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748)
을 위한 세계는 없다-748화(748/817)
EP.748 복수 너머에서 (5)
***
가장 먼저 손을 든 건, 성녀 바로 옆에 앉은 살로메였다.
“저기…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하지 않나요?”
“…가서 졸업할 때까지 공부하자고?”
“아니, 그래도 졸업장은 따는 편이 좋을 거 같고… 그, 뭐시냐… 스쿨 라이프도 더 즐기고….”
괜찮은 의견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로드 하우 아카데미의 졸업장 아닌가. 지구에서 활동할 거라면, 로드 하우의 인맥은 큰 도움이 되리라.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여명 일행이 졸업장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다섯 신 교단의 성녀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마탑의 그릇, 귀쟁… 아니, 엘프 공주와 신성을 각성한 세티 모두 아카데미 졸업장의 권위 따위는 애초에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물론, 남녀 기숙사 담을 넘어 다니는 스릴과 자극이 있긴 했지만… 성녀는 인내라는 걸 아는 여자였다.
“좋아, 아카데미에 돌아가는 건 후보에 넣자. 우선 순위는 나중에 정하고.”
그러자 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에 마지막 기연이 하나 더 남긴 했지만… 급할 필요가 없죠. 그건 어차피 우리만 아는 거니까요.”
“그러면 다음은… 음, 네크로맨서를 마무리하러 간다?”
이번에는 네티가 손을 들었다.
“어… 네크로맨서 앞에서 그런 이야기 해도 되나요?”
네티의 하늘색 눈동자는, 구석에서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는 네크로맨서를 향하고 있었다.
성녀 또한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작 딜라의 반응은 그녀들의 예상과 달랐다.
“미국 내 네크로맨서의 비밀 기지는 워싱턴 D.C, 뉴욕 맨해튼, 그리고 잭슨빌에 있습니다.”
“….”
“남미 기지는 제가 다 알지 못해서… 일단 아는 것부터 말할까요?”
“아, 아니, 거기까진 신경 써주지 않아도 괜찮아….”
대체 샌드위치가 뭐길래. 네티가 새삼 샌드위치의 위력에 경악하는 가운데, 쇠미리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그, 아샤의 공산주의자들과 만나보는 건?”
[으, 빨갱이 냄새.]조금 전에 당한 앙금이 남은 걸까, 용이 태클을 걸었다. 엘프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니, 뭐, 여명이 공산주의자가 되라는 건 아니고… 아샤를 어지럽히는 공산주의자들을 정리할 필요도 있고… 그… 여명을 차기 서기장으로 추대하려는 게 꼭… 나쁜 건 아니잖아요?”
“….”
“인민을 구하는 건 용사의 책무라고요….”
모두의 시선이 꽂히자, 미리디스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성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기각.”
“다수결로 정해야죠! 멋대로 기각하는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있지.”
“….”
“내가 왜 교회를 회의장으로 삼았는지, 아직도 모르겠소? 동무?”
성녀는 탁. 마총을 책상 위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코르부스와 딜라를 제외한 방에 모인 모두가 황당한 표정으로 성녀를 보건 말건, 그녀는 계속 말했다.
“자, 다음은… 지금은 이 자리에 없는 세티 의견인데, 아샤에 농장 하나 짓고 우리끼리 알콩달콩 사는 거. 어때?”
목가적인 평화의 나날. 모두가 여명과 함께 가정을 꾸리는 사는 미래를 떠올렸다. 나쁘지 않았다. 정체를 숨기고 숨어 산다는 점에서 더욱더.
한데, 라날이 갑자기 고개를 팍! 들었다.
[농장? 노오오옹장?? 평생 도시에서 자란 것들이란!]“…뭐, 뭣?”
[시골 생활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들…! 현대 문물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알아?! 와이파이가 없어서 인터넷도 안 되고! 편의점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 니들 살충제 없는 곳에 벌레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어? 아냐고!!]“….”
라날답지 않은 합리적인 지적이었다. 아니, 그보다 하수도에서 사는 용이 저런 건 어떻게 아는 거야?
성녀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라날이 ‘멍청한 도시 촌놈들’ 이라며 일행들을 비난하길 잠시.
이번에는 희생양 자매의 넷째, 붉은 양 시리가 의견을 냈다.
“시골로 간다고 하면… 변경백령은 어때요?”
“변경백령?”
“예, 그, 사돈 어르신… 변경백께서는 홀로 밀랍 산맥에 사시잖아요. 꼭 그럴 필요 있나요? 가족끼리 다 모여서 함께 사는 게….”
희생양 자매 중 유일하게 가족이 살아있는 까닭일까, 다른 사람들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괜찮은데?”
성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희생양 자매의 막내, 시스가 손을 들었다.
“근데, 이 회의에 의미가 있어요? 어차피 형부가 가자는 대로 갈 거 잖아요?”
의표를 찔린 걸까? 성녀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지만… 그, 미리 준비를 해두고, 우리도 의견을 낸다… 뭐 그런 거에 의미가 있지! 여러 길을 준비해 놔야, 급한 길이 생겼을 때도 대응할 수 있고!”
시스는 그런가? 라며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번에도 라날이 이죽거렸다.
[뭐야, 그런 거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잠자리 순서부터 정해야지. 초대 용사를 따라한 수많은 귀족 가문들이 그거 때문에 풍비박산났-]다행스럽게도, 성녀는 마총을 뽑지 않았다. 그 대신 의자를 집어던지긴 했지만.
우당탕! 라날이 의자를 피해 바닥을 구르는 것으로 회의는 종결되었다.
그리고 난장판이 된 회의장을 바라보던 코르부스는,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인은 대체 왜 부른 것이오?”
***
싸늘한 아샤의 북부.
