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44)
을 위한 세계는 없다-744화(744/817)
EP.744 복수 너머에서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이 걷던 길이 계단인지,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한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
“일어났어?”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여명은 눈을 떴다.
대체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건지 모르겠지만, 온몸이 찌뿌둥했다. 그가 본능적으로 크게 기지개를 켜자, 과일을 깎고 있던 세티가 픽 웃었다.
“잘 잤어?”
“응. 오랜만에 푹 잤네… 근데,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거야?”
세티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대충… 이틀하고 두 시간 정도? 기절하기 전에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더 기절했네.”
“….”
딱 예상한 만큼 잤네. 여명이 뚜둑- 목을 풀며 주변을 둘러보자, 낯선 병실이 보였다. 커다란 TV와 냉장고, 그리고 과일 바구니가 놓인 VIP용 병실.
뭐지. 묘하게 익숙한데.
여명이 눈을 찌푸리는 사이, 세티가 그의 입에 자른 사과를 넣어주며 말했다.
“널 위한 전용실이야. 입원할 때 들어보니까, 생각보다 상태가 아슬아슬했다더라. 의사가 수술하자고 했는데,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어. 주가시빌리가 걸리면 큰일이니까.”
“….”
이것도 들어본 거 같고.
“그 외에 뭐 대단한 일은 없었어. 성녀가 한밤중에 몰래 이 병실에 들어오려다가 잡히고, 라쉬크가 정부한테 가짜 청구서로 사기 치다가 걸리고… 뭐, 그 정도?”
어이구. 상황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여명은 입에 문 사과를 씹어 삼킨 뒤 대답했다.
“…고생했어.”
“자, 그러면 고생한 연인을 위해선 뭘 해야 하죠?”
세티는 보란 듯 볼을 내밀며 말했고, 여명은 픽 웃으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짧은 감촉, 긴 웃음.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길 잠시. 세티가 과일 접시를 내려놓고 아래에서 얇은 서류 뭉치를 꺼냈다.
“아, 그리고 이거 읽어봐.”
“이게 뭐… 아, 기자회견 대본이구나.”
“응? 어떻게 알았어??”
서류를 든 세티의 눈이 동그래지는 가운데, 여명이 말했다.
“나라 전체에 그 난리가 났는데, 아무 일 없었겠어? 종말 교단 문제도 있고, 쿠데타 후처리도 있고… 무엇보다, 내가 너무 큰 관심을 받았겠지. 아무리 분신이라지만 용 타고 전국을 돌아다녔으니… 뭐, 당연한 일이지.”
“….”
“아, 그리고 한국 상황도 좀 어렵지? 중지된 올림피아 때문에 외교적 압박도 상당할 테고, 그 와중에 외교부는 망했고, 도와줘야 할 세력들은 공범 취급이나 안 받으면 다행일 거고… 그렇지?”
“어… 그, 그렇지.”
여명이 청산유수로 떠들자, 세티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어떻게 다 아는 거야? 분명히 자는 걸 확인했는데… 기절하기 전에 다 생각해둔 거야?”
“꿈속에서 이거랑 똑같은 상황을 봤어.”
“…??”
“그리고… 아직도 꿈인 거 같네.”
그렇게 말한 여명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의 문을 열었다.
우당탕! 문에 딱 붙어 있던 사람들이 안으로 넘어졌다.
성녀와 살로메, 네티를 비롯한 처제들과 라쉬크… 그리고 파순까지.
여명은 한데 뭉쳐 바닥에 쓰러진 소녀들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게 하얀 양이 보여줬던 거짓 꿈과 똑같았으니까.
“어… 여명? 이건 말이지….”
가장 아래 깔린 성녀가 무어라 변명하는 가운데, 여명은 손을 뻗어 파순의 뒤통수를 잡아 일으켰다.
설마 자신부터 일으킬 줄 몰랐던 걸까, 파순은 똥그래진 눈으로 말했다.
“뭐야?”
“주먹.”
여명은 그대로 주먹을 휘둘러 파순의 턱주가리를 후려쳤다.
빠각! 파순의 턱이 돌아가는 소리와 동시에, 꿈이 무너지지… 는 않았다.
“…?”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파순과 놀란 일행들, 그리고 얼얼한 주먹. 여명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꿈이 아니었네?”
