시. 그녀들은 아무 말 없이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장 먼저 일어난 성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여명, 몸은 좀 어때?”
“…나야 괜찮지. 성녀 너야말로, 괜찮아?”
한 명도 아니고 다섯 명한테 깔렸잖아. 여명이 애써 뒷말을 참자, 성녀가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안 괜찮아, 넘어질 때 가슴부터 떨어졌… 아니, 이 이야기는 됐고!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막, 수명이 깎인 거 같다던가, 그런 거 없지?”
여명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없지.”
“….”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걱정 끼쳐서 미안해.”
“여명, 너는 진짜….”
성녀는 못 참겠다는 듯 여명을 끌어 안으려 했다. 다행히 사이에 있던 세티가 그녀의 몸을 막았다.
“애정 표현은 기자회견 끝난 뒤에.”
뒤에 서 있던 네티가 아쉬운 표정을 짓건 말건, 일행은 병실 밖으로 나갔다. 기다란 병원 복도를 넘어 계단을 내려갈 때쯤, 살로메가 가장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기자회견장은 병원 1층에 준비 중이야. 대본은 다 외웠어?”
“아직. 다 외워야 하는 거야?”
“그야, 지금 쓰인 건 누가봐도 대본이니까? 남이 쓴 걸 읽는 느낌을 주면 안 되지.”
남이 쓴 것 같다…? 여명은 다시 한 번 대본을 훑었다.
‘오해하시는 바와 달리 저는 용사가 아니며, 머리색과 눈색은 혼혈에 의한 우연일 뿐입니다.’
‘기밀이라 모든 걸 말해드릴 순 없지만, 오래전부터 김규원 대통령님과 함께 한국 내의 종말 교단을 쫓고 있었습니다.’
‘올림피아가 중지된 건 매우 유감입니다. 부디 빠른 시일 내로 경기가 재개되길 바랍니다.’
과연, 다른 사람이 보면 남이 쓴 것처럼 느껴지는 대본이었다. 실제로 남이 써준 대본이기도 했고.
어쨌거나, 여명은 대본을 손에서 흔들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히틀러만큼은 아니더라도, 연설로 실망시키진 않을 테니까.”
“야!”
살로메가 빽 소리치며 여명의 다리를 걷어차길 잠시. 여명은 1층이 내려다보이는 계단에서 걸음을 멈췄다.
대형 병원 1층 로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천여명! 천여명이다!
카메라부터 드는 기자들.
-용사이시여, 우리를 재앙에서 구원하시고….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대뜸 기도를 날리는 사람들.
-….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외국의 초인들까지.
혼잡한 풍경 속 무수한 시선을 마주한 여명이 꿀꺽, 침을 삼키는 순간. 네티가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형부 화이팅.”
“….”
뭔가 대단한 말은 아니었지만,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는 일행들을 남겨둔 채, 당당하게 1층 로비에 준비된 연단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걸음이 로비로 향할수록,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그렇게 카메라의 셔터 소리조차 작아질 때쯤.
여명은 연단에 올랐다. 연단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군인이 마이크를 켜며 말했다.
-천여명 선수의 성명이 있겠습니다. 현재 천여명 선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으므로, 따로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곧 여명이 연단 앞에 섰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란스러운 침묵.
잠시 사람들의 얼굴을 훑은 여명은, 침묵을 밀어냈다.
말이 아닌, 손에 들린 대본을 북북 찢는 소리로.
나는 대본을 읽지 않는다-는 뜻이 담긴 퍼포먼스였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 셔터가 다시 빛을 내뿜었다.
찢어진 대본을 바닥에 내버린 여명은, 그대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 시대의 용사. 천여명입니다.”
그 순간, 세상이 멈췄다.
***
여명은 무덤덤하게 정지된 세상을 훑었다.
모든 게 색을 잃고 멈춰 있었다. 계단에서 이쪽을 바라보던 세티도, 놀란 기자들과 경악한 군인들도.
덕분에, 움직이는 인물이 더 자세히 보였다.
“준비된 무대를 망치는 최악의 대사였어.”
“….”
“그리고 그거, 표절이잖아.”
병원 구석에서 이쪽을 구경하고 있던 여자. 비교적 작은 키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정지된 세상에서 홀로 움직이는 그녀는 그 무엇보다도 선명했다.
여명은 그녀가 연단 앞으로 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여명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꺼낸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알았니?”
여명은 세티의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파순.”
“…?”
“저 새끼, 내 여자 아닙니다.”
“뭐…?”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가, 탁! 소리 나게 이마를 짚었다.