황족들은 초대 용사와 똑 닮았다고 주장하는 레몬 빛 눈동자의 주인, 황태자는 크게 한숨 쉬며 말했다.
빨갱이들에게 납치된 상황 때문도 아니오, 자신을 찾지 못하는 제국에게 실망감을 느껴서도 아니었다.
스팸.
통조림에 가지런히 담겨 있는 생 스팸이 그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적어도 익혀서 나오면 좋으련만.”
납치된 후 계속 스팸만 먹다 보니 내장에 스팸이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그나마 비타민이 부족하지 말라고 가끔 야채를 주긴 하는데, 그조차도 이 강렬한 생 스팸의 맛을 가리진 못했다.
혹시 그를 고문하는 건가 싶었지만, 정작 그를 감시하는 공산주의자들도, 그리고 철창 바깥의 공산주의자들도 전부 스팸을 퍼먹고 있었다.
심지어, 아주 맛있게.
“황태자님. 왜 안 드십니까? 혹시, 몸이 안 좋으십니까?”
“….”
철창 너머에서 우걱우걱, 스팸 통조림을 퍼먹던 공산주의자가 물어왔다. 포로 주제에 반찬 투정하냐- 는 어투는 아니었다. 그는 순수한 얼굴에는 ‘이 맛있는 걸 왜 안 먹지?’ 라고 쓰여 있었으니까.
황태자는 탁! 스팸 통조림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자네… 아니, 동지는 이름이 뭡니까?”
“사바칸이라고 합니다! 황태자니… 아니, 동지!”
사바칸, 사바칸… 그가 알기로, 그건 비코프 직속 전령의 이름이었다. 이 시간에 전령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건, 현재는 군사작전은 없다는 뜻.
황태자는 호감을 사기 쉬운 나긋나긋한 말투로 물었다.
“사바칸 동지, 혹시 춘부장이나 자당께서 오크셨습니까?”
“춘부…장? 그게 뭡니까?”
“…조상님 중에 오크가 있으셨느냐, 그런 질문입니다.”
“아뇨! 제 가족은 순수한 북부인입니다. 동지!”
“…스팸을 아주 좋아하셨나 보군요.”
“예, 분명 좋아하셨을 겁니다!”
하셨을 거다? 황태자는 지뢰를 밟았다고 확신했다.
“어… 그게, 죄송합니다.”
“아뇨,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땐, 황태자 동지는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니까요!”
“….”
황태자는 애써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내려놨던 스팸 통조림을 철창 밖으로 내밀며 말했다.
“저, 사바칸 동지. 이 스팸 하나로 부탁 하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사바칸이란 공산주의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런, 뇌물이 안 통하는 부류였나? 식탐이 강해 보여서 저질러 본 건데, 실책이었-
“황태자 동지, 이 귀한 스팸을 나눠주실 필요 없습니다. 부탁이라면 그냥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제법을 준수합니다!”
“….”
연기인가, 아니면 진짜 꾸미지 않은 순박함인가. 황실이라는 복마전에서 자라난 그조차 쉽사리 구분할 수 없었다. 황태자는 잠시 스팸 캔을 꼼지락거리다가,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럼… 신문을 볼 수 있겠습니까? 계속 여기 갇혀있으려니, 심심해서요.”
“신문 말입니까?”
“예, 꼭 신문이 아니더라도, 바깥소식을 알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좋습니다. 뉴스나, 잡지 같은 것도요.”
황태자는 꿀꺽, 침을 삼켰다. 포로에게는 쉽사리 바깥 정보를 주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어쩌면 감히 포로 주제에 정보를 캐려 들어? 라며 매타작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어진 사바칸의 반응은 황태자의 예상보다 훨씬 끔찍했다.
“이 기지에서 신문을 보시는 건 비코프 동지뿐입니다! 그리고 마침, 비코프 동지께서 신문을 다 보셨을 시간이고요!”
“…예?”
“제가 비코프 동지에게 가서, 신문을 빌려오겠습니다!”
“자, 잠깐. 잠깐! 사바칸 동지! 제발, 내 말 좀!”
황태자가 애타게 그를 불러 세웠으나, 사바칸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제기랄, 제기랄-
황태자는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손톱을 씹었다. 빨갱이지만, 비코프의 본질은 군벌이자 장군이었다. 그가 자신이 신문을 요구한 이유를 모를 리 없을 터.
처맞지 않는 걸 감사해야 하는 입장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선을 넘고 말았구나. 황태자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좌절하길 한참.
두다다다- 감옥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는 무시무시한 비코프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사바칸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가지고 왔습니다! 황태자 동지!”
“…예?”
눈을 뜨자, 오늘… 아니, 어제 발행된 [뉴욕 타임스] 신문이 철창 앞에서 그를 마주했다. 가장자리가 조금 구겨져 있는 게, 누군가가 읽은 게 틀림없는 신문이었다.
사바칸은 멍한 황태자를 향해 말했다.
“비코프 동지께서 흔쾌히 가져다주라고 하셨습니다!”
“….”
황태자는 이게 꿈인가 싶으면서도, 철창 너머로 손을 뻗어 신문을 잡았다. 거친 종이의 감촉. 이건 진짜였다.
설마 신문 따위로 그의 호감을 사려는 건 아닐 테고, 신문을 아무리 봐도 탈출할 수 없다고 경고하는 건가?
황태자는 복잡한 마음으로 신문의 1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뒤늦게, 비코프가 신문을 허락한 이유를 깨달았다.
『또? 공화당 유력 후보 조지프 P. 케네디 3세, 워싱턴을 찾은 제국 사절과 황녀에게 막말!』
『미국은 세계의 기저귀가 아니다!』
『왜 미국 시민의 피 같은 세금으로 황태자를 구출해야 하는가?』
『제국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