우연인가, 아니면 하얀 양이 미래를 보여준 걸까?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여명은 턱을 부여잡은 파순에게 사과했다.
“미안, 꿈인 줄 알았어.”
“이, 이 미친 새끼가… 지금 사람을 패놓고 무슨 개소리를….”
“대신 부탁 하나 들어줄게.”
“어? 정말?”
“정말로.”
여명은 닉슨과 함께 싸워준 파순을 떠올리며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도와준 은혜를 외면할 정도로 모질지 않았-
그때, 파순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러면 나랑 같이 워싱턴을 박살 내자! 네가 새로운 서기장이 되면 가능… 억!”
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명이 녀석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은혜는 개뿔.
***
닉슨은 눈을 떴다.
숨을 들이켜는 것과 동시에, 산업화되지 않은 아샤의 신성한 공기가 그의 폐를 가득 채웠다.
초인의 후각이 옅은 화약과 매연의 냄새 또한 잡아냈지만, 닉슨은 개의치 않았다.
마왕의 기운을 느끼고 한국으로 가던 순간과 현재 사이에 기억이 흐릿했지만, 역시나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건 오직 하나, 그의 손에 검은 구슬이 들려 있다는 사실뿐.
“도돌이표가 움직였군.”
잠시 손바닥 위의 구슬을 바라보던 그는 곧 가까운 돌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구름 사이로 프랑스의 전투기가 지나가길 잠시.
타앗! 양복 차림의 흑인이 닉슨의 앞에 착지했다. 거의 날아오는 속도로 달려온 탓인지, 그가 멈춘 자리에는 깊은 발자국이 남았다.
닉슨은 숨을 헐떡이는 흑인을 향해 말했다.
“아팔리우나. 네가 첫 번째가 되었나.”
순식간에 자세를 다잡은 흑인은 탁! 소리 나게 경례를 올리며 대답했다.
“예, 대통령님. 제가 첫 번째 대행자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은 죽었지만, 살아남은 녀석들은 펜타곤에 소속됐습니다. 한데….”
말끝을 흐린 흑인은 대통령의 손을, 정확히는 손바닥 위에 놓인 구슬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그것이… 독자의?”
닉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행자의 눈이 흥분으로 떨리는 가운데, 대통령은 별것 아니라는 듯 툭- 그에게 구슬을 던졌다.
대행자가 기겁하며 구슬을 받아드는 사이, 닉슨이 말했다.
“캐피톨에 앓던 이를 뽑았다고 전해라.”
캐피톨. 그건 로마 시내의 일곱 언덕 중 가장 신성하게 여겨졌던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유래된 미국의 지명, ‘캐피톨 언덕’의 줄임말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캐피톨 언덕 위에 지어진 건물은… 그 이름도 유명한 미국 국회의사당이었다.
“펜타곤이나 룸 101이 아니고, 캐피톨입니까?”
“그래, 캐피톨이다.”
“…알겠습니다.”
한 번 더 경례한 첫 번째 대행자는 아공간에서 두꺼운 금고 가방을 꺼냈다. 달깍! 두꺼운 잠금장치가 열리고 가방 안에 구슬이 놓이는 걸 본 닉슨은 턱을 괴며 물었다.
“다음 대통령 선거는 어떻지? 공화당이 우세인가?”
역시 공화당 출신 4선 대통령답다고 할까, 시작부터 선거 이야기였다. 대행자는 가감 없이 대답했다.
“민주당 쪽에서 여러 잡음이 있는 덕분에 공화당이 살짝 우세하지만, 거의 반반이라고 봅니다.”
“반반이라.”
닉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대행자가 덧붙였다.
“민주당 쪽 후보가 꽤 걸물입니다. 경제 정책도 괜찮지만, 특히 쇼맨십이 뛰어납니다. 클린턴의 유니콘 말살 정책 이후 생긴 민주당의 문란한 이미지를 돌파하기 위해 직접 기른 유니콘을 타고 다니는….”
“잠깐, 유니콘 말살?”
“아,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돌아가셔서 모르시나 보군요. 글쎄, 빌 클린턴이 입으로 하는 건… 흡!”
대행자는 설명을 끝내지 못했다. 그 순간, 대행자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으므로.
닉슨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익숙한 듯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봤다. 인공위성이 떠 있을 법한 높은 하늘을.
곧, 떨림이 멈춘 대행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룸 101의 연락입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예, 첫 번째 문제는… 도돌이표에 새로운 세이브 포인트가 생겼습니다.”
“세이브 포인트…? 새로 나온 용어인가?”
대행자는 뒤늦게 닉슨이 게임 세대가 아니란 걸 상기했다. 그는 조금 더 풀어서 설명했다.
“무언가 도돌이표를 막았습니다. 앞으로는 시간을 돌려도… 오늘보다 옛날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흐음, 어쩐지. 너무 짧게 시간을 되돌렸다 싶었지. 운명의 주인이 한 짓인가?”
운명의 주인. 닉슨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자, 첫 번째 대행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닉슨은 짧게 되물었다.
“주인공?”
“거기까진… 아직 파악하지 못하셨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지금 운명의 구슬들이 너무 많이 모여있다 보니.”
“….”
“어쩌면 독자를 죽인 게 트리거가 됐을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독자는… 좀 특별하잖습니까.”
닉슨은 그 설명에 아무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저 굵은 눈썹이 씰룩거리다가, 흑인의 뒤편을 보며 말했다.
“첫 번째 문제라는 건, 두 번째 문제도 있다는 거겠지.”
“예, 현재 이곳으로…”
“…변경백이 왔군.”
닉슨이 뒷말을 가로챈 순간, 흑인이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
분명 조금 전까지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그의 뒤에는, 금색 눈동자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빌어먹을 프랑스 새끼들.
대행자가 재빨리 구슬이 든 가방을 아공간에 집어넣는 가운데, 변경백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오랜만이오. 대통령.”
친구에게나 할법한 말투. 그건 변경백 나름의 비꼼이었다.
비꼼의 반대편, 닉슨은 정치인 특유의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오랜만이군. 변경백.”
“죽은 대통령이 어쩌다 이런 곳까지 나들이를 오셨소?”
“자네도 알다시피, 지도자는 가끔 직접 나서야 할 때가 있거든.”
“죽은 뒤에도?”
“물론, 죽은 뒤에도.”
그렇게 대답한 대통령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던 첫 번째 대행자가 조심스레 뒤로 물러나는 가운데, 닉슨이 말했다.
“역으로 내가 묻고 싶군. 자네야말로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이렇게 나들이를 나온 거지?”
“….”
“밀랍 산맥에 처박혀 괴수들과 함께 늙어 죽는 게… 자네와 자네가 사랑하는 아샤인들을 위한 유일한 해법이었는데 말이지. 왜, 여태껏 자네를 찾지 않는 시민들을 보다 보니, 배알이 꼴리던가?”
닉슨은 말로 상대를 몰아붙이고, 화가 난 상대가 약점을 드러내는 걸 노리는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치판의 이야기. 상대는 정치인이 아닌 변경백이 아닌가.
지구와 아샤를 통틀어 가장 강한 자.
대행자는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연신 변경백을 힐끔거렸다. 그는 혹시라도 변경백이 검을 뽑을까, 잔뜩 몸을 긴장했다.
하지만 이어진 변경백의 말을 듣자마자, 맥이 탁 풀렸다.
“자식을 보러왔소.”
고자가 자식을? 대머리가 헤어스타일을 고민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말이었다. 대행자는 설마 변경백이 방심을 유도하려고 이러는 건가 싶어 주먹을 꽉 쥐었다.
그에 비해 대통령은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지. 혼자 늙어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들지. 하지만 자식을 보기엔 자네는 좀 늦지 않았나?”
“….”
“아, 이건 어떤가? 내가 입양을 주선해주지. 용사의 혈통이 아닌, 아주 건강하고 순수한 미국의 아이를 키우는 거지.”
다음 순간, 변경백은 닉슨을 따라 빙그레 웃었다. 누군가와 닮은 미소였지만, 닉슨도 대행자도 알아채지 못했다.
가식적인 웃음 위로 웃음이 겹치고, 대행자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 한 방울이 턱 아래로 떨어진 순간.
두 초인은 동시에 정색했다. 먼저 입을 연 건 변경백이었다.
“내 원래 목적과 상관없이, 경고하겠소. 대통령. 다시는 아샤 땅을 밟지 마시오.”
닉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걸 정하는 건 자네가 아닌 제국 황제일 텐데.”
“변경백령이 사라진 순간부터, 황가를 향한 나와 가문의 의무도 함께 사라졌소.”
“…황제라도 죽이겠다?”
“그게 필요하다면.”
“….”
짧은 침묵.
묵직한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변경백은 거침없이 말했다.
“같은 의미에서, 지금의 나는 필요하다면 차원문도 넘을 수 있소.”
“… 내 귀에는 마치 선전포고처럼 들리는군.”
“그러면 선전포고로 들으시오.”
“….”
“지금 당장 시작하시겠소?”
닉슨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대행자를 보며 고민했다.
변경백을 여기서 처리할 수 있는가? 만에 하나 예상 외의 인물이 끼어들 가능성은? 대행자의 권능과 현재의 자신이라면 승률은…
그때, 지이잉! 그와 대행자 뒤의 공간이 반으로 갈라졌다. 일렁거리는 황금빛 차원문이 두 사람의 등 뒤에 드리웠다.
미국조차 겨우 몇 명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차원문.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변경백이 아니라, 독자의 구슬을 안전하게 미국으로 회수하는 것이다.
쯧. 겁쟁이 같은 예언자놈.
짧게 혀를 찬 닉슨은 말아쥔 주먹을 풀었다.
“전쟁은 나중으로 미루지. 중요한 선거가 있어서 말이지.”
“….”
“괜히 도돌이표를 돌리지 말고, 가만히 있게. 그리고… 자네가 자식을 보길 간절히 기도하겠네.”
변경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검을 뽑을 것처럼 검 손잡이를 잡은 순간, 닉슨과 대행자는 어떠한 흔적이나 전조도 없이 차원문과 함께 사라졌다.
고독한 바람이 홀로 남은 변경백을 훑고 지나가는 가운데, 그는 저 멀리 승만 시티가 있는 방향을 보며 말했다.
“이것으로, 시간은 벌었다.”
***
“기자회견은 나중에 하자.”
발길질과 주먹질 끝에 파순을 병실 침대와 하나로 만들어준 여명이 꺼낸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일행들의 의견은 반으로 갈렸다.
기자들을 쏴버리지 않기 위해 고생하던 성녀는 당연히 그 의견에 찬성했다. 하지만 쇠미리는 기자회견을 먼저 하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는 법이에요. 기자회견을 늦출수록 여명을 향한 관심이 커졌으면 커졌지, 절대 줄어들지 않을걸요?”
의외로, 살로메는 성녀의 편을 들었다.
“그거야 평범한 상황일 때나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는 얼굴을 내미는 것부터가 관심을 끄는 행동이라고! 기자란 족속들이 얼마나 지독한데, 분명 여명에게 용사냐고 물어볼걸? 난 관심이 줄어들 때까지 숨기고 있는 게 맞다고 봐.”
요 며칠 기자들에게 시달린 걸까? 기자들을 언급하는 살로메의 목소리에는 조금 감정이 실려있었다.
어쨌거나, 그녀를 시작으로 다른 일행들도 저마다 의견을 내놨다.
네티와 막내는 그냥 기자 한 명 두들겨 패면 되지 않냐고 말했고, 라쉬크는 다 좋으니 돈이나 달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일행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고, 침대 위에 쓰러진 파순이 ‘미친놈들아, 구경만 하지 말고 의사 불러.’ 라고 말할 때쯤.
여명은 성녀와 살로메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반반씩 수용했다.
“기자회견은 다음에 정식으로 날짜를 잡고, 오늘은 그냥… 기자들 앞에 얼굴만 내밀자.”
그제야 세티가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네가 깨어난 걸 알면 기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건 기절해 있어도 똑같아. 지금은 미끼를 던져주고… 귀찮게 하는 방송사는 기자회견에서 제외한다고 하면 돼.”
이도 저도 아닌 판단이었지만, 동시에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기자들을 죽일 것도 아니고, 무작정 기다리게 하면 선을 넘는 놈이 나올 게 분명했다. 지금은 정식 기자회견 날짜를 예고하는 편이 나았다.
절대 ‘여러분, 이 시대의 용사. 천여명입니다.’ 라고 말한 게 쪽팔려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아무튼, 일행들은 여명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리고 다 함께 우르르 몰려다니면 시선을 끌 게 분명했기에, 그녀들은 아쉬움을 삼키며 병실을 떠났다.
남은 건 대외적인 연인이자 여명을 부축해줄 세티뿐. 병실을 나선 여명은 그녀의 도움을 받으며 병원 1층으로 향했다.
하얀 양의 꿈속과 달리, 병실 밖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간호사와 의사, 그리고 넘쳐나는 환자들까지.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비교적 상처가 가벼운 환자들은 병실 대신 복도에 늘어져 있을 정도였다.
“….”
여명은 그들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미처 구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느니, 조금만 더 힘냈으면 구할 수 있었느니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씁쓸함을 삼킨 여명은 얼굴을 가리고, 일부러 환자들을 피해 비상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여명을 알아본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 형이다!”
여명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를 향해 손가락을 드는 꼬마와 얼굴을 마주했다.
올림피아 경기장에서, 여명에게 이기고 오라고 했던 바로 그 꼬마.
다행히 다치진 않았는지, 멀쩡한 옷을 입은 녀석은 쪼르르 복도를 가로질러 여명에게 다가왔다. 졸졸거리는 꼬마의 발걸음을 따라 복도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여명은 도망가지도, 숨지도 않았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복도 곳곳에서 술렁거리는 가운데, 코앞까지 다가온 꼬마가 물었다.
“형! 이겼어요?”
여명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응, 이겼어.”
“잘했어요!”
활짝 웃은 꼬맹이는, 대뜸 주머니 속에서 사탕을 하나 꺼냈다. 포장지가 꼬질꼬질해진 딸기 사탕.
꼬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여명에게 사탕을 내밀었다. 그는 사탕과 꼬마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건?”
“상이에요! 엄마가 그랬거든요! 형은 상을 받아야 한다고!”
“….”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었던 여명은 사탕을 받았다. 그리고 포장지를 뜯어, 그대로 입에 넣었다.
“엄청… 맛있네. 고마워.”
“헤! 별말씀을!”
정말로 사탕만 주러 온 거였는지, 꼬마는 그대로 등을 돌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여명은 멀어지는 꼬맹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뒤에서 의외의 인물이 말을 걸어왔다.
“멋진 상이긴 하지만, 이걸로 만족하진 마라. 진짜 상은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익숙한 목소리. 그건-
“…장관님?”
김강혁 장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여명은 흠칫 놀랐다. 장관의 상태가 정상과는 거리가 먼 탓이었다.
옷 사이사이로 보이는 노골적인 수술의 흔적과 양손에 쥔 목발, 그리고 머리를 꽁꽁 싸맨 붕대까지.
특히 붕대는 거의 복면 수준으로 덮여 있었다. 그걸 본 여명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머리의 붕대는… 수류탄 파편이라도 맞으신 겁니까?”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정확히 말하자면… 뇌 속에 있던 금제가 터졌다.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걸 보면, 아마 내가 육성될 때 심어진 금제겠지.”
“….”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다. 난 운이 좋은 편이니까.”
“그런 거 치곤 상태가… 안 좋아보이십니다.”
“뭐, 두개골 중 일부가 사라지고, 뇌에 영구적인 장애가 남긴 했지만… 난 진심이다. 애국자 중 대부분이 각하의 제물이 되어 죽은 판에,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지.”
장관은 여태껏 보여준 적 없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먼저 간 애국단원들이 살려준 것 같다. 나중에, 조금 더 애국한 뒤에 오라는 뜻이겠지.”
그렇게 말한 장관은, 세티와 여명의 분위기가 무거워지기 전에 말을 돌렸다.
“아무튼, 상 이야기로 돌아가지.”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나라 살림도 어려울 텐데, 전 괜찮습니다.”
“아니, 어려운 상황이니 더더욱 상을 줘야지. 잘한 자에겐 상을, 못한 자에게는 벌을. 그건 조직 운영의 기초 중 기초다. 그리고… 이번 사태에서 너보다 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여명이 무어라 반박하기 전에, 장관은 왼손의 목발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일단 따라와라. 기자들보다 먼저 볼 사람이 있으니.”
“…대통령이요?”
“대통령께선 지금 과로 중이시다. 거의 3분 단위로 온 세상을 욕하고 계시지.”
“….”
그러면 누구지? 여명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오르는 가운데, 장관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교단의 마지막 생존자.”
“…예?”
“교단이 남긴 모든 유산… 우선 그것부터 챙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