“이런… 목숨을 걸고 싸우길래, 당연히 연인인 줄 알았어.”
“남녀가 함께한다고 다 사귀는 사이는 아닙니다.”
여명이 지적하자, 여자가 한 번 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거 치곤 쟤 빼고 다 사귀지 않았니? 심지어 처제들도 건드렸으면서.”
“….”
“어때, 정곡을 찔렀지?”
여명은 그렇노라 대답하는 대신, 연단에 삐딱하게 몸을 기댔다.
“헛소리는 됐고, 그래서 넌 누구냐.”
“쓰러지기 전에 기억이 하나도 없을 텐데, 예상보다 훨씬 침착하구나… 냉정하기도 하고. 당연히 개망나니일 줄 알았는데. 의외인걸.”
그렇게 말한 여자는 자신의 관자놀이에 양손을 올렸다.
그리고 여명이 무어라 반박하려는 순간, 뽁! 대뜸 목에서 머리를 뽑아냈다. 케이크에서 초를 뽑는 것처럼 쉽게.
?!
여명의 눈썹이 휘어지는 사이, 뽑힌 머리가 일렁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렁거림 사이로 여명이 아는 얼굴이 드러났다.
성녀가 떠오르는 새하얀 머리카락, 축 처진 부드러운 눈매와 병든 것 같은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인.
어딘가 세티와 닮은 그녀는, 머리 없는 사람 손 위에서 말했다.
“하얀… 양?”
[그런 칭호로 불리기도 하지. 하지만 칭호보다는 정확한 이름으로 불러주겠니?]“….”
[내 이름은 김하늘이란다.]직후, 여명은 그 어느 때보다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잠깐, 왜 그쪽 이름만 멀쩡한 겁니까?”
하얀 양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
[…?]짧은 침묵.
침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머리만 남은 하얀 양- 아니, 김하늘은 살짝 난감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궁금한 게 그거니?]여명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히 김세크햄이나, 김하티 같이 이상한 이름이 나올 줄 알았는데… 하늘? 너무 평범하잖습니까.”
[….]“물론, 세티나 네티란 이름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이건 좀… 불공평한 거 같아서요.”
그가 말끝을 흐리자, 김하늘은 큭큭 웃었다. 여명의 말이 웃겨서? 아니, 말을 돌리는 척하며 기억을 떠올리려 하는 여명의 행동 때문에.
이 상황에서도 뭔가를 하려는 의지는 높이 살만했다.
‘운명 앞에서도 그럴 수 있을 지 확신할 순 없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김하늘은 웃음을 멈추고 정지된 세상을 움직였다.
곧 정지된 세상이 쩌억- 갈라지며 여명이 떠올리려던 순간을 비췄다.
만탑산 지하 결계 위에 우뚝 선 리처드 닉슨과 그런 닉슨을 마 주보는 홍세티.
“…!”
두 사람을 보자마자 기억을 되찾은 여명은 곧바로 연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곧장 세티에게 달려갔으나, 그는 몇 걸음 더 걷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벽과 충돌해야 했다.
김하늘이 말했다.
[제부, 그렇게 열 낼 필요 없어 저건 영상… 정확히는 결계가 보여주는 심상에 불과하니까.]“…실시간입니까?”
[응.]직후, 여명의 의지가 심상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바깥으로 나갈 기세였고, 힘과 의지 또한 충분했다.
김하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잠깐, 제부. 잠깐만. 이대로 나가봤자 조금 전처럼 패배할 뿐이야. 알잖아?]“….”
[그리고 이곳의 시간은 현실과 다르게 흐르니까… 잠깐만 설명을 들어주겠니? 늦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명은 곧장 허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결계의 마나를 내버려 뒀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라도 결계를 해제할 수 있도록 의지와 마나를 곤두세운 채 다시 연단으로 돌아갔다.
털썩, 연단 난간에 앉은 그가 말했다.
“말씀하시죠.”
김하늘을 향한 그의 태도는 깍듯했지만, 금빛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김하늘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진짜로 내 동생을 좋아하는구나? 언니로서 참 뿌듯한걸.]“….”
[여자가 많아서, 그냥 몸만 노리는 관계인 줄 알았어.]여명은 대답 대신 힐끗, 세티의 모습을 확인했다. 당신의 잡소리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뜻이 담긴 행동이었지만, 김하늘은 동생의 연인을 구경하는 언니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대화는 나중에 하는 게 어떻습니까.”
여명은 솔직하게 말했다. 김하늘 또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럴까? 그러면…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겠네. 저기 보이는 닉슨은, 운명의 가호를 받는 존재란다.]“…?”
[네가 그분에게 간택 받았듯, 닉슨 또한 운명의 선택을 받았지.]대화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큰 탓일까, 여명은 눈을 깜빡였다.
“운명…이요?”
[응, 운명. 드워프 왕을 자살에 가까운 죽음으로 몰아넣고, 마탑주의 제자를 미치게 만들었으며, 종말 교단이 세상을 불태우도록 종용한 존재.]“….”
여명은 닉슨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정지된 대통령의 모습이 뭔가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운명은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단다. 죽음보다도 더한 방법으로 고통을 주고, 이용하지.]“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이라면…….”
[…시나리오의 일부로 만드는 것.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음, 작가가 남겨 놨던 미래의 스토리. 기억하니? 거기에 나오는 적들은?]작가의 노트. 그것을 떠올린 여명은 조금 진지하게 대답했다.
“…기억합니다.”
[노트를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한 적 없니? 튜토리얼 보스 부줌, 1장 보스 피혁 사제, 2장 보스 엘프 사냥꾼 후안, 7장의 구더기 공주… 어떻게 적이 척척 순서대로 준비될 수 있을까?]“….”
[눈치챘니? 시나리오란, 운명이 자신의 적들을 주인공에게 먹이는 순서야. 맞춤 식사라고 해야 할까… 덕분에 주인공은 항상 시련을 겪으면서도 죽지 않고 성장할 수 있단다.]어느정도 예상하던 일이라 그런가, 여명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역으로 질문했다.
“그걸… 당신이 대체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김하늘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분이 누군지, 여명은 곧바로 알아챘다.
“…미그니움.”
[미그니움… 미그니움… 그분다운 이름이네.]김하늘은 혓바닥 위로 그 이름을 몇 번 더 되새기다가, 갑자기 주륵-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쨌거나, 우리 자매는 그분에게 바쳐질 제물 중 하나였단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을 비롯해 여러 존재들이 두루 좋아할 부분을 쑤셔 넣어 만든 종합 제물 세트지.]“….”
[우리 전원이 용사의 피를 넣어 만든 가짜인 이유가 뭔지 아니? 그분은 용사의 피를 좋아하시기 때문이야. 물론 우리 핏줄에 흐르는 용사의 피는 흐릿하지만… 질보단 양이라고, 우리는 머릿수가 다섯이나 있잖아?]진실한, 그렇기에 역겨운 이야기였다.
여명이 정색하고, 김하늘의 눈에서 흐른 피눈물이 턱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운데, 그녀가 재차 말을 이었다.
[슬퍼할 필요 없단다. 덕분에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까. 그분께서 내게 설명하는 역할을 허락하셨거든.]“….”
[덤으로, 내가 각하의 옆에서 운명에 대해 보고 들은 게 있는 덕분이기도 하고.]여명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러면 저 닉슨은… 시나리오를 망친 절 죽이기 위해 운명이 보낸 겁니까?”
[절반쯤은?]나머지 절반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여명이 의아해하자, 김하늘이 웃었다. 피눈물과 뒤섞인, 어딘가 섬뜩한 미소였다.
[제부는… 시나리오를 너무 많이 망가트렸어. 주인공의 기연을 독차지하고, 죽어야 할 사람을 살렸지. 거기다 멸망해야 할 곳들을 구원했고.]만주, 드레이테리얼, 황도, 마탑, 성도… 여명이 자신이 구한 곳을 떠올리는 사이, 김하늘이 말했다.
[그 뒤틀림을 바로 잡기 위해, 운명이 선택받은 자를 깨운 거야.]정말로 무덤에서 부활한 거라고? 여명은 저 멀리 닉슨을 보며 말했다.
“…나머지 절반은 뭡니까?”
[제부 때문에 깨어나긴 했지만, 닉슨은 딱히 제부를 죽이기 위해 온 게 아니야. 아직 제부가 운명을 바꿨다는 사실조차 모르겠지. 만약 알고 있었다면… 제부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전부 죽였을 테니까.]“그러면….”
[닉슨이 죽이러 온 건 독자야. 정확히는, 마왕이 된 독자. 운명의 틈바구니에서 회귀를 따라다니는 독자가 마왕의 힘까지 얻어 다음 회차로 넘어온다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테니까.]“잘… 이해가 가질 않는데요. 그러면 독자를 죽인 제게 상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제부가 그 힘을 이어받았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어째서일까? 그 순간, 여명의 머릿속에는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어 다행이라던 닉슨